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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 아가서 5:2-6:14
I. 예루살렘 여자들의 문제(6:1)
이러한 간증을 듣고 나서 함께 가서 찾는 것은 자연스런 결과이다. 여기서 그녀들은 새 창조 안에서 새 창조의 새로움으로 충만한 한 사람을 본다. 여기서 그녀가 자랑하고 그녀가 인식한 그리스도는 일반적인 사람들이 지식적으로 전하고 말하는 그리스도와 많이 다르다. 그러므로 이상하게도 여기에는 능력이 있고 매혹하는 힘이 있다.
그녀들은 여전히 그녀를 칭찬해 「여자 중에 지극히 아름다운 자」라고 부른다. 동시에 그녀와 함께 가서 찾겠다는 뜻을 나타낸다. 그녀들의 문제는, 네가 그분이 그렇게 사랑스럽다고 하는데, 도대체 그분이 어디로 갔느냐는 것이다. 다음에 거듭된 그녀들의 질문은 「어디로 돌이켜 갔느냐」는 것이다. 그 말은 여자와 그녀의 사랑하는 자 사이에 간격이 있으므로 그분이 돌이켰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가리킨다.
그녀들의 뜻은, 네가 이전에 그분이 이렇게 사랑스러운 분이라는 것을 알았으므로 우리도 이제 그분을 찾고자 하는데, 그분이 어디 있는지를 네가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녀들은 참으로 이 여자가 언급한 사랑하는 자와 다른 사람의 사랑하는 자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음을 느낀다.
J. 여자의 대답(6:2-3)
2절에서 원래 이 여자는 이러한 어린 여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그녀들의 간구로 인하여 그녀의 사랑하는 자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녀가 그분의 인격을 묘사한 후 다른 사람을 도우려 할 때, 그녀는 갑자기 빛을 얻고 분명해져서 그녀의 사랑하는 자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녀는 뜻밖에도 그녀들에게, 『나의 사랑하는 자가 자기 동산으로 내려가 향기로운 꽃밭에 이르러서 동산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며 백합화를 꺾는구나』라고 말할 수 있었다. 이 「자기 동산」은 그녀 자신이다(4:16, 5:1). 그녀는 갑자기 분명해졌으며, 그분이 결코 다른 곳에 가시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하늘로 올라갈 필요가 없고 음부로 내려갈 필요도 없다. 주님은 그녀를 멀리 떠나지 않으셨고, 그녀의 입에 계시며 그녀의 마음에도 계신다.
그분이 비록 그녀가 순복을 더디할 때 돌이켜 가버리신 것 같지만, 이것은 그녀의 느낌에서 그분이 사라지심으로 그녀로 하여금 느낌에서 그분이 숨었을 때의 고통을 조금 느끼게 하려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사실상 그분은 그녀의 마음에 계신다. 사실 그녀는 그렇게 당황할 필요 없이 다만 한면으로는 그녀의 사랑하는 자에게 열고 또 한면으로는 자기의 실패를 시인하고 용서를 구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분의 임재가 그녀에게서 멀어진 것같이 느껴졌을 때, 그녀는 조용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그분은 여전히 그분 자신의 동산에 계시며 합당한 때가 되면 다시 새롭게 나타나신다는 것을 믿어야 했다. 그녀가 비록 소외를 느끼고 그분이 멀리 떠난 것처럼 느껴도, 그녀는 하나님의 말씀 위에서 그곳에 잠기듯이 안식해야 한다. 그녀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그녀 자신의 신실함을 능가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혈기의 열심으로부터 나온 추구는 결코 그녀를 회복시킬 수 없으며 또한 많은 때에 갈수록 혼돈하게 된다. 믿는이의 추구하지 않음은 항상 믿는이의 생명에 큰 상처를 가져다 준다. 그러나 믿는이가 혈기로 추구하는 것은 믿는이에게 더 깊은 상처를 가져다 준다. 그러므로 회복의 방법은 결코 여기에 있지 않다.
