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성한 말씀을 누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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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전히 기둥에 대해 부담을 느낀다. 창세기에 나오는 거의 모든 것이 후속되는 책들에서 발전되는 씨라는 원칙에 근거할 때, 우리는 기둥에 대한 말씀에 있어서 강한 부분인 열왕기 상 7장 13절부터 22절에 이른다.

 

야곱의 부르심에 있어서, 변화된 야곱 자신은 주로 이 기둥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벧엘에서 꿈을 꾸고 난 후 야곱은 기둥을 세웠다(28:18). 벧엘로 돌아왔을 때에도 역시 그는 기둥을 세웠다(35:14). 야곱은 처음 기둥을 세웠을 때,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라고 말했다. 이것은 그 기둥이 단지 기둥이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집 벧엘이 될 것임을 가리킨다. 열왕기 상에서 우리는 성전에 대한 최초의 언급을 본다. 그 전에는, 장막(tabernacle)은 있었지만 성전(temple)은 없었다. 성전 외부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두 기둥이었다. 열왕기 상 7장에서 우리는 이 기둥들에 대한 상세한 묘사를 본다.

 

나의 부담은 창세기에 나오는 기둥에 관한 씨를 깊이 생각해 본 후, 이제 구약의 이어지는 책들 속에서 이 씨의 발전 안으로 들어가자는 것이다. 뒤에 우리는 신약에 나오는 이 씨의 절정을 살펴볼 것이다.


성전의 건축에 관계됨

 

a. 히람을 통하여 솔로몬이

 

성전의 기둥들은, 『모든 놋 일에 지혜와 총명과 재능이 구비한』자인 「놋점장이」 히람을 통하여 솔로몬이 지었다(왕상7:14). 장막과 성전과 같이, 구약에 나타나 있는 것 중 많은 것이 그림자요 예표이다. 우리는 이 모든 예표들의 성취를 알아야 한다. 솔로몬은 그리스도의 예표요, 히람은 신약 안에 있는 은사 있는 사람의 예표였다. 의심할 것 없이, 사도 바울은 은사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신약의 히람이었다.

 

에베소서 4장 11절과 12절은,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자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라고 말한다. 은사 있는 사람들은 성도들을 온전케 하기 위해 머리로 말미암아 몸에 주어진다. 솔로몬이 직접 기둥들을 세운 것이 아니라 히람을 통하여 솔로몬이 세웠다는 것은 오늘 그리스도께서 직접 기둥들을 건축하시지 않고 은사 있는 사람들을 통하여 건축하심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놋이 히람의 솜씨 있고 재능 있는 두 손에 복종했듯이 우리는 은사 있는 사람들의 두 손에 순복해야 한다.


b. 두 기둥

 

열왕기 상 7장 15절에 의하면, 히람은 『두 기둥을 만들었다』. 성경에서 둘이라는 수는 간증의 수이다. 이 두 기둥은 간증으로서 성전 앞에 서 있었다.

 

창세기에 나오는 기둥에 관한 사상은 간증의 사상이다. 야곱이 라반과의 생활을 체험한 후, 그는 『돌을 가져 기둥을 세웠다』(31:45). 이 기둥은 간증이었다(31:51-52). 의심할 것 없이, 야곱이 28장에서 기둥을 세웠을 때 그의 관념 역시 간증의 관념이었다. 하나님의 영의 감동하심 아래, 그는 이 간증이 하나님의 집이 되리라고 말했다. 구약의 성전은 확실히 하나님에 대한 간증이었다.

 

원칙은 오늘 교회에 관해서도 동일하다. 디모데 전서 3장 15절에 의하면, 하나님의 집 곧 교회는 기둥이다. 이것은 교회 전체가 우주에 대하여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해 서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구약의 성전 앞에 있는 두 기둥은 하나님의 집에 대한 강한 간증이었다.


c. 놋으로 만듬

 

이제 우리는 두 기둥이 놋으로 만들어졌다는 중요한 점에 이르렀다(왕상7:15). 창세기에 나오는 기둥은 돌기둥이지만 열왕기 상 7장에 나오는 기둥은 놋기둥이다. 돌은 변화를 가리킨다. 비록 우리는 진흙이지만 돌로 변화될 수 있다. 그러나 놋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장막 입구의 제단은 하나님의 심판을 가리키는 놋으로 싸여 있었다(출27:1-2, 민16:38-40). 물두멍 역시 놋으로 만들어졌다(출30:18). 더 나아가, 장대 위의 놋뱀(민21:8-9) 또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심판받으심을 증거하였다(요3:14).

