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성한 말씀을 누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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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 이사야 49:4-5, 마태복음 11:25-30

 

1

 

이사야서는 하나의 선지자(先知者)의 예언서(豫言書)이다. 그 책의 많은 말들은 다 그리스도를 말한 것이다. 이사야 49장 5절은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 무슨 역사를 하셨는가를 보여주고, 4절은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역사가 이루어졌는가, 이루어지지 않았는가를 보여 준다.

 

하나님은 주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어 무슨 일을 하셨는가? 그것은 바로 야곱을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하시며 이스라엘을 자기에게로 모이게 하신 것이다.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성공(成功)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볼 때 우리 주님은 완전히 실패했다. 야곱의 지파(支派)들은 돌아오지 않았고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은 다 그를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했다. 또 그의 제자는 그를 팔았다. 그러므로 여기(4절)에서 말하기를 『내가 헛되이 수고(受苦)하였으며 무익(無益)히 공연(空然)히 내 힘을 다하였다』고 했다.

 

형제 자매여, 만일 우리가 이러한 상태에 있을 때-세상에서 사람들의 버림을 받고, 사역(使役)은 조금도 효과(效果)를 거두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이 하나도 성취(成就)된 것 같지 않을 때-우리는 틀림없이 낙심(落心)하고 눈물을 흘릴 것이다. 낙심은 않는다 할지라도 근심할 것이며, 근심은 않는다 할지라도 소극적으로 되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렇지 않았다. 『비록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히 공연히 힘을 다 하였지만 정녕 나의 신원은 여호와께 있고 나의 보응(報應)은 하나님께 있다』고 하신 것이다. 이 말씀의 뜻은 비록 내가 생각하고 바란 것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을 얻지 못했을지라도 나의 신원은 여호와께 있고, 내가 오랫동안 수고하여 그 일은 하나도 성취되지 않았을지라도 나의 보응은 여호와께 있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내게 실패의 이유가 있든지 없든지 나의 신원은 여호와께 있고 나의 보상(報償)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 비록 내가 야곱의 지파와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을 돌아오게 하지 못했을지라도 나는 반드시 하나님이 내게 주신 보상을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불만하지 않고, 원망치 않고, 눈물 흘리지 않고, 낙심치도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주님의 태도(態度)이다.

 

형제 자매여, 여기에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한 가지 일은 바로 우리가 우리의 사역과 직접 관계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과 직접 관계를 맺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일과 직접 관계를 맺어서는 안 되고 다만 하나님과 직접 관계를 맺어야 한다. 우리는 어떤 사람과도 직접 관계를 맺지 말고 하나님과 직접 관계를 맺어야 한다.

 

형제 자매여, 언제든지 당신의 사역과 직접 관계를 맺고, 어떤 일과 직접 관계를 맺고, 어떤 사람과 직접 관계를 맺으면 당신이 어려움을 당할 때 당신의 마음은 상(傷)할 것이고, 눈물을 흘릴 것이고, 괴로와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하나님과 직접 관계를 맺으면 비록 사람들이 버릴지라도 능히 기뻐할 수 있고, 어려움을 당할지라도 여전히 기뻐할 수 있다. 모든 것을 실패(失敗)할지라도 여전(如前)히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

 

당신이 하나님과 직접 관계를 맺으면, 얻든지 잃든지 그것들은 당신을 움직이게 하지 못할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주의(注意)할 것은 하나님 앞에 이유가 있든지 없든지 하나님 앞에 보상이 있든지 없든지 당신의 신원이 하나님 앞에만 있다면 당신의 보상(報償)도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11장에서 말씀하신 이 땅에서의 어려움을 당하실 때의 주님의 태도는 이사야서 49장에서 한 말과 같다. 마태복음 11장의 앞 부분에 기록된 일은 다 마음이 아픈 일뿐이다. 첫째로 세례 요한이 그의 제자를 보내어 주님께 여쭙기를,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라고 했다. 이 말의 뜻은, 『당신이 참 메시야입니까? 당신이 참 그리스도입니까?』라는 것이다.