우리는 여기 여자가 회복되는 과정에서, 첫번째가 그녀의 간증임을 본다. 그녀는 결코 자신이 충성되지 않은 사람이므로 충성된 주님을 위하여 간증할 수 없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께 매혹되어 자기 자신에서 벗어났다. 그러므로 그녀는 그와 같이 자기의 주님에 대해 말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上)이다. 그분의 어떠하심, 그분의 은혜, 그분의 역사, 그분의 성실, 그분의 사랑을 생각할 때 자기도 모르게 잃었던 빛을 되찾게 되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거의 절망적인 가운데에서도 의외로 힘을 다해 다른 사람을 도왔다. 비록 그녀 자신은 이미 교통을 잃은 것 같으나, 그녀는 오히려 다른 사람이 그분의 귀함을 알고 그분과 교통을 갖기를 원했다. 그녀의 말함이 비록 이전의 계시이지만, 믿는이가 서로 주님을 이야기할 때 주님이 어찌 옆에서 조용히 듣지 않으시겠는가? 그녀가 비록 굶주렸지만 다른 사람은 그녀보다 더 굶주렸다. 그녀가 다른 사람을 배부르게 하여 만족시켰을 때, 자기도 모르게 그녀 자신도 만족케 되었다. 여기서 당신은 다시 한번 그녀가 얼마나 자신에서 벗어났는지를 본다.
그녀의 병의 증상은 곧 영 안의 어두움과 가라앉음이었다. 그녀가 주님께 매혹되어 자신에서 벗어날 때, 그녀의 병의 증상이 모두 사라졌다. 그녀가 분명해질 때, 그녀는 예루살렘 여자들에게 말한 것 같지만 사실은 자신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비록 느낌에서 그분이 멀리 떠난 것처럼 여겼으나 오히려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그분이 여전히 그분의 동산에 계심을 발견했다. 이 동산은 단수이므로 그녀 자신을 가리키며, 아래의 동산은 복수이므로 모든 성도를 가리킨다.
그녀의 말의 뜻은 그분이 내 마음 안에와 모든 성도들 안에 계시다는 것이다. 「밭」도 복수이므로 같은 뜻을 갖고 있다. 「향기로운 꽃밭」은 앞에서 한 번 사용되었는데, 두 뺨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뜻은, 주님이 그분의 동산 안에서 그분의 아름다운 실과를 먹는 동안 또한 그곳에서 그분의 믿는이를 감상하신다는 것이다. 그분은 그분의 믿는이들의 마음 가운데서 그들을 목양하시며, 또한 그곳에서 그분 자신의 기쁨을 위하여 백합화 곧 일체 순수하게 그분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을 모으신다.
3절에서 그녀가 이것을 보았을 때, 그녀는 비록 모든 것이 변했지만 그녀와 주님 사이의 약속은 결코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그녀는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녀의 체험이 지금보다 더 얕았을 때, 그녀는 교통의 느낌으로 충만했기 때문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분께 속하였다』(2:16)고 말했다. 그녀의 마음이 달콤한 느낌으로 충만했기 때문에, 주님이 그녀의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앞에서 말한 것과 완전히 다르다. 느낌이 이전만큼 그렇게 많지 않고 오히려 그 반대일 뿐이다. 그러나 그녀는 매우 깊게 주님이 여전히 그분 자신의 동산에 계시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그녀는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다」고 말하며, 그로 인해 또한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전의 근거는 느낌이었으나 현재의 근거는 바로 믿음이다. 그녀의 마음은 자연스럽게 자기에게서 주님께로 옮겨졌다.
