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죠지 뮬러(1805∼1898)

 

믿음의 기도

 

죠지 뮬러(George Muller)는 교회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도의 사람들 중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특별한 기도의 응답을 50,000 번 이상이나 받았다. 뮬러는 믿음의 기도에 관한 문제를 완전히 회복했을 뿐 아니라 전세계에 놀라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과시할 수가 있었다. 그는 여러 개의 커다란 고아원을 설립하기 위해 그의 전생애 동안 기도의 응답으로 들어온 칠백만 달러를 소비한 것으로 유명하다. 뮬러는 또한 「형제회」의 영향력 있는 인도자들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교회 생활의 합당한 실행에 관한 많은 중요한 문제들을 깨닫고 실행했으며, 어떤 면에서는 형제회의 주도적 교사인 죤 넬슨 다비(John Nelson Darby)보다도 어떤 진리들에 관하여는 더 분명했다.


그리스도를 발견한 후에

 

죠지 뮬러는 1805년 9월 27일 프러시아(현 독일)의 알베르스테드트 부근에서 출생했다. 어린 시절에 그는 거짓말장이요, 협잡꾼이요, 도둑이었으며, 열 여섯 살에는 심지어 자신의 비행으로 인해 얼마 동안 감옥에서 보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명한 청년이었던 까닭에 그의 아버지는 뮬러를 할례(Halle)에 있는 루터 신학교에 보냈다(1세기 전에 진젠돌프가 거기에서 공부한 바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체험이 없었던 뮬러는 여전히 죄스러운 행동들을 일삼았다. 스무 살이 되어서야 비로서 그는 몇 명의 그리스도인들을 만나 결국은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 때부터 그는 성경을 열심히 읽고, 기도하는 데 시간을 보내며, 그리스도인의 집회에 참석했다.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선교사가 되기로 작정하고 그의 여생을 복음 전파로 바꾸었으며, 소책자와 신문을 배포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극히 사랑하는 자

 

1829년에 뮬러는 런던 선교회에서 훈련을 받아 유대인들에게 선교사로 가려는 소망을 품고 런던으로 갔다. 그러나 학업 도중 그는 병이 들어 요양을 하기 위해 디본쉬어로 갔다. 여기에서 그는 안토니 그로브스와 헬리 크레잌 등을 포함하는 형제회 운동 초기의 영향력 있는 몇몇 지체들을 면대하게 되었다.

 

이 때에 뮬러는 과거에 지은 죄들에 대한 철저한 회개를 경험하고 자신을 주님께 헌신했다. 그는 그 때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극히 사랑하는 자』가 되었으며, 그의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기 시작했다고 술회했다.

 

런던으로 돌아와서 그는 「너무나 달콤한 하나님과의 교통」을 발견하였기에 종종 이른 아침 시간까지도 기도를 했다. 디본쉬어에서 어떤 사역자로부터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영적인 문제들의 표준이라는 말을 듣고 인상을 받은 뮬러는 자신을 더이상 선교회에 묶어 둘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오히려 그는 바울과 바나바의 경우처럼(행 13:2) 성령이 자신을 보내주시기를 원했다.

 

1831년에 그는 주님이 테인마우스에 있는 그리스도인 모임에서 사역하도록 인도하신다는 느낌을 가졌다. 그는 또한 안토니 그로브스의 누이인 마리아와 결혼했다.


성경적인 실행들

 

이때로부터 뮬러는 믿음의 기도와 아울러 교회 실행에 관해 더 많은 것을 보기 시작했다. 그는 승인된 연령에 받는 수침의 성경적인 실행을(행 8:38-39) 선호한 까닭에 유아 침례(루터교에서 넘어온)를 버렸다. 그는 믿는이들이 주의 날마다 함께 떡을 뗄 수 있다는 것을 보았다(고전 10:16, 11:24-26). 그는 모인 여러 지체들이 집회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말하는 것이 허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납득했다(고전 14:29-31).

 

뮬러는 고정된 급료 받기를 거절했으며, 재정 지원을 위해 「의자 임대료」를 부과하는 만연된 실행을 중단했으며, 대신에 그는 자원하는 예물을 넣을 수 있도록 간편한 상자를 놓았다. 그는 또한 빚을 지거나(롬 13:8) 돈을 축적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 아래서 경영을 시작했다. 하나님께는 『예측할 수 없는 비상사태가 없으며, 응할 수 없는 부족함이 없기』 때문이었다.


성직자-평신도 제도의 냄새조차 거절함

 

1832년에 뮬러는 테인마우스를 떠나 브리스톨에서 헨릴 크레이크와 합류했다. 그들은 비록 소수이긴 하나 믿는이들과 더불어 기드온과 벳세다 체플에서 모이기 시작했다. 그는 성직자-평신도 제도의 냄새를 풍기는 것조차도 거절하고 회중과의 고정된 목회적 관계가 아닌 조건하에서만 사역을 했다. 그는 또한 하나님의 생각이라고 간주하는 바를 자유롭게 전파하기를 원했다.

