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성한 말씀을 누려요. ^^

  • 목록
  • 아래로
  • 위로
  • 0
  • 청지기
  • 조회 수 94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

 

갈라디아서 2장 20절은 우리가 잘 아는 성경 구절이다. 오늘 오후 우리는 더 자세히 보기로 한다.

 

어제 여기서 우리는 이기는 생명이 무엇인가를 보았다. 우리는 이기는 생명이 그리스도이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임을 안다. 이제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해서 이 생명 안으로 들어가는가에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이 되고자 하고 그분은 우리를 이기게 할 수 있다. 이것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명으로 얻을 수 있는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거하게 하여 그분의 생명을 살아 나타낼 수 있는가? 우리가 예수께서 구주라는 복음을 들은 것은 매우 좋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그분을 구주로 얻는가? 우리가 십자가의 구원을 아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십자가의 구원과 연결되는가?

 

그러므로 오늘 오후에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어떻게 해야 그리스도가 우리 생명이고 우리를 대신해 우리 안에 사시는가이다. 그러므로 오늘 오후 우리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보기로 한다.

 

이 성경 구절에 관하여 우리는 시작이나 끝부분에서부터 말하지 않고 중간에서부터 말하겠다. 보라, 이 구절에 매우 좋은 한 마디가 있다. 이제는 내가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말한다. 『내가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이 말의 의미는 바로 이김이다. 이 말은 몇 일 동안 우리가 말해 온 이기는 생명이다. 이기는 생명은 다름이 아니라 첫째는 「내가 아니요」, 둘째는 「오직 그리스도」이다. 이기는 생명은 바로 이것이다. 당신이 일단 「내가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일 때, 「내가 아니요」에 「오직 그리스도」가 더해질 때 곧 이기게 되고 모든 어려움이 사라진다.

 

어제 우리는 이기는 생명이 곧 내가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임을 보았다. 그러나 오늘 한 가지 문제가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내가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에 이를 수 있는가이다. 우리는 어떻게 이 생명에 이를 수 있는가? 우리는 어떤 길로 가야 내가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자세히 읽어야 한다. 왜냐하면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라는 말씀이 중간 부분에 있기 때문이다. 그 앞뒤에 각각 한 마디씩이 있다. 그러므로 바울이 어느 시점에서 어느 단계에까지 이른 후에 내가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라고 말했는지를 보아야 한다. 우리가 이것을 본다면 그 길로 감으로써 우리도 내가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라고 말할 수 있기 바란다. 그러므로 바울이 거친 것을 우리도 거쳐야 한다. 바울이 사용한 방법이 우리가 사용할 방법이고 그가 걸은 길이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이다.


어떻게 해야 「내가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일 수 있는가

 

이제 우리는 어떻게 내가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가 될 수 있는지를 보겠다. 우리는 첫 마디부터 읽어 보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바울은 어떻게 했기에 내가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단계에 이르렀는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라는 말씀은 우리가 잘 알고 있다. 「내가 아니요」라는 말은 내가 없어졌다는 것이고 십자가에서 내가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내가 아니요』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우리가 함께 죽었다는 진리는 우리 가운데서 오늘 오후에 처음 들은 것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벌써부터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바 십자가에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힌 교리가 우리 몸에서 효력을 발휘하는가?

 

육(陸) 형제님에게 묻겠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교리를 안 지 몇 년이나 되었는가? 육 형제는 십여 년이 되었다고 답했다. 효력이 있는가 없는가? 솔직히 말해 달라. 이것이 당신의 몸에서 얼마나 효력을 발휘했는가? 육 형제는 많지 않다고 말했다. 계(季) 형제, 당신이 알고 있는 십자가의 교리가 당신을 얼마나 인도했는가를 간증해 보라. 효력이 있는가? 바울과 같은 능력이 있는가? 계 형제는 이 이틀 동안에 커졌다고 말했다. 내가 여러분에게 말해 주겠다. 십자가에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힌 교리를 안 지 십여 년이 되었지만 내 몸에서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물론 효력이 있긴 있지만 많지 않다. 우리는 바울과 같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말한 다음 뒤이어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라고 말하지 못한다. 그 교리가 우리 몸에서 별 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 것 같다.

 

그러므로 오늘 오후 나는 다시 십자가의 교리를 전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런 일을 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이 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이 말씀이 우리 몸에서 무엇을 이루기 원하는가를 보아야 한다. 우리가 어떻게 한 다음에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할 수 있는가?

 

형제 자매들이여, 우리가 다 알듯이 십자가에 주님이 못 박혀 죽으심은 우리가 못 박은 것이 아니요 우리가 그곳에서 죽은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의 죽음 안에 포함시켜 죽게 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다 아는 바이다.

 

그러나 나는 여러 분에게 한 가지 질문하겠다. 하나님이 우리를 못 박혀 죽게 한 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어떠한 절차를 거치고 어떤 일을 거쳐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는가? 과거 수년 동안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것을 보았지만 우리의 책임이 무엇인지를 보지 않았다. 우리는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못 박으셨는가를 거듭 보았지만 우리 자신의 못 박힘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를 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오늘 오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에 대해 나의 책임이 무엇인가를 보기로 한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를 받아들임

 

하나님은 왜 그리스도를 못 박았는가? 오늘 오후 나는 말씀을 전하려는 계획이 없고 여러분과 대화를 갖겠다. 이것은 우리 모든 사람의 일이지 나만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 모든 사람은 하나님이 왜 나를 주 예수와 함께 못 박았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한 가지 예를 들려주겠다. 한 강도가 법관의 판결을 받을 때 법관은 그의 죄가 무겁지 않으므로 10 년의 징역을 선고한다. 또 어떤 강도에 대해서는 법관이 총살을 선고한다. 당신은 왜 그 사람을 총살하는지 아는가? 왜 한 사람은 십 년 징역이고 또 한 사람은 총살인가?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십 년 징역을 선고받은 강도에 대해서는 법관과 국가가 아직도 소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좋은 국민이 되기를 바라기 때문에 십년 동안 가둔 후에 다시 풀어 주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강도에 대해서는 국가가 소망을 갖고 있지 않고 그의 죄가 너무 무거우며 국가에 대해 그가 조금도 쓸모가 없기 때문에 그를 총살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 대해 어떻게 보고 계시는가? 하나님은 우리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왜 그러셨는가? 내가 솔직히 말하지만, 이 말은 그리 듣기 좋지 않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다. 하나님은 당신에 대해 조금도 소망을 갖지 않으시고 소망이 없으시다. 하나님은 당신을 볼 때 당신에 대해 전혀 방법이 없고 당신은 조금도 좋아질 방법이 없다. 당신의 육신은 극도로 패괴하여 참으로 방법이 없고 오직 죽을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신다.

 

주 예수의 역사는 당신의 육신을 변케 할 수 없고, 하나님의 능력도, 성령도 당신의 육신을 변케 못한다. 당신이 성경을 읽고 기도하여도 당신의 육신을 변케 할 수 없다. 육신으로 난 것은 육신이요 영원히 변하기를 바랄 수 없으며 변할 수도 없다. 하나님은 당신의 육신을 죽음 외에는 얻을 것이 없는 것으로 보신다. 하나님이 당신에 대해 소망이 없기 때문에 당신과 나를 그리스도 안에 포함시켜 못 박아 죽게 하셨다. 당신은 죽는 것 외에 달리 소망이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모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에게 요구하시는 첫번째 일이 바로 침례이다. 침례는 하나님이 그에 대해 절망하셨기에 못 박아 죽게 했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침례는 또한 당신이 나는 죽어 마땅한 자이므로 나를 들어 장사하라고 남에게 부탁하는 것이다. 당신은 보았는가? 침례는 바로 우리가 죽었다는 것을 하나님이 선포하고 또한 우리가 시인하는 것이다. 침례는 곧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에 우리가 아멘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당신은 죽어 마땅하다고 말할 때 당신이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나를 장사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하여 소망을 갖지 않고 나 자신에게는 조금도 소망이 없기에 나는 죽는 수밖에 없다. 오늘 나는 죽음의 위치에 서 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침례받을 때 행한 것을 다 잊어 버렸다. 많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에 대한 평가가 무엇인지를 잊어 버렸다. 하나님의 평가는 무엇인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곧 죽음이다. 우리는 다만 죽기에 합당하다. 우리는 죽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다. 당신은 고치려 해도 고칠 길이 없고 때워도 때워지지 않는다. 당신은 진보하려고 해도 진보할 수 없으며 개선하려 해도 할 수 없다. 당신은 죽음 외에 별다른 용도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당신을 주 예수의 죽음 안에 포함시켰다. 그분이 우리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곧 우리에 대한 일종의 평가의 표시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당신과 나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임을 기억하라. 하나님은 이런 표시로서 당신은 조금도 소망이 없고 오직 죽기에 합당하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이것을 인정하는가를 묻겠다. 우리 자신에 대해 우리도 모순적인 생각을 가질 때가 있다. 한면에서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한다. 이 말을 우리는 십여 년 동안 말해 왔고 지금도 말하고 있다. 또 한면에서 우리는 자신에 대해 아직도 소망에 차 있다. 우리는 자신이 할 수 없다고 느끼지만 또 한면에서 자신이 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우리가 약하고 실패했는데도 이길 수 있기를 바란다.