그분은 여전히 예전과 같이 『백합화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신다』(2:16). 그분이 이전에 어떠했다면, 지금도 여전히 그처럼 그분의 양무리를 먹이신다. 그분이 이전에 그곳에서 그분의 양떼를 먹이셨다면, 그분은 현재도 그곳에서 그분의 양떼를 먹이신다. 그녀는 이제 어떻게 이 영원하고 견고한 주님을 앙망하며 기복이 심한 자신의 느낌을 따르지 않는가를 배웠다. 평소에 따르지 않을 뿐 아니라 실패했을 때에도 따르지 않는 것이다.
Ⅱ. 장막 안의 생활(6:4-14)
A. 사랑하는 자의 칭찬(6:4-9)
그녀가 이러한 단계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아주 자연스럽게 주님이 그녀에게 그녀에 대해 만족하신다는 표시를 하고자 하심을 보아야 한다. 우리는 다시금 이 아가서가 말하고 있는 것을 상기해야 하는데, 그것은 곧 한걸음 한걸음 앞으로 나아가면서 더욱 긴밀한 연합을 갖는다는 것이다. 연합의 목적은 교통이며, 교통은 동일시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여자가 왕에게서 본 모든 것은 여자가 왕 안에서 체험한 것이다. 왕이 여자에게서 보는 것은 왕의 생명이 여자에게서 어떻게 나타나는 가이다. 그러므로 왕의 칭찬은 믿는이가 주님과의 연합으로 인하여 이렇게 많이 얻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에 불과하다.
4절에서 주님은 이제 하늘의 성소의 관점에서 그분의 믿는이를 보신다. 그러므로 이것은 장막 안의 일이다. 주님이 일찍이 그녀의 어여쁨과 고움을 말씀한 적이 있으나, 여기서는 그녀의 어여쁨과 고움이 이전보다 더 제한적이므로 그분은, 『너의 어여쁨이 디르사 같고 너의 고움이 예루살렘 같고』라고 말씀하신다.
「디르사」는 왕궁이 있는 곳이다(왕상 14:17). 「예루살렘」은 큰 임금의 도시이다. 디르사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인 하늘의 성소를 대표하고, 예루살렘은 하늘에 속한 예루살렘을 대표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이제 여기서 우리의 하늘에 속한 본질과 우리의 성소 안의 생활을 살펴보고 계심을 본다. 그 예루살렘 안에는 곱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고 그 디르사 안에는 어여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는데, 이는 이 두 가지 모두 하나님의 새 창조이기 때문이다. 이 믿는이는 오늘날 이미 장래의 성소의 어여쁨과 고움을 나타낸다.
「엄위함」은 「무서움」으로 번역될 수 있다. 군대가 전쟁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무기이며, 승리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깃발이다. 만일 전쟁에 진다면 풀이 죽고 기가 꺾여 깃발을 내릴 것이다. 그러므로 기치를 벌이는 것의 의미는 승리의 영광이다. 여기의 뜻은, 그녀가 주님 앞에서는 어여쁘고 고운 것이 마치 하늘의 성과 같이 견고하고 성소같이 고요하며, 또한 대적과 세상 사람 앞에서는 그녀의 승리의 영광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장막 안의 생활은 주님 앞에서의 생활일 뿐 아니라 대적 앞에서의 생활이다. 왜냐하면 성도가 거하는 하늘은 여전히 대적이 와서 공격하는 하늘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믿는이에게 단지 하늘에 속한 아름다움만 있고 전쟁의 성질은 없기를 결코 바라지 않으셨다. 하늘에 속한 전쟁은 주님 앞에서 한 번도 잊혀진 적이 없다.
믿는이는 마땅히 사랑스러워야 하지만, 엄위하기도 해야 한다. 오늘날 믿는이들은 주님 앞에서는 그의 사랑스러움을 잃었으며, 대적과 세상 사람 앞에서는 그의 엄위함을 잃었다. 사람이 참으로 우리를 두려워하는가? 성경은 자주 주님을 엄위하신 분으로 말하는데 이것은 주님의 거룩함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자신을 거룩하게 지켜 승리한다면, 많은 때에 당신은 대적이 물러나고 세상 사람이 감히 들어오지 못하는 것을 볼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믿는이들은 오히려 그들의 엄위함을 희생시켜 사람과 귀신에게 그다지 무서운 존재로 보지 않게 되었다.