 

이즈음에 그는 믿음의 기도를 통해 2,000 명의 고아를 돌본 어거스트 프랭키의 제사장의 생활을 읽었다. 뮬러는 그 문제에 의해 깊이 만져진 바 되었으며, 아침 식사 후에 즉시 그의 집에서 고아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후 1834년 그는 국내외를 위한 성경 학원을 개설했다. 이 일을 통해 그는 아동을 위한 주간 학교들을 지원하고, 성경과 기타 영적인 간행물들의 출판과 배포, 그리고 가장 성경적으로 행하는 선교사들을 후원하기로 작정했다(한순간 그는 허드슨 테일러의 중국 내지 선교회를 지원하는 주요 근원이 되었다).

 

비록 뮬러와 크레이크에게 2실링(50센트) 밖에 없었지만 뮬러는 이렇게 설명했다. 『주님은 쏟아부으시는 반면 우리는 쏟아부으시기를 구한다.』 물러는 여전히 자신을 선교 사업을 위한 지원 가능자로 생각했으나, 주님이 영국을 떠나도록 인도하신다는 느낌은 추호도 갖지 못했다.


믿음의 공과와 성경 통독 200회

 

1835년에 뮬러는 고아원 설립에 관한 주님의 인도하심을 구하기 시작했다. 그의 사상은 『하나님은 여전히 신실하시며 변함없이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을 사람이 알 수 있다는 것이었다.

 

1837년부터 그는 약 60여 명 되는 아이들을 집에 유숙시키면서 돌보았다. 재정적인 지원은 줄곧 믿음의 기도를 통해 받았다. 뮬러는 불신자들로부터는 절대로 지원을 받지 않았다. 그때로부터 고아를 위한 그의 사역은 거대해졌다.

 

1850년대에 이르러서는 애쉴레이 다운스에 커다란 고아원 몇 개를 지었으며, 60 년 동안 아이들에게 음식이 결핍되는 일이 없었다. 뮬러는 점차적으로 큰 믿음의 공과를 배웠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함으로 그들의 믿음을 강하게 하도록 충고했다. 그는 또한 믿는이들에게 정직한 마음을 유지하고, 시험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이 역사하실 수 있도록 길과 시간을 드리라고 격려했다. 뮬러는 성경을 200 회나 통독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중 100 회는 무릎을 꿇고 보았다!


부분적인 진리를 강조하지 말라

 

브리스톨에서의 뮬러의 모임은 무교파적인 입장에서 계속되었으나,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그들을 「플리마우느 형제회」라 지칭했다. 애석하게도 형제회 모임 가운데 있었던 헤른후트 사람들의 교회 생활과 놀라운 회복은 두 인도자, 죤 넬슨 다비와 벤자민 뉴톤간의 와해로 손상되었다.

 

1845년에 뉴톤이 자신의 실수를 철회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비는 이단적인 것을 가르친다고 뉴톤을 비난했으며, 이미 뉴톤이 모이고 있었던 플리마우스에서 다비는 다른 모임을 갖자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다비는 뮬러와 크레이크를 설득하여 자기 편을 들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뮬러는 모임들은 서로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뉴톤을 따르는 자들이 이단적인 가르침을 붙잡지 않는다면 그들과의 교통을 차단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 후 다비는 브리스톨 형제회와의 교통을 차단했다. 그 분열은 「개방된」 형제회 모임과 「폐쇠된」 형제회 모임을 낳았다. 뮬러의 공개적인 입장은 분명히 더 성경적이었다. 그는 이미 침례나 국교회를 떠나는 것과 같은, 그리스도인의 공통적인 신앙에서 절대적인 요소가 아닌 진리의 방면들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커다란 위험이 있다는 것을 보았다.

 

뮬러는 이렇게 서술한다. 『어떤 진리의 부분이든, 심지어는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켜진 우리의 존재나, 하늘에 속한 우리의 부르심이나, 예언과 관계된 가장 귀중한 진리들이라 할지라도, 그것들이 너무 중시된다면, 진리의 이러한 부분들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그것들을 두드러지게 만드는 자들은 머지않아 자신의 혼을 잃는 자가 될 것이며, 그들이 교사들이라면 그들이 가르치는 자들을 손상시킬 것이다.』


그의 영향력

 

칠십 세 때 뮬러는 고아원을 전적으로 운영하면서도 전세계에 걸친 전도여행을 수차례나 했다. 그는 자신의 위임에 일곱 가지 동기를 부여했는데, 1) 복음을 전파하고, 2) 믿는이들을 인도하여 그들의 회심한 후의 상태를 알게 하고 하나님 안에서의 그들의 특권을 깨닫게 하며, 3) 그들을 성경으로 돌아오게 하며, 4) 형제 사랑의 영을 촉진시키며, 5) 하나님을 신뢰하는 생활을 강화시키며(어떻게 하나님이 그의 기도에 응답하셨는지를 예로 들어서), 6) 세상으로부터의 분별을 촉진시키며, 7) 그리스도의 재림을 말하는 것이었다.

 

십 칠 년 동안 그는 약 300만 가량 되는 사람들에게 강연을 했다. 그는 1898년 3월 10일, 93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브리스톨에서 끊임없이 전파했다. 그의 생애와 그의 책-주님이 뮬러를 다루신 일화집-은 그의 생전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으며, 심지어는 지금도 영을 고양시키는 역량이 있다.


[회복의 밝은 빛들, "죠지 뮬러 편", 한국복음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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