 

나는 이런 한 폭의 그림을 본 적이 있다. 남편이 죽은 한 여인이 남편의 관을 자기 집 문 앞에 30여 년간 두었다. 그녀는 묻기를 꺼려했다. 그녀는 지금 남편은 자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부활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 자신에 대하여 우리도 이렇게 바라고 있다. 우리는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몸임을 믿고 자신이 죄 가운데서 죽은 자임을 믿지만 또한 스스로 아직도 호흡할 수 있고 아마 아직도 쓸모가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말하기를 좋아한다. 『이번에는 내 결심이 굳세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했다. 다음에 굳세게 결심을 하면 이길 수 있다. 이번에는 깨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했다. 다음에 잘 깨어 있으면 설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는 내가 거절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했다. 만일 다음에 내가 거절한다면 이길 수 있다. 이번에는 내 기도가 부족했기 때문에 실패했다. 다음에 기도를 많이 하면 이길 수 있다.』

 

당신은 이것을 보았는가? 하나님이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 너는 죽은 자라고 말씀하셨지만 당신은 당신이 죽은 자임을 보지 못했고 인정하지도 않았다. 당신은 계속해서 이미 꺼진 불이라도 부채질하면 타오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계속 부채질을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을 체험하려면 우리 편에 영원히 없어서는 안 될 조건이 필요하다. 그것은 곧 하나님에게 『당신이 나에 대해 실망하셨기에 나도 나 자신에 대해 실망합니다. 당신이 나를 조금도 소망 없다고 보므로 나도 자신을 조금도 소망 없는 것으로 봅니다. 당신이 나를 마땅히 죽을 자로 보므로 나도 자신을 죽어 마땅한 자로 봅니다. 당신이 나를 약한 자로 보므로 나도 내가 약한 자임을 시인합니다. 당신은 내가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고 나도 내가 할 수 없음을 시인합니다.』

 

당신이 이 위치에 서 있는 것을 가리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신 일은 영원히 뒤집을 수 없다. 이미 완성된 것이다. 지금 당신 편에 일부의 책임이 있다. 그것은 곧 그 평가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에 대하여 절망하시고 나도 자신에 대하여 절망한다. 내가 당신에게 말하지만, 언제든지 당신이 자신에 대해 절망할 때 당신은 즉시 「내가 아니요」를 보게 될 것이다.

 

오늘 가장 어려운 점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눈을 감고 하나님이 그들에 대해 소망이 없고 요구가 없으시며 그들이 아무런 쓸모 없는 자임을 보지 못하는 데 있다. 육(陸) 형제, 당신에게 득죄할까 염려하지 않는다. 형제를 가리켜 모든 사람 앞에서 당신은 아무 쓸모 없다고 선포할 수 있다. 이것은 그래도 예의를 갖춰 말하는 것이다. 심하게 말한다면 『육 형제, 당신은 너무 악하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한다! 나는 형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다 너무 악하고 아무 쓸모가 없다. 죽음 외에 다른 용도가 없기 때문에 오직 죽는 것만이 길이다. 나라는 사람은 고쳐도 선하게 될 수 없고 아무런 소망이 없다. 너무 악하기 때문에 오직 죽기에 합당하다. 이것이 하나님의 관점이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이것 외에 다른 관점을 갖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많은 관점들을 갖고 있다. 우리는 자신에 대해 소망을 가득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 오후 우리는 한 걸음 더 나가서 실행 방면에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할 수 있는가를 보기로 한다. 그렇다. 하나님은 우리에 대해 절망하셨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는 하나님에게 우리도 자신에 대해 절망했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말하기로 하자. 우리는 잠시 갈라디아서 2장을 한 쪽에 놓고 필요할 때 다시 보기로 한다. 이제 누가복음 18장 18절부터 21절까지를 보자.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의 원칙

 

나는 이 단락의 성경 말씀을 아주 귀히 여긴다. 이 단락의 성경 말씀은 이김의 첫째 조건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보여 준다. 여러분은 인내로 나와 함께 이 단락의 말씀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보기 바란다. 여기에 한 관원이 주 예수께 와서 그가 영생 곧 하나님의 생명인 그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한다고 말했다. 이 영생은 구원이 그 안에 포함되어 있고 이김도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다음 문장에서는 구원을 언급하고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 말했다. 우리는 여기서 말한 범위가 구원과 이김을 다 포함시킨 것을 볼 수 있다.

 

이 관원은 주 예수께 그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느냐고 물었다. 주 예수님은 다섯 가지 엄한 계명들을 말씀하셨다. 곧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이다. 이것들은 젊은 관원이 할 수 없는 일들이다. 이 젊은 관원은 간음하지 않을 수 없고, 살인하지 않을 수 없으며, 도적질하지 않을 수 없고, 거짓 증거 하지 않을 수 없으며, 부모를 공경할 수 없다.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지만, 젊은 관원은 이 다섯 가지 조건을 통과할 수 없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이 젊은 사람은 예수님께 이 모든 것은 어려서부터 한 번도 범한 적이 없으며 다 지켰습니다. 선생님, 다른 조건들은 없습니까? 그러면 나는 영생을 얻을 수 있겠군요. 나는 영원한 생명을 소유할 수 있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주 예수님은 그에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오, 당신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나는 당신이 당신에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음을 아는지 모르겠다.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란 무엇인가? 주 예수님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이 한 가지가 있어야 완전하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주 예수 앞에 나온 사람들은 다 모든 소유를 팔아야 한다는 말인가? 주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 아무 것도 없어야 한다는 말인가? 아니다. 우리는 많은 재물을 소유한 사람들도 영생을 얻을 수 있음을 인정할 것이다. 그런데 왜 그런 사람들이 많지 않고 이렇게 적은가?

