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성한 말씀을 누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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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사람은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되어 있어야 한다(벧전4:1).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문제이다.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보기 전에, 먼저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고난받는 것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를 보기로 하자.


성경의 가르침은 상당히 분명하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이 고난을 받아야만 한다는 생각은 없으시다. 어떤 철학 사상은, 사람의 육체는 고통을 받아야만 하며 복을 누려서는 안 된다고 여긴다. 따라서 이러한 사상을 가진 사람은 어떤 누림도 옳지 않다고 여긴다.

 

주님의 종으로서 주님을 대표하는 사람들인 우리는 이러한 철학 사상이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가져야 할 사상이 아니라는 것에 분명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께는 그분의 자녀가 고통을 받아야만 한다는 뜻이 없음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준다.

 

시편 23편 1절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가 나의 목자이시므로 무엇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당신이 방금 밥을 먹었는데,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죽 한 그릇을 준다면, 당신은 분명히 『나는 배 불러서 더 필요치 않아요.』라고 말할 것이다. 시편 23편 1절의 뜻은 주님이 우리의 목자이시므로 우리는 무엇도 부족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부족하기를 바라지 않으시고 우리가 배부르기를 원하시며 우리에게 어떤 좋은 것도 아낌없이 주신다는 말이다.

 

구약 성경이 줄곧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것은,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돌보시고, 그들의 어려움과 고통을 덜어 주시고, 그들로 하여금 이방인들과 항상 분별이 있게 하셨다는 것이다. 여하를 막론하고 고센 땅은 애굽과 달랐다. 하나님은 고센 땅을 축복하셨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고행을 제창하는 그러한 철학 사상을 기독교 안으로 들여와서는 안 된다. 우리가 기독교가 아닌 어떤 것을 기독교 안으로 들여오면, 즉시 기독교는 혼란스러워진다. 이것은 우리가 반드시 주의해야 할 일이다.

 

그런가 하면, 이와는 반대로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이 시련과 채찍질에서 예외가 되게 하지는 않으신다. 하나님도 시련을 주시고 채찍질을 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고행을 제창하는 그런 철학 사상과는 다르다는 것을 분별해야만 한다. 하나님은 항상 그분의 자녀들에게 은혜를 주시고, 돌보시고, 돕고, 공급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필요한 때에 그분은 또한 그분의 자녀들에게 채찍질하시고 시련을 주신다. 이것은 결코 그분이 날마다 그들을 시험하신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에게 채찍질할 필요가 있을 때에만 채찍질하시지, 결코 매일 매순간 그렇게 채찍질하지는 않으신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그분의 자녀들에게 채찍질을 하시고 시련을 당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다. 어떤 때는 그렇게 하시지만, 보통 때는 항상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보통 때에 그분은 늘 우리를 돌아보시고, 우리를 위해 안배하신다. 만일 우리가 완고하여 굴복치 않는다면, 그분은 우리에게 시련을 계속 주시고 채찍질로 우리를 떠나지 않게 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안배하심에 있어서 그분은 늘 평상시에 하고자 하시는 일을 계속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난받기를 원치 않으신다. 이 점에 대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분명해야만 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모든 좋은 것을 그분의 자녀들에게 주고자 하시며, 우리는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다.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고난을 받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성경에서 말하는 고난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주님 앞에서 한결같이 택한 길이다. 이것은 바로 주님께서 우리가 은혜로 충만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안배하신 것을 말하며,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그분을 섬기기 위하여 기꺼이 고난받는 길을 택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난 받는 길은 바로 선택하는 길이다. 그것은 마치 다윗을 좇으며 생활한 세 용사가 다윗이 베들레헴 성문 곁의 물 한 모금을 원한다는 말을 듣고서 자기들의 생명을 초개(草葬)같이 여기고 다윗의 소원을 풀어 주기 위해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격파하고 지나갔던 것과 같다(삼하23:14-17).

 

그러므로 고난을 받는 것은 선택하는 것이지 결코 규정된 것이 아니다. 고난을 받는 것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선택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아주 기꺼이 고난받기를 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정하심에 따라 많은 고난은 받을 필요가 없는 것이지만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보통 사람과 다른 길을 기꺼이 선택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고난받을 마음가짐이다. 고난받을 마음가짐은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성격이다. 만일 우리에게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없다면 어떤 일도 잘할 수 없다. 주님을 섬기는 사람에게 이 점이 부족하다면 그의 일은 매우 얕을 것이다. 주님을 섬기는 사람에게 만일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없다면, 그는 하나님 앞에서 일을 할 수 없다.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 점을 약간 언급해야 한다.

