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성한 말씀을 누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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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우주 가운데 지극히 위대한 것이다. 우리 주님과 영광의 하나님 외에, 우주 안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우리 수중에, 우리 눈 앞에 있는 이 성경이다. 성경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이것을 연구하거나 이해하기 전에 합당한 해석이 필요하다. 이 해석은 분명한 법칙과 원리를 따라야만 하고 우리가 좋아하는 방식대로 아무렇게나 해석해서는 안 된다. 성경이 어떻게 쓰여졌으며 어떻게 여러 가지 언어로 번역되어, 우리가 볼 수 있는 책으로 되었는지 보았으므로 이제 성경 해석과 연구에 대한 통제하는 원리 원칙을 알아 보도록 하자. 이것이 성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많은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도움을 줄 것이다.

 

모든 법칙은 일종의 보호 역할을 한다. 기차가 달릴 철도가 없다면 부드럽게 달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안전하지 못할 것이다. 철길이 있다면 기차는 부드럽게 달리게 되고 안전한 보호를 받게 된다. 이것은 성경 연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만약 맹목적으로 조심성없이 성경을 연구하고 해석한다면 그 결과는 상상할 수도 없이 매우 위험할 것이다. 종종 우리의 생각은 제한이 없다. 자신의 관념대로 판단하고 인식한 대로 해석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성경을 합당하게 연구하여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제한된 해석이 있어야 하고, 제한된 성경 해석을 하려면 성경 해석의 원칙들을 알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 열 가지 원칙을 소개한다.


Ⅰ. 가능한 한 글자 그대로

 

첫 번째 원칙은 가능한 한 글자 그대로 해석하여 이해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영감을 주어 성경을 쓰게 하실 때 하나님은 사람들이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굳게 믿어야 한다. 오늘날 성경을 이해하려 할 때 성경의 글자를 따라서 엄격하고도 정확하게 하나님의 생각을 이해해야 한다.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되었기 때문에 사람의 언어를 초월하여 영적인 해석으로만 열릴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위험한 생각이다. 말씀의 글 뜻 그대로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 글자 그대로의 해석이 아무리 어렵거나 부적절하게 보일지라도 글 뜻 그대로의 의미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이사야서에 주 예수님이 처녀에게서 태어날 것이라는 구약의 예언은 분명하다. 이제 주님은 이미 처녀에게서 태어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말씀을 읽거나 들을 때 별로 놀라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사야 당시에 처녀가 아이를 낳아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에 대한 글을 읽으면 마음 속에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겠는가? 분명히 어떤 사람은 처녀가 아이를 낳는 것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영적인 해석을 하여 이 처녀는 실제적인 처녀가 아닌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한다고 제안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예언이 성취되었을 때 이것은 글자 그대로 성취된 것이었다. 이 처녀는 실제적인 처녀였다.

 

구약의 스가랴서에서는, 주 예수님이 마지막에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갈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 당시에 이것을 읽으면, 다른 사람들이 호산나라고 외치는 이 분은 찬양받기에 합당한 분이며 이스라엘의 가장 귀한 분이기 때문에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갈 가능성이 없으므로 이것을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귀새끼를 타는 것은 논리적이지 않다고 사람들은 생각할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인해 그들은 이것을 영적으로 해석하여 다른 어떤 것을 뜻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예언이 이루어졌을 때 모든 면에서 글자 그대로 성취되었다. 그 단어는 나귀새끼였으며 실제도 나귀새끼였다.