5절의 전반부는 일종의 시적인 표현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랑의 굳셈, 곧 눈에 나타난 애정을 본다. 「나를 놀래니」는 「나를 이기었으니」로 번역해야 한다. 여기서 주님은 결코 믿는이의 사랑을 거절하지 않고 도리어 속으로 격려하고 칭찬하신다. 그분이 어떻게 수로보니게 여인을 거절하셨으며(막 7:25-29), 어떻게 이틀을 더 늦추어 유대로 올라가셨으며(요 11:5-7), 어떻게 모세에게 『나대로 하게 하라』(출 32:10)고 말씀하셨으며, 어떻게 야곱으로 자신을 가게 하라고 하셨는가(창 32:26). 그분은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거절의 말로써 사랑을 격려하고 계신다. 여기의 「보다」라는 단어는 시선을 돌리지 않고 주시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랑의 표시일 뿐 아니라 사랑의 견고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분은 여기서 마치 그분의 약함을 나타내시는 것 같은데, 이 약함은 그분이 여러 차례 사랑하는 자 앞에서 나타내신 것이다. 그분은 여기에서 암시적으로 그분이 사랑하는 자 앞에서는 얼마나 의지할 것이 없고, 정복당하고, 저항할 수 없는가를 우리에게 보여 주신다. 무릇 주님이 거절하는 것 같고, 늦추는 것 같고, 사양하는 것 같으며, 여기서 대항하여 이길 힘이 없으신 것 같음을 인식하는 것이 주님의 길을 아는 사람이다.
5절부터 7절에서 「머리카락」은 여전히 헌신의 능력을 말한다. 「이」도 여전히 받아들이는 능력을 말한다. 「장막 안의 두 뺨」(원문 참조)도 이전에 말한 대로 감추인 아름다움을 말한다. 여기의 칭찬은 4장 1절에서 3절까지의 칭찬과 같으나, 오히려 우리에게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보여 준다.
(1) 주님의 사랑은 변치 않는다는 것이다. 비록 여자가 지연시키는 실패를 할 수 있고 그녀의 죄가 흑암의 죄일지라도, 주님은 여전히 예전같이 그녀를 대하신다. 주님은 그녀의 의심 즉 주님이 그녀를 대하시는 것이 아마도 변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제해 버리려고 그녀에게 똑같은 말을 다시 한 번 하시는 것이다. 매번의 실패 후에 믿는이가 가장 잃기 쉬운 것은 확신하는 믿음으로서, 자신과 주님 사이의 관계에 대해 오해를 하게 된다. 많은 때에 우리는 자기가 얼마나 의심이 많은 자인지를 알지 못한다. 주님의 똑같은 말의 반복은 이러한 것을 처리하기 위한 것이다.
(2) 영적인 체험이 한 단계 더 높아졌을 때, 그러한 많은 체험들을 여전히 간직해야 한다. 분별된 헌신, 받아들이는 능력, 감추인 생활이 어렸을 때 필요하다면 자랐을 때에도 똑같이 필요하다. 어떤 영적인 체험은 진보할 때 변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 있는 것과 어떤 영적인 체험은 자란다고 해서 변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러한 체험들이 한 단계 더 높아질 때 한 단계 더 깊은 체험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 자신의 영적인 노정에서 많은 중복된 공과를 배워본 적이 있지 않는가? 그러나 후에 배운 것은 처음에 배운 동일한 공과에 비해 더욱 완전하다. 체험은 비록 같지만 한 단계 한 단계 배우는 것이 있다.