 

그러므로 예표론에서 놋은 항상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한다. 두 기둥이 놋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분명, 우리가 기둥이 되고자 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자들임을 인식해야 함을 가리킨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심판 아래 있어야 한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바울의 말처럼 우리는, 『나는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아무런 쓸모가 없으므로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나는 오직 죽을 자격만 있을 뿐입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많은 형제들이 지적이고 능력 있으며, 많은 자매들이 아주 좋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실상 전혀 자격이 없음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한푼어치의 가치도 없다. 우리는 오직 죽을 자격이 있을 뿐이다. 『나는 제쳐 놓은 바 되었고 정죄받은 바 되었고 죽은 바 되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자기 심판의 한 형태이다. 당신 자신에 대한 당신의 심판은 무엇인가? 당신은, 『내 자신에 대한 나의 심판은 내게 아무런 자격이 없다는 것과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입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당신에게 기둥이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이미 자격을 상실한 것이다.

 

장로들의 임명과 관계된 니 형제님의 실행에 관하여 뭔가를 말하고 싶다. 니 형제님은 누구든지 장로 되려는 야심이 있는 사람은 결코 장로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중국 대륙에서 우리 중 많은 사람에게, 『당신이 장로가 될 수 있다고 생각지 말라. 장로가 되려는 야심을 품지 말라. 당신에게 장로가 되려는 야심이 있다면 당신은 결코 장로가 될 수 없다.』고 말했다. 나는 1933년에 처음 상해에 왔을 때 어떤 형제를 만났다. 나는 나중에 그가 장로 되려는 야심이 매우 많음을 발견했다. 니 형제님은, 그 형제는 장로 되려는 야심이 매우 많은 까닭에 장로 될 자격이 없다고 내게 말해 주었다. 장로 되려는 야심이 있는 자는 누구든지 장로 될 자격이 없다.

 

몇몇 형제들이 증거할 수 있듯이, 우리는 미국에서 요 몇 해 동안 이것을 실행해왔다. 우리 중 극소수가 장로 직분을 찾아 헤매었다. 그들은 심지어 장로가 될 기회를 찾아서 이곳 저곳을 옮겨 다니기까지 했다. 특정 지방의 장로 직분이 다 채워진 것을 안 후에 그들은 많은 공석이 있는 또 다른 지방으로 옮겨갔다. 그러나, 그러한 공석들은 오직 장로 되려는 야심이 전혀 없는 사람으로만 채워질 수 있었다. 한번 우리가 어떤 형제에게 장로 되려는 야심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때 그는 영원토록 완전히 자격이 상실될 것이다. 이에 대한 이유는 그러한 형제는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저는 자격이 없습니다. 저는 불쌍하고, 죄 많고, 타락하고, 부패하였습니다. 어떻게 제가 장로 직분의 책임을 감당할 수 있습니까? 저는 이에 대한 자격이 없습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이것이 놋을 체험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정당화하고 우리 자신에게 자격을 부여하는 것은 놋과 더불어 끝나야 한다. 놋을 체험하는 사람들은 계속적으로 심판 아래 있는 사람들이다.

 

초창기 중국에서의 여러 해 동안, 나는 때때로 왜 니 형제님이 이 문제에 그렇게 엄격하신지 의아해했다. 결국, 나는 교회 생활의 모든 방면에서 인도자 되려는 야심이 있는 자는 모두 문제가 됨을 알았다. 여기에는 하나도 예외가 없었다. 그러나 교회의 건축에 참된 유익이 되는 모든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를 인도 직분에 자격 없는 자로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오히려 그들은 항상, 『저는 자격이 없습니다. 저는 너무나 형편없습니다. 저의 기질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저는 아직도 너무 많이 저의 천연적인 생명 안에 있습니다. 저는 제 자신이 합당하다고 생각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것일 뿐 아니라 자신의 심판 아래 있는 것이다. 당신 자신에 대한 당신의 평가는 무엇인가? 『나 외에 다른 누구도 합당하지 않다.』라고 말하지 말라. 이렇게 말할 때마다 당신은 끝났고, 주님은 결코 당신 자신에 대한 이 평가 위에 그분의 인을 치시려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타락되고 부패하고 전혀 합당하지 않다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롬7:18). 우리는 마땅히, 『나는 죽는 것 외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어떻게 형제님들은 내가 장로들 중의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나는 이 말을 헛되이 하는 것이 아니다. 과거 몇 년 동안 어떤 사람들은, 『왜 아무 아무 형제는 장로로 임명 받았는데 나는 그렇지 않은가?』라고 말했다. 당신이 자격 있다고 느끼기 때문에 그가 당신 대신 임명받은 것이다. 당신의 자기 인정은 당신의 자격을 상실하였다. 주님은 자신에게 자격 있다고 생각하는 그 누구도 결코 선택하시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스스로 자격 있다고 생각할 때, 당신은 놋과 아무 상관없다. 대신, 당신은 스스로 만든 금이다. 놋의 체험은 우리가 항상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것과 우리 자신의 심판 아래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주여, 제게 긍휼을 베푸소서. 제 안에는 아무런 좋은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함으로 우리 자신에게 이 말씀을 적용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다. 우리가 우리 안에 어떤 좋은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거짓말쟁이들이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바울은,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또한,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말하는 고린도 전서 15장 10절의 그의 말씀을 적용할 수 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바울은,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말했으며, 고린도 전서 15장 10절에서 그는, 『내가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말했다.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무엇이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나 스스로의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내 스스로는 결코 사도도 될 수 없었고,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의 사역자도 될 수 없었다.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수고한 이는 내가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였었다.』고 말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것이 놋의 체험이다.