 

성경을 읽을 때 한면으로는 영감을 받아들여야 하지만 또 한면으로는 글자 그대로의 의미를 영적인 해석에 맞추기 위해 바꾸어서는 안 된다. 예언이나 비유를 글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이 너무나 터무니없고 부적절할 때에만 그것들을 영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는 성경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성경의 어떤 항목을 글자 그대로 해석해야 하는지 아니면 영적으로 해석해야 하는지 주의깊게 고려해야 한다. 거기에는 큰 차이점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계시록에 나오는 메뚜기를 오늘날의 비행기로 해석하고, 하늘에서 내리는 우박을 비행기에서 떨어지는 폭탄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것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너무 마음대로 해석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괴상하고도 비합리적인 본보기들을 보고 싶으면 제 칠일 안식교에서 출간된 「시대의 표적」이라는 책을 읽어보면 된다. 거기에는 제한되지 않고 위험한 해석들이 많이 있다. 우리는 성경을 이런 식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가능한 한 원칙을 붙들어야 하고 글자 그대로의 의미를 고수해야 한다. 다만 어떤 환상이나 예언, 비유에 있어서 글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이 너무 터무니없거나 불합리할 때만 영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Ⅱ. 똑같은 문장과 구절과 문단 내에서 글자 그대로의 해석과 영적인 해석을 혼용하지 못함

 

성경의 한 문장이나 한 구절, 한 문단을 앞부분은 영적으로, 뒷부분은 글자 그대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또는 그것과 유사한 다른 방법으로 해석해서도 안 된다. 만약 한 문장이 영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면 전체가 다 영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3장에서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많은 성경 주석가들은 여기의 물을 영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다음 구절에서 성령을 글자 그대로 성령을 언급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런 식의 해석은 잘못된 것이며 성경 해석의 원칙에서 어긋난다. 만약 뒷부분에 있는 성령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려면 앞 부분에 있는 물도 또한 글자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 성령을 영적으로 해석할 수 없기 때문에 물도 영적으로 해석할 수 없다. 이것은 반드시 글자 그대로 해석되어야 한다.

 

마태복음 3장에서 침례자 요한은 말했다.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 3:11-12). 어떤 주석가는 여기의 불을 영적으로 환난과 시험으로 해석한다. 또 어떤 이는 이것이 불처럼 태우는 성령이라고 해석한다. 이것들은 다 불이라는 말을 영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침례자 요한이 말한 물은 실제적인 물이므로 성령도 글자 그대로 성령이다. 그러므로 뒷부분의 불은 영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글자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 여기의 「불」을 영적으로 해석하면 「물」도 영적으로 해석해야 하므로 이렇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성경 해석에 있어서 중요한 원칙이다. 한 문장 속의 여러 부분들을 모두 글자 그대로 해석하든지 아니면 모두 영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두 가지 방법으로 다 해석해서는 안 된다.


Ⅲ. 전체적인 진리를 제시하는데 있어서 한 부분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함

 

성경을 해석할 때, 성경의 한 부분만으로는 전체 진리를 제시하는데 충분하지 않다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즉 한 부분의 말씀만 갖고서 전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진리는 없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고 해석할 때 「또 기록되었으되」라는 말씀을 주의해야 한다. 이것은 마태복음 4장 7절에서 주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다. 주님이 시험받으실 때 마귀는,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라는 시편 91편 말씀을 인용했다. 구약에 그러한 약속이 있기 때문에 주님이 성전 꼭데기에서 뛰어내려도 다치지 않으리라고 말했다. 이것이 바로 마귀가 구약의 한 부분의 말씀으로 주 예수를 유혹한 방법이다. 주님이 이것을 들었을 때 주님은 즉시로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고 대답하셨다.

 

이것은 성경의 한 부분의 말씀만 고려해서는 안 되고 성경의 두세 부분 또는 더 많은 부분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만약 우리가 「또 기록되었으되」의 원칙을 무시하여 성경 말씀을 한 구절만 적용한다면 쉽게 마귀의 궤계에 빠지게 될 것이다. 만약 마귀가 어떤 사람에게 성경을 따르지 못하도록 막을 수 없다면 마귀는 그 사람이 성경을 단독적인 방법으로 인용하도록 할 것이다. 물론 사탄은 우리가 성경을 따라 행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는 안다. 주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모든 사람들은 성경을 따라 행하기를 원한다. 마귀는 우리가 성경을 따르거나 성경을 따라 행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그는 단지 다른 방법만을 사용할 수 있는데 이 방법 중의 하나가 성경을 단독적인 방법으로 따르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극단으로 치우쳐져서 「또 기록되었으되」라는 말씀을 잊어버리게 된다.