8절의 이러한 사람들은 모두 솔로몬과 관계 있다. 세상적으로는 이러한 일이 사악한 것이겠지만, 영적인 의미와 영적인 예표를 분명히 아는 사람은 여기서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을 볼 것이다. 우리의 주님이 얻으신 것은 전체 교회의 믿는이이다. 단체적으로 말한다면, 어린양의 아내는 하나뿐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말한다면, 그분에 대한 애정의 정도는, 또는 그분의 관계의 정도는 믿는이마다 다른데, 어떤 것은 그분의 왕후 같고, 어떤 것은 그분의 비빈 같고, 어떤 것은 그분의 시녀 같다.
아담, 이삭, 모세는 모두 그리스도가 어떻게 단체적인 아내를 얻으시는가를 예표하며, 솔로몬은 그리스도가 개인적인 믿는이에 대해 어떠하신가를 예표한다. 여기서는 성결과 영적인 행동이 주님을 대표하기 어려운 것 같으며, 오히려 불의한 것이 하나님을 대표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이 예표하는 바는 오히려 그분의 불의가 아니다. 도적이 주님을 예표할 수 있으나, 그것이 예표하는 바는 물건을 훔치는 것일 뿐이다. 무릇 지혜 있는 사람은 여기에 대해 모두 분명해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믿는이와 주님과의 관계가 체험적인 면에 있어서 반드시 다 같은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어떤 것은 왕후 같고, 어떤 것은 비빈 같고 어떤 것은 시녀 같다. 어쨌든 그녀들은 다 왕과 사랑의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녀들은 주님을 추구하는 사람인 이 여자에는 미치지 못한다.
『나의 비둘기, 나의 깨끗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 그녀의 어미의 독생자요 그 낳은 자의 가장 뛰어난 자로구나』(9절. 다른 번역). 여기서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것은,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 누가 참으로 그분의 마음을 만족시킬 수 있느냐는 것이다. 주님이 보시기에는 그녀가 유일한 사람이다. 이것은 결코 그녀와 같은 사람이 단 한 사람 뿐이라는 말이 아니고, 주님의 안목에서 그러한 사람은 단 「하나뿐」인 사람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그녀는 완전히 성령 안에서 살므로 참으로 비둘기이다. 그녀는 또한 세상과 완전히 분별되었으므로, 그분의 참된 「깨끗한 자」이다. 그녀는 은혜로 산출된, 유일하게 완전한 사람인 것 같다. 그녀는 은혜의 독생자인 것 같다. 은혜의 역사의 결과 가운데 그녀가 가장 뛰어난 자 같다.
은혜의 자녀란 결코 하나님의 넓고 큰 사함을 입은 사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의 마음에서 역사하시는 모든 것이 다 은혜의 역사이다. 은혜의 의미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은혜를 많이 입은 사람은 하나님이 그를 위해 역사하신 것이 많은 사람이며, 은혜를 조금 입은 사람은 하나님이 그를 위해 역사하신 것이 많지 않은 사람이다.
하나님에게는 은혜가 있지만, 사람이 반드시 하나님께서 완전히 역사하시도록 허락해 드리는 것은 아니다. 자기로부터 나온 모든 것은 율법이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모든 것은 은혜이다. 은혜의 자녀는 교회 안에 가득하지만, 은혜가 완전한 단계에 이르도록 역사한 사람은 단 한 사람밖에 없는 것처럼 희귀하다는 것이다. 은혜의 독생자는 그녀 한 사람뿐이라는 말이 결코 아니며, 다만 그녀가 가장 뛰어나다는 것뿐이다(주님과 완전히 연합한 사람은 다 주님의 것인데, 이것이 독생자의 의미이다. 왜냐하면 완전히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딸들이 그녀를 보고 복된 자라 하고』(「여자들」은 마땅히 「딸들」로 번역해야 한다.). 많은 믿는이들이 자신은 비록 완전히 주를 위한 사람이 아닐지라도, 누가 완전히 주님을 위한 사람인지는 안다. 비록 그들 자신은 완전히 주님께 돌아갈 정도로 충분히 많은 생명을 얻지 못했지만, 그들 안에 완전히 주님께 속한 사람을 사모할 정도의 생명은 충분히 있다.
