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성한 말씀을 누려요. ^^

  • 목록
  • 아래로
  • 위로
  • 0
  • 청지기
  • 조회 수 1259

이사야 45:15, 열왕기 상 19:9-18, 누가복음 24:13-37, 요한복음 20:11-29, 베드로 전서 1:8

 

여러분은 성경에서 이러한 진술-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을 주의해 본 적이 있는가? 나는 많은 형제 자매들에게 이 질문을 해봄으로써 하나님의 자녀들 중 어느 누구도 그분의 말씀이 그러한 표현을 담고 있다는 것을 거의 깨닫지 못한다는 것과 그들이 정말로 하나님을 그분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으로는 알지 못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들은 그분을 전능하신 하나님으로서, 의로우신 분으로서, 은혜와 긍휼이 풍성하신 분으로서는 알고 있지만 그분 자신을 숨기시는 분으로서는 알지 못한다.

 

이사야가 이 사상을 어떻게 표현했는지를 주의하라. 『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그의 진술들 중에 이 진술은 가장 힘을 준 것이다. 그는 그의 상상력의 결과인 공허한 말을 취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말함은 사실들의 축적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는 그 사실들을 살펴 보고 연구한 다음 이러한 결론-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에 이르게 되었다. 그가 하나님이 행하셨던 것들에 대해 보았던 것, 그가 관찰했던 것은 하나님의 수중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어난다는 것, 그가 하나님의 백성의 체험들을 지켜 본 것, 이 모든 관찰들이 그 선지자로 하여금 하나님을 그분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아니할 수 없게 했다.

 

왜 이사야가 이러한 결론에 이르렀는가? 여러분이 그의 책을 철저히 읽는다면 발견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들을 행하시고 그들의 사생활에서도 많은 일들을 행하셨지만 그분이 그분 자신을 숨기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끊임없이 일을 하시고 계셨지만 항상 숨으셨다. 매우 많은 것들이 그분에 의해 행해지고 있었지만 이스라엘 자손들은 행하시는 자가 누구인지는 전적으로 몰랐다. 이사야가 어느 날,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외쳤다.

 

우리의 인격은 하나님의 성품과는 정반대이다. 그분은 숨기시길 좋아하시지만 우리는 과시하길 좋아한다. 그분은 외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원하시지 않지만 우리는 그러한 것이 없이는 만족할 수 없다. 이 하나님의 기질은 큰 시험과 시련으로 우리를 조성한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었고』. 따라서 그는 이 시험을 견디지 못했다. 갈멜산에서 하나님은 분명 그와 함께 계셨지만 그분의 분명한 임재를 허락치 않으셨을 때 엘리야는 견딜 수 없었다. 그는 낙담하여 동굴 안으로 들어 갔다. 하나님이 그에게,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라고 물었을 때 그는,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 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라고 대답했다.

 

하나님은 엘리야의 어려움을 알고 계셨고 엘리야가 그분이 그분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이시길 원했음도 알고 계셨다. 그는 하나님이 그분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이심은 깨닫지 못했었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에게 하나의 증거를 주셨다. 크고 강한 바람이 일어났다. 엘리야는 『주님이 이 안에 계시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바람 안에 계시지 않으셨다. 바람에 이어 지진이 따랐다. 엘리야는 『주님이 틀림없이 이 안에 계시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님은 지진 안에도 계시지 않으셨다. 이어서 불이 있게 되자 엘리야는, 『주님은 소멸하시는 불이시니까 그 가운데 계시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불 안에도 계시지 않으셨다.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었는데 주님은 그 안에 계셨었다! 엘리야는 그분께, 『오직 나만 남았거늘』이라고 말했지만 주님은 아주 부드럽게,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칠천 명이 있단다. 엘리야야, 나는 내 자신을 숨긴단다. 너는 내가 그 칠천 명을 어떻게 보존했는지를 모르고 있었다.』라고 말씀하셨다. 엘리야는 그가 볼 수 있었던 것만으로 생각했었지만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바람 안에도, 지진 안에도, 불 속에도 계시지 않으셨고 몹시 작은 소리 안에 계셨다. 그분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칠천 명을 그분 자신을 위해 보존하셨었지만 그분의 행동은 그와 같이 감취어져 있었고 선지자인 엘리야조차도 그것에 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분의 일하심에는 숨기시는 본성이 있음을 깨닫기를 원한다. 힘있는 영향력들만이, 거대한 이상들만이 큰 계시들만이 그분께 속해 있다고 생각지 말라. 하나님의 가장 분명한 역사는 우리 존재의 비밀한 곳에서 이루어진다. 종종 그것이 작은 속삭임이나 보잘것 없는 영향력에 불과해서 우리는 그것을 우리 자신의 느낌과 거의 분간할 수 없다. 이것이 하나님의 가장 능력있는 활동 방법이다.