 

예표와 비유에 있어서 열왕기 상 7장의 두 놋기둥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심판은 물론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어야 함을 말해 준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아무 것도 아니요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기에 합당한 자로 심판해야 한다. 나는 형제들에게뿐만 아니라 자매들에게도 이 말을 한다. 우리 중 그 누구도 어떤 일을 하기에 합당하지 않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자들로 여겨야 한다. 장로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지 않으면 좋은 장로가 될 수 없으며 인도하는 자매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지 아니하면 합당한 인도 자매가 될 수 없다.

 

내가 충분히 인식하고 증거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공급하기 위해 나는 항상 자기 심판 아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집회를 위해 적극적으로 기도하는 데 짧은 시간만을 보내는 반면 내 자신을 형편없고 가치 없고 육적이고 천연적인 자로 심판하는 자기 심판에는 긴 시간을 보낸다. 때때로 나는, 『오 주여, 제가 제 육신을 떠나 당신의 말씀을 공급할 수 있는 때가 언제 오리이까?』라고 말하며 한숨짓고 신음하기도 한다. 내가 여러분에게 공급하면서 여기 서 있을 때 나를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지 말라. 아니다. 나는 너무나 형편없다. 우리가 천연적인 생명과 옛 창조 안에 있는 한, 우리는 불쌍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 아래서 섬겨야 하며 하나님의 심판의 인식 아래 사역해야 한다. 나는 이미 심판받은 자이다. 나의 천연적인 사람과 나의 육과 내 자신은 모두 이미 하나님께 심판받았으며 나는 여전히 이 심판 아래 있다. 우리에게 이러한 인식이 있을 때 그때 우리는 놋이 된다.

 

놋이 빛을 내기는 하지만 거기에는 전혀 영광이 없다. 반대로, 금이 빛을 내는 데에는 영광이 있다. 놋이 빛을 내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음을 의미한다. 장로가 놋과같이 빛을 낼 때 그는 이미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었고 여전히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장로이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금등대가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내는 놋기둥이다.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기둥이나 인도자가 되고자 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어야 한다. 성령이 이것을 당신에게 말씀하시기 바란다. 하나님의 성전 안에는 아무런 교만도, 자기 자랑도 없다. 하나님의 성전의 기둥들은 놋으로 만들어진다. 부담을 지는 사람들은 심판받은 사람들이다. 모든 장로들은 이미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었고 여전히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형제들이다. 더 나아가, 이 심판은 그들 자신에게 완전히 인식된다. 그들은 그들이 죄 많고 타락하고 부패하였으며 그들 안에 아무런 선한 것이 없고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아무 것에도 자격이 없으므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음을 인지한다.

 

나는 이 말을 거듭거듭, 또 거듭하여 반복할 수 있다. 당신은 기독교 안에 왜 그렇게 많은 싸움이 있는지 아는가? 그것은 놋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심판이 전혀 없다. 오히려, 그곳의 모든 「기둥들」은 나무기둥들이다. 합당한 교회 생활 안에서 더 많은 책임을 질수록 당신은 당신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음을 더 많이 인식해야 한다. 당신은 단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놋일 뿐이다. 한순간도 이 심판으로부터 당신 자신을 풀어놓지 말라. 대신, 당신은 하나님의 심판의 인식 아래 남아 있어야 하고 놋과 함께 머물러야 한다.


d. 각각 십 팔 규빗의 높이

 