 

우리는 결코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곧 고난을 받는다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만 한다. 고난을 받으려는 마음가짐이란 말의 의미는 이러하다. 우리 내면이 하나님 앞에서 갈망을 가지며, 우리 마음이 즐거이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려 하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고난을 받으려는 마음가짐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고난받을 마음을 가진 사람이 실제로 항상 고난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마음가짐에 있어서는 자신을 드리고 달게 고난을 받으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오늘 주님이 당신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좋은 가구로 장식된 비교적 좋은 집을 주신다면, 당신은 그것을 누리고 사용할 수 있다. 주님이 만일 이렇게 안배하셨다면, 당신은 주님 앞에서 그것들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여전히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려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한다. 비록 지금 당신의 육체에 고난은 없지만 당신의 마음가짐은 오히려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려 해야 한다. 그러므로 문제는 외적인 환경이 아니라 당신 내면의 마음가짐이다. 모든 것이 좋은 이러한 상황에서 당신에게는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있는가? 주님은 우리가 매일매일 고난받도록 안배하시지는 않지만 주님의 모든 사역자는 하루라도 고난받을 마음의 대비를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고난이 매일매일 당신의 생활에 꼭 있지 않을지라도 고난받을 마음가짐은 매일매일 있어야 한다.

 

많은 형제 자매와 많은 동역자들의 가족들은 단지 조금만 어려움이 닥쳐도 쉽게 좌절한다. 이것은 그들에게는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주님이 우리에게 아주 순탄한 환경을 안배하여 우리로 물질면에서 부족함이 없게 하시고 우리의 몸도 건강하게 하실 때에, 우리는 매일매일 주님께 봉사하는 데 있어서 매우 순리적이다. 그러나 어떤 한 가지 일에 조금의 시련만 닥쳐와도 우리는 곧 무너져 버리는데, 이는 우리에게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없다면, 우리는 아주 조그마한 시련도 감당할 수 없다.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고난받을 것을 잘 예비하는 것이며, 마음에 고난을 받으려 하는 것이고, 이것은 고난받는 길을 기꺼이 택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받지 않도록 안배하실지라도 그것은 주님의 일이다. 우리 편에서는 다만 언제나 고난받을 것을 예비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주님의 안배가 바뀌어서 시련이 우리 몸에 닥칠 때에도 우리는 응당 이것을 감당해야 하며 조금도 이상한 것이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만일 당신이 조그마한 시련도 감당할 수 없다면 주님이 당신에게 좋은 환경을 안배하실 때에는 당신이 받아들이겠지만, 환경이 조금만 변해도 당신은 즉시 물러나거나 혹은 사역을 중단하게 되는데, 그것은 당신에게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없기 때문이다. 사역은 당신을 기다릴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라. 당신은 먹을 것이 있어도 이렇게 하며 없어도 이렇게 한다. 당신은 입을 것이 있어도 이렇게 하며 없어도 이렇게 한다. 당신이 편안해도 이렇게 하며 편치 않아도 이렇게 한다. 당신이 건강할 때도 이렇게 하며 몸이 약할 때도 이렇게 한다. 여기에서 당신은 고난을 받으려는 마음가짐이 곧 병기(兵器)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병기의 위력은 대단하여 사탄이 이길 방법이 없다. 그렇지 않으면, 시련이나 어려움이 닥쳤을 때, 당신은 사역을 할 수 없게 되고 즉시 멈추게 된다.

 

어떤 형제 자매들은 고난을 잘 참고 견며 내지만,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이 고난을 당하는 것이 보배로움을 조금도 느끼지 못한다. 따라서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도 전혀 없게 된다. 그들은 때로 심지어 속에서 원망하며, 원망의 말을 한다. 그들은 그런 날들이 빨리 지나가지 않을까봐 두려워한다. 그들에게는 오직 이 고난을 잊어버릴 것에 대한 간구만이 있을 뿐 어떠한 찬미도 없다. 성령의 다스림 아래서 그들에게 닥친 것들은 그들이 받아들이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속에서 그런 날들이 빨리 지나기만을 갈망한다. 이런 것들은 그들이 조금도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없다는 것을 사람에게 보여 준다.

