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성한 말씀을 누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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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은 우리에게, 신성한 생명의 실제이신 그 영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이 장에서 우리는 요한복음에 있는 생명의 원칙 대(對) 선악의 원칙을 설명하는 네 가지의 사례를 살펴보겠다. 타락한 인간 속에는 항상, 『이것은 좋은가 나쁜가, 옳은가 틀린가, 예인가 아니오인가?』라는 질문이 있다. 주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사람들은 항상 좋은가 나쁜가, 옳은가 틀린가, 예인가 아니오인가를 그분께 질문했다.

 

영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함

 

요한복음 4장에는 사회에서 멸시받는 죄인인 여자의 사례가 있다. 그 여자와 말씀하시면서 주님은 그녀에게 생수가 필요함을 지적하셨다(10절). 생수는 삼일 하나님이며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 곧 생명 주는 영이 되신 그 그리스도이시다(고전15:45下). 이것이 그 여자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었다.

 

그 여자가 이 물을 주님께 구했을 때 주님은,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16절)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지혜롭고 자비로우셨다. 그분은 우리와 같지 않으시다. 복음을 전할 때 많은 경우에 우리는 지혜가 부족하다. 우리가 생수이신 주님에 대한 복음을 전할 때 죄인들이 복음을 받기 원한다고 대답할 경우 우리는 이렇게 질문한다. 『당신의 죄는 어떻게 합니까? 당신은 죄인인 것을 모릅니까?』

 

이것은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여 마음을 닫게 할지도 모른다. 주 예수님은 지혜로우셨다. 그분은 「죄」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셨다. 그 대신에 「남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셨다. 그분은 마치 이렇게 말씀하신 것 같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나는 죄에 대해서 말하기를 원치 않는다. 나는 네 남편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원한다. 너는 네 남편에 대해 문제가 있다.』 그 여자는 깊은 충격을 받았다. 남편에 관한 일은 그 여자의 참된 문제였다. 이 문제는 그 여자의 죄의 중심이었다.

 

여기에서 그 여자는 참을 말함으로써 주 예수님께 거짓말을 했다. 그 여자는,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17절)라고 말했다. 이 말이 거짓말인가 참인가는 당신의 해석에 달려 있다. 주님은 그녀를 정죄하지 않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17절-18절).

 

그 여자는 죄를 자백하지 않았으나 주 예수님은 그 여자의 죄에 대해 철저히 자백해 주셨다. 그 때 그 여자는 영리하게도 남편에 관한 대화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에 관한 종교적인 질문으로 화제를 바꾸었다. 그 여자는,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20절)라고 말했다.

 

그 여자의 질문은 사람이 산에서 예배하는가 또는 예루살렘에서 예배하는가와 관계된 것이었다. 그것은 예 아니오, 옳은가 그른가의 질문이었다. 그러나 주 예수님은 예 아니오 또는 옳다 그르다로 대답하지 않으셨다. 주님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21절, 23절)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우리는 원칙을 볼 수 있다. 그 당시에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에 관한 많은 말들이 있었다. 이것은 선하고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주제이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교회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함에 대해 많은 말을 할지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형식으로 또는 저런 형식으로, 이런 방법으로 또는 저런 방법으로, 이 장소에서 또는 저 장소에서 하나님께 예배해야 한다고 말할지 모른다. 이것들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에 대한 다른 의견과 생각과 관념과 이해들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함의 문제로 붙잡혀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외적인 방법에 있지 않고 전적으로 우리 영 안의 문제라는 것을 소홀히 했고 잊은 것 같다. 우리가 예배하는 분은 외적인 분이 아니다. 그분은 영이시다. 마치 책상의 본성과 본질이 나무이듯이 그분의 본성과 본질은 영이시다. 우리가 예배하는 분은 일정한 장소나 일정한 형식으로 예배하기를 요구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본질상으로 그분은 영이시다. 우리는 나무토막으로 전기를 접촉할 수 없다. 전기를 접촉해서 전기를 흐르게 하려면 우리는 금속을 사용해야 한다. 이와같이 오직 사람의 영만이 영이신 이 하나님을 접촉할 수 있다(24절). 방법에 대한 말은 무의미하다.