 

어떤 사람은 그들이 모든 소유를 파는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26절에서는 듣는 자들이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느냐』고 말했다. 그러나 27절에서 주 예수님은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주 예수님이 그 젊은 관원에게 말한 한 가지 부족한 것은 사람이 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 젊은 사람은 자신의 할 수 없음을 시인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간음하지 않을 수 있고 살인하지 않을 수 있고 도적질하지 않을 수 있으며 거짓 증거 하지 않을 수 있고 부모를 공경하는 것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주 예수님의 목적은 사람이 할 수 없음을 그에게 보여 주려는 것이었다. 구원받는 것에 있어서 사람은 할 수 없고 이기는 것에 있어서도 사람은 할 수 없다. 그런데 그 관원은 자기가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은 그에게 조건을 내세웠다. 『좋다. 네가 이 다섯 가지를 할 수 있다고 했느냐? 내가 또 한 가지 일을 보충하여 네 앞에 둘 터이니 네가 할 수 있나를 보자.』 이제 이 젊은 관원은 자기가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심히 근심하며 돌아갔다.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겠다. 당신이 스스로 이기고 구원 얻으려 한다면 하나님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을 당신 앞에 두실 것이다. 많은 경우 우리는 자신의 행함이 매우 좋다고 느낀다. 『나의 조급한 성격을 이제는 통제할 수 있고 조급하지 않게 되었다. 나는 본래 교만한 사람이었으나 이제 약간 겸손할 수 있게 되었다. 본래 나는 매우 질투하는 사람이었는데 이제 별로 질투하지 않는다. 본래 나는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나는 이김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나는 조급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질투하지 않고 말도 많지 않게 되었지만 아직도 한 가지 약점이 있다. 다른 것들은 대충 문제가 없는 것 같은데 아직도 약간 부족하다.』

 

그것이 매우 작은 일이거나 먹기를 좋아하는 것이거나 여덟 시, 아홉 시가 되어도 일어나지 못하는 것일 수 있다. 다른 죄들은 다 이길 수 있어도 무엇 때문인지 이 한 가지는 이기지 못한다. 이 한 가지는 항상 길이 없다. 당신이 많은 힘을 들여 남더러 깨워 달라고 하거나 자명종을 울리게 해도 당신은 일어나지 못한다. 당신은 다른 일을 다 할 수 있는데 왜 이것만은 할 수 없는지 이상히 여길 것이다.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지만 이것은 다름이 아닌 바로 누가복음 18장의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의 원칙이다. 하나님은 당신이 할 수 없음을 당신에게 증명해 보이고자 하신다. 언젠가 당신은 할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당신이 할 수 있는 것들을 주셨지만 당신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주님은 당신이 할 수 없는 한 가지가 있음을 당신에게 보여 주실 것이다. 하나님이 당신으로 이기게 하셨다면 당신이 할 수 없음을 증명해 주실 것이다. 이김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에게 주신 것이다. 당신 스스로 이기지 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넘어서지 못하는 한두 가지를 남겨 두심으로써 우리에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음을 보여 주신다.


이김의 첫 걸음은 자신이 할 수 없음을 보는 것임

 

내가 여러분에게 말해 주겠다. 이 젊은 사람이 다섯 가지 조건을 통과하고 쉰 가지 조건을 통과하고 백 가지 조건을 통과할 수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한 가지를 그의 앞에 두어 그가 할 수 없음을 보게 하신다. 친구여! 이김의 첫 걸음은 내가 할 수 없음을 발견하는 데 있다. 당신이 자신이 할 수 없음을 보았다면 당신은 이미 첫 걸음을 걸은 것이다.

 

오늘 우리 가운데와 모든 사람들에게 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기묘하게도 당신은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매번 그것과만 부딪치면 곧 실패한다. 어떤 사람의 한 가지 부족한 것은 그의 성질이고, 어떤이는 그의 더러운 생각이며, 어떤이는 그의 수다스러움이고, 어떤이는 아침에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고, 어떤이는 제의하기를 좋아하는 것이고, 어떤이는 그의 질투이고, 어떤이는 그의 교만이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각 사람에게 그의 특별한 한 가지가 있다. 무릇 이기고자 하는 사람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내야 한다. 사람마다 누구나 그 사람의 특별한 한 가지가 있다. 최소한 한 가지가 있고 그 이상 있는 사람도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 앞에서 할 수 없음을 보여 주기를 원하신다.

 

이기기를 원하고 하나님 앞에서 많은 문제들을 해결한 한 자매가 있었다. 그녀는 매일 편지를 써서 남에게 사과하고 하루 종일 산에 올라가 기도했다. 그녀가 산에서 기도하고 내려올 때마다 나는 『관문을 통과했는가?』라고 물었다. 그녀는 산에서 또 하나의 무덤을 파서 자신을 그 안에 묻어 버렸다고 말했다.

 

이튿날 내가 또 그녀에게 물었을 때 그녀는 하나님이 또 그녀에게 그녀의 죄를 찾아 주셨기 때문에 그것들을 묻어 버리고 많은 일들을 처리했다고 말했다. 이렇게 이십여 일간 그녀는 매일 죄를 처리했다. 나는 그녀에게 이제는 어느 정도 충분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많은 것을 처리했기 때문에 이젠 거의 승리했다고 말했다.

 

나는 개별적으로 한 동역자 자매에게 그녀의 하는 일을 보라고 말했다. 어느 날 그녀 집에 갔을 때 나는 그녀가 매우 근심하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근심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해서 그녀에게 이유를 묻지 않고 근심을 멈추라고도 말하지 않았다. 이렇게 육 일간 그녀가 근심하는 것을 보았다.

 

육 일이 지난 후 우리 가운데 어느 형제가 식사에 초대했는데 그녀도 자리를 같이했다. 그녀도 밥을 먹었지만 억지로 먹었다. 내 정면에 앉았던 그녀의 얼굴은 웃고 있었으나 사실은 근심하고 있었다. 그날 형제들은 이십여 명이고 자매들은 세 명뿐이었다. 식후에 나는 내가 새로 쓴 시가(詩歌)를 피아노로 쳐 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두 절을 부르고서는 눈물을 흘렸다. 나는 그녀가 눈물을 흘리도록 내버려두고 아무 말하지 않았다.

 

얼마 후 나는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다. 그녀는 『나에게는 조금도 방법이 없습니다. 나는 한 가지 일을 이길 수 없습니다. 어떻게 처리해도 이길 수 없습니다.』고 말했다. 그녀는 매우 수줍어하는 자매인데 이십여 형제들 앞에서 울었다. 방법이 없다 하며 계속 울었다.

 

내가 그녀에게 대체 어떤 일을 통과하지 못하느냐고 묻자 그녀는 한 주 동안 처리했어도 통과하지 못하는 한 가지 일이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나에게 『니 형제님이 알다시피 이 한 주 동안 저는 매일 저의 죄를 처리하여 거의 모든 죄들을 다 처리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녀가 정말 그녀의 죄를 자백했음을 시인한다. 그녀는 『그러나 내가 어떻게 노력했어도 이번 주 동안 나의 죄를 처리할 수 없음이 증명됐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이 자매의 죄가 분명히 작은 죄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녀에게 대체 처리할 수 없는 것이 무슨 죄냐고 물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아주 작은 것이지만 처리할 방법이 없습니다. 어려서부터 저에게는 군것질하는 작은 습관이 있습니다. 아침 식사를 한 후 조금이라도 군것질하고 싶습니다. 점심 식사 전에 미리 약간 군것질을 해야 합니다. 점심을 먹은 후에 또 약간 군것질을 해야 합니다. 밤에 잠을 자려 할 때도 약간 군것질을 하고 싶어집니다. 이 며칠간 나는 주님 앞에서 이 일을 그냥 통과시킬 수 없다고 느꼈습니다. 나는 이렇게 조금씩 먹는 것이 합당치 않다고 느끼기 때문에 이 일을 처리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육 일간 처리했지만 육 일 다 실패했습니다. 나는 나의 세 자녀들보다 더 잘 먹습니다. 자질구레한 것들만 보면 손으로 집게 됩니다. 나는 먹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녀는 말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나는 듣고서 매우 즐겁고 웃음이 나왔다. 나는 참으로 즐거웠고 극도로 즐거워했다. 그리고 형제 자매들 중에서 어떤 형제는 남아 있고 어떤 자매는 자리를 피해 주었다. 그녀는 거기서 어쩔 줄 모를 정도로 계속 눈물을 흘렸고 나는 거기서 어쩔 줄 모를 정도로 계속 웃었다. 그녀는 계속 울었고 나는 계속 웃었다. 그녀는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다. 나는 『내 마음이 심히 즐겁고 즐겁습니다. OO 자매님, 당신은 오늘에서야 당신이 할 수 없음을 아셨습니까? 당신이 노력한 지 20 일이 지났어도 당신의 할 수 없음을 모릅니까? 당신이 할 수 없는 날이 있음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내가 말하지만 당신이 할 수 없을 때 하나님께 방법이 있습니다.』

 