아마도 많은 사람이 자신은 비록 아직 완전히 순복하지 못하지만, 완전히 순복하는 사람을 칭찬할 정도의 순복의 체험은 충분히 갖고 있을 것이다. 딸들과 왕후와 비빈은 이 여자의 육체의 방면에 있어서는 아마도 탄복할 만하지 못하다고 느낄지 모르지만, 이 여자가 은혜를 받은 방면에 있어서는 오히려 그녀가 얼마나 복된지 깨닫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장막 안의 생활에 있어서, 사람 안에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나타난 모든 것은 다 귀하게 여겨져야 한다.
B. 여자의 영광(6:10)
여기서 성령은 제 삼자의 입을 빌어 가장 놀랍고 기이한 질문으로 이 여자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 같다.
이 네 가지 질문은 다 이 여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성령은 질문으로 믿는이의 생각을 격려하기를 기뻐하시며, 또한 그들의 주의를 일깨워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역사를 더듬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인식케 한다. 우리는 매번 성령이 질문을 할 때는 여자가 새롭게 온전케 함을 얻은 이후임을 본다. 3장에서 그러하고, 후에 8장에서도 그러하며, 여기서도 그러하다. 성령은 믿는이의 체험이 한 단계 더 높아 졌을 때, 질문을 사용하여 우리로 하여금 그 가운데의 과정과 원인을 알게 하시는 것 같다.
『아침 빛같이 뚜렷하며』. 이제 그녀는 이미 아침에 이르렀다. 여기의 「아침빛」이라는 단어는 앞에서 두 번 사용한 「날이 밝음」이란 단어와 그 뜻이 같다(2:17, 4:6, 원문 참조). 이제 그녀의 어두운 그림자는 사라졌고, 그녀와 주님과의 사이에 더이상 간격이 없다. 그녀는 이제 간격이 없는 그러한 생활을 시작한다. 비록 아직은 낮이 아니지만 이미 아침인 것이다. 그녀의 앞길은 아침빛과 같으며, 그녀의 소망도 아침빛과 같다. 그녀의 장래의 모든 것은 아침빛의 장래와 같은 것이다. 아침빛의 소망과 장래는 정오이다. 정오는 약속에 있어서 이미 그녀의 것이다(잠 4:18). 주님의 손 안에 있는 의인의 길은 정오에 이르러 멈추며, 결코 오후의 생활은 없다.
『달같이 아름답고』. 여기서 주의하는 것은 달의 차고 기우는 것이 아닌 달의 아름다움이다. 이것은 그녀의 그 온화한 밝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녀는 하늘에 속한 사람이지만, 오히려 땅을 비추어 흑암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녀의 간증을 보게 한다(시 89:37).
「해같이 맑고」란 안에 조금도 가린 것이 없으며 빛이 충만하다는 말이다. 달과 해는 모두 그녀가 얼마나 하늘에 속한 사람인가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달은 그녀가 자신 안에서 얼마나 은혜를 받은 사람인가를 가리키는 것이며 해는 우리에게 그녀가 주님 안에서 어떠한가를 보여 주는 것이다. 그녀 자신으로 말한다면, 그녀는 생명이 없고 기식도 없는 죽은 사람에 불과하지만, 마치 태양으로부터 생명과 빛을 얻는 달과 같다는 것이다. 달이 태양을 향할 때에는 빛이 있으나 태양을 등질 때에는 흑암이다. 그러나 그녀가 주님 안에 있는 것으로 말한다면, 그녀는 맑은 해이며 완전한 새 창조이며, 빛이 있을 뿐 흑암은 없다. 주님이 해이시듯이 그녀도 해이다.