 

유대인들은 모세의 책에서 하나님께 예배함에 관한 것들을 배웠고 사마리아인들도 같은 책에서 하나님께 예배함에 관해 배웠다. 역사는, 사마리아인들에게 모세 오경이 있었으며 그들도 유대인들처럼 구약의 그 부분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께 예배했음을 말해 준다. 두 민족에게 같은 성경 말씀이 있었으나 해석은 달랐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의 중심부인 시온 산에서 하나님께 예배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사마리아에서 예배해야 한다고 말했다. 두 장소에서 두 사람에게 두 관념이 있었다. 한 사람은 그들의 관념이 성경에 따른 것이라고 말했고 다른 사람은 그들의 관념이 더 성경에 따른 것이라고 말했다.

 

죄 많고 멸시받고 영리한 이 여자는 예배에 관한 질문을 주 예수님께 가져왔다. 그 여자는 누가 옳고 누가 틀렸는가를 알고 싶었다. 그 여자에게는 단지 하나님께 예배함에 관한 지식밖에 없었다. 하나님께 예배함에 관한 지식 자체는 의미가 없다. 만일 당신이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함을 관심한다면 당신은 우리가 예배하는 그 하나님이 본질상 영이심을 알아야 한다. 예배는 규례와 지식과 장소와 방법에 달려 있지 않다. 그것은 당신이 예배할 때 자신의 어떤 부분-당신의 영, 혼, 몸-을 사용하는가에 달려 있다.

 

예루살렘을 방문할 때 나는 회교도들이 땅에 엎드려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을 보았다. 나는 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여기서 뭘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이것이 하나님의 눈에 끔찍한 것임을 모릅니까?』 그들은 예배하는 장소가 거룩함을 알기 때문에 신을 벗고 특별하고 비싼 슬리퍼로 갈아 신는다. 그런 다음 그들은 줄을 맞추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몇 번씩 절을 한다. 그들은 육신적인 몸을 사용하여 하나님께 예배한다.

 

그러나 주 예수님은, 이 곳이나 저 곳에서 예배하지 말고 또한 생각이나 몸 안에서 예배하지 말고 우리의 영 안에서 예배하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 안에서... 예배할찌니라』(요4:24, 원문 참조), 우리는 우리의 영을 사용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함에 대해 많은 말을 할 수 있지만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함이 오직 우리의 영 안에서만 효력이 있다는 사실을 잊을 수 있다. 형식이나 「어떻게」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 우리는 하나님에 관한 모든 것이 반드시 우리의 영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영으로 돌이키라. 이것이 우리 가운데서 새로와져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함에 대해 말하지 말라. 당신의 영으로 돌이키라.』고 말해야 한다. 문제는 사마리아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니며 우리의 영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섬기는 그분은 영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영 안에서, 그리고 우리의 영으로 그분을 접촉할 수 있다.


죄가 없는 유일한 분

 

요한복음 8장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주님께 데려왔다. 그들은 율법을 알았으면 주님을 시험하여 이렇게 물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5절).

 

주 예수님은 급히 대답하지 않으셨다. 이번에도 그분은 지혜로우셨다.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일을 급히 하지 않는다. 그는 천천히 행하기를 배운 사람이다. 주님이 「천천히」 행하시는 방법은 몸을 굽혀서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는 것이었다(6절). 이런 주님의 행동은 서기관들에게 겸손의 공과를 가르쳐 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교만하게 똑바로 서 있어서는 안 되었었다.

 

어떤 사람은 교만하게, 『나는 바리새인이며 율법을 아는 사람이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은, 『나는 서기관으로서 율법 박사이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주 예수님은 몸을 굽혀서 땅에 무언가를 쓰셨다. 성경 학도들은 주님이 쓰신 말씀을 추측할 뿐이다. 그분은 아마,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누구냐』라고 쓰셨을 것이다. 그들이 계속 재촉할 때 주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7절)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그들의 양심을 만졌다.