당신은 모든 것의 원칙이 여기 있음을 보아야 한다. 한 시간쯤 지나서 그녀는 이기는 관문을 통과하게 되었다.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지만 이기는 길은 한 가지 부족한 바로 이것이다. 당신 자신은 이것도 거의 다 됐고 저것도 거의 다 했다고 생각하면서 당신이 할 줄 알고 당신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하나님은 당신이 할 수 없음을 당신에게 증명하여 보여 주신다. 그러므로 이김의 관문을 통과하려는 사람이 첫째로 찾아내야 할 것은 바로 자신이 할 수 없음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것에 근거하여야 당신이 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알 수 있다. 당신에게 무슨 특별한 죄나 특별히 이기지 못하는 죄가 있는가?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지만 대충하는 사람은 이김의 관문을 통과할 수 없다. 당신은 자신의 특별히 약한 점을 전일적(專一的)으로 알아야 한다. 이것으로써 당신이 이김의 관문을 통과한 것을 증명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의 약점은 교만이고 어떤이는 질투이고 어떤이는 쉽게 남에게 만진 바 되는 것으로서 조금만 만진 바 되어도 속에서 감지한다. 어떤이는 그의 부정한 생각이고 어떤이는 말이 많은 것이며 어떤이는 남의 흠을 잡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배후에서 사람에 대해 말하고 말을 전달한다. 어떤이는 몸을 절제하지 못한다.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지만 누구에게나 다 한 가지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다 한 가지 이기지 못하는 일이 있다. 그러므로 오늘 오후 집회를 마친 후 여러분은 돌아가서 성경을 펴고 『오히려 한 가지가 부족하다』라고 쓰고서 당신의 부족한 점 한 가지를 써 내기 바란다.

 

그 젊은 관원의 부족한 점 한 가지는 그의 모든 소유를 파는 것이었다. 아마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은 그의 돈을 내려놓지 못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내려놓지 못하는 것이 돈은 아니지만 그에게 부족한 것 한 가지가 있기 마련이다. 만일 돈이 아니라면 당신이 특별히 이길 수 없는 죄가 무엇인가를 써 내야 한다. 당신의 병이 어디에 있는지 알 때 하나님 앞에서 당신은 전일적으로 그것을 이기는 관문을 통과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특별한 점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모든 사람에게 각각 특별히 약한 점이 있다. 그것에 대하여 반드시 하나님의 빛 비춤을 구해야 한다. 모든 사람에게 최소한 한 가지가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한 가지 이상이 있다. 당신은 당신이 할 수 없는 그 한 가지를 보아야 한다. 당신이 할 수 없다는 것을 본 후 당신은 하나님의 하실 수 있음을 볼 수 있다. 만일 당신이 당신의 약함을 볼 수 없다면 당신은 그리스도의 능력을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형제 자매들이여, 하나님은 왜 한두 가지를 거기 두셨는가? 우리가 할 수 없음을 우리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이다.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지만 이것은 성경의 매우 보편적인 원칙이자 매우 중요한 원칙이다. 우리가 매번 우리 주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말할 때 우리가 잊어 버리기 쉬운 것이 바로 이 원칙이다. 오! 하나님은 당신과 내가 쓸모 없다는 것을 아신다. 하나님은 당신의 육체에서 나온 것에는 선한 것이 없음을 아신다. 하나님은 아시되 이미 아신다. 그러나 당신은 이것을 모르고 당신의 육체 속에 선한 것이 없음을 모른다. 그러므로 당신은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얻기를 바라고 계속 힘쓴다.

 

하나님은 우리 육신이 쓸모 없음을 아신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육신이 쓸모 없음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율법을 우리에게 주셨다. 하나님이 율법을 내리심은 사람에게 죄가 있고 당신이 할 수 없음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다. 율법은 당신이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율법을 지킬 수 없음을 아신다. 율법을 내리신 목적은 당신으로 몇 가지 더 범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율법은 당신더러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범하라고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이 율법을 범할 것을 아셨지만 당신은 자신이 율법을 범하게 될 것을 모른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당신으로 율법을 범하게 하기 위하여 율법을 내리셨다. 그럴 때 당신은 하나님이 아신 대로 알게 되고 당신이 쓸모 없는 사람임을 알게 된다.

 

이상하게도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이 율법 밖에 있다는 것은 생각하는데 십계명만 율법이고 신약의 명령들 역시 다 율법이라는 것은 잊어버린다. 하나님은 이런 명령들을 통해 당신이 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당신에게 보여 주신다. 하나님은 당신이 할 수 없는 단계에까지 인도하신다. 그럴 때 당신은 비로소 하나님에게 『당신이 저를 십자가에 못박으신 것은 옳은 것입니다. 저는 참으로 형편없고 죽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이 저를 잘못 못박으신 것입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로마서 7장의 귀함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로마서 7장에서 계속 발버둥치는 한 사람을 본다. 왜 그런가? 이는 하나님께서는 그에 대하여 완전히 실망하셨지만 로마서 7장에 있는 그 사람은 자신에 대하여 여전히 소망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그는 계속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얻으려 하고 율법을 행하려고 하지만 완전히 실패한다. 그때 비로소 하나님이 그를 잘못 십자가에 못 박지 않으셨으며, 하나님이 그가 죽어 마땅한 자라고 말씀하셨으므로 자신이 정말 죽어 마땅한 자임을 인정하게 된다.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지만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기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의 실패가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죄를 충분히 범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기지 못한다. 만일 죄를 조금더 범한다면 더 쉽게 이기게 된다. 만일 참으로 육신의 패괴함을 보았다면 더 쉽게 이기게 된다. 로마서 7장에 있는 그 사람은 결국 길이 없어서 탄식하며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원하라고 말했다. 그가 「누가」라는 단어를 볼 때 곧 이기게 된다. 그가 「누가」라는 단어를 볼 때 곧 그를 구원할 자가 있게 된다.

 

그러므로 형제 자매들이여, 오늘 오후 첫번째로 보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관점에 따라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조금도 쓸모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조금도 쓸모없는 자로 보신다. 우리도 우리 자신이 할 수 없는 자임을 보아야 한다. 만일 당신이 할 수 없음을 보지 못한다면 당신은 십자가의 평가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당신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아니요」라고 말할 수 없게 된다. 만일 내가 아직도 소망 있다고 말한다면 아직 쓸모가 있을 것이다. 그럴 때 당신은 「이제는 내가 아니요」라고 말하지 못 한다.


할 수 없고 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음

 

나는 여기서 우리가 한걸음 더 나아가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많은 형제 자매들은 자기가 할 수 없음을 안다. 당신은 당신이 할 수 없음을 안다. 또 한 마디 묻겠다. 대체 당신은 할 수 있는가 없는가? 형제여! 당신은 자신에 대해 절망했는가? 당신은 이길 수 있는가 없는가?

 

어제 저녁에 우리가 본 것은 다 객관적인 것이고 오늘 오후에 본 것이 첫번째 주관적인 것이다. 그리스도가 당신을 대신하여 이기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리스도가 당신을 대신해 사는 데에는 조건이 있다. 이 조건은 자신의 할 수 없음을 보는 것이다. 당신은 대체 할 수 있는가? 과거 수십 년 동안 하나님이 당신에게 여러 실패를 주셨는데 당신은 자신에 대해 아직도 절망하지 않았다. 할 수 있는가 없는가, 이것이 문제이다. 앞으로 당신이 진보할 수 있는가의 관건은 다 여기에 달렸다. 만일 당신이 마음 속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계속 당신이 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내가 당신에게 말하거니와 그리스도는 당신을 대신하여 사실 수 없다. 그리스도는 오직 완전히 할 수 없는 사람을 위하여만 사실 수 있다. 이김은 완전히 실패한 사람을 위하여 예비한 것이다. 오직 완전히 실패한 사람만이 이김을 소유한다. 누구든지 완전히 실패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그를 대신하여 이기실 수 없다. 『나는 할 수 없다. 나는 할 수 없다. 』가 첫째 조건이다.