 

예수를 위해 길을 예비한 요한도 의심을 하여 장래 오실 그이가 당신이냐고 물은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볼 때 참으로 마음 아픈 일이었다. 세례 요한이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을 때 사람들은 그에게 귀신들렸다고 했다. 그러자 인자가 와서 먹고 마시고, 사람들과 왕래하며, 그들을 구원하려 할 때 아무 말이 없어야 할 그들은 또 말했다. 예수는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자라고 한 것이다. 그 사람들은 안 먹어도 욕했고 먹어도 욕했다. 이렇게 해도 욕하고 저렇게 해도 욕했다. 그들은 주님이 어떻게 하든지 비평했다. 주님의 길을 예비한 요한이 사람들에게 귀신들렸다고 욕을 먹었고, 주님도 먹기를 탐하고 마시기를 즐기는 자라는 말을 들었다.

 

그뿐 아니라 그가 가버나움, 벳세다, 고라신에서 많은 기적을 행했으나 가버나움 사람들은 그를 믿지 않았고 벳세다, 고라신 사람들도 그를 거절했다. 마태복음 11장의 앞 부분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우리 주님은 사람들에게 의심받고, 훼방(毁誇)을 받고, 버림을 받은 주님이라는 것이다.

 

형제 자매여, 만일 당신의 생활(生活)에서, 당신의 사역(使役)에서, 당신과 교제(交際)하는 사람 가운데서 당신이 계속 환난(患亂)에 부딪힌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당신은 상심(傷心)하고, 낙심하고,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렇지 않았다. 성경에 기록(記鑛)된 주님의 태도가 주님을 말해준다. 주님께서는 『천지(天地)의 주재(主宰)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智慧)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 마음에는 쓰라림도, 원망(怨望)도, 불평(不平)도, 혈기(血氣)도 없었다. 그는 다만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감사하나이다』라고 하신 것이다. 형제 자매여, 당신에게 이유(理由)가 있든 없든 사람들의 의심을 받고, 훼방을 받고, 버림을 당할 때 당신은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겠는가?

 

아, 우리는 무엇을 얻었을 때만 감사해 왔고 우리의 사역이 발전(發展)될 때만 감사해 왔고,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환영(歡迎)하고 공경(恭敬)할 때에만 감사해 왔다. 우리는 이유 없이 다른 사람에게 의심을 받고, 훼방을 받고, 버림을 당할 때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 것이다. 형제 자매여, 당신은 이런 때 하나님께 감사해 왔는가?

 

우리 주님이 여기에서 하나님께 감사한 것은 무엇이었나? 그가 말씀하시기를,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라고 하셨다. 또 주님은 여기에서 큰 위안을 얻으시며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라고 하셨다. 이것이 아버지의 아름다운 뜻이니 내가 무슨 말 하리이까 하신 것이다. 주 예수님이 볼 때, 세례요한이 주님을 의심했고 사람들이 그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자라고 비평했고, 가버나움, 벳세다, 고라신 성의 사람들이 다 그를 버렸으나 그것은 모두 아버지의 아름다운 뜻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능히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감사하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많은 경우, 당신은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것까지 믿을 수 없게 되어 「아버지」라고도 부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여전히 「아버지」라고 하셨다. 그는 여전히 하나님을 친근하게 느끼고 있는 것이다. 많은 경우 당신은 「천지의 주재」라고도 부르지 못하고 천지간에 오직 한 주님임도 믿지 못하나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기 때문에 능히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라고 부른 것이다. 그가 볼 때에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아름다운 뜻이므로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라고 한 것이다.

 

형제 자매여, 당신은 능히 『아버지여,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당신은 다른 사람의 오해를 받고 어려움을 당할 때 마음 아파하고, 슬퍼하고, 낙심하겠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여 감사하다는 말을 하겠는가? 당신은 능히 하나님께, 『아버지여 옳소이다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형제 자매여, 당신은 과연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2

 

주님은 이어서 우리에게 해석해 주시듯 또 말씀하셨다. 그는 왜 이런 말씀을 하셨는가? 그가 말씀하시기를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다』고 하셨다. 아버지만 자신(주님)을 알아주면 만족(滿足)하다고 하신 것이다. 고라신이 나를 알지 못하는 것도, 벳세다가 나를 알지 못하는 것도, 가버나움이 나를 알지 못하는 것도 중요(重要)한 일이 아니다. 모든 야곱의 지파와 이스라엘 사람과, 내 도움을 받은 모든 사람들이 다 나를 몰라도 중요(重要)하지 않다. 심지어 요한까지 나를 오해(誤解)해도 그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다. 다만 한가지 중요한 것은,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다는 것이다. 아, 아버지만 아시면 나는 만족(滿足)한다.