그 기둥들의 『고는 각각 십 팔 규빗』이었다(왕상7:15). 앞으로 보겠지만 각 기둥의 원주는 십 이 규빗이었다. 십 팔 규빗은 십 이 규빗에 셋을 곱한 것의 절반이다. 다른 말로, 십 팔은 세 개의 완전한 단위의 절반이다. 그 세 단위는 바로 우리 안으로 분배된 삼일 하나님을 의미한다. 기둥이 되려면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을 심판해야 하고, 그리고나서 삼일 하나님으로 채워지고 적셔지고 침투되어야 한다. 왜 각 기둥이 세 개의 완전한 단위의 절반인지를 의아해하고 있을 때 주님은, 『어리석은 사람아, 장막 안에 서 있는 널판은 각각 그 너비가 일 규빗 반이라는 것을 말하는 메시지를 여러 번 네가 전하지 않았느냐? 너는 어떤 널판도 흘로 서 있을 수 없고 서로서로 지탱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그것이 기둥들에 있어서도 동일하다는 것을 보지 못하느냐? 두 널판이 서로 함께 지탱하여 완전한 세 규빗을 만들듯이, 두 기둥도 그렇게 완전한 세 단위를 만든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때 나는 『주님, 이제 이해합니다.』라고 말했다.

 

기둥이 되려면 삼일 하나님으로 채워지고 적셔지고 침투되어야 한다. 그러나 당신이 아무리 많이 하나님으로 채워진다 할지라도 당신은 여전히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기껏해야 당신은 반쪽이다. 당신은 결코 하나님을 온전히 소유할 수 없다. 당신 안에 계신 바로 그 하나님이 당신의 형제 안에도 계신다. 당신은 하나의 온전한 단위가 아니므로 당신을 온전케 하려면 다른 사람들을 필요로한다. 모든 영적 거인들은 그들이 개인주의적으로 온전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사람이 반쪽에 지나지 않음을 계시한다. 장막 안의 지탱하는 널판도 반쪽이었고(출26:15-16), 성전의 각 기둥도 반쪽이다.

 

이 말을 들을 때 어떤 사람은, 『이 형제님 성경을 비유하시는군요.』라고 말할지 모른다. 내가 비유하고 있다 해도 나는 비유할 근거를 가지고 있다. 왜 성경은 기둥의 높이를 십 칠 규빗이나 십 구 규빗이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만일 기둥의 높이가 이러하다면 비유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아니다.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님께 묻고 있었을 때, 그분은 내게, 말씀의 이 부분에서 십 이가 온전한 단위이며 십 팔은 한 단위 반임을 보여 주셨다. 이것은 우리가 삼일 하나님으로 충만케 될지라도 하나님은 결코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다 맡기지는 않으실 것임을 가리킨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많이 얻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다 얻지 못한다. 우리는 단지 한 부분일 뿐이다. 우리에게는 또다른 한쪽이 필요하다. 내게는 당신이 필요하고 당신에게는 내가 필요하다.

 

주님은 항상 그분의 제자들을 둘씩 내보내셨다(막6:7, 눅10:1, 행13:2). 나는 삼십 육이라는 수가 아니다. 기껏해야 나는 십 팔이라는 수이다. 당신의 키가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당신은 당신이 단지 십 팔 규빗이고 당신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필요함을 인식해야 한다. 『나는 완전하고 온전하다. 여러분 모두에게는 내가 필요하지만 내게는 여러분이 필요하지 않다.』라고 말하지 말라, 이렇게 말하는 것은 어리석다. 기껏해야 우리는 단지 십 팔 규빗들일 뿐이다. 어떤 자매들은 하나님으로 충만되는 것에 관하여 꿈을 꾼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그분으로 충만된다 할지라도 그들은 결코 반 단위 이상일 수 없다. 그들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필요하다.


e. 십 이 규빗의 둘레

 

이제 우리는 기둥들의 원주에 이르렀다. 열왕기 상 7장 15절은, 『각각 십 이 규빗 되는 줄을 두를 만하며』라고 말한다. 이 구절을 구성하는 말은 매우 특이하다. 원주를 말하는 대신 이 구절은 「십 이 규빗 되는 줄」이 기둥들을 두른다고 말한다. 비록 이 번역이 정확하지 않다 할지라도 축어적인 번역이다. 그것은 어느 정도 해석을 하고 있다. 어떤 번역은 「열 두 규빗의 원주」라고 번역한다. 나는 이 간단한 번역을 더 좋아한다. 그러나 성경에는 쓸데없는 말이 전혀 없다.