 

형제 자매여, 주님이 당신에게 평안한 날들을 허락하셨을 때, 만일 당신에게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없다면, 주님이 당신의 길을 순탄케 하실 때는 당신이 전진할 수 있겠지만, 길이 진흙투성이일 때에는 봉사를 그만두게 된다. 이런 것은 옳지 않다. 거듭 말하지만,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있다고 해서 곧 고난받는 것은 아니다. 당신에게 고난받으려는 마음가짐이 있더라도, 주님이 반드시 당신으로 고난받게 하시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고난을 받게 된다면, 당신의 내면에 이미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있으므로 당신은 좌절하지 않게 된다.

 

고난받는 사람이 모두 다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있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비록 고난을 받고는 있지만, 그들에게는 조금도 고난을 받으려는 마음가짐이 없다. 그러므로 고난을 받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있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많은 형제 자매들은 고난을 당하거나 어려움을 만날 때, 거의 매일 그 속에서 구출되기를 외치고 그 괴로움을 부르짖으며 그런 날들이 어서 속히 지나가기만을 간절히 바란다. 이런 사람에게는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조금도 없는 것이다. 그들은 다만 고난만 받을 뿐, 결코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없다.

 

그러므로 신체상으로나 경제상으로나 기타 모든 일에서 시련을 받는 형제 자매는 주의해야만 한다. 주님 앞에서 당신에게 계산될 수 있는 것은 당신에게 고난이 있는가 없는가가 아니라, 당신에게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있는가 없는가이다. 당신이 큰 고난을 당했다고 해서 그것이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는 것이라고 오해하지 말라. 물론, 당신이 만난 것은 큰 고난이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즐거이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려는 마음가짐이 얼마나 있는가? 당신이 주님 앞에서 이러한 선택을 할 마음이 얼마나 있는가? 혹은, 당신은 속에서 원망하고 불평하며 스스로를 연민하고 자신을 참소하지는 않았는가?

 

사람에게 아주 많은 심중의 괴로움이 있을 수 있고 많은 실제상의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조금도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고난받을 마음가짐은 고난을 받는 것보다 훨씬 더 심오하다. 고난받을 마음가짐을 갖는다는 것은 반드시 외적으로 고난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외적으로 고난을 받는다는 것 또한 반드시 고난받을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형제 자매여! 당신은 이 차이점을 발견하는가? 이것은 마치 물질적으로 빈곤한 사람이 영 안에서 빈곤하지 않을 수 있는 것과 같다. 많은 사람들이 물질면에서는 빈곤하지만 영 안에서는 빈곤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많은 형제 자매가 분명히 고난을 받지만 그들에게는 조금도 고난을 받으려는 마음가짐이 없다. 만일 주님께서 그들에게 선택하도록 하신다면, 그들은 단 일 개월의 고난받음도 원치 않으며 하루 혹은 일 분의 고난받음도 원치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전혀 없다.

 

고난을 받으려는 마음 가짐이 없는 사람은 사역에 있어서 어떤 경지에 이를 수 없다. 외적인 요구가 그의 능력에 지나칠 때 그는 즉시 좌절한다. 그에게 조금이라도 드릴 것을 요구하면 그는 견디지 못한다. 그러나 그 자신이 귀중히 여기는 그러한 것에 관한 한 그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순탄한 날들 속에서 가장 순리적인 일들만을 할 수 있다. 그는 주님께서 그를 위하여 모든 방해 요소를 가져 가시고 그로 하여금 여기서 평안 무사히 일할 수 있게 해주시기를 바란다. 주님을 섬기는 사람이 이처럼 바란다면, 이것은 아주 기이한 일이다.

 