 

형제 자매여, 하나님만 당신을 알고 계시면 당신은 만족하는가? 당신은 요한이 당신을 알아주기를 원하는가? 야곱의 지파와 이스라엘 사람들이 당신을 알아주기를 원하는가? 혹은 고라신, 벳세다, 가버나움 사람들이 당신을 알아주기를 원하는가? 형제 자매여 하나님만이 당신을 알아준다면 만족(滿足)하는가, 만족치 않는가? 우리에게는 형제가 없어도 안 되고 자매가 없어도 안 되지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 있다면 그들이 우리를 알아 주지 않을 때에도, 오직 아버지만 아시면 만족하다고 할 것이다.

 

주 예수님께서는 능히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다』고 말씀하셨다. 형제 자매여, 당신의 모든 것은 다 아버지께서 주신 것인가, 아니면 사람이 준 것인가? 당신은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다』고 말씀하셨다. 형제 자매여, 당신의 모든 것은 다 아버지께서 주신 것인가, 아니면 사람이 준 것인가? 당신은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다』고 말할 수 있는가? 당신은 능히 『나는 아버지가 내게 주신 것 외에는 사람에게서 아무 것도 구(求)하지 않노라』고 할 수 있는가?

 

만일 당신이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당신은 능히 안식(安息)할 수 있고 능히 찬송(讚頌)할 수 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느니라』고 하시고, 또 『아들과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聲求)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만 아시게 하는 자만이 하나님을 아는 자이며 다른 사람을 인도하여 하나님을 알도록 할 수 있는 자이다. 아버지를 모르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인도해도 아버지를 알도록 할 수 없다.

 

형제 자매여 당신은 다른 사람을 돕고 싶은가? 왜 당신의 말에는 능력(能力)이 없는가? 왜 당신의 말은 다른 사람을 감동(感動)시키지 못하는가? 이것은 바로 당신의 모든 것이 아버지께서 주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신의 생각 속에는 아버지께서 주신 것이 너무 적다. 당신은 아버지가 주시는 것에 만족치 않고 인간에게서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이러한 사람임에 틀림없다면 당신은 감히 『오직 아버지만이 나를 아신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형제 자매여, 하나님만이 당신을 아신다면 당신은 정말 만족하겠는가? 당신이 정말 만족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만일 당신이 『하나님만이 나를 알면 족(足)하다』고 한다면 당신도 능히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는 사람이 능히 하나님을 아는 사람인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 아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인도하여 하나님을 알도록 할 수 있다.

 

형제 자매여, 하나님 밖에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우리에게는 인간의 정(情)이 많고 하나님 외의 것이 너무 많으므로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우리는 항상 사람에게서 안위(安慰)를 얻는다. 사람이 우리에게 준 영광(榮光)이 너무 많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을 인도하여 하나님을 알도록 할 수 없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 외의 여러 가지 것들이 충만할 때 우리는 능히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주님이 말씀하신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는 것이다.

 

형제 자매여, 만일 당신이 당신의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버린다면 당신은 하나님을 알 수 있고, 능히 다른 사람을 인도하여 하나님을 알도록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당신의 마음이 청결(淸潔)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청결(淸潔)한 자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이다(마 5:8).


3

 

주님은 이상(以上)의 말씀을 하신 후 이어서 또 위로(慰勞)의 말씀을 하셨다. 그것은 바로 『수고(受苦)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溫柔)하고 겸손(謙遷)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니라』하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은 주님 자신의 경험(經驗)이다. 주님은 그 자신의 경험(經驗)을 본(本)으로 남겨 주시어 그가 안식(安息)을 누림과 같이 우리도 안식(安息)을 누리라 하신 것이다. 『수고(受苦)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형제 자매여, 당신은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가? 당신은 항상 그것을 벗어나려고 하고 있지 않는가? 당신의 마음은 고통(苦痛)스럽지 않은가? 주님은 여기에서 당신에게 말씀하신다. 『오라,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당신에게는 많은 염려(念慮)가 있는가? 당신에게는 질 수 없는 짐이 있는가? 또 당신에게는 많은 실패(失敗)로 인한 고통(苦痛)이 있는가? 주님은 말씀하신다.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주님은 어떻게 우리를 쉬게 하실까? 주님은 자기 자신을 우리 앞에 놓으시어 우리로 그를 보게 하셨다. 그가 말씀하시기를 『나는 마음이 온유(溫柔)하고 겸손(謙遍)하다』고 하셨다. 그러면 무엇이 온유(溫柔)인가? 어떤 형제가 한 비유(警輸)를 들어 말했다. 『온유(混柔)란 작은 발동선(發動胎)에 달린 하나의 타이어와 같다. 배를 부둣가에 댈 때 부두와 배가 직접 부딪히면 반드시 사고(事故)가 생긴다. 그러나 이러한 타이어가 가운데 놓여 있으므로 딱딱한 부두와 배가 다 이 타이어에 부딪혀도 아무 사고도 생기지 않는다.』