 

「또」라는 말씀은 너무나도 큰 말씀이다. 우리는 이 말씀에 동그라미를 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을 따를 때 단독적인 방법으로 따라서는 안 된다. 우리는 양면을 다 고려해야 하고 할 수 있으면 모든 면을 다 고려해야 한다. 집의 한 쪽면이 집 전체를 나타낼 수 없는 것처럼 성경의 한 부분이 진리 전체를 나타낼 수 없다.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이다. 뒤에서 사진을 찍으면 머리에는 단 하나의 구멍도 없지만 앞에서 찍으면 일곱 개의 구멍이 있다. 사람의 한 쪽면만으로는 그 사람 전체를 나타낼 수 없다. 성경 말씀에 대해서도 이와 같다. 성경 한 부분으로는 진리 전체를 나타낼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면에서 균형잡혀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또 기록되었으되」의 원칙을 기억해야 한다.


Ⅳ. 매 구절은 모든 진리를 포함하고 있음

 

단 한 구절이 진리 전체를 나타낼 수 없지만 성경의 매 구절은 모든 진리를 포함하고 있다. 한면으로는, 단 한 구절이 진리 전체를 포함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의 진리를 이해하려면 한 구절에만 의존할 수 없고 다른 많은 구절들도 고려해야 한다. 또 다른 면으로는 어떤 진리를 결정할 때 모든 구절을 고려해야 한다. 성경의 각각의 구절은 모든 진리를 포함한다.

 

한번은 어떤 형제가 「성경의 어떠한 구절도 이것을 설명하는 데는 전성경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것은 사실이다. 만약 창세기 1장 1절을 이해하려면 전 성경을 이해해야 한다. 한면으로는 창세기 1장 1절은 전 성경을 포함할 수 없지만 또 다른 면으로는 창세기 1장 1절은 성경의 모든 진리를 포함한다.

 

그러므로 어떤 진리를 결정할 때 성경의 한 구절만 의존할 수 없고 그 대신 말씀에 의존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어떤 한 구절에 대한 주해는 그 자체의 내용에만 기초를 두어서는 안 되고 대신 성경 전체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 베드로 후서 1장 20절에서 성경 예언은 사사로이 풀지 말라고 했다. 이 구절의 원래 의미는 성경 예언은 그 자체의 내용에 의해서만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예언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성경의 모든 예언을 연구해야 하고 성경의 모든 예언에 근거하여 결론을 내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때에만 비로소 그 예언이 완전해질 것이다.


Ⅴ. 성경의 어떤 부분도 희생하지 않음

 

진리를 결정할 때 가끔 연관된 많은 구절들이 어떤 하나의 의미를 나타내지만 그들 중 두세 가지는 그런 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런 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구절이 한두 구절밖에 안 된다는 이유로 그것을 무시하고 다른 많은 구절들을 근거로 해석할 수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성경의 몇몇 구절들이 희생당하게 된다. 우리는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한두 구절 때문에 어떤 한가지 해석을 할 수 없다면, 그 해석을 포기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의 모든 부분을 중시해야 한다. 하나의 해석이 성경 전체와 조화될 때만 이 해석을 믿을 만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어떤 진리의 해석과 반대되는 구절은 어떤 것도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 해석을 포기하고 하나님께서 더 많은 계시를 주시도록 기다려야 한다. 우리가 이런 식으로 성경을 연구한다면 쉽사리 잘못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Ⅵ. 모든 병행된 표현이 똑같음

 