 

우리는 이 구절의 실지적인 구성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것은 기둥들의 둘레를 측정하기 위한 줄로 실을 사용하였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한 행정 안에서 그분과 연합되는 것의 온전함과 완전함을 우리에게 새기기 위함이다. 삼(3)과 사(4)를 더하여 구성되는 숫자 칠(7)은 이 시대 안에서 하나님의 움직임의 완전함과 온전함을 상징한다. 이것은 덧셈의 문제이다. 그러나 삼과 사를 곱하여 구성되는 숫자 십 이(12)는 곱셈의 문제이며, 이는 피조물이 삼일 하나님과 연합된 것과, 이 연함이 하나님의 영원한 행정 안에서 온전하고 완전함을 가리킨다. 기둥들은 정사각형이나 직사각형이나 삼각형이 아니다. 그것들은 둥글고 원형이며 이는 그 완전함이 영원하다는 것을 상징한다.

 

놋, 십 팔 규빗의 높이, 십 이 규빗의 원주를 함께 놓을 때, 우리는 기둥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어야 한다는 것과 충분하고 철저하고 완전하게 하나님으로 적셔쳐야 함을 본다. 우리는 놋이어야 하고 둘레가 십 이 규빗이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온전히 하나님과 연합된다 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반쪽일 뿐이다. 우리에게는 또다른 반쪽이 필요하다. 어떤 장로가 이와 같다면 그는 틀림없이 뛰어난 장로일 것이다. 어떤 인도하는 자매가 이와 같다면 그녀는 가장 우수한 자매일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확실히 책임을 질 수 있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 자신을 정죄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옹호하고 정당화하고 인정하고 변명한다. 종종 우리는, 『그것은 제 잘못이 아닙니다. 아무개 형제의 잘못입니다. 저는 늘 조심합니다. 저에게는 잘못이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자기 옹호이다. 우리 자신을 옹호한 뒤 나아가 우리는 자신을 정당화하고 인정한다. 우리가 이미 우리 자신을 인정한 까닭에 우리는 시험받을 필요가 없다. 우리의 눈에, 우리 자신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는 실수에 빠진다. 그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변명하며, 『집회가 너무 길고 제가 피곤한 까닭에 그런 실수를 했군요.』라고 말할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우리 자신을 위한 비상구를 만드는지!

 

우리에게는 자기 옹호, 자기 정당화, 자기 승인, 자기 변명이라는 네 개의 큰 비상구가 있다. 우리가 실수한 때에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 자신을 변명한다. 예를 들면 어떤 자매는, 『가장 좋은 타자기들은 다른 사람들이 사용하고 제일 형편없는 타자기가 제 차지가 되어서 타자가 형편없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과거에 나는 많은 자기 옹호와 자기 정당화와 자기 승인과 자기 변명을 경험하였었다.

 

남편이나 아내는 다툴 때에 좀처럼 먼저, 『미안해요. 이것은 내 실수입니다. 제발 나를 용서하세요.』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내는, 『왜 제가 제 남편에게 그렇게 강한지 아세요? 그가 언제나 늦기 때문이예요. 우리 결혼 생활 내내 그의 지각은 늘 제 골치를 썩여 왔답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면 남편은, 『제 아내는 결코 저를 동정하는 법이 없습니다. 저는 바쁘고 할 일이 무척 많죠. 제가 이렇게 과로하는데 어떻게 늦지 않을 수 있나요?』라고 말할 것이다. 이것은 자기 옹호요 자기 정당화요 자기 인정이요 자기 변명이다. 우리가 이러한 네 가지를 매일 십자가에 못박는다면 우리의 가정 안에서 무슨 일을 하든 결코 싸움이 없을 것이다.

 

우리가 다만 사(4)라는 숫자가 되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 우리는 사(4)에 삼일 하나님을 더한 칠(7)이라는 수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여전히 초기이며 완성인 십 이는 아니다. 십 이라는 수가 되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으로 충만되고 적셔지고 연합되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으로 온전히 적셔지고 연합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행정을 위해 합당하다. 그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지적했듯이, 십 이(12)라는 숫자가 된 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높이가 십 팔(18) 규빗일 뿐이다. 우리는 단지 반쪽의 단위일 뿐이다.