 

형제 자매여, 이것이 온유다. 그 둘은 다 딱딱하나 이런 부드러운 것이 가운데 놓여 있으므로 사고가 생기지 않는다. 상대(相對)는 딱딱해도 당신이 부드러우면 그가 얼마든지 와 부딪혀도 좋다. 당신은 가벼이 그와 부딪히게 된다. 주 예수께서 『나는 마음이 온유(溫柔)하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곧 그가 가벼이 부딪힌다는 뜻이다.

 

형제 자매여, 당신은 온유한가? 많은 경우, 당신이 어떤 물건을 얻고자 할 때 그것을 반드시 얻으려고 하여 결국 당신이 그것을 얻었어도 그것은 당신을 변화(變化)시키지 못했고 또 당신을 변화(變化)시킬 수 없다. 이것은 당신의 마음이 온유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온유란 것인가? 온유란 능히 변화(變化)될 수 있는 것이다. 온유(溫柔)는 하나님이 얻고자 하는 것을 얻는 것이다. 온유(溫柔)란 나 자신으로 말하자면, 얻어도 좋고 얻지 않아도 좋다는 마음이다. 얻게 되어도 찬송(讚頌)하고 감사(感謝)하는 것이고, 얻지 못해도 찬송(讚頌)하고 감사(感謝)하는 것이다. 온유(溫柔)는 하나님 뜻에 의해 우리의 결정(決定)이 변경(變更)되는 것이다.

 

형제 자매여, 하나님의 뜻이 능히 당신의 뜻을 변경시킬 수 있는가? 당신이 결정한 것, 당신이 사모(思慕)한 것, 당신이 바라는 것, 당신이 계속 찾는 것을 하나님이 허락(許諾)지 않으실 때 당신은 능히 그것을 버릴 수 있는가? 당신은, 『하나님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당신이 요구(要求)하는 것을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지 않을 때에도 『할렐루야』 찬송할 수 있겠는가?

 

형제 자매여, 우리가 알 것은 온유(溫柔)한 마음은 곧 순종(順從)하는 마음인 것이다. 그러므로 온유라는 것은 자기 뜻을 고집(圈執)하지 않고, 자기 의견(意見)을 고집(固執)하지 않고, 자기 주장(主張)을 고집하지 않는 것이다. 자기가 무엇을 얻기 위해 고집(固執)하지 않는 것이다. 온유한 마음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변경(變更)시킬 때 우리도 변경(變更)되기를 원하는 마음이다. 마음이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이 이리 가라 하시면 이리 가고 저리 가라 하시면 저리 가는,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변경시켜도 좋다는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은 안식(安息)을 누리는 사람이다.

 

형제 자매여, 안식(安恩)은 가장 귀(貴)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서 생활할 때 항상 안식하지 못하고, 항상 불만이 있고, 항상 원망하는 데에는 하나의 원인이 있다. 그 원인은 바로 그에게 하나의 요구(要求)가 있는 것이다. 거기에서 하나 바라는 것이 있고 하나 이루고자 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안식의 조건(條件)은 온유(溫柔)임을 보여 준다. 하나님의 길과 우리의 길이 어긋날 때 우리가 우리의 길을 바꾸며, 『하나님, 저는 하나님께 양보(讓步)합니다.』라고 능히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양보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온유하지 않다는 증거(證據)이다.

 

형제 자매여, 우리는 반드시 마음이 온유해야 한다. 마음이 온유하지 않으면 안식을 누릴 수 없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할 것은 온유한 마음은 안식의 첫 조건(條件)이라는 것이다.