성경에는 서로 병행된 표현들이 많이 있다. 이 모든 병행 구절들은 서로 똑같고 다르지 않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5장에서 주님은 아홉가지 축복을 말씀하셨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이것은 첫 번째 표현이 두 번째 것과 어울리는 표현이다. 이 경우 각각의 축복에 먼저 조건이 있고 그 다음 축복 그 자체가 있다. 모든 구절들이 똑같다. 만약 한 구절의 첫 번째 부분이 어떤 조건을 말하면 모든 병행 구절의 첫 번째 부분도 또한 조건을 말한다. 한 구절의 두 번째 부분이 축복을 말하면 모든 표현의 두 번째 부분도 또한 축복을 말한다. 이것은 또 하나의 원칙 또는 법칙이다.


Ⅶ. 배경에 제한받지도 않고 배경을 무시하지도 않음

 

성경을 해석할 때 배경에 제한받아도 안 되며 무시해도 안 된다. 예를 들면 주님의 산상수훈에는 많은 말들이 유대교의 배경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마 5:23)과 같은 말씀이 있다. 예물을 제단에 드리는 이것은 전적으로 유대교의 배경에 근거하고 있다. 만약 이 구절의 본래 의미를 이해하려면 그 시대의 배경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가까이하여 그와 교제하기 위해 제단에 예물을 드렸다. 만약 당신이 이 원칙을 붙든다면 주님의 말씀이, 하나님께 어떤 것을 드리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을 언급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배경을 무시할 수 없고 오히려 배경을 이해해야 한다.

 

또 한면으로 배경에 제한되어도 안 된다. 단지 주님이 말했기 때문에 제단에 가서 예물을 드리라고 말할 수 없다. 만약 당신이 이런 배경에 제한된다면 큰 문제를 야기시키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배경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성경의 정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또한 잘못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배경에 제한받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Ⅷ. 시대의 차이에 주의를 기울임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은 시대에 따라 나뉜다. 어떤 말씀은 율법시대에 또 어떤 말씀은 은혜시대에 주어졌다.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매시대의 차이를 구별해야 한다. 율법시대에 주어진 말씀은 은혜시대에 적용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바로 안식일을 지키는 안식교도들의 실수이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율법시대에 하나님이 주신 계명이므로 은혜시대에는 전적으로 문제가 다르다. 그러나 안식교도들은 출애굽기 20장을 붙들고서 하나님이 안식일에 대해 분명히 말했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말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율법시대의 문제이지 은혜시대의 문제가 아니다.

 

또 하나의 예를 들면 시편에서 육신으로 난 우리의 아이들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구약 말씀이라는 것을 기억하라. 신약에서는 이것은 더 이상 사실이 아니다. 신약에서 육신으로 난 아이들이 축복이라고 말한 곳은 찾을 수 없다. 비록 육신으로 난 아이들이 저주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육신으로 난 아이들은 짐이요 공과라는 것을 감히 말할 수 있다. 오늘날 은혜시대에서 참된 축복은 영적인 자녀들이다. 이와 같이 구약에서 하나님은 그의 택한 백성들에게 그들로 번성하여 이 땅에서 그들의 경계를 넓힐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정반대이다. 오늘날 연단에 서서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했다고 가정해 보자.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우리가 그분을 경외하면 그분은 우리의 지경을 넓혀 주시고 모든 사람이 대지주가 될 것입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성경에 그런 약속이 있지만 이 약속은 은혜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 아래 있다. 신약시대에는 우리의 땅을 포기하여 그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야 한다고 말씀했다. 이것은 구약시대와 정반대이다.

 

비록 이 모든 것이 성경 말씀으로서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일지라도 구약시대의 말씀을 취하여 현시대에 적용해서는 안 된다. 카톨릭과 많은 개신교도들이 이런 점에서 잘못을 범하고 있다. 천주교에는 구약의 유대교로부터 온 것이 많이 있다. 신부들이 입는 옷과 예배의식은 모두 구약 원리에서 따온 것이다. 그것들이 분명히 성경에 나와 있지만, 현시대를 위한 것은 아니다. 성경을 설명하고 해석할 때 「이것이 성경 말씀이 아니냐 이것이 성경 말씀이라면 이것을 지켜야 한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반드시 시대를 구분해야 한다. 즉 말씀이 어느 시대에 속하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당신이 어떤 시대에 있지 않다면 그 시대를 위한 말씀은 당신과 아무 관계도 없다. 시대(경륜)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더 많이 알아보도록 하자.