 

때때로 우리의 가장 깊은 속으로부터 어렴풋한 제안(나는 그것을 느낌이라고 해야 할지? 소리라고 해야 할지? 말이라고 해야 할지?)이 온다. 그 제안은 거의 말들이 아닌 말로, 『그것은 천연적인 생명이지만 십자가에 속한 것이다.』라고 이같이 어떤 것을 말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런 막연한 말들이 하나님의 가장 적극적인 행동의 증거들이다. 여러분은 이것은 하나님이 아니시고 그저 나일 뿐이라고 판단을 내릴지 모르겠지만 나는 여러분에게 이것이 그분의 가장 구체적인 말씀하심이고 행하심이라고 확언한다.

 

거의 이천 년의 교회 역사를 통해 교회를 보존해 온 것은 바로 그와 같은 하나님의 행동이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면 섬길수록 우리는 그분 안에 더 거하게 되고 하나님은 아주 조용한 분이어서 종종 그분의 임재는 발견되지 않음을 더 깨닫는다. 우리를 인도하시는 그분의 가장 친밀한 방법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그분이 우리를 인도하고 계신다는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다 할지라도 어쨌든 우리는 인도를 받고 있고 일은 발생하고 있다. 우리가 종종 가장 큰 인도를 받는 것은 바로 종종 하나님의 이 조용하고도 내적인 활동으로 인한다.

 

우주의 역사를 주의깊게 살펴 본다면, 구약과 신약의 역사를 주의깊게 살펴 본다면, 인류의 온 역사를 주의깊게 살펴 본다면 여러분은 동일한 결론-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이시다-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 우주가 그분에 의해 창조되었고 하늘과 땅은 그분의 손이 행하신 것들이지만 육천 년 동안 사람들이 이 모든 것을 지켜보아 오는 데도 하나님을 본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성경이 구약시대에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보지 못했다고 말하더라도 신약시대에는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그러나 이 독생하신 하나님이 아버지를 나타내려고 오셨을 때 인생-『상한 얼굴』을 지닌 인생, 『고운 모양도 풍채도 없는』 인생(사 52:14, 53:2)-안에 그분을 감추셨다. 또한 그분은 보잘것 없는 지방인 갈릴리에서는 어떤 선지자나 선한 사람도 나올 수 없다(요 1:46, 7:52)고 유대인들이 말한 작은 읍인 나사렛 출신이었다. 따라서 그분이 나타나셨을 때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그분 안에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믿기란 어려웠을 뿐 아니라 그분이 하나님의 선지자였다고 믿는 것조차도 어려웠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사렛 사람인 예수 안에 숨으셨다.

 

내가 언젠가 이것을 깊이 생각하고 있었을 때 그분 자신을 나타내시길 분명히 원하셨던 하나님이 창조로부터 구약 말기까지, 사천 년 동안 사람들에게서 그분 자신을 숨기셔야만 하셨던 것이 놀라운 일로서 떠올랐다. 따라서 그분이 신약시대에 사람들에게 그분 자신을 계시하시려는 특별한 목적으로 하늘로부터 땅으로 오셨을 때 한번 더 그분 자신을 숨기셨다. 즉 사람 안에 그분 자신을 숨기셨다. 그분은 나타나신 후에 숨으시고 그분 자신을 너무나 효과적으로 잘 숨기셔서 어느 누구도 도저히 그분을 인식할 수 없다. 그분은 그러한 방식으로 행하시길 좋아하시는 것 같다. 내가 그것을 그분의 기질이라고 말한다 할지라도 무례하지 않음을 그분이 알고 계시리라고 믿는다.