 

요한복음 4장에서 주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자에게 대답하실 때, 그분은 자신이 성육신하신 그 하나님이며 그녀가 필요로 하는 것과 주님이 그녀에게 주시고자 하는 생수는 그 영임을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8장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주신 매우 간단한 주님의 대답은, 이 우주 안에 죄 없는 분은 오직 한 분임을 나타낸다. 오직 예수님만이 죄가 없으시다.

 

주님의 대답은 지혜로왔으며 오직 그분만이 그런 죄 있는 여자를 정죄할 자격이 있음을 나타낸 것이었다. 그 외에는 아무도, 심지어 스스로 의롭다 하는 바리새인들이라도 감히 죄가 없다고 말하지 못했다. 이 말씀을 듣고 그들은 어른으로 시작하여 한 명 한 명 나갔다(9절).

 

이 상황에서 그 여자를 돌로 치는가 안 치는가는 문제가 아니었다. 누구에게 자격이 있느냐가 문제였다. 오직 주 예수님 자신만이 죄 없는 분이시다. 오늘날 우리는 성경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 모른다. 또한 우리는 사람을 정죄하는 데에 사용될 수 있는 영적인 규례를 알지 모른다. 그러나 사실은 아무에게도 사람을 정죄할 자격이 없다. 당신이 다른 사람들을 정죄할 때 당신 또한 죄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누가 자신에게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자매들은 항상 형제들보다 섬세하다. 섬세한 사람은 거친 사람을 정죄한다. 아마 남편들은 아내들만큼 많이 남을 정죄하지 않을 것이다 남편들은 아내들로부터 섬세한 정죄를 당한다. 아내는 넥타이에 묻은 때로 인해 남편을 정죄할 것이다. 그러나 아내인 당신에게는 때가 없는가?

 

자신을 정죄하는 데에 익숙한 사람은 거의 없다. 우리 모두는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데에 익숙하다. 당신은 자신의 잘못보다 남의 잘못을 두 배로 보기가 쉽다. 과거 여러 해 동안 당신은 얼마나 많은 날을 비난하며 보냈는가? 만일 당신에게 남을 비난하지 않은 하루가 있었다면 당신은 특별한 사람이다. 당신은 어머니나 아버지나 만나는 모든 사람을 비난했다. 당신은 친척들과 심지어 장로들을 비난했을 것이다. 당신이 열 다섯 살이건 오십 살이건 남의 것을 본 것 중에서 비난하지 않은 것이 있었는가? 당신은 보는 것마다 비난했을 것이다.

 

교회생활 안에서 우리는 매일 서로 만난다. 만일 남을 만나지 않고 숨을 수가 있다면 나는 그렇게 하겠다. 남을 비난하는 데서 자신을 구원하는 가장 좋은 길은 많은 것을 알지 않는 것이다. 여러 해 동안 나는 말씀을 전하기 위해 여행하며 사람의 집에 손님으로 앉아 있었다. 가끔 나는 그 사람의 집에 무엇이 있는가를 보고자 하는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공과를 배웠기 때문이다. 겉사람은 보기를 원하지만 속사람은, 『그러지 마라. 그것은 허락되지 않은 것이다. 너에게는 볼 권리가 없다. 만일 본다면 너는 철저한 자백을 해야 할 것이다.』

 

한 장소를 보지 못한 후 나는 눈을 돌려서 다른 장소를 보라는 유혹을 받았다. 나는 즉시 멈추었다. 사람의 비밀을 아는 것은 죄이다.

 

우리가 남을 정죄하고 비난하려 할 때마다 우리는 자신이 죄 없는 자가 아님을 상기해야 한다. 오히려 우리는 죄 있는 사람이며 또한 죄 없는 분이 필요하다. 그분은 우리의 구주이시다. 그분은 죄 없는 유일한 분이며 우리는 그분이 필요하다. 이것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자연히 비난을 멈출 것이다. 누가 옳고 누가 틀렸는가를 묻지 말라. 절대적으로 옳은 분은 오직 한 분뿐이다. 우리들 중 아무도 자신이 옳다고 말할 권리가 없다. 우리는 틀린 사람이며 옳은 사람이 필요하다.