Ⅸ. 말씀의 대상을 구분하는 데 주의를 기울임

 

성경을 해석할 때 말씀의 대상이 되는 사람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어떤 말씀은 유대인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에 이방인이나 교회와는 관계가 없고 어떤 말씀은 이방인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에 유대인이나 교회와는 관계가 없으며 어떤 말씀은 교회에 주신 것이므로 유대인이나 이방인과는 관계가 없다.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이방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고전 10:32). 성경에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대상이 적어도 세 종류 - 유대인, 이방인, 교회 - 가 있다. 구약에는 말씀의 대부분이 유대인들에게 하신 것이며, 신약에는 교회에 하신 말씀들이 많이 있으며, 또한 신약이든 구약이든 이방인들에게 하신 말씀들도 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이러한 차이를 구분하여 이 말씀의 대상 - 유대인, 이방인, 교회 - 을 알아내야 한다. 먼저, 말씀의 대상을 알아야 그 후에 합당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예를 들면, 어떤 성경학자들은 마태복음이 누구에게 쓰여졌는지에 대해 심한 논쟁을 벌인다. 마태복음이 교회에게 쓴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에게 쓴 것이라고 주장하는 주석가들도 많이 있다. 그들은 마태복음에 있는 말씀의 유대적 배경을 지적하여 주 예수님이 분명히 제단에 예물을 드리는 것을 언급했다고 말한다. 그들은 이것을, 유대인들을 위한 말씀이라고 말하는 근거로 삼는다. 주 예수님은 분명히 공회의 심판에 대해 말했다. 공회는 유대인들의 조직이다. 그들은 또한 거룩한 곳에 선 멸망의 가증한 것을 언급한 마태복음 24장을 지적한다. 그들에게 거룩한 곳은 분명히 유대인들에게 속한다. 또한 대환난을 만날 때 도망하는 일이 안식일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교회가 안식일을 지키겠는가? 이 말씀을 받은 사람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들이 유대인이 아니겠는가? 이 학자들은 마태복음이 유대인들에게 쓰여졌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 이와 같은 예들을 많이 지적해 낸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마태복음 전체가 더 이상 우리의 유산이 될 수 없으므로, 심각한 문제가 된다.

 

마태복음 전체를 조심스럽게 읽어보면 확실히 마태복음 5장에 있는 말씀은 유대적 배경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만 이 말씀은 유대인들에게 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왕국 백성들에게 하신 것이다. 왕국 백성들은 유대인 가운데 구원받은 사람들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의 믿는이도 포함한다. 왕국 백성들은 바로 교회이다. 왕국 백성들 가운데는 이전에 유대교에 있어서 유대적 분위기를 가진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주 예수님은 그 당시 산 위에서 말씀하실 때 이러한 배경과 관련된 것들을 사용하셔야 했다. 마태복음 24장과 25장에는 더 많은 논쟁이 있다. 이 부분을 조심스럽게 읽어보면 한 부분은 유대인들에게, 또 한 부분은 교회에, 또 한 부분은 이방인들에게 해당하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24장 1절부터 31절은 유대인들에게, 32절부터 25장 30절까지는 교회에, 31절부터 46절까지는 이방인들에게 주신 것이다. 성경을 연구할 때 한 가지 해석을 내리기 전에 말씀의 대상을 먼저 확인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해석하게 된다.