 

우리가 모두 이러하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 싸우는 대신 우리는 자신을 정죄하며, 『주님, 저에게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저는 십자가에 못 박혔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 내가 아니요 나와 함께 하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이것이 놋이요 심판이며 열 두 규빗이요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이다. 우리는 기껏해야 반쪽일 뿐이므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경륜과 행정을 위해 다른 사람들이 필요하다. 당신이 이러한 관점 위에 기도한다면 당신은 이것이 하나님의 집 안에서 책임을 질 수 있는 기둥임을 볼 것이다.


f. 두 기둥머리

 

각 기둥의 꼭대기에는 다섯 규빗 높이의 기둥머리가 있었다(왕상7:16). 그 기둥머리들은 그 기둥들의 꼭대기를 덮은 덮개였다. 각 기둥머리의 높이가 여섯 규빗이나 일곱 규빗이 아닌 다섯 규빗이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우리가 여러 차례 지적했듯이, 성경 안에서 오(5)라는 숫자는 책임을 의미한다. 당신의 손을 생각해 보라. 네 개의 손가락과 엄지 손가락은 책임을 지는 것을 말하고 있다. 만일 우리에게 네 손가락만 있다면 우리는 합당한 방법으로 책임을 질 수 없다. 사(4)라는 숫자는 피조물을 의미하며 일(1)이라는 숫자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의미한다. 유일하신 하나님이 사람에게 더해질 때 우리의 수는 오(5)가 된다.

 

예를 들어 십계명은 돌판에 다섯씩 무리지어 기록되어 있었으며 열 처녀는 다섯의 지혜로운 처녀와 다섯의 어리석은 처녀로 나뉘어져 있다. 그러므로 다섯 규빗 높이의 두 기둥머리는 책임의 감당을 가리킨다. 여러분이 이것을 나의 비유라고 말한다면 나는 비유할만한 근거를 가졌노라고 대답하겠다. 기둥머리의 높이가 네 규빗 반이 나 여섯 규빗이 아니라 다섯 규빗이기 때문이다. 두 기둥머리를 합한 높이는 열 규빗이 된다. 십(10)이라는 숫자는 책임에 있어서의 충만을 의미한다. 십계명도 열 처녀도 충만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십이라는 숫자는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책임의 충만함을 계시한다. 일을 하기 위한 우리의 열 손가락과 움직이고 걷기 위한 우리의 열 발가락이 이것을 가리킨다.


g. 바둑판 모양으로 얽은 그물과 사슬 모양의 땋은 것

 

열왕기 상 7장 17절은, 『기둥 꼭대기에 있는 머리를 위하여 바둑판 모양으로 얽은 그물과 사슬 모양의 땋은 것을 만들었으니 이 머리에 일곱이요 저 머리에 일곱이라』고 말한다. 바둑판 모양으로 얽은 그물과 사슬 모양의 땋은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많은 번역들을 참고한 후, 나는 바둑판 무늬로 얽은 것[(checkerwork), 바둑판 모양의 축어적인 번역-역자 주]이 격자, 곧 작은 네모진 구멍들이 있어 덩굴들을 지탱해 주는 틀과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더 나아가 이 구절의 「세공(work)」이라는 말은 도안(design)을 함축한다. 그러므로 바둑판 무의로 얽은 것은 바둑판 무늬의 도안이고 사슬무늬의 땋은 것은 사슬 무늬의 도안이다. 앞으로 보겠지만, 이 바둑판 무늬의 도안은 백합들의 성장을 위한 것이다. 이 격자(格子)는 백합들을 위한 장치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백합들을 지탱하는 그물이다. 사슬 무늬로 땋은 것은 마치 기둥머리의 외부를 에워싸는 화환과 같다.

 

이 모든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기둥머리의 높이인 다섯이라는 수가 책임을 나타내며 둘과 다섯을 곱한 것이 책임의 충만을 의미함을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기둥머리 위에 왜 또 바둑판 모양으로 얽은 그물과 사슬 모양의 땋은 것이 있는가? 내가 이것을 이해하고자 하는 부담을 가지고 있는 동안, 주님은 이것이 얽히고 복잡한 상황임을 내게 보여주셨다. 가족 가운데서, 교회 안에서, 사역 안에서 기둥들로 말미암아 생긴 부담과 책임은 항상 복잡하고 얽힌 상황 안에 있다. 우리는 종종 이러한 상황들을 곧게 하려 하지만 하지 못한다. 당신이 한가지 말썽거리를 곧게 할 때 세 가지 다른 말썽거리가 들어앉을 것이다. 당신이 한가지 문제를 명료하게 하려고 시도한다면 상황은 더욱더 막연해질 것이다. 당신이 이해시키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더 많이 오해하게 될 것이다.

 

『지난 밤에 아무개 형제가 그 아내와 좋지 않았어요.』라고 말하지 말라. 만일 당신이 이같이 말한다면 말려들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설명하려고 노력할수록 더 많은 오해가 일어나고 오해는 더 무성해질 것이다. 수년 간의 체험을 통하여 나는 오해를 피하는 최선의 길은 가능한 한 말을 거의 하지 않는 것임을 배웠다. 당신은 당신의 아내에게, 『주님을 찬양하오.』라는 말도 하지 말아야 한다. 당신이 이 말을 하면 그녀는, 『당신은 왜 그렇게 영적인가요? 당신의 찬양이 나를 정죄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시나요? 당신은 주님을 찬양할 때 당신이 영적이고 내가 육적이라는 걸 말하고 있어요.』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교회 생활은 사슬로 둘러 싸인 바둑 무늬의 세공이요 장로 직분은 가장 강한 사슬이 있는 가장 복잡한 격자이다.