 

그러나 여기서 할 수 없는 것과 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당신은 이런 말을 들어 보았는가? 이김의 첫째 조건은 할 수 없는 것인 동시에 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이다. 많은 때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또 하려고 노력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할 수 없음을 시인하고 해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기게 된다. 문제는 우리가 우리의 할 수 없음을 알지만 해 보려고 하는 데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을 추가하려고 한다. 우리는 우리가 조금만 더 기도하면 할 수 있고 조금만 더 결심하면 설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할 수 없으면서도 해 보려고 한다.

 

가령 여기에 삼백 근 무게의 짐이 있다 하자. 당신은 이백 근밖에 들수 없기 때문에 당신이 삼백 근을 들 수 없음을 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짐이 무거운 줄 알면서도 자기가 들 수 없지만 시도해 보겠다고 말한다. 그는 할 수 없으면서도 시도해 보려고 한다. 그러므로 할 수 없는 것과 하려고 시도하지 않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우리가 할 수 없다면 시도해 보려고 하지도 말고 이렇게 말해야 한다. 『주여, 저는 할 수 없습니다. 또한 하려고 시도해 보지도 않겠습니다.』

 

당신은 완전히 손을 놓아야 한다. 손을 놓는 문제는 매우 큰 문제이다. 당신이 할 수 없다는 것을 알 때 당신 자신을 멈추고 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이번에 나는 계속해서 어떤 죄를 범하는 많은 형제들을 만났다. 그들은 자신들이 할 수 없다고 말한다. 내가 그들에게 해 보려고 하지는 않았느냐고 물을 때 그들은 『우리가 또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방법이 없습니다. 』라고 말했다. 하나님은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 당신을 구할 길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당신은 어떠한가? 당신은 자신이 구할 길이 없음을 시인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해 보려고 한다. 여전히 해 보려고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화내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가령 당신에게 조급해하는 성질이 있고 당신은 자기의 성질을 다스릴 수 없다 하자. 당신은 계속 노력하지만 계속 실패한다. 당신의 성질에 대하여 당신은 방법이 없음을 시인한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하는가? 우리는 성질을 다스릴 수 없음을 알면서도 힘써 다스리려고 한다. 우리는 어떻게 하는가? 사람과 말할 때 조심한다. 사귀면 좋지 않은 사람들과 왕래를 적게 하고 내 뜻과 합하는 사람들과 왕래를 많이 갖는다. 나에게 가시가 되는 사람들과 교통하지 않고 그들의 얼굴을 대하지 않는다. 화가 나려고 할 때마다 힘을 다하여 억누른다. 조금 더 기도하여 그것을 억눌러 버린다. 이것은 무엇인가? 이것이 곧 할 수 없으면서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할 수 없으면서 해 보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할 수 없으면서 능력을 가하여 해 보려는 생각이다. 이러한 사람은 영원히 이기지 못한다. 이러한 사람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할 수 없다.

 

형제 자매들이여, 이김의 조건이 곧 할 수 없는 것임을 기억하라. 그러나 이김의 가장 큰 어려움은 우리가 해 보려고 하는 것이다. 이김은 곧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신 이김이고 나를 대신하여 사시는 그리스도이시다. 이 이기는 생명은 당신으로 하여금 주님에게, 「주여, 나는 할 수 없고 또한 하려고 애쓰지도 않습니다. 당신이 날 대신하여 하소서. 당신의 할 수 있음을 나의 이김으로 외식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말하고 이 위치에 서 있도록 요구한다. 만일 이렇게 할 수 있다면 당신은 당신이 이기는 것을 볼 것이다.

 

하나님이 구할 수 없는 무리는 해 보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사람들에 대해 하나님은 조금도 방법이 없다. 당신이 하려고 시도해 보고 할 수 있으려고 노력하면 하나님은 하지 않으신다. 그리스도는 당신 안에서 그분의 생명을 나타내기를 원하시지만 문제는 당신이 당신의 일의 완전함을 지키려고 하는 데 있다. 그리스도가 그분의 생명을 나타낼 수 있기 위하여 당신은 반드시 당신 자신의 일을 완전히 거절해야 한다. 만일 당신이 조금 도우려고 한다면 당신은 사람의 행위가 추가될 때 하나님의 은혜가 나가는 것을 보게 된다. 만일 그리스도가 당신을 대신하여 이기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당신 자신의 이김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능력은 당신의 일의 부족함을 보충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은 당신의 생명의 부족함을 보충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분은 당신 안에서 당신을 대신하여 살기를 원하신다. 만일 그리스도가 당신을 대신해 살기 원한다면 당신은 반드시 살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신의 할 수 없음을 알 때 비로소 길이 있다. 또한 싸우기만 하면 패배당하기 때문에 싸우기를 사모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당신은 자신이 할 수 있기를 바라고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당신이 힘을 쓸 때 그리스도는 당신 안에서 살 수 없게 된다.

 

사람의 일은 종종 겹칠 가능성이 있다. 내 집에 있는 한 일꾼이 일을 그만두고 돌아가려고 해서 나는 새로운 일꾼을 불러왔다. 나는 그 오래된 일꾼에게 이 주간 더 머물면서 새 일꾼에게 일을 가르친 후에 돌아가라고 말했다. 사람이 하는 일은 항상 겹치는 시간이 있다. 오래된 하인은 돌아가려고 하고 새로운 하인은 이 주 전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결코 이런 일을 하지 않으신다. 당신 편이 아직 떠나지 않았다면 그분은 시작하시지 않는다. 당신이 멈추는 그곳에서 그분이 시작하신다. 그분이 계시고 당신도 그곳에 함께 있기를 바라는 것을 불가능한 일이다. 언제든지 당신의 일을 완전히 멈출 때 그리스도가 일하기 시작하신다. 언제 「그리스도」가 될 수 있는가? 그것은 「내가 아니요」의 때가 되어야 한다. 나와 그리스도가 겹치는 때가 있기를 바라는 것은 영영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할 수 없어야 할 뿐 아니라 또한 할 수 있으려고 하지도 말아야 한다. 당신의 손을 완전히 풀어 놓아야 하고 오늘 이후로 모든 것을 주님 손에 맡겨야 한다. 오늘부터 모든 것을 주님 손에 맡겨야 한다. 당신은 할 수도 없고 해 보려고 하지도 말아야 한다. 내가 말하지만 이럴 때 당신은 이기게 된다.

 

이렇다 하더라도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많은 사람은 그의 할 수 없음을 보고 눈물을 흘린다. 당신은 울 때 자연히 눈물을 흘리게 된다. 우는 것은 매우 좋다. 많은 때 우리는 눈물을 흘려야만 죄를 깨끗이 씻을 수 있다. 죄를 깨끗이 씻기 위해서 반드시 눈물이 있어야 한다. 많은 때 우리는 주님 앞에서 눈물을 너무 적게 흘린다. 그러나 기묘하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기려고 노력하고서 자신의 문제와 자신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을 발견한 다음 그 젊은 관원을 본받아 근심하며 돌아간다. 그는 자기가 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기가 모든 재산을 가지고 나와 가난한 자를 구제할 수 없으므로 소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여전히 소망이 있다.

 

나는 종종 누가복음 18장과 19장이 연결된 것이 매우 의미 있다고 생각했다. 당신은 누가복음 19장이 무슨 일을 기록했는지 아는가? 19장은 삭개오의 이야기이다. 삭개오는 어떤 사람인가? 삭개오는 늙은 사람이다. 13장의 관원은 젊은 사람이다. 젊은 사람도 돈이 있고 삭개오도 돈이 있다. 사람들이 볼 때 젊은 사람은 항상 너그럽고 늙은 사람은 항상 그렇지 못하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삭개오가 나무에서 내려올 때 주 예수님이 돈을 내놓으라고 말씀하시지도 않았는데 그가 스스로 만일 뉘게 토색한 것이 있으면 네 배나 갚고 그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겠다고 말했다. 그는 한번에 돈을 다 내놓았다. 주 예수께서 그 젊은 관원에게 돈을 내놓으라고 말씀하실 때 그는 할 수 없었다. 이 늙은 사람에 대해 주 예수님은 그에게 돈을 내놓으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는데 오히려 그가 돈을 내놓았다.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젊은 사람은 사람의 할 수 없음을 나타내고 삭개오는 하나님이 하실 수 있음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무엇을 하실 수 있는가? 주 예수님이 그도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임하였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구원하신 것이다. 이 젊은 사람은 자신의 할 수 없음을 알았지만 그를 구원해 달라고 하나님께 구하지 않았다. 사람은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에게 나쁜 성질이 있거나 육신의 죄가 있거나 영성상의 죄가 있는 것을 보고 어떻게 하는가? 그들은 자기에게 그런 어려움이 없으면 좋겠다고 느낀다. 나는 여러 자매들이 나에게 『니 형제님, 저의 성질을 조금 참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말한 것을 들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나는 항상 그들에게 『당신의 조급한 성질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고 말했다. 당신이 할 수 없음을 보는 것으로 족하다. 당신의 할 수 없음을 인하여 즐거워해야 한다.