Ⅹ. 구약에서 예표로 분명하게 언급되지 않은 사람, 사건, 사물을 예표로 다루지 않고 예증으로 다룸

 

구약에는 많은 예표들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기업을 물려받는 아들이신 주 예수를 예표하는 이삭, 그리스도가 취하는 신부 - 교회 - 를 예표하는 리브가와 같은 이러한 것은 개인적인 사람을 예표로 사용했으며 우리의 구주이신 죽임당한 그리스도를 우리가 받아들일 때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구원을 의미하는 유월절과 같은 이러한 것은 사건을 예표로 사용한 것이다. 또 다른 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인데 이것은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어린양이나 놋뱀과 같이 사물을 예표로 사용한 것도 있다.

 

구약에는 많은 사람, 사건, 사물들이 예표로 사용되었지만 이것이 예표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에게 달린 것이 아니다. 우리는 신약에서 명확한 증거를 찾아야만 한다. 신약에서 그 사물, 사건, 사람을 예표로서 언급한 곳이 없으면 성급하게 이것이 예표라고 추측해서는 안 된다. 기껏해야 이러한 사람, 사건, 사물을 예증으로 빌려와서 신약에 있는 진리를 설명하는 데 사용할 수 있을 뿐이다. 어떤 것이 예표(Type)라고 말할 때 이것은 단순히 예증(illustration)이라고 말하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을 해석하는 열 가지 원칙을 간단하게 제시하고 지적했다. 이 원칙은 수백 년, 수천 년 동안 성경을 연구함으로 점차적으로 발전되어 온 것이다. 이것은 우유의 크림이나 벌꿀과도 같아서 매우 귀중한 것이다. 나는 우리 모두가 이것들을 분명하게 기억하기를 바란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도움과 제한이 될 것이다. 지금부터 모든 형제 자매들이 이 원칙을 성경 연구에 적용하기를 바란다. 이것을 적용한다면 성경에 대해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게 되고 더 뛰어나고 더 정확하고 더 완전한 이해를 하게 될 것이다.


위트니스 리
[성경을 해석하는 원칙, "성경 해석의 원리", 한국복음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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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십자가를 통한 사역 청지기 12.03.08.09:12 1004
55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 청지기 12.03.08.09:08 863
54 하나님의 건축을 위한 어린양의 일곱 눈 청지기 12.03.08.09:04 866
53 육체의 탄식―휴거되기 전 청지기 12.03.08.09:01 965
52 합일과 분열의 근거 청지기 12.03.08.08:57 938
51 교회들이 세워진 근거 청지기 12.03.08.08:55 862
50 어떻게 내면의 인도를 따르는가 청지기 12.03.07.16:33 810
49 모든 사람을 사랑함 청지기 12.03.07.16:24 931
48 성경 해석을 지배하는 원칙 청지기 12.03.07.16:22 839
47 하나님이 계심에 대한 체험과 토론 청지기 12.03.07.16:06 993
46 네 가지 소극적인 요인들을 주의하라 청지기 12.03.07.15:59 954
45 십자가에 못박힌 생활을 삶 청지기 12.03.07.15:52 1076
44 가정집회들과 이주와 전시간 사역자들 청지기 12.03.07.15:42 944
43 동료 믿는이들을 향한 우리의 태도 청지기 12.03.07.15:37 758
42 성도들을 진리 안으로 이끎 청지기 12.03.07.15:24 806
41 구속과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에 대한 이상 청지기 12.03.07.14:02 1169
40 사역의 하나에 대한 공과 청지기 12.03.06.12:48 776
39 하늘에 속한 이상―몸에 대한 이상 청지기 12.03.06.12:23 1174
38 하늘에 속한 이상―그리스도에 대한 이상 청지기 12.03.06.12:16 1448
37 복음을 위해 바울이 고난받고 은혜를 누림 청지기 12.03.06.11:47 2349
36 권위의 기도 청지기 12.03.06.11:42 1385
35 교회의 기도 사역 청지기 12.03.06.11:36 1345
34 주님의 사역자의 성격―진리의 절대성 청지기 12.03.05.15:43 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