 

만일 교회 생활 안에 비난이 없다면 사망의 구십 퍼센트는 사라질 것이다. 교회 생활 안에는 항상 어떤 사망이 흐르고 있다. 우리는 비난을 통하여 남을 죽인다. 심지어 우리의 자녀들 중 몇몇은 집회에서 말하는 사람을 어떻게 비난하는지를 알고 있으며 장로를 어떻게 비난하는지를 알고 있다. 만일 우리가 교회 생활 안에 있는 비난을 없앨 수 있다면 사망의 구십 퍼센트는 생명에 의해 삼켜질 것이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영이시며, 요한복음 8장에서 죄가 없는 분이신 그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체현되시고 우리에게 생명으로 오신 삼일 하나님이다. 그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생명의 문제이며 생명이신 분은 오직 한 분,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분은 체현되신 하나님이시며 죄가 없으신 바로 그분이다. 그분이 우리의 필요이시다.

 

그분은 바로 하나님이시고 생명이시며 오늘날 그분은 또한 그 영이시다. 우리는 그분이 필요하다. 만일 당신이 그분께 어떤 질문을 하면 그분은 「그렇다」 또는 「아니다」라고 대답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분은 항상 당신이 결코 옳을 수 없음을 상기시키실 것이다. 그분의 눈으로 볼 때 우리는 모든 것에서 틀린 사람이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식함

 

요한복음 9장에는 나면서부터 소경 된 자의 사례가 있다. 제자들은 유대인들 가운데서 어느 정도의 신학을 배웠다. 그들의 신학에 의하면 만일 어떤 사람이 날 때부터 소경이라면 반드시 죄를 지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주님께 물었다.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2절).

 

예수님은,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3절)고 대답하셨다. 이 사례는 작은 것이지만 그 원칙은 매우 크다.

 

우리는 눈 멀은 상황을 만날 때 그 이유를 캐기를 좋아한다. 우리는 그것이 우리의 죄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의 실수로 인한 것인지를 생각한다. 거의 매번 우리는 그것이 누구의 실수로 인한 것인지를 발견할 수 없다. 우리는 그것이 우리 자신이나 부모나 아내 때문인지 아닌지를 모른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권자이심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그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나는 것을 허락하셨다. 그것은 자기의 죄나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소경 됨을 사용하여 그분의 능하신 일을 나타내시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 안에 보내셨다.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을 위해 어떤 일을 행할 수 있도록 그는 소경으로 태어날 필요가 있었다. 만일 소경 된 자가 한 명도 없었다면 그런 소경 됨을 치료하심으로써 주 예수께서 나타나실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이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죄 있는 영리한 여자는 하나님께 예배함에 대한 질문을 했다. 8장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종교 안에 있는 율법과 규례에 관한 질문을 했다. 이제 9장에서 제자들은 신학적인 선한 질문을 했다. 사람의 소경 됨이 누구의 죄로 인함인가의 질문은 신학적인 질문이다. 그러나 신학은 이 질문에 대답하기에 충분치 않다.

 

별로 좋지 않은 많은 일들이 우리에게 발생한다. 우리의 인식과 분석에 의하면 이런 일이 발생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이런 일은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 발생했다. 때때로, 결혼한 청년들은 삼 일 후에 그들의 결정을 후회한다. 어떤 사람들은 내게 와서 큰 실수를 했다고 말한다. 그들은 이 문제에 있어서 주의 깊게 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으나 그 권면의 말을 받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회개했다. 회개한 것은 좋지만 그들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들의 여생에 고난을 당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신학적으로, 『이것은 누구의 실수입니까?』라고 물을지 모른다. 우리는 그것이 누구의 잘못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실수가 있었다. 마치 이 실수에 대한 원인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깊은 속에서 나는 하나님의 주권이 그 원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나님은 당신이 엉뚱한 사람과 결혼했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주권자이시다. 어떤 의미에서 올바른 결혼은 많지 않다. 결혼하고 나서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에 누구의 결혼이 여전히 올바르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주권자이심을 인정해야 한다. 모든 결혼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 그것은 당신의 실수도 아니고 배우자의 실수도 아니다. 당신이 결혼한 것은 하나님의 주권이다. 역사와 전기(傳記)를 읽어볼 때 우리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결혼을 통해 가장 큰 도움을 얻었음을 배울 수 있다. 당신이 하나님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 아무도 당신의 아내만큼 당신을 도울 수 없다. 당신의 사랑스런 아내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라. 또한 많은 아내들도 그들의 남편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그들이 남편에게서 받는 모든 고난에는 그들에게 유익한 어떤 것이 있다. 다른 것에 의해서 그들은 결코 그런 유익을 얻을 수 없다. 우리의 결혼은 자신의 선택에 있지 않다. 배우자를 선택하는 데 있어서 아무리 많은 훈련을 해도 우리는 실수할 수 있다. 우리가 조심하면 할수록 더 심각한 실수를 할지 모른다.