자기의 약함을 자랑함

 

고린도 후서 12장 9절 :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나를 덮게 하려 함이라』.

 

당신은 보았는가? 약함은 비참하고 눈물 흘릴 일이 아니라 도리어 자랑할 일이다. 당신은 당신의 큰 승리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한다고 말하겠지만 당신의 큰 실패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한 적이 있는가? 하나님이 당신으로 인내케 하신 것으로 인하여 그분께 감사하고 찬양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의 나쁜 성질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한 적이 있는가? 당신의 교만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한 적이 있는가? 당신의 질투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한 적이 있는가? 당신의 더러움, 당신 속에 죄악이 가득 차 있음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한 적이 있는가?

 

내가 당신에게 말하지만, 만일 당신에게 이런 어려움이 있다면 당신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해야 한다. 그러므로 첫째는 할 수 없는 것이고, 둘째는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고, 세째는 나의 할 수 없음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이다. 할렐루야, 나는 할 수 없다! 할렐루야, 나는 할 수 없다!

 

왜 바울은 도리어 나의 약함을 자랑하기를 기뻐한다고 말했는가? 「자랑」이라는 용어는 원문에서 「영광」이다. 바울은 그의 약함을 그의 영광으로 삼았다고 말했다. 왜 그런가? 그리스도께 그분의 능력을 나타낼 기회를 주어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나를 덮게 하기 위한 것이다. 약함이 없는 사람을 그리스도의 능력이 덮을 수 없고 약함이 있는 사람만이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를 덮을 기회가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나는 나의 약함을 자랑한다. 왜냐하면 내가 약할 때 주님께 일할 기회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주님의 능력을 증명할 기회를 갖고 주님께 날 대신하여 일하실 기회를 드린다.

 

형제 자매들이여, 여러분이 시인할 수 없는 어떤 죄가 있는가? 하나님께 드려야 하나 드릴 수 없는 어떤 것이 있는가? 혹은 당신이 제해 버릴 수 없는 어떤 것이 있는가? 당신이 하나님 앞에서 얻지 못한 어떤 은혜가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는가? 근심하는가? 그러면 당신은 그 젊은 관원의 친구가 된다. 그가 근심했기 때문에 당신도 근심한다면 결과적으로 당신은 그와 한 길을 가는 것이다. 그가 근심하며 갔고 당신도 근심하며 가는 것이 된다.

 

오! 우리는 근심할 필요가 없다. 젊은 사람의 잘못은 자기의 할 수 없음을 본 것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하실 수 있음을 보지 못한 데 있다. 젊은 사람의 잘못은 그가 해내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해 낼 수 있음」을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기의 약함을 찾아내는 것은 죄가 아니다. 하나님의 강하심을 믿지 않는 것이 죄이다. 자기의 돈을 내놓지 못함을 보는 것은 죄가 아니다. 하나님이 당신으로 돈을 내놓게 하실 수 있음을 믿지 않는 것이 죄이다. 나쁜 성질을 갖는 것은 죄가 아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대신하여 인내하심을 믿지 않는 것이 죄이다. 이기지 못하는 죄를 갖는 것은 죄가 아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대신하여 이길 수 있음을 믿지 않는 것이 죄이다.

 

자신의 의지할 것이 없음을 보는 것은 매우 영광스런 일이다. 주님의 목적은 그 젊은 사람에게 자기의 의지할 것 없음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젊은 사람은 집으로 돌아갈 때 즐겁지 않고 근심하였다. 일단 주님이 당신에게 당신의 할 수 없음을 증명해 주시면 즉시 하나님의 하실 수 있음을 당신에게 보여 주신다. 주님은 당신을 실망시키기 위하여 당신의 할 수 없음을 보여 주시는 것이 아니다. 주님이 당신에게 당신의 할 수 없음을 보여 주신 것은 오늘 주님께서 당신 몸에 나타나실 기회가 있음을 믿으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주님에게 이렇게 말해야 한다. 『주여! 저는 할 수 없습니다. 주여! 저는 하려고 하지도 않겠습니다. 나의 할 수 없음으로 인하여 당신께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당신이 자신의 할 수 없음과 자신에게 길이 없음을 보고 주님이 당신으로 할 수 있게 하심을 볼 때 당신은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할 수 있다. 당신이 이것을 보았다면 주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전에 당신은 당신의 약함에 대해 근심하고 당신의 죄를 위해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오늘 당신은 자랑하고 찬양하며 주님께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주님, 나의 할 수 없음을 인하여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주님, 내게 방법이 없음과 나의 이길 수 없음과 할 수 없음을 인하여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나의 할 수 없음을 인하여 당 신께 감사드리고 즐거워합니다. 내게 조금도 방법이 없고 당신의 할 수 있음을 인하여 나는 즐거워합니다.』 내가 당신께 말하지만, 이럴 때 당신은 이기게 된다.


주 예수님은 불치병만 치료하신다

 

이번에 연대(煙臺)에서 이김의 관문을 통과한 한 형제가 있었다. 이 형제는 동삼성(東三省)에서 왔는데 군대에서 십여 년간 생활한 의사이다. 그가 동북(東北)지역에 있을 때 형제들에게 이끌리어 구원을 받았다. 주님을 믿은 후 그는 연대로 와서 일년 남짓 진료를 했다. 내가 연대에서 일 주간의 집회를 가질 때 그도 거기에 있었다. 나는 집회 때에 이기는 문제를 언급했다.

 

어느 날 그는 나를 찾아와 아주 급하게 내일 나를 찾아올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내일 아침에는 일이 있을 것 같으니 오늘 밤이 어떠냐고 말했다. 그는 자기의 일이 매우 중요하고 또 저녁 시간으로는 너무 부족하므로 긴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날 아침으로 정했다. 그는 내일 아침 아흡시에 올테니 다른 사람과 약속하지 말고 자신에게 아주 큰 문제가 있으니 오전 내내를 그에게 할애해 달라고 말했다. 이 사람은 참으로 군인답게 키가 크고 체격이 늠름했다. 나는 좋다고 하고 다음날 아침 이(李) 형제님 집에서 교제하기로 약속했다.

 

내가 아흡시 전에 거기에 도착했는데 그는 벌써 와 있었다. 서로 대면하여 앉자마자 그는, 『니 형제님, 저의 이야기가 아주 깁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과거 그가 어떻게 군대에서 생활했고 후에 어떻게 주님을 믿었고 어떻게 연대에 오게 되었는지를 알려 주었다. 그는 나에게, 그가 어떻게 모든 죄를 이겼고 과거 군대에서의 모든 죄를 어떻게 이겼는데 현재 오직 한 가지만은 방법이 없다고 알려 주었다.