 

예를 들어 무엇을 하든지 대체로 삼가히 행하는 형제 자매들이 있다 하자. 만일 그들이 여러분에게 물 한 컵을 갖다 준다면 그들은 여러분이 창 밖을 내다보고 있을 때 기회를 노려 조용히 몰래 들어와서 물을 내려놓고 다시 몰래 나갈 것이다. 여러분이 되돌아서서 물 한 컵을 보지만 누가 그것을 거기에 두었는지는 전혀 모른다. 나는 그와 같이 일을 행하는 많은 형제 자매들을 만났다. 그들이 여러분을 위해 어떤 것을 행할 때는 그것을 아주 조용하고도 비밀스럽게 행하기 때문에 누가 그것을 행했는지 알지 못한다. 우리는 그것이 그들의 기질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전적으로 다른 기질을 소유하고 있는 형제 자매들이 있다. 그들은 항상 지나치게 과시한다. 만일 그들이 여러분에게 물 한 컵을 갖다 준다면 물을 내려놓기도 전에 여러분에게 소리가 들리도록 컵을 요란하게 다룬다. 그런 다음 걸어 나오면서 큰 소리로, 『아무게 형제, 물!』이라고 말한다.

 

언젠가 한 번은 자매들 중 한 명이 접대하는 자매로 정해져 있는 어떤 교회를 방문했다. 오! 그 자매만이 그 장소를 가득 채웠다. 그녀는 너무도 커서 온 교회를 덮어 가렸다. 나는 그녀의 시야로 인해 장로들이나 집사들이나 형제들이나 자매들을 발견할 수 없었다. 내가 보는 곳마다 그녀는 그곳에 있었다. 그녀가 여러분에게 어떤 것을 갖다 준다면 그녀는 항상 그것을 드러내면서 할 것이다. 형제 자매들이여, 나는 그것이 그녀의 기질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또한 여러분에게 우리의 하나님은 그와 같지 않으시다고 말하고 싶다. 그분은 결코 어떤 것도 과시하지 않으시지만 너무도 위대하시다. 그러나 그분이 그렇게 숨어 계시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우리는 그분이 위대하시고 대단히 위대하시며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하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분은 나사렛 예수라는 사람 안에 그분의 거처를 정하시기에 충분하도록 작아지셨다. 또한 이 사람은 가난한 가정에서 목수-아주 평범한 목수-로 성장하셔서 삼십 세까지 작은 규모로 일하셨다. 어느 누가 그분을 하나님, 무한하신 하나님이 내주하시는 분으로 생각이나 했겠는가? 참으로 그분은 그분의 공적인 사역으로 들어가신 후 때때로 표적과 기적을 행하시며 비범한 것들을 말씀하셨지만 그런 다음에는 뒤로 물러나서 그분 자신을 다시 숨기시곤 하셨다.

 

성경을 주의깊게 연구해 본다면 하나님께는 과시하길 싫어하시는 기질이 있으시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분은 공개적으로 하시기보다 오히려 비밀스럽게 하시길 좋아하신다. 그분은 우주를 창조하신 후 우리가 그분을 어느 곳에서 찾아야 될지를 모를 때까지 그분 자신을 우주 안에 숨기셨다. 그분이 그분의 거처를 사람 안에 정하셨지만 그 사람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분을 처음 만났을 때 사람들은 다만 나사렛의 예수라고 불리우는 한 사람을 보았다. 그분을 두번째 만났을 때 그들은 그분이 보통 이상의 지력을 지닌 한 사람임을 인식했다. 세번째 만났을 때 그들은 그분이 틀림없이 선지자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그분을 더 나중에 만났을 때는. 『오, 이 사람은 확실히 선지자 이상의 분이시다!』라고 느꼈다. 그러나 그분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발견한다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삼 년 반 동안이나 그분과 동행했던 그분의 제자들조차도 그분에 대한 참다운 인식에 이르지 못했다. 이 모든 것은 그분이 그분 자신을 끊임없이 숨기시고 계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 준다. 그분 자신을 잠시 동안 나타내시곤 하셨지만 그런 다음에는 다시 숨기시곤 하셨다.