 

주 예수님은 온유할 뿐 아니라 겸손(謙擺)한 분이시다. 우리는 항상 망상(妄想)과 혈기(血氣)속에서 항상 허망(虛妄)한 소망(所望)과 무익(無釜)한 계획을 갖고 있다. 우리는 항상 다른 형제와 비교(比較)하고, 자매와 비교하고, 다른 사람이 앞서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내가 그들보다 높아지기를 좋아하고 크게 되기를 좋아한다. 우리의 생각에는 교만(騎慢)과 자만(自慢)이 충만하다. 우리의 마음은 겸손치 않으며 우리 주님과는 다르다. 우리 주님은 마음이 온유할 뿐 아니라 겸손(謙遲)한 분이다. 우리 주님은 크기를 원치 않으신다. 그는 어떤 유익(有益)을 구(求)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을 달게 받으시고 만족(滿足)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의 마음이 겸손(謙適)한 것이다.

 

형제 자매여, 당신은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신 것에 만족(滿足)하는가? 아니면 당신은 그보다 더 크고 더 많은 것을 얻으려 하는가? 아직도 당신은 하나님이 주신 것에 불만족(不滿足)하는가? 당신은 어떤 일에 있어서 꼭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려는가? 형제 자매여, 하나님이 얻고자 하는 사람은 마음이 겸손한 사람이다. 많은 사람이 영웅심(英雄心)과 야심(野心)을 갖고 있지만 그것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쓸모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를 쓰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마음이 겸손한 사람이 아니므로 안식을 누리지 못한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것을 만족하게 생각하지 않으므로 그들에게는 안식이 없는 것이다.

 

형제 자매여, 당신은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 때문에 당신의 주장과 당신이 바라는 것과 당신의 뜻을 변경시킬 수 있는가? 만일 당신에게 야심(野心)이 있고, 영웅심(英雄心)이 있고, 이것을 위하고 저것을 원한다면 당신은 온유하지 않고 겸손하지 않은 사람이다.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주시든지 그대로 받고, 언제나 능히 『할렐루야!』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우리 주 예수님은 온유한 분이므로 그는 하나님 앞에서 부드러우시다. 우리 주님은 겸손하시므로 그에게는 자기 자신의 요구(要求)가 없었다. 오직 온유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인도(引導)를 받을 수 있고, 겸손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케 할 수 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음」은 「혼(魂)」으로 번역된다)』라고 하셨다. 주 예수님은 자기의 경험(經驗)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어 우리로 보게 하셨다. 안식을 얻으려면 그의 멍에를 메고 그에게 배우라 하신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큰 문제는 바로 많은 경우에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중(重)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혼(塊) 속에 안식(安息)이 없고 기쁨이 없다. 성경에는 두 가지 기쁨이 있다. 그 한 가지 기쁨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恩惠)를 믿을 때 얻는 것이고, 또 한 가지 기쁨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순종(順從)할 때 얻는 것이다.

 

형제 자매여, 당신의 마음 속에는 기쁨이 있는가? 당신의 마음에는 만족(滿足)이 있는가? 당신의 마음에 맞지 않는 일이 있어 원망(怨望)하고 있는가? 만일 원망이 있다면 그 원인(原因)은 바로 당신이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지 않는 데 있다. 누구든지 이러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말한다. 『바치는 일보다 더 기쁜 일은 없다.』

 

자신을 완전히 하나님의 손에 바쳐 하나님의 지배(支配)를 받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은 없다. 만일 당신의 마음에 기쁨이 없다면, 당신의 마음에 만족이 없다면, 원인은 바로 당신이 주님의 멍에를 메지 않고 주님께 배우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의 모든 것은 다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준 것임을 알고 『아버지여, 옳소이다. 무엇이든지 당신이 결정(決定)하신 것이 가장 좋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가장 깊은 기쁨이다. 이것이 우리 주님의 경험(經驗)이요, 우리 주님이 알려주신 것이다.


4

 

형제 자매여, 당신에게 안식이 없고 기쁨이 없다면 당신은 당신 속에 있는 한 가지 물건(物件)을 놓지 않고 있는 것이다. 반드시 어떤 것이라고 지적(指摘)할 수는 없으나 무언가가 그 속에 있는 것이다. 또 당신이 고민(苦悶)하는 것은 당신 속에 어떤 일이 있기 때문이다.