우리는 반드시 무엇이 고난받을 마음가짐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평안한 가운데 있는 형제가 그의 고난받을 마음가짐에 있어서는 시련중에 있는 형제보다 더욱 강할 수 있다. 그는 주님 앞에서 고난받을 마음 가짐이 있으므로 주님을 위해 고난받기를 잘 예비한 것이다. 반면에 고난중에 있는 그 형제는 결코 주님을 위해 고난받기를 원치 않는다. 한 형제는 평안중에 있고 다른 한 형제는 시련중에 있는데, 사람의 눈으로 본다면 시련중에 있는 형제가 분명 고난을 받고 있다. 그러나 주님은 평안중에 있으면서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있는 그 형제를 더욱 귀중히 여기신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더욱 귀하게 여기시는 것은 고난받을 마음가짐이지 고난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님은 결코 우리가 고난 받기를 원치 않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을 많이 받아야만 된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우리 몸에 한 가지 요구가 있으신데 이 요구에 잘 부응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있어야 하며 이것으로써 병기를 삼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당신에게 이 병기가 없다면 당신은 주님을 위하여 싸울 방법이 없다. 당신은 어려움을 만나자마자 후퇴하려고 한다. 주님께서 당신에게 조금만 대가를 요구해도 당신은 견디지 못한다. 주님께서 당신으로 하여금 조금만 고통을 겪게 해도 당신은 즉시 좌절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신이 고난을 얼마나 받았는가를 묻지 않고, 오히려 당신이 고난받을 마음 가짐이 얼마나 있나를 묻는다. 우리는 고난을 많이 받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많이 입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고난을 많이 받은 형제를 만났을 때 우리는 뜻밖에도 그에게서 조금의 도움도 얻지 못하며, 후에 그에게는 본래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없었으며, 그는 고난받는 것을 달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만약 그에게 선택을 하게 했다면 그는 고난받는 것이 단지 일 분이라 해도 도망가려 했을 것이다. 그는 고난을 받았지만 그 내면에는 조금도 기꺼운 마음이 없다. 그는 비록 고난을 받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공과도 배우지 못했으며 그의 내면은 배반으로 가득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은 고난받을 마음가짐과 고난받는 것이 결코 같은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님께서 귀히 여기시는 것은 고난받으려는 마음가짐이다(고난받을 마음을 품지만 고난을 받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고난받는 것으로 고난받을 마음가짐을 갖는 것을 대신할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사역에 있어서의 어려움을 보기로 하자. 예를 들면, 어떤 때에 하나님이 마치 물질적인 면에 있어서 예비하심이 충분치 않은 것처럼 우리를 이러한 재정적인 궁핍의 시련 가운데 두실 때에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물질적으로 조금만 궁핍해도 우리의 사역을 멈추고는 주님이 우리를 어쩌면 그토록 야속하게 대하시는가라고 생각한다. 이 때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가 나를 섬기는 것은 무엇을 위해서인가?』라고 물으실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형제 자매여! 하나님의 사역에 있어서 당신이 잘하느냐 못하느냐는 당신에게 고난받을 마음 가짐이 있는가가 하나의 큰 관건이다. 당신은, 『나는 조금만 어려움이 닥쳐도 조금만 시련을 받아도 즉시 멈추고 일을 하지 않겠다.』라고 말할 수 없다. 어떤 그리스도의 사역자도 맑은 날에만 일하러 나가고 비가 오면 집에서 기다리겠다고 하는 사역자는 없다. 만일 당신이 고난받을 마음가짐만 있다면 어려움이 닥쳐도 당신은 이렇게 하며 고난이 와도 당신은 해낸다. 병이 들어도 하며 죽음이 닥칠지라도 당신은 그렇게 행한다.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있을 때 당신은 당당히 서서 귀신에게, 『어떤 것이 와도 나는 해낸다.』라고 말한다.

 

당신의 내면이 만일 무엇을 두려워한다면 사탄은 당신에게 손쉬운 미끼를 제공하여 당신으로 떨어지게 한다. 만일 당신이, 『굶주려도 나는 겁나지 않는다.』라고 말하며 또한 사탄이 당신에게 굶주림을 주어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사탄은 물러갈 수밖에 없다. 만일 당신이, 『추워도 난 겁나지 않는다.』라고 말하며 사탄이 당신에게 추위를 주어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사탄은 물러간다. 만일 당신이 『나는 병(病)이 무섭다.』라고 말한다면, 사탄은 반드시 당신에게 병을 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병들자마자 실패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나는 병도 무섭지 않다.』라고 말한다면, 사탄은 당신에게 방법이 없다. 만일 당신이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없다면, 사탄은 당신이 두려워하는 그 점을 이용해서 당신을 다루므로 당신은 실패하고 만다.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잘 예비되어야 하며, 어떤 것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와도 여전히 일을 하며 저것이 닥쳐도 여전히 일을 해야 한다. 가정에 시련이 닥쳐도 하며 신체의 질병이 생겨도 이렇게 해야 한다. 굶주림이 와도 추위가 와도 이렇게 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사탄은 당신에 대해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당신이 이러한 태도를 가질 때 당신은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있는 것이다.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없으면 즉시 사탄은 당신이 두려워하는 것을 가져와서 당신으로 실패하게 하고 하나님의 일에서 후퇴하게 하며 당신을 쓸모없게 만들어 버린다.