 

나는 그에게 한 가지가 남아 있다는 것을 듣고서 마음 속으로 기뻐했다. 누구도 한 가지가 없다고 말할 수 없다. 나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는 손을 내게 보이면서 담배 피우는 것을 이기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는 각종 무서운 죄와 나쁜 죄를 다 이겼지만 이 한 가지는 이기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는 담배를 피운 지 이미 십 년이 됐고 주님을 믿은 지는 삼사 년이 되었으며 연대에 있은 지도 이미 일 년이 되었다. 이 삼사 년 동안 일 년에 심지어 일곱, 여덟 번도 끊으려고 했지만 끊어지지 않고 방법이 없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여기서 담배 피우는 것이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연대 지방은 작은데다가 형제 자매들도 많습니다. 만일 그들이 나 사(史)형제가 담배 피운다는 것을 알면 큰일나기 때문에 남 몰래 피울 수밖에 없습니다. 집에서 피우려면 자매인 내 아내가 감시하기 때문에 안 됩니다. 밖에서 피우면 형제 자매들과 부딪칠까봐 담배를 공개적으로 피울 수 없습니다. 나는 담배를 주머니 속에 넣고서 병원에 있을 매는 내 방에서 피울 수 있지만 밝은 데서 피울 수 없고 한 구석에서 피워야 합니다. 사람 소리가 나면 빨리 담배를 꺼야 합니다. 또 병원에서는 간호원이 알고서 형제 자매들에게 연락할까봐 두렵습니다. 내 아내에게 들키면 다툼이 벌어지기 때문에 정말 담배 피우는 것이 너무나 고통입니다. 또 형제 자매들은 불타서 줄지어 나를 보러 옵니다. 담배를 피우다가 형제들이 왔다는 소리를 들으면 입에서 담배 냄새가 날까봐 은단을 입 속에 넣습니다. 이 일 년 동안 연대에서 나는 담배 때문에 정말 고통스러웠습니다. 나는 피우고 싶지 않습니다. 온갖 방법을 써 보았지만 끊을 수 없었습니다.」

 

앞에 앉아 있는 아주 크고 늠름한 그의 체격을 보면 참으로 군인다왔다. 그러나 그의 우는 모습은 정말 어린아이가 울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에게 『이것은 즐거워할 만한 일입니다. 이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다른 사람은 다 끊을 수 있는데 나는 끊을 수 없다는 것을 당신은 모르십니다. 만일 당신이 내가 담배를 끊는 것을 보았다면 나의 고통을 알 것입니다. 한번은 삼 일 동안 담배를 피우지 않고 손에 담배를 가지고 있지 않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어디를 가든지 머리 속에는 담배로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담배를 피웠습니다. 나는 내 자신이 밉습니다. 내게는 방법이 없습니다.』

 

나는 이것은 즐거워할 만한 일이요 참으로 즐거워할 만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나에게 『당신의 말은 대체 무슨 뜻입니까?』라고 물었고, 나는 그에게 이렇게 답했다.

 

『당신 사(史) 선생님은 진료를 잘하는 의사입니다. 그러나 나 니 토생을 만나면 내 몸이 아주 건강하기 때문에 당신은 쓸모 없게 됩니다. 당신은 연대 전 지방에서 매우 좋은 의사이고 나는 연대 전 지방에서 몸이 매우 건강한 사람입니다. 나도 당신이 쓸 데 없고 당신도 내가 쓸 데 없습니다. 만일 오늘 당신이 담배를 끊을 수 있다면 당신은 내가 당신에게 쓸 데 없는 것같이 주님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내가 어떤 의사도 치료하지 못하는, 몸에 병이 많은 약한 사람인데 당신이 전문의라면 내가 당신에게 올 때 당신은 당신의 능력을 나타낼 기회와 장소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사(史) 의원님, 당신의 병원 문 앞에 「불치병 전문 치료」라는 푯말을 감히 걸어 놓을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는 『감히 그럴 수 없읍니다. 만일 잘못 치료하면 어떻게 합니까?』라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주 예수님은 다른 병은 일체 치료하지 않으시고 오직 죽을 병 한 가지만 치료하십니다. 주 예수님은 오직 죽을 병만 치료하십니다. 오늘 당신은 불치병에 걸리지 않았습니까? 오늘 당신의 끊지 못하는 담배는 불치병이 아닙니까?』라고 말했다.

 

그는, 『물론 불치병입니다. 사 년 동안 일 년에 일곱, 여덟 번 끊어도 끊을 수 없으니 이것이 불치병이 아닙니까?』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럼, 좋습니다. 주 예수님은 당신을 치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즐거워할 만한 일이 아닙니까? 당신을 치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즐거워할 만한 일이 아닙니까? 당신의 병이 치료 불능이고 당신이 주 예수께 치료받을 자격이 있는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주 예수께 「주 예수여, 나는 담배를 끊을 수 없습니다. 나에게 방법이 없습니다. 주 예수여, 내 자신을 당신 앞에 둡니다. 」라고 말하십시오. 예수님이 당신 같은 환자를 받는 것으로 인하여 마음 속에 즐거워해야 합니다. 』 그런데 그는 『니 형제님, 나와 농담하지 마십시오. 내게는 정말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라고 말하면서 또 울었다.

 

후에 나는 고린도 후서 12장 9절을 펴서 그에게 읽어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약함에 대하여 당신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눈물을 흘려야 합니까?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는 나의 약함을 좋아하고 나의 약함을 자랑하며 나의 약함을 자랑하기를 기뻐한다. 왜냐하면 나의 약한 데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를 덮을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또 나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오늘 주 예수 앞에 나아와 그분께 「십여 년간 나는 계속 담배를 피웠습니다. 주 예수여 나는 담배를 끊을 수 없음을 인하여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주 예수여, 내가 사 년 동안 담배를 끊으려고 했으나 완전히 실패했음을 인하여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주 예수여, 내가 작년에도 일곱, 여덟 번 담배를 끊으려고 했으나 여전히 이기지 못했음을 인해 당신께 감사합니다. 주 예수여, 내게 조금도 방법이 없음을 인하여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주 예수여, 나에게 방법이 없음을 인하여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주 예수여, 나의 약함을 인하여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주 예수여, 내가 담배 피울 수밖에 없음을 인해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주 예수여, 내가 담배를 끊을 수 없기 때문에 나 자신은 끊으려고 하지 않겠습니다. 지금부터 당신이 나를 대신하여 담배를 끊어 주소서. 당신이 대신해 끊어 주시지 않으면 나도 끊지 않겠습니다. 어떠하든지 나는 내 힘으로 끊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나를 대신해 끊어 주소서. 당신의 능력이 나를 덮을 수 있음을 인하여 당신께 감사하며 찬양합니다. 」라고 말하십시오. 좋습니다. 이제 무릎 꿇고 기도합시다.』

 

그러자 그는 좋다고 하며 기도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참으로 군인답게 재빨리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내가 먼저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 당신이 불치병에 걸린 이 사람 위에 당신의 능력을 갖게 됨을 인해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그는 참으로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기적을 보고자 합니다.』 내가 기도를 마치자 그가 다음과 같은 좋은 기도를 했다. 『당신께 찬양드립니다. 나는 담배를 피우고 또 담배를 끊을 수 없기 때문에 당신 앞에 나왔습니다. 주여, 오늘부터 내가 끊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내 대신 끊어 주십시오. 나는 끊으려고 노력하지도 않겠습니다. 나의 일을 당신 손에 맡깁니다. 당신이 할 수 있음을 당신께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기도를 마친 후 그는 참으로 즐거워했으며 일어나서 상 위에 있는 모자를 집었다. 나는 그에게 잠시 묻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오늘 이후로 다시 담배를 피우시겠읍니까?』라고 묻자 그는 아주 좋은 답변을 해 주었다. 그는 『나는 담배를 피울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나 사재림(史再臨)은 담배를 피울 줄 압니다. 나는 피울 줄 알지만 주 예수께서 나를 대신하여 담배를 끊게 해 주실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고서 즉시 가버렸다.