 

형제 자매여, 당신 속에는 무슨 일이 있는가? 당신은 무슨 일 때문에 고민(苦悶)하여 감히 그것을 내놓지도 못하는가? 당신은 무슨 일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감히 자기 속을 파 보지 못한다. 보기만 하면 무슨 문제가 생길까 하고 두려워하는 것이다. 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이 그를 만질 때 어디로 빠져 나가려고만 하고, 단 몇 분 동안도 안정(安定)하여 생각지 않고 안절부절하여 안식(安息)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쁨이 없다.

 

형제 자매여, 당신이 진정(眞正)으로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께 배운다면 당신에게는 평강(平康)이 충만(充滿)할 것이고 찬미(讚美)가 충만(充滿)할 것이다. 전에 어느 형제가 집을 떠나 시골로 복음(福音)을 전(傳)하러 가게 되었다. 그 형제는 길을 가면서 말했다. 『오늘 이후로 나의 친척과 가정과 친구는 내게서 멀어졌다.』 이어서 그 형제는 또 말했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기쁜 사람이다!』

 

형제 자매여, 당신은 구원(救援)의 기쁨을 알았으나 이 형제는 바치는 기쁨을 안 것이다. 많은 경우, 우리 마음은 고통스러워도 우리 입에서는 찬미가 충만하다. 그러나 유감(遺憶)스러운 것은 때로 많은 그리스도인의 그 찬미가 어떤 것들에 막히는 것이다. 이 말은 그들을 정죄(定罪)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에게 하나님 외의 것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막혀 있는 모든 것들을 제하시면 그의 마음도 반드시 안식을 누리게 될 것이고, 기쁨이 충만할 것이다.

 

많은 형제 자매들이 사람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사람과의 관계가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더 깊은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날, 사람의 사랑을 잃고 사람의 친절(親切)을 잃을 때 그는 안식을 잃고 기쁨도 잃게 된다. 형제 자매여, 만일 당신이 주님같이 연속(連續)된 오해(誤解)와 훼방(毁誇)과 버림을 받을 때, 당신의 마음은 어떻겠는가? 당신은 어떻게 말하겠는가? 어떤 사람은 여기에서 주님과 따지며 주님에 대해 문제를 일으킨다.

 

그러므로 그의 마음에는 안식이 없고 기쁨이 조금도 없게 된다. 그러나 만일 그가 주님 앞에 와서 『주여, 당신이 허락하시어 내게 임(臨)하게 하신 모든 일들에 나는 「아멘」합니다. 모든 것이 옳습니다.』라고 말할 때 거기에는 즉시 하늘의 안식과 하늘의 기쁨이 충만할 것이다.

 

한 형제가 달밤에 광야의 길을 가게 되었다. 하나님이 그에게 『네가 사랑하는 OO를 내가 데려간다면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으셨다. 그는 대답했다. 『하나님, 나는 감당할 수 없읍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다시 말씀하셨다. 『너는 약하고, 감당할 수 없지만 내가 감당하게 하겠다.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그는 말했다. 『주여, 감사합니다. 찬미를 드립니다. 나는 할 수 없으나 주님은 하실 수 있읍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하시게 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다. 그는 한편으로 눈물을 흘리며 한편으로는 하나님께 맡긴 것이다. 기이한 일은 그가 이렇게 수그러들 때 그에게 즉시 하늘의 기쁨과 평강이 충만해진 것이다.

 

형제 자매여, 당신은 하늘의 기쁨과 하늘의 평강을 맛보았는가? 주님은 당신에게 하늘의 기쁨과 평강을 주려고 기다리고 계신다. 문제는 당신이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께 배웠느냐에 있다. 당신은 주님이 당신에게 요구하는 일에 불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오늘 주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또 주님의 축복을 다른 사람에게 나눠줄 수도 없는 것이다. 주님은 말씀하셨다.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형제 자매여, 당신은 이 말씀을 믿는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은 인색한 분이시다. 그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은다』고 하지만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주님의 멍에는 쉽고 주님의 짐은 가벼움을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하나님의 많은 자녀들이 하나님의 뜻을 듣기를 무서워한다.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능력은 듣고 좋아하고 찬송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들으면 무서워하는 것이다. 우리 주님은 어떠하셨는가? 그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아름다운 뜻』이라고 말했다. 주님이 보시기에는 하나님의 모든 뜻이 다 아름다운 것이다.