 

형제 자매여! 우리는 다음과같이 하나님께 말해야 한다. 『당신의 사랑의 강권함과 오늘날 당신이 나에게 베푸신 은혜로 인해, 천당이 오든 지옥이 오든 결과가 어찌되든 나는 변함없이 이렇게 행합니다. 나는 내가 좋아도 이렇게 행하고 좋지 않아도 이렇게 행합니다.』 만약 우리에게 이러한 마음가짐이 없다면 우리의 약점이 사탄에게 붙잡히게 될 때 우리는 즉시 끝나고 쓸모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무엇인지 알게 하시기를 간구해야 한다. 고난받을 마음가짐은 당신 내면에서 앞길이 어떠하든 상관치 않고 무엇을 만나든지 주님을 위한다고 이미 작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고난받을 마음가짐을 갖는다고 해서 반드시 고난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또한 반드시 고난을 받지 않는다고도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내면의 그러한 확신은 견고해야 한다. 만일 당신 내면에 그런 확신과 뜻이 없다면 당신은 어려움을 만나자마자 무너진다. 만일 당신 내면에 그런 확신이 있다면 어려움을 만나든 만나지 않든 문제가 안 된다. 당신은 보았는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섬기는 길은 고난을 받는 데 있지 않고 도리어 고난받을 마음가짐에 있다는 것을.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이러하다. 만일 주님이 당신에게 먹을 좋은 것과 입을 좋은 것을 주시면 당신은 주님께 감사한다. 그러나 주님이 당신에게 좋은 것으로 먹이고 입히지 아니하실지라도 당신은 주님께 감사할 줄 안다. 당신에게 있어서 이러한 것들은 모두 문제가 되지 않는다(좋은 것도 문제가 되지 않고 나쁜 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특별히 고생을 사서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고난받을 마음가짐을 갖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은 어려움이 있어도 이렇게 하고 좌절하지 않도록 예비되어야 한다.

 

이러한 마음가짐의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면 어떤 것도 해결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당신이 주님을 위하여 사역하러 나갔는데 몸이 약하다면 건강한 사람보다 비교적 좋은 침대에서 잠을 자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내 몸은 건강하지 않아서 잠 잘 침대가 좀 좋아야 한다.』라고 말한다면, 사탄은 즉시 이 점을 공격하여 당신이 잠 잘 침대가 좋지 않게 한다. 당신의 침대가 좋든 좋지 않든 상관없이 사역은 항상 계속되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고난받을 마음가짐이다. 만일 주님께서 당신을 위하여 좀더 안락한 침대를 안배하셨다면 당신이 일부러 딱딱한 마루바닥에서 자려고 할 필요는 없다. 주님이 당신에게 좋은 침대를 주셨다면 당신은 자면 된다. 주님이 당신에게 좋지 않은 침대를 마련하셨을지라도 당신은 자야 한다. 침대가 어떠하든 상관없이 당신은 언제나 사역을 수행해야 하며, 침대가 좋지 않다고 해서 물러나거나 위축되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마음가짐이 성경에서 말하는 고난받을 마음가짐이다.

 

어떤 형제가 평소 물질 생활에서 좀 궁핍하다고 해서 그에게 반드시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물질 생활에 있어서 좀 어려운 환경에 있는 형제가 물질 생활에 있어서 비교적 좋은 환경에 있는 형제보다 고난받을 마음가짐을 더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직 진실하게 자신을 주님께 바친 형제에게만이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있는 것이다.

 

고난받을 마음가짐은 한량이 없기 때문에 끝이 없다. 당신이 어떤 곳에 갔을 때는 잠자리가 마루바닥이었지만 다른 어떤 곳에 가 보니 마루바닥은 고사하고 다만 짚을 깐 땅바닥에서 잘 수밖에 없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어떤 사람은 잠이 들기는 하였지만 마지 못해 잠을 청한 것일 수 있다. 그가 비록 고난을 받았지만 그의 고난받는 데에는 한계가 있어서 마루바닥에서는 잘 수 있지만 더 이상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마치 그의 평상시의 생활이 이미 좋지 않은데 환경이 더 나빠지면 어떤 것도 더이상 할 수 없게 되는 것과 같다. 고난을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여기에는 고난을 받으려는 마음가짐이 없는 것이다.