 

그가 어디로 가든지 그의 주위 사람들이 천사들과 같아야 한다는 관념에 사로잡힌 한 사람을 알고 있다. 그의 주위 사람들은 모두 매우 영적이어서 일찍 잠자리에 들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 말씀을 기도로 읽어야 한다. 모든 사람이 하늘에 속한다면 그때 이 지체는 행복할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의 마음에 그리는 곳은 지구상의 어디에도 없다. 많은 가정에서, 더러는 늦게까지 얘기하다가 아침 늦게까지 잠을 잔다. 깨자마자 어떤 사람은 밤새 창이 열려 있어 너무 추웠다고 불평하고, 더러는 너무 통풍이 안 되어서 질식할 것 같았다고 불평할지 모른다.

 

교회 지체들이 만나는 모든 상황은 바둑무늬로 얽힌 것이요 침과 가시들로 만든 관으로 둘러싸인 격자이다. 내게는 대가족이 있고, 또한 나는 커다란 교회 안에 있다. 내게는 많은 자녀들과 손자들과 많은 형제 자매들이 있다. 내가 어디에 있든, 타이페이에 있든 아나하임에 있든, 나는 바둑판 무늬로 얽힌 것과 사슬 무늬로 땋아진 것을 피할 수 없다. 어떤 의미에서, 아나하임은 멋있지만 바둑 무늬로 얽힌 것과 사슬로 가득하다. 심지어 천사들도 내가 계속적으로 얽히고 복잡한 상황 가운데 있음을 안다. 나의 자녀들과 교회 안의 형제 자매들로 인해 내게 생기는 모든 문제들은 나에게 바둑 무늬로 얽힌 것을 더 많이 만든다. 우리는 이 얽히고 복잡한 상황 가운데서 책임을 져야 할 뿐 아니라 그 가운데 살아야 한다.


h. 기둥머리들은 백합화 모양임

 

이러한 복잡한 상황 속에서 책임을 지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야 한다. 열왕기 상 7장 19절은, 『낭실 기둥 꼭대기에 있는 머리의 네 규빗은 백합화 모양으로 만들었으며』라고 말한다. 백합화는 하나님 안에 있는 믿음의 생활을 상징한다. 먼저 우리는 우리가 타락하고 무능력하고 자격 없다는 것과 또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고 우리 자신을 정죄해야 한다. 그리고나서 우리는 우리의 어떠함 혹은 우리가 할 수 있다는 것으로 인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어떠함으로 말미암지 않고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어떠하심으로 말미암아 존재하는 백합화여야 한다(마6:28,30).

 

오늘 땅에서의 우리의 삶은 그분께 달려 있다. 얽히고 복잡한 교회 생활 안에서 우리가 과연 어떻게 책임을 질 수 있는가? 우리 자신으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면 할 수 있다. 내 안에 사시는 분은 내가 아닌 그리스도시다. 이것이 백합화이다. 책임을 지는 분은 내가 아니라 그분이시다. 나는 내 자신으로 인해서가 아니라 그분으로 인하여 살며, 내 자신으로 인해서가 아니라 그분으로 인하여 사역한다. 여러분 자매들이 교회 안에서 어머니들이라면 여러분은, 『나는 교회 안에서 내 자신으로 인해서가 아니라 그분으로 인하여 어머니입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아가서 2장 1절과 2절에서 추구하는 이는, 『나는 골짜기의 백합화로다』라고 말한다. 그때 주님은,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구나』라고 답하신다.

 

도대체 어떤 건축가가 기둥머리 꼭대기에 백합화 모양이 있고 그 놋기둥머리를 떠받치고 있는 그러한 놋기둥을 설계하겠는가? 인간적으로 말해서 이것은 의미가 없지만, 영적으로 말해서 그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한편으로, 우리는 정죄받고 심판받은 놋이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살아 있는 백합화들이다. 놋은 『나는 죽고(Not)』를 의미하고 백합화는 『그리스도만(But Christ)』을 의미한다. 백합화들인 사람들은, 『지금 내가 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우리는 우리가 바둑판 무늬로 얽히고 사슬 무늬로 땋여진 것이 가득한 얽히고 복잡한 상황 속에서 불가능한 책임을 지고 있는 백합화들임을 알 수 있다. 장로들은, 『주님, 이 혼란들을 제하소서.』라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그들은 더 많은 말썽거리들을 기대해야 한다. 내가 깊이 확신하건대, 당신이 그 말썽거리들이 없어지도록 기도하면 할수록 더 많은 말썽거리들이 있을 것이다. 바둑 무늬로 얽힌 모든 것은 그 안에서 백합화들이 자라는 기초요 모판이다.