 

많은 경우 하나님은 우리가 생선을 구할 때 뱀을 주시는 것 같고 우리가 떡을 구할 때 돌을 주시는 것 같다. 왜 하나님은 생선을 구하는데 뱀을 주시고 떡을 구하는데 돌을 주실까? 우리는 우리가 구한 생선이 실(實)은 뱀인 줄을 모르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뱀을 주신 것 같으나 그것이 실은 고기인 줄을 모른다. 또 우리는 우리가 구한 떡이 실은 돌인 줄을 모르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것이 돌 같지만 실은 떡인 줄을 모르는 것이다. 또 여러 번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지 않은 것 같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셨음을 모르는 것이다.

 

아, 우리 하나님은 절대 어기지 않는 분이시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않는 데 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때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마음 아픈 일을 주시고, 어려운 일을 당하게 하시는 것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우리를 온전케 하여 좋은 것으로 채우게 하려 하심이다. 우리가 만일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아름다운 뜻임을 믿는다면 우리는 눈물을 흘리며 찬송을 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를 믿어야 한다. 그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그의 사랑은 영원히 변치 않고 그의 지혜는 영원히 틀림이 없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든지 우리에게 유익이 없는 일은 우리에게 임하게 하지 않는다. 우리는 또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인도하여 우리가 거쳐야 할 것을 거치게 하심을 믿고 또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임하는 모든 일을 감당하게 하실 줄을 믿어야 한다. 이때 우리는 능히 하나님께, 『하나님, 감사합니다. 찬미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뜻이 옳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시작할 때부터 하나님의 은혜를 찬미하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 찬송하며, 항상 찬송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얻을 때 찬미하고 잃을 때에도 찬미하여야 한다. 시작할 때 찬미하고 마친 후에도 찬미하여 항상 찬미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형제 자매여, 우리는 이렇게 함으로써 능히 안식할 수 있고 능히 기뻐할 수 있으며 모든 일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능력이 충만할 것이다.

 

『사막의 단샘』 10월 24일의 일부분은 아래와 같다.

 

『5원의 가치가 있는 강철(鋼鐵)을 제철(製鐵)하면 10원의 가치를 갖는 철이 된다. 만일 그 철(鐵)로 가는 바늘을 만든다면 350원의 가치가 된다. 만일 그 철(鐵)로 칼을 만든다면 32,000원 짜리가 되고 그 철(鐵)로 시계(時計) 바늘을 만든다면 250,000원 짜리가 된다.』

 

형제 자매여, 당신은 이것을 보았는가? 10원, 350원 32,000원, 250,000원의 분별은 어디에 있는가? 똑같은 물질(物質)이지만 많이 거치고 많이 단련(鑛鍊)하여 많이 두드릴수록 단단하게 되고 많이 다룰수록 유연하게 되어 가치 있는 물건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더 많이 단련하시고, 더 많이 두드려서, 우리로 하나님 앞에 쓸모있고 가치 있는 그릇이 되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임(臨)하게 하시는 모든 일을 원망(怨望)없이 기쁘게 받아야 안식(安息)을 누릴 수 있고 『아버지여, 감사(感謝)합니다. 당신이 내게 임(臨)하게 하신 모든 것이 다 좋습니다.』라고 능히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뜻에 복종(服從)할 때 우리의 마음은 안식(安息)을 얻고, 기쁨이 충만(充滿)하고, 우리의 입에도 찬미(讚美)가 충만(充滿)하여 우리가 지고 있는 짐이 무거운 줄을 모르게 된다.

 

형제 자매여, 우리가 이미 본 바와 같이 우리 주님에게는 깊은 기쁨이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을 믿기 때문에 『나의 신원이 여호와께 있고 나의 보응(報應)은 하나님께 있다』고 하신 것이다. 그는 믿기 때문에,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라고 하신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분명히 알려 주셨다. 『너희는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혼(魂)이 쉼을 얻으리라』.

 

아, 형제 자매여 우리가 이 깊은 기쁨에 참여(參與)하려면 우리는 반드시 주님의 말씀을 믿고 그의 멍에를 메고 그에게 배워야 한다. 주님께 감사드리자. 그의 멍에는 쉽고 그의 짐은 가볍다.


워치만 니
[열두 광주리 가득히, "더 깊은 기쁨", 한국복음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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