 

어떤 형제 자매들은 평소에 비교적 안락한 생활을 누리다가 생활 환경이 안 좋아질지라도 여전히 거기에 안주할 수 있다. 그는 마루바닥에서 잘 수도 있고 짚을 깔은 땅바닥에서 잘 수도 있다. 그는 불평하지 않으며 기꺼이 즐거운 마음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이 고난을 받으려는 마음가짐이다. 하나님은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되어 있는 사람을 택하려 하신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고난을 받고 안 받고의 문제가 아니라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이다. 당신이 하나님을 섬기고자 한다면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없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주님께 쓰임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없는 사람은 조금만 시련을 당해도 금방 무너져 버리기 때문이다. 사탄이 당신 몸에 한 가지 일만 임하게 해도, 당신은 즉시 어떤 일도 할 수 없게 된다. 형제 자매여! 당신은 이 점을 보았는가? 고난을 받으려는 마음가짐이 있다는 것은 생활의 환경이 낮아지는 그 정도가 한계가 없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문제는 고난을 얼마나 많이 받는가가 아니라 어디까지 고난받을 수 있는가이다. 고난을 받는 것이 우리 몸에 항상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고난받을 마음가짐은 우리에게 꼭 필요하다. 주님은 우리가 계속해서 고난 가운데 있기를 원치 않으시며 도리어 우리 내면에 고난받을 마음가짐을 창출해 내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을 섬기기를 배우는 모든 형제 자매들이 사역하러 나갈 때 고난받으려는 마음을 갖지 않는다면 결코 굳세게 사역할 수 없다. 만일 당신에게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없다면 당신은 가장 연약한 사람이다. 당신은 조금만 어려움이 직면해도 자기 자신을 가련하게 여기며 자기 연민에 빠져서 자신을 위해 눈물 흘리고 탄식하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결국 이러한 경지에 떨어졌다.』

 

과거에 수년 동안 주님을 섬겨 오던 한 자매가 한번은 울고 있는 다른 한 자매를 발견하고는 그녀에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까?』 아! 많은 사람들은 자신을 위해서 눈물을 흘린다. 그가 자신을 볼 때 이렇게 사랑스럽고 귀중한데 뜻밖에도 이런 지경에까지 떨어졌으니 자신을 위해 우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가장 연약한 사람이다 그는 일에 부딪히자마자 그 자신이 먼저 쓰러지게 된다.

 

그러므로 문제는 시련이 닥칠 때, 괴로움이 몰려올 때 당신의 마음을 어디에 두는가에 있다. 한면으로는 당신의 고통의 문제이며, 다른 한면으로는 주님의 사역의 문제이다. 당신에게 만일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없다면 당신은 즉시 주님의 사역을 희생한다. 당신이 자신을 위해 괴로워하고 자신을 귀하게 여기는 데에도 시간이 부족한데 어찌 주님의 사역을 돌볼 마음이 있겠는가?

 

형제 자매여! 우리는 고난받을 마음가짐을 갖기를 배워야만 한다. 만일 우리가 사역을 내려놓으면 고난받는 것은 무사히 지나갈 수 있지만 사역은 이로 인해 손실을 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문제는 여기에 있다.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없고 이것이 결여되었다면, 어떤 때든지 사탄은 우리로 사역을 버리게 하고 주님의 사역을 희생하도록 만든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유지할 자로서 하나님이 우리로 살게 하시든지 죽게 하시든지 우리의 책임을 저버릴 수 없고 우리의 사역을 하지 않을 수 없으며 하나님 앞에서 항상 끝까지 견뎌 내야만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형제 자매가 고난받기를 원치 않는다. 만일 가능한 상황 중에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의식주의 필요가 다 채워질 수 있다면 그것은 좋다. 우리는 결코 형제 자매가 일부러 고난을 찾아서 고난받기를 원치 않으며 결코 그 몸에 고난이 더해지기도 원치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조금도 부족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필요하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한면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것 주시기를 조금도 아끼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 다른 한면으로 우리는 고난받을 마음을 가져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조그마한 어려움을 만나도 쓰러지게 되며 생활도 뜻대로 되지 않아 실패하게 된다.