 

모든 부모는 착한 자녀를 원한다. 그러나 경험 있는 부모는 자기 자녀가 최고라고 감히 말하지 않는다. 자녀를 기를 때 경험 있는 부모는 자녀에게 복종된다. 우리의 자녀가 착한가 착하지 않은가는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 만일 당신에게 착한 자녀가 있다면 하나님을 경배해야 한다. 만일 당신에게 착하지 않은 자녀가 있다면 더욱 하나님을 경배해야 한다. 왜냐하면 당신은 그들을 통해 훨씬 더 많은 유익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첫째 아이가 박사 학위를 받고 둘째 아이는 의사가 되고 세째 아이는 정부의 고위 관리가 되기를 원할지 모른다. 우리는 놀라운 자녀가 있는 놀라운 가정을 원한다. 우리는, 『이것을 보라!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가?』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실지적으로 첫째 아이는 지능이 매우 낮고 둘째는 불구자이고 세째는 거역하는 아이일지도 모른다. 그들 중 아무도 착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자주 이런 일이 생긴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다. 우리가 어떤 환경이나 어떤 상황에 있든지 그것은 우리 위에 있는 하나님의 긍휼을 보여 주고 우리에게 더 많은 은혜를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주권이다.

 

요한복음 9장에 있는 그 사람은 외부적인 어떤 원인이 없이 날 때부터 소경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날 때부터 소경인 사람에게 하나님이 시력을 줄 수 있다는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한 최상의 기회를 예수 그리스도께 제공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께 속한 일이었다.

 

우리는 어떤 일에 대해서 자신의 신학이나 지식에 따라 원인을 분석하며 말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통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이 뛰어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당신이 더 나은 직업을 구하든지 현재의 직업을 잃든지 모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 나는 많은 성도들이 즐거운 교회 생활을 하기 바라지만 교회 생활이 즐거울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 그러나 어떤 결과가 있든지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확신할 수 있다. 하나님의 주권은 항상 우리에게 그분의 자비와 은혜와 평강과 보호하심을 가져다 준다. 우리 모두는 「예」와 「아니오」에 따르지 않고 주권자이신 하나님에 따라 상황을 분석하기를 배워야 한다.


부활이신 분을 소유함

 

요한복음 11장에는 특별하고 흥미있는, 나사로의 사례가 있다. 나사로가 심한 병이 들었을 때 그의 두 누이인 마르다와 마리아는 이 소식을 주 예수님께 알렸다. 일반적으로, 그 소식을 듣고 예수님은 즉시 병든 자를 보살피러 가셨어야 했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분은 이틀을 더 지연시키셨다(6절).