 

이튿날 저녁 그는 다시 집회에 나왔다. 그는 나에게 자기 아내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간증했다. 『당신이 일 년 넘게 나와 다투면서 내게 담배 피우는 것이 틀렸다고 계속 말해 왔지만 내가 아무리 끊으려 해도 끊을 수 없었다. 보라, 어제 아침 내가 하나님 앞에 나가서 삼십 분밖에 안 들였는데 담배를 피우지 않게 되었다. 당신과 다투는 것은 소용 없고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만이 길이다.』

 

나는 그에게 앞으로 또 담배를 피울 거냐고 물었다. 그는 『내가 왜 못 피웁니까? 피울 줄 압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또 피우게 되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다. 그는 『나는 영원히 피울 줄 알고 나 사재림은 오 년 아니 십 년이 지나도 여전히 담배를 피울 수밖에 없습니다. 나로 단배를 피우지 않게 하는 분은 주 예수이십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의 말을 듣고 마음에 평강이 있었고 문제가 해결된 것을 알았다. 그는 자기 자신을 알았고 또한 그의 하나님도 알게 되었다. 그는 그가 변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가 그를 바꾸는 것임을 알았다. 내가 연대를 떠날 때까지 이 개월 동안 그는 담배 한 가치도 피우지 않았다. 형제들은 그 형제가 계속 진보했고 아주 빠른 속도로 진보했다고 말했다.


우리는 할 수 없고 하나님이 하실 수 있음

 

내가 당신에게 말하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으시다. 그러므로 당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보는 첫째 조건은 당신의 할 수 없음을 보는 것이고, 둘째 조건은 당신이 할 수 있으려고 하지 않는 것이며 세째 조건은 당신의 할 수 없음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이다. 우리의 약함이 우리를 저지하지 못하고 우리의 실패도 우리를 저지하지 못한다. 또 우리의 사상도 우리를 저지하지 못하고 우리의 애호도 우리를 저지하지 못하고 우리의 성질도 우리를 저지하지 못한다. 주 예수님은 하실 수 있으시다. 내가 당신에게 말하지만 주 예수님은 하실 수 있으시다. 오늘 오후 이 집회에서 주 예수님은 자기의 할 수 없음을 시인하는 모든 사람에게 기적을 행하신다.

 

그러므로 여기서 당신은 당신의 할 수 없음을 보아야 하고 하나님이 당신에게 준 위치에 서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할 수 없음을 보게 하셨고, 또한 당신을 오직 죽기에 합당한 자로 보신다. 당신은 이렇게 말해야 한다. 『주여, 나는 다만 죽기에 합당합니다. 나는 나를 변개하고 고치려 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렇게 할 수 없는 자로 당신 앞에 나옵니다. 내가 할 수 없음을 인하여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지만, 과거 몇 개월 동안 사탄은 수없이 나를 찾아와 말했다. 그는 영원히 풀어 놓지 않는다. 그는 계속 이렇게 말한다. 『네가 이겼는가? 보라, 네가 아직도 좋지 않다.』 나는 『만일 나라면 근심하겠지만 이기는 분은 주님이시다.』라고 말한다. 그가 『보라, 네가 이렇게 악하지 않느냐?』라고 말할 때 나는 『나의 악함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한다.』라고 말한다. 그가 너는 약하다고 말할 때, 나는 『좋다.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능력을 나타낼 기회를 가지실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당신은 약함이 귀한 것이고 즐거워할 만한 일임을 보게 될 것이다. 당신은 두려워할 필요 없다. 당신은 할 수 없기 때문에 당신의 마음 속에 감사와 찬양으로 충만할 수 있다.

 

오! 형제 자매여, 「할 수 없음」은 하나의 방해가 아니라 도움이다. 우리가 할 수 없을수록 그리스도는 더욱 그의 능력을 나타낼 기회를 갖게 된다. 그분은 전문적으로 우리의 할 수 없음과 약함을 해결하신다. 내게 없을수록, 내가 실패하고 약할수록, 할 수 없을수록 내 몸에서 내 주의 능력을 나타낼 기회를 갖게 된다.

 

할렐루야! 예수는 구주시라. 할렐루야! 예수는 나의 주시라. 할렐루야! 그분은 우리 생명이시라. 할렐루야! 그분의 능력은 전적으로 우리의 약함을 덮으신다. 여기서 우리의 눈은 자신을 보지 말고 그분을 보아야 한다.


워치만 니
[이기는 생명, "이기는 생명을 체험하는 길", 한국복음서원]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kakao talk
퍼머링크

댓글 0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찬양노트의 말씀방입니다. image 청지기 12.02.20.18:01 4918
131 신언하기를 실행함 청지기 12.04.20.11:13 1089
130 유기적으로 소그룹 집회를 실행함 청지기 12.04.20.11:09 940
129 말씀의 사역의 최고봉 청지기 12.04.20.11:07 916
128 네 단계의 중요한 노정 청지기 12.04.20.10:00 984
127 기도의 사람 청지기 12.04.19.14:56 1057
126 그리스도를 살기 위하여 능동적-수동적이 됨 청지기 12.04.19.14:48 1183
125 부모를 공경하고 결혼을 존귀히 여김 청지기 12.04.19.14:38 941
124 영의 느낌을 따름 청지기 12.04.19.14:35 987
123 보배와 질그릇 청지기 12.04.19.14:29 1101
122 눈물 청지기 12.04.19.14:24 1482
121 기둥으로 변화됨 청지기 12.04.19.14:16 921
120 분리와 계시 청지기 12.04.19.09:38 953
119 교회생활에 관한 몇 가지 중요한 문제들 청지기 12.04.19.09:33 1062
118 영적 생명의 단계 청지기 12.04.19.09:27 1130
117 오락 청지기 12.04.19.09:21 962
116 세상과의 분별 청지기 12.04.19.09:14 965
115 자아의 파쇄와 영의 해방 청지기 12.04.18.19:01 940
114 주님의 이름을 부름 청지기 12.04.18.18:57 1604
이기는 생명을 체험하는 길 청지기 12.04.18.18:50 940
112 제사장의 의복―흉패와 에봇 청지기 12.04.18.18:40 1898
111 혼적인 신자의 경험 청지기 12.04.18.18:38 1121
110 십자가로 돌아가라 청지기 12.04.10.11:02 902
109 사실, 믿음, 체험 청지기 12.04.10.10:58 895
108 생명의 체험―헌신 청지기 12.04.10.10:52 999
107 생명의 체험과 성장 청지기 12.04.10.10:46 967
106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 청지기 12.04.10.10:44 1565
105 삼일 하나님 안에서의 하나 청지기 12.03.27.13:40 1012
104 판결의 흉패 청지기 12.03.27.13:35 905
103 주님의 재림 청지기 12.03.27.13:31 1022
102 처음 익은 열매 청지기 12.03.27.13:23 934
101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 청지기 12.03.27.13:16 1015
100 믿는이들의 휴거(2) 청지기 12.03.27.13:03 1186
99 믿는이들의 휴거(1) 청지기 12.03.27.12:55 940
98 그리스도의 승천으로부터 이 시대 끝까지의 세계 역사―첫째 인부터 네째 인까지 청지기 12.03.26.10:11 1037
97 특별하고 최종 완성적인 예수의 증거 청지기 12.03.26.10:07 898
96 하나님과의 교통 안에 삶―영광스런 중재(仲裁) 청지기 12.03.26.10:01 900
95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은혜를 앎―씨와 땅 청지기 12.03.26.09:51 1218
94 부활 안에 있는 생명―열국에 의해 상징된 종파 안의 문제 청지기 12.03.26.09:40 877
93 사람의 세번째 타락 청지기 12.03.23.17:42 997
92 사탄의 배역과 파괴 청지기 12.03.23.17:35 1037
91 하나님이 믿는이들을 다루시는 길―왕국에서의 징계(Ⅱ) 청지기 12.03.23.17:30 1048
90 하나님이 믿는이들을 다루시는 길―왕국에서의 징계(Ⅰ) 청지기 12.03.23.17:24 1254
89 하나님이 믿는이들을 다루시는 길―천국에 들어가는 조건 청지기 12.03.23.17:14 1067
88 하나님이 믿는이들을 다루시는 길―징계와 상급 청지기 12.03.22.19:03 1395
87 영에 속하는가 두뇌에 속하는가 청지기 12.03.22.18:57 914
86 하나님의 구속의 방법 청지기 12.03.22.18:47 996
85 새 종교를 향한 다섯 단계 청지기 12.03.22.17:59 866
84 새 예루살렘―성의 치수들 청지기 12.03.22.17:51 1148
83 사역의 재고―서문, 머리말 청지기 12.03.21.19:37 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