 

그러면 어느 정도까지 고난받을 마음을 가져야 하는가? 성경의 요구는 『죽도록 충성하라』(계2:10)이다. 바꾸어 말하면, 어떠한 고난이 닥쳐온다 해도 죽기까지 변함없어야 한다. 물론 우리는 극단에 빠져서는 안 된다. 그러나 고난받을 마음가짐은 중용(中庸)을 취할 수 없다. 만일 중용을 취해야 한다면, 차라리 주님으로 하여금 당신을 대신해 중용을 취하시게 하고 교회나 혹은 나이 많은 형제들로 하여금 당신을 대신해 중용을 취하게 하고 당신은 자신을 주님께 드리는 편이 낫다. 만일 당신이 당신 자신을 중용의 위치에 둔다면, 당신은 어떻게 일을 할 수 있는가?

 

당신은 일에 있어서 어떤 길도 잘 걸어갈 수 없다. 이것은 일종의 자기 생명을 귀하고 사랑스럽게 여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 수중의 사람을 끌어들이기만 할 뿐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아무리 일을 해도 별로 해내지 못한다. 우리 개개인은 죽기까지 충성하도록 예비해야 한다. 우리는 언제나 이 길을 걸어가야만 한다. 물론 주님은 당신의 충성으로 인하여 당신을 죽으러 가게 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나 생명을 보호하는 것은 주님의 일이며 우리 자신이 지켜서는 안 된다. 주님이 어떻게 안배하시든지 그것은 주님의 일이며, 우리는 다만 언제든지 자신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무슨 고난이든 상관없이 우리는 모두 참고 견뎌야만 한다.

 

형제 자매여! 당신이 만일 자신의 생명을 소중히 여긴다면 당신은 죽기까지 충성할 수 없다. 죽기까지 충성하려는 사람은 자기 생명을 아껴서는 안 된다. 죽기까지 생명을 아끼지 않는 것이 우리에 대한 주님의 기본적인 요구이다. 고난받을 마음가짐은 우리에게 있어서 응당 강해야 하며, 어떤 경지에 이르러서는 다음과같이 말할 수 있기까지 강해야 한다. 『주여, 죽으면 죽으리이다. 어떠한 곤고한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나는 당신을 위하여 내 목숨을 바치기 원합니다.』

 

형제 자매여, 만일 우리에게 이러한 마음가짐이 없다면, 우리는 어려움을 만나자마자 일을 멈추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모든 사역자는 자신을 아끼지 않는 이러한 공과를 배워야만 한다. 무릇 자기 생명을 아끼는 사람은 무엇을 해도 한계가 있으며 어느 때인가는 멈추게 된다. 하나님은 마음가짐이 대단한 사람이 그분을 섬기기를 원하시고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고 버릴 수 있는 사람이 그분을 섬기기 원하신다.

 

그러므로 어떻게 해야만이 극단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지를 염려하지 말라. 그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어떤 것도 안배해서는 안 된다. 우리 개개인은 하나님 앞에서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언제나 절대적이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꼭 고난받지는 않더라도 고난받을 마음가짐은 항상 있어야만 한다. 우리는 어떤 것에 상관없이 예비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외적인 어려움도 고려하지 않으며 신체상의 어려움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자신을 사랑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걸 수 없다면 우리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우리는 주님께 다음과같이 말해야 한다. 『주여! 나는 모든 것을 다 바치기 원합니다. 지금 이후로 어떤 고난을 만나든지 그 어떤 것도 내가 주님 섬기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죽든지 살든지, 고난이든지 즐거움이든지 언제나 나는 이 길을 택하기 원합니다.』

 