 

언젠가 한 번은 변화산에서 그분은 그분 자신을 분명하게 계시하셨지만 다시 감추셨고 그분과 함께 있었던 세 사람에게조차도 그들이 보았던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 또한 그들은 변형에 대한 목격자들이었을지라도 후에 그들 스스로가 의혹과 믿음 사이에 마음이 흔들렸다. 그들이 당혹한 원인은 무엇이었는가? 이것은 바로 그분이 그분 자신을 계시하시자마자 그분 자신을 한 번 더 감추셨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온 세상에 확산되어 왔지만 자신의 눈으로 예수님을 실제로 지켜 보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기독교가 지구상에 그렇게 존재할지라도 예수님이 세상에 대해 숨어 계신다는 것은 놀랄 만한 사실이다. 형제 자매들이여 그것에 대한 놀라움이 여러분에게 충격을 주지 않는가? 주 예수님을 믿습니까? 『물론입니다』. 주 예수님을 사랑합니까? 여러분은, 『예, 그렇습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이방인들은 여러분에게, 『어느 곳에서 그분을 만났습니까?』라고 물을지도 모른다. 또한 그들만 질문들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스스로도 자문해 볼 것이다.

 

나는 이십여 년 전에 내가 속임당했는지를 의심해 본 적이 있다. 나는 예수님을 극도로 사랑했고 진정으로 그분을 믿었지만 그분을 결코 본 적이 없었다. 사람들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본 적도 없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가? 내 눈으로 결코 본 적이 없는 사람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나는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깜짝 놀란 일은 내가 의심하고 있는 바로 그때 나는 무릎을 꿇고서, 『오 주 예수님, 당신이 너무나 좋습니다. 당신은 너무나 신뢰할 만한 분이십니다.』라고 기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동안에도 나의 이 생각은 여전히, 『아마 내가 속았던 것일거야. 어디에 예수님이 계시는가? 너는 예수님을 본 적이 있느냐?』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 생각이 줄곧 질문하고 있는 동안에도 나의 마음은, 『오 주 예수님, 내가 얼마나 감사를 드려야 할지! 당신은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이제 나의 중보자로서 하늘에 계시며 당신의 성령은 내 안에 계십니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다만 생명의 그 두 흐름-의심하고 있는 겉 사람과 기도하고 있는 속 사람-을 보라! 종종 이 두 체험이 동시적이라는 것이 놀랍지 않는가?

 

왜 내가 이 한 가지 사항을 설명하는 데 그렇게 많은 시간을 투자했겠는가?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분과 우리와의 모든 교통 가운데서, 우리 생활에서의 그분의 모든 활동 가운데서, 그분의 방법들은 그분의 기질과 함께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우리의 친구들과 교제시, 우리의 기질들에 따라서 불가피하게 행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우리와의 모든 관계에서 그분의 기질에 충실하시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분의 기질인가? 그 자체를 감추시는 것이 바로 그분의 기질이다. 그분은 매우 활동적이시지만 매우 감추신다. 그분은 참으로 계시지만 너무나 잘 감추셔서 여러분이 그분의 임재를 전혀 의식하지 못할 수 있다. 언제라도 여러분이 그분을 인식하게 되면 그분은 그분의 행동을 바꾸시고 그 인식은 사라져 버린다.

 

우리의 주 예수님은 삼 년 반 동안 그분의 제자들과 친밀한 교통을 가지셨다. 그분은 그들이 그분을 하나님께서 내주하시는 사람으로 깨닫기 시작할 때까지 그분 자신을 그들에게 조금씩 알리셨다. 그들이 그때 그분을 얼마나 누렸는지! 그들은 그분을 보았고 그분을 만졌고 그들 중 한 사람은 그분의 가슴에 기대기까지 했다. 그들이 그분을 소유했다고 참으로 생각하는 바로 그때 그분은 갑자기, 『나는 떠나겠다!』라는 말씀으로 그들을 놀라게 하셨다.