 

이틀 후에 아마 제자들은 실망했을 것이다. 그들은, 『왜 나사로를 위해 일을 하지 않으셨읍니까?』라고 물었을 것이다. 그들이 실망한 후에 주 예수님은 나사로를 보러 가자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베다니에 도착하셨을 때 마르다가 그분을 만나러 나왔다. 마르다는,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21절)라고 말했다. 주님은 그분이 부활로 거기에 계셨기 때문에 그분이 늦게 오시거나 제 때에 오시는 것은 의미가 없음을 보여 주셨다(25절). 그분은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부활은 시기에 달려 있지 않다. 내가 일찍 오건 늦게 오건 나는 부활이다. 너희들에게 내가 있는 한 부활이 있다. 나를 꾸짖지 말라. 나는 너희들에게 보여줄 것이 있어서 일부러 늦게 왔다. 시기에 대해 염려하지 말라. 네 오라비는 부활할 것이다.』

 

그러나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24절)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부활을 어떤 시기에 제한시켰다. 주님은,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6절)고 물으셨다. 마르다는,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27절)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전혀 주님의 의미하시는 바에 따르지 않고 자기의 종교적이고 신학적인 관념에 따라 대답했다. 이런 면에서 그녀는 전형적인 우리의 대표이다. 부활은 늦거나 제 때에 오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그분이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이다 시기와 주변과 환경과 상황을 잊으라. 이 모든 것은 의미가 없다. 오직 한 가지만 의미가 있다. 그것은 그분의 임재, 곧 지금 당신에게 그분이 계신가 안 계신가이다.

 

요한복음 4장의 사례는 하나님께 예배함이 이런 방법이나 저런 방법, 또는 이곳이나 저곳의 문제가 아님을 보여 준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영 안에 있는가의 문제이다. 8장에 있는 사례는, 종교의 규례에 대한 지식이 아무 의미가 없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다른 사람처럼 죄가 있음을 알아야 하며 우리에게는 죄 없는 분이신 그리스도가 필요함을 기억해야 한다.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우리에게 죄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남을 정죄할 권리, 지위, 자격이 없다. 오히려 우리에게 죄 없는 분이 필요하다. 이 분은 살아 계신 예수님이다. 살아 계신 이 예수님은 오늘날 우리 영 안에 계신 그 영이시다. 남을 비난하려 할 때 당신의 영으로 돌이키라. 당신의 영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비난하지 말라. 너도 그 사람과 동일하다. 그녀에게 죄가 있고 너 또한 죄가 있다. 오히려 너에게는 죄에서 너를 구출해 줄 분이 필요하다. 이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죄 없는 유일한 분이다.』

 

9장에 있는 사례는,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 우리에게 예수님이 필요함을 보여 준다. 오늘날 이 예수님은 생명 주는 영이시다. 어떤 상황에 대한 원인을 캐려고 할 때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주권이 그 원인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주권자이시다. 하나님은 당신이 그 상황 안에 있기를 원하셨다. 당신은 그 원인 때문에 괴로와할 필요가 없다. 원인을 캐려고 하는 것은 다만 신학에 속한 것이다.

 

4장의 사례는 하나님께 예배함이 장소의 문제가 아님을 보여 주는 반면에 11장의 사례는 부활이 시기의 문제가 아님을 계시한다. 그것은 살아계신 인격에 속한 것이다. 우리에게 그분이 있는 한 우리에게는 부활이 있다.

 

만일 즐거운 교회 생활을 기대한다면 우리는 이 네 가지의 사례로부터 배워야 한다. 장소와 규례와 원인과 시기는 잊어 버리라. 남들이 옳건 틀리건, 심지어 심각하게 틀렸어도 비난하기를 잊으라. 만일 그들의 잘못을 본다면 당신 또한 잘못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이 이렇게 잘못되었다면 당신은 저렇게 잘못되었을 것이다. 당신은 죄 없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 다음 당신은 자신을 죄에서 구출해 줄, 생명 주는 영이신 그리스도가 필요함을 기억해야 한다. 만일 즐거운 교회 생활을 원한다면 우리는 마땅히 이 모든 공과들을 배워야 한다.


선악이 아니라 생명임

 

1943년에 나는 중병에 걸려서 2년 반 동안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그 기간 동안 나는 집회와 가족과 가정과 일로부터 분리되어 있었다. 매우 자주 나는 주님과 단 둘이 있었다. 주님께서 창세기 2장에 있는 두 나무를 보여 주신 것은 그 때였다.