형제 자매여! 효과 있는 한 가지 일은 죽기까지 충성하여 주님을 섬기는 것이다. 당신이 그 위치에 서 있으면 있을수록, 당신은 사탄이 당신에 대해 아무런 방법도 없으며 사탄에게 길이 없다는 것을 보게 된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실제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므로 조금만 고통을 당해도 그침 없이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기를 마지 않으니, 이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인지! 만일 우리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눈물도 없고 탄식도 없을 것이다. 이 길을 걸어가는 모든 형제 자매는 생명을 바치는 사람이다. 만일 당신이 이 길을 가고자 한다면 당신은 주님께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주여, 당신이 정하신 길이 내가 고난을 받아야 하든지 그렇지 않든지 간에 나는 언제나 고난받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고난받는 것은 한계가 있지만 고난받을 마음가짐은 마땅히 한계가 없어야 한다. 주님이 당신으로 하여금 실제로 받게 하는 고난은 한정적이지만 당신이 주님 앞에서 고난받을 마음가짐은 한계가 없어야 한다. 만일 당신이 주님을 위해 고난받으려는 마음가짐이 제한적이라면 당신은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없는 것이다. 일단 제한이 있으면 옳지 않다. 이 요구는 대단히 큰 것이며, 주님은 바로 이것을 요구하신다. 이 요구보다 작다면 하나님을 섬길 도리가 없다. 우리는 기꺼이 고난받는 것에 대해 다만 어느 정도까지만 고난을 받으면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옳지 않다. 기꺼이 고난받는 것은 제한 없는 경지까지 이르러야 하고 심지어 죽기까지 해야 한다. 만일 이 요구보다 작다면, 사탄이 당신을 시험하여 당신으로 설 수 없게 할 뿐이다.

 

『또 여러 형제가 어린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계12:11). 만일 당신이 양심의 거리낌이 없고 사탄에게 승리의 간증을 하며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는다면, 사탄도 당신에 대해 어떠한 힘을 쓸 수 없다. 사탄에게는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사람을 다룰 어떤 방법도 없다. 우리는 욥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 사탄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일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욥을 그렇게 공격하였다. 『...사람이 그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지라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욥2:4-5).

 

사탄은 욥의 생명을 만지고 욥이 그의 생명을 아끼기만 하면 자신에게 길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은 사탄이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그러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방법도 없음을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 준다.

하나님의 사역자들의 실패는 바로 자신의 생명을 아끼는 데에 있다. 우리는 다음과같이 물어야만 한다. 『사역이 더 중요한가, 아니면 자신의 생명이 더 중요한가? 우리의 책임이 더 중요한가, 아니면 자신의 생명이 더 중요한가? 사람의 영혼이 더 중요한가, 아니면 자신의 생명이 더 중요한가? 하나님의 교회가 더 중요한가, 아니면 자신의 생명이 더 중요한가? 이 땅 위에서의 하나님의 간증이 더 중요한가, 아니면 자신의 생명이 더 중요한가?』

 

자기 자신을 아끼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 또한 고난받는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직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있는 사람, 끝없이 고난 받을 마음을 가진 사람 『비록 죽을지라도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겠다.』는 마음가짐이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섬길 수가 있다. 우리는 오늘 다시 한 번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려야 한다. 우리는 고난받기 위하여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도 버릴 수 있도록 예비하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의 목숨을 잃게 하실 뜻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죽도록 충성하겠다는 마음을 가져야만 한다. 형제 자매들의 많은 일에 있어서의 실패는 모두 자신의 나태함과 자기를 보호하려는 것과 자신을 버릴 수 없는 것에 기인한다. 세상 사람의 눈이 멀었다고 생각하거나 형제 자매들의 눈이 멀었다고 생각하여 잘못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사역하러 나가는 데 있어서 어떤 것도 버릴 준비가 되어 있다면, 사람들도 이것을 분별해 낼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자신을 보류하거나 중용의 길을 고수한다면 그들 역시 이것을 분별해 낼 수 있다.

 

형제 자매여! 주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에게 모든 것을 드리라고 하셨다. 다만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우리 중 한 사람도 자신을 귀히 여기지 않고 생명을 아끼지 않기를 원한다. 우리는 마음으로부터 자신을 아끼지 않고 자신을 연민하지 않기를 배워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길이다.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사역에는 언제나 제한이 있다. 고난 받을 마음가짐이 얼마 있다면 영적인 일도 그만큼 있게 된다.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제한적이면 영적인 일에 있어서도 제한적이다. 고난을 받으려는 우리의 마음가짐이 제한적이면, 우리가 사람에게 가져다 주는 축복도 제한적이며 우리의 사역의 결과도 제한된다. 다른 것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이 얼마인지 헤아리지 말고, 오직 고난받으려는 마음가짐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이 얼마인지를 측량하라. 만일 고난받으려는 우리의 마음가짐이 제한적인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반드시 한량 없는 축복을 받을 것이다.


워치만 니
[주님의 사역자의 성격,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있어야 함", 한국복음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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