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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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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 우리는 성령을 우리 몸에 생명 주시는 분으로 받아 들여야 할 뿐 아니라 또한 우리 몸의 행실을 죽이는 분으로 받아 들여야 한다. 만일 우리가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을 소홀히 한다면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 몸에 생명 주시기를 바랄 수 없다. 이는 오직 그분을 힘입어 몸의 행실을 죽여야만이 살 수 있다. 몸이 살려면 몸의 행실은 반드시 먼저 죽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망이 곧 임하게 된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의 오류를 볼 수 있다. 믿는이는 자기를 위해 살고 자기 몸으로써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행하면서도 성령이 자기 몸에 생명을 주사 몸이 병들지 않고 강건하기를 바란다. 사람이 자기를 위해 살도록 성령께서 그에게 생명과 능력을 주시겠는가? 이것이 가능한 일이겠는가? 하나님이 우리 몸에 주신 생명은 그분 자신을 위하고 그분을 살게 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온전히 자신을 드리지 않았는데도 성령께서 우리로 자신을 위하여 살도록 우리에게 건강과 강건함과 능력을 주실 수 있겠는가? 성령이 몸(육신)의 생명이 되는 것을 추구하는 믿는이들은 이것을 주의하지 않는 한 결코 자신들이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본래 우리는 우리 몸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한다. 그러나 성령으로 말미암을 때 우리는 할 수 있다. 그분은 우리에게 몸의 행실을 죽일 능력이 있게 하신다. 믿는이는 자기 지체 중에 정욕이 어떻게 몸을 격동케하여 정욕을 일으키고 그 지체로써 자기 정욕의 요구를 만족케 하고, 또 어떻게 이것들을 처리할 힘이 없는지를 체험한다. 그러나 만일 성령으로 말미암는다면―혹은 인하여―그는 능히 처리할 수 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요점이다. 언제든지 자신을 못 박는 것은 아무 쓸모가 없다. 오늘날 믿는이들 가운데 십자가 위에서 함께 못박힌 진리를 아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러나 실지로 이 생명을 나타내는 사람은 아주 적다. 함께 못박힌 진리가 많은 사람의 생명에 있어서 일종의 가르침에 불과하다. 이것이 구원 안에서의 성령의 위치―성령께서 어떻게 십자가와 연합하여 역사하는지―를 분명히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십자가만 있고 성령이 없다면 십자가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반드시 보아야 한다. 십자가가 이룬 모든 것은 오직 성령만이 「적용시킬 수 있고」 그것들이 믿는이의 체험이 되게 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십자가의 진리를 들은 후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 진리를 우리 생명에 이루어지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모든 것이 이상(理想)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게 된다.
워치만 니
[영에 속한 사람, p.759-760, 한국복음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