 

첫번째 나무는 생명나무이다. 생명은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이며 생명나무는 한 인격이신 하나님, 그리스도, 생명 주는 영을 가리킨다. 또 하나의 나무는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이다. 그 2년 반 내내 나는 내 일과 사역의 많은 부분에서 생명나무를 적게 따르고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를 따랐음을 회개했다. 나는 그 기간 동안 많은 비춤을 받았다.

 

1942년에 상해 교회에는 워치만니 형제님을 반대하는 혼란이 있었다. 그 때 니 형제님은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이 일과 일본 침략군의 핍박으로 인해 교회는 집회를 중단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거기에 있었다. 그들은 교회를 떠나지 않았지만 거기에 교회 생활은 없었다. 동시에 니 형제님의 사역은 중단되었다. 그는 4년 동안 사역을 할 수 없었다.

 

1946년 여름에 남경과 상해에 있는 교회는 다시 소수가 모이기 시작했으며 나는 그들에게 초청받았다. 몇몇 형제들이 내게 와서 같은 질문을 했다. 『형제님은 니 형제님이 틀리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들은 「예」나 「아니오」의 대답을 원했다. 그것은 나에게 적절한 기회였다. 나는 얼마 전에 생명나무의 어떠함을 보고 내 과거의 대부분이 선과 악의 지식나무 안에 있었으며 많은 일을 옳고 그름, 또는 예 아니오에 포함시켰음을 회개했었다. 그러므로 나는 감히 예 아니오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나는 감히 지식나무에 속한 것을 사용할 수 없었다.

 

내게는 그들의 질문에 대한 오직 하나의 대답이 있었다. 나는, 『여러분이 니 형제님을 틀렸다고 생각하기 전의 여러분의 영적 생활은 어떠했읍니까?』라고 물었다. 질문했던 자들은 모두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고 대답했다. 나는 또다시, 『니 형제님이 틀렸다고 생각하는 위치에 있은 후에 여러분의 영적 생활은 어떠했읍니까?』라고 물었다. 몇몇 사람은 울면서 그들의 영적 생활이 혼돈 가운데 있었다고 말했다.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의 옳고 그름에 주의하는 것을 주 예수님이 원치 않으신다는 강한 표시입니다. 당신이 이것을 만질 때 당신은 사망을 만집니다. 심지어 당신이 옳더라도 당신은 죽습니다. 당신이 이런 것을 남에게 말할 때 그들 또한 죽습니다. 그럴 때 교회 생활 안에는 사망이 강하게 퍼집니다.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과 사망의 문제입니다. 당신이 사실을 퍼뜨리든 헛소문을 퍼뜨리든 문제가 안 됩니다. 당신을 죽이는 것은 또한 다른 모든 사람을 죽입니다.』

 

나는 그들에게 요한복음에 있는 네 사례를 지적해 주었다. 나는, 주님이 땅에 계실 때 항상 질문들이 그분을 따라다녔으며 사람들은 그분에게서 예 아니오, 옳고 그름, 선과 악의 대답을 원했음을 그들에게 보여 주었다. 주 예수님은 결코 이렇게 대답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분은 항상 사람들을 생명으로 향하게 하셨다. 그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고 선과 악의 문제도 아니며 예와 아니오의 문제도 아니다. 그것은 생명의 문제이다. 우리는 살아나야 하며 남을 살리고 온 교회를 살려야 한다. 우리는 자신을 죽이고 성도들을 죽이고 교회를 죽이는 어떤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필요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체현되셨고 죽음과 부활을 거쳐 생명 주는 영이 되신 그 삼일 하나님이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함이나 규례들과 같은 모든 종교적인 것들을 잊어 버리고 그분을 우리의 중심과 목표와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우리는 생명과 부활과 하나님과 그 영과 우리에게 모든 신성한 것들의 실제가 되시는 한 분의 이 살아계신 인격 외에는 아무 것도 주의하지 않는다. 만일 그분을 택한다면 우리는 항상 살아 있을 것이며 남을 살릴 것이며 온 교회 생활을 살릴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필요는 살아 계신 이 인격을 추구하는 것이다.


위트니스 리
[영과 생명, "선악이 아니라 생명임", 한국복음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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