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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uge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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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생명에 의한 것이었지만
이것이 교회 안에서
전수받은 지식이 될 때
그것은 사람을 살리는 도구가 아닌
사람을 죽이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생명에 의해
그러한 문화를 갖게 되었다면
그 안에는 자신의 약함, 드러남,
심지어 실패에 대한 느낌이
여전히 포함되어 있을 것입니다.
자신은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었지만
주님의 빛 비추심과 치료와
생명의 공급에 의해
그러한 표준에 도달하게 되었다는
느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수받은 지식이라면
그 안에는 빛 비추심도 자신을 드러냄도
치료와 생명의 공급도 없기 때문에
자신의 문화와 다른 사람에 대해
배타적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문화를
가지고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떤 과정을 통해
그러한 문화를 갖게 되었는지가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만일 생명의 체험에 의해
그러한 문화를 갖게 되었다면
우리는 그렇지 못한 사람에 대해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느낌이 있을 것이고
우리의 상태가 어떠하든
그를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다만 전수받은 지식에 의해
그러한 문화를 갖게 되었다면
우리는 우리와 다른 사람에 대해
심한 배타적인 느낌을 갖게 될 것이고
심지어 공격적이 될 수도 있습니다.
현대의 바리새인이 되어..
그리고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 문화와 하나가 된 자신의 자아를 보호하려는
숨겨진 욕망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생명의 체험에 의해
그러한 문화를 갖게 된 사람은
그 과정에서 자신의 자아가 처리되었기 때문에
자신과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전자는 사람에게 자신의 문화를 요구하지만
후자는 생명의 체험으로
그 지체를 인도해 주게 됩니다.
자신이 그 문화를 받은 방법에 따라서..
댓글 4
생명의 체험을 갖고 생명의 체험으로 인도하여
뒤에 오는 양들에게 생명으로 목양하는 자,,,
주님, 그러한 자가 되기 원합니다. 베드로와 같이,,, 아멘.
생명의 방식이 아닌 외적인 조절과 규례의 방식을 피할 수 없게 되는 것 같습니다.
사람을 참되게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 생명이라는 것을 보지 못한다면..
자연히 나와 다른 사람에 대해 생명 공급에 대한 필요를 느끼는 것 보다
그가 나와 다르다는 그 차이점을 더 견디지 못해서
외적인 반응이 나오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상과 그에 따른 생명의 체험이 없다면
가장 좋은 문화가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이 될 수도 있음을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