『기치를 벌인 엄위한 군대같이』. 그녀에게는 소망이 가득한 미래가 있을 뿐 아니라 완전히 하늘에 속한 생활이 있으며, 그녀는 또한 항상 승리의 개가를 부르는 자이다. 그녀는 「기치를 벌인 군대」같이 엄위하며, 승리에 승리를 거듭하는 사람이다. 당신은 그녀가 누구인지 아는가? 당신은 그녀를 보았는가?
C. 이 단락은 현안(縣案)이라 할 수 있으며, 결론을 내리기 어려움(6:11-12)
11절의 「호도 동산」은 「육두구 동산」으로 번역해야 한다. 이 구절은 『골짜기의 열매를 보려고 포도나무가 무성한가 석류나무에 순이 났는가를 보리고 내가 육두구 동산으로 내려가니』라고 번역할 수 있다.
12절을 혹자는, 『부지중에 네 마음이 나를 기꺼이 원하는 백성(시 110:3, 참조)의 수레 가운데 두었도다』라고 번역한다. 「귀한」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데, 하나는 「왕권의 백성」이고 또 하나는 「기꺼이 원하는 백성」이다.
만일 이 두 구절이 여자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면, 「기꺼이 원하는 백성」이란 이 어구의 어려움을 제외하고는 한 가지 대답 같은데,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의 시작이 있는가 없는가, 진보가 있는가 없는가를 가서 볼 때 부지중에 네 마음이 나를 왕의 수레 가운데 두었다는 것이다(그러나 「기꺼이 원하는 백성의 수레」에는 왕만이 앉을 수 있다.).
D. 여자의 진보와 승리(6:13)
「술람미 여자」는 「평안의 여자」로서 「솔로몬」의 여성형이다. 「여자」라는 단어는 번역하지 않을 수 있다.
성령은 이제 제 삼자인 방관자들의 부름을 통하여 가장 열렬하게 그녀가 돌아와 그녀들로 그녀를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것 같다. 그녀는 이제 전차에 앉아서 계속 전진하고 승리하며, 거침이 없고 장애가 없다. 이제 그녀들은 그녀를 한 번 봄으로 그녀가 이같이 전진하고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한다. 이 부탁은 한면으로 같이 추구하는 사람들의 마음의 뜻을 대표하는데, 왜냐하면 그녀들이 기꺼이 그녀가 계속 전진하는 이유를 알고자 하기 때문이며, 또 한면으로는 성령이 제 삼자의 부탁과 제 삼자의 대답을 통해 그녀의 뒤를 따르는 사람으로 하여금 역사를 위한 예비가 도대체 어떠한가를 알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성령은 제 삼자의 두 가지 어조를 통해 자신의 뜻을 표현해 내신다. 그분은 한 무리의 사람을 통해 부탁하게 하시고, 또 다른 한 무리의 사람을 통해 그녀들에게 대답하게 하심으로써 사람들로 술람미 여자가 역사를 위해 예비한 것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 인식할 기회를 갖게 하신다.
그녀는 이제 참으로 술람미인데, 이는 그녀와 솔로몬의 연합은 더이상 나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며, 또한 이제 그녀는 솔로몬의 역사를 이미 그녀의 역사로 삼았기 때문이다.
「마하나임」은 야곱이 하나님의 천사를 본 곳으로 「두 영(營)의 군대」라는 뜻이다(창 32:2). 그러므로 마하나임의 춤은 매우 열렬하며 충분히 사람을 매혹시킬 것이다. 춤은 승리의 표시이다(출 15:30, 삼상 18:6). 그러므로 마하나임의 춤 안에는 승리의 뜻이 들어 있다. 이 질문의 뜻은, 너희들이 왜 술람미 여인을 하늘에 있는 두 영(營)의 군대가 승리를 기념하는 춤을 추는 것으로 보았느냐이다. 술람미 여인에게 어떤 장점이 있기에 너희들이 그녀를 두 영(營)의 군대로 보았는가?
워치만 니
[워치만니 전집 2집 제 3권, 노래 중의 노래 제 4단락 "부활 후의 십자가의 부르심", 한국복음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