 

문맥에 따르면 땋은 것인 사슬 무늬의 세공은 장식의 형태였다. 그러나 이 장식은 복잡한 것들로 가득했다. 당신이 나의 가정에 올 때 모든 것이 분명하고 단순하리라 생각지 말라. 당신이 잠시 동안 나와 함께 있는다면 당신은 많은 말썽거리들과 불평들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내 가족의 아름다움이다. 그것은 땋은 것, 즉 화환이기 때문이다. 모든 장로들은 교회 생활이 마치 중국 두부가 토막마다 네모 반듯하게 잘려지듯이 명쾌하기를 바란다. 그들은 교회 안의 모든 것이 정확하고 좋기를 원한다. 이러한 곳은 오직 공동묘지 뿐이다. 합당한 교회 생활은 아나하임에서의 교회 생활처럼 바둑판 모양으로 얽힌 그물이요 사슬 모양으로 땋여진 것이다. 이곳이 장로들이 전부 책임을 지는 곳이다. 이것은 단순히 그 단락을 연구하여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이 부분을 우리의 체험의 빛 가운데서 해석함으로 말미암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i. 이백 개의 석류들

 

20절은, 『이 두 기둥머리에 있는 그물 곁 곧 그 머리의 공같이 둥근 곳으로 돌아가며 각기 석류 이백이 줄을 지었더라』고 말한다. 이백 개의 석류들로 인하여 주님을 찬양하라! 각 기둥머리 둘레에는 배와 같은 돌기(突起)가 있었다. 각 기둥머리 위의 돌기를 둘러싼 것은 각기 일백 개씩으로 된 두 줄의 석류들이었다. 이것은 생명의 부요함의 백 배의 표현의 두 배를 가리킨다. 당신은 얽히고 복잡한 상황 가운데 매일 책임을 지는 이러한 장로들을 접촉할 때, 그들이 석류들, 즉 생명의 부요함을 표현하고 있음을 볼 것이다. 모든 불평과 불만과 골치아픈 전화 호출들은 결국 석류들로 충만한 돌기를 형성하게 한다. 이 얼마나 놀라운가!


j. 기둥머리의 직경은 사 규빗임

 

각 기둥머리의 직경은 사 규빗이다(왕상7:19). 이것은 그 기둥들의 둘레를 말하는 십 이(12)라는 숫자가 삼(3)과 사(4)를 곱하여 구성됨을 가리킨다. 기둥의 둘레가 십 이 규빗인 반면 그 기둥 머리의 직경은 사 규빗이다. 이것은, 그 기둥머리가 있는 기둥들이 피조물인 사람의 수 사(4)이지만 그들이 삼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증가됨을 함축한다. 삼일 하나님과 연합되어 그들은 결국 십 이(12)라는 숫자가 된다. 당신이 이 모든 것을 나란히 놓는다면 그것이 매우 의미심장함을 볼 것이다. 그것은, 그들 자신을 심판하고 정죄하고 그들 자신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그들 자신으로 인하여 살지 않고 하나님으로 인하여 사는 까닭에 복잡한 상황 중에서 전부 책임을 질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결국 그들은 그들의 능력과 자격과 지식과 이해와 지혜를 표현하지 않는다. 그들은 석류들, 즉 이백 배의 생명의 부요함을 표현한다.


k. 두 기둥은 성전의 낭실 안에 서 있음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 두 기둥의 이름이 야긴과 보아스였음을 본다(왕상7:21). 야긴은, 『저가 세우리라』는 의미이며, 보아스는 『그 안에 능력이 있다』는 의미이다. 낭실 앞에 서 있는 이 두 기둥은 주님이 그분의 집을 세우시리라는 것과 참된 힘(능력)이 그 집 안에 있음을 증거한다. 오늘도, 교회의 건축은 이것을 간증한다. 열왕기 상 7장에 나타난 상세한 묘사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을 심판하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고 책임을 감당하고 생명의 부요함을 표현함으로써 하나님의 집 안에서 기둥이 될 수 있는 법을 본다.


위트니스 리
[창세기 라이프 스타디 83, "변화됨(6)", 한국복음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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