 

그들 모두는 몹시 낙담했다. 이전에는 그들이 그분을 몰랐었지만 이제 그들이 그분을 알고 이제 그들이 그분을 누리고 이제 그들이 그분을 귀히 여기고 이제 그들이 참으로 그분을 영원토록 소유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때 그분이 그들에게서 떠나 가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분이 어떻게 그러실 수 있는가? 그러나 그분이 하신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그분의 제자들은 이전보다도 더 당황하게 된다. 『당신이 떠나가는 것이 무리에게 유익이라고요?』 『물론이란다』.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그분은 누구인가? 『그분』은 여전히 『나』이시다. 『나는 떠나갔다가 너희에게로 오겠다 나는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내가 너희에게로 오겠다』(요 14:18, 28, 16:5-16).

 

그분은 떠나가셨다가 다시 오셨는가? 물론 그러하셨다. 그러나 여기에 주목할 만한 사항이 있다. 그분이 떠나가셨을 때는 그들이 그 사실을 알았지만 그분이 다시 오셨을 때는 그 사실에 대해 몰랐었다. 그것은 놀랍지 않는가? 그분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사람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마리아가 그곳에 서서 울다가 『예수님이 서 계신것을 보았지만 그분이 예수님이신 것은 알지 못했다.』는 것을 여러분은 기억하고 있다. 그분이 『마리아야』라고 부르자마자 그녀는 주님을 알아 보고 그분을 만지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분은 만지지 말라고 하신 후 즉시 사라지셨다(요 20:14-17)! 여러분은 알고 있는가? 여러분이 분명히 알지 못할 때는 그것이 그분의 기질이시다! 그분은 모두가 보이지 않게 오시지만 여러분이 그분을 아는 순간에는 사라져 버리신다.

 

나는 누가복음 24장 읽기를 좋아한다. 나는 엠마오로 가던 그 두 제자가 했던 말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생각한다(그러나 나는 때때로 내 자신이 두 사람 중 한 사람임을 발견한다!). 그 슬픈 기색을 띤 제자들이 길을 따라 걸으면서 주님의 죽으심에 관해 슬프게 서로 주고 받고 있을 바로 그때 갑자기 어떤 한 사람이 합류한 후 그들이 무엇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지를 물었다. 『무슨 일이냐고요?』 그들은, 『당신은 예루살렘에 거하면서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모른단 말이요?』라고 말했다.

 

주님은 얼마나 위대하신지! 그분은 단순히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라고 물으셨다. 또한 그들이 길을 따라 서서히 비탄에 찬 그들의 긴 이야기를 쏟아 부을 때도 그분은 참을성 있게 동행하셨고 인내롭게 들으셨다. 그들이 그들의 이야기를 끝마쳤을 때 그분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라고 말씀하셨다. 이 시점에 이르러서도 그들은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낯선 사람에 의해 감명을 받았음에 틀림없었다. 이는 그들이 가려는 촌에 이르매 예수님이 『더 가려하는 것 같이 하시니』, 『저희가 그분에게 강권하여』 그들과 함께 유하시도록 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이 그분께 잡수시도록 청했을 때 그분은 매우 허물없이 주인의 역할을 맡아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셨다』. 또한 여기에 놀랄 만한 일이 있다. 그들이 볼 수 없었을 때 그분은 들으실 수 있었고 그들이 어리석은 말을 했을 때 그분은 그분의 방법에서 나와 오랫동안 그들과 동행하실 수 있으셨다. 그러나 그들의 눈이 열리자마자 『그분은 그들의 시야에서 벗어나 사라지셨다』. 그것이 그분의 기질이다!

 

여러분이 주님을 볼 수 없을 때 그분은 여러분의 모든 어리석은 말에 귀를 기울이시고 그분의 방법에서 나와 여러분과 동행하실 것을 확신한다. 나는 어떤 한 형제에게, 『요즈음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지 않으십니다. 집회들이 몹시 무겁습니다. 입을 열어야만 할 자들이 다문 채 그대로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저버리신 것 같습니다』라고 말한 일이 있다. 나는 그와 같이 말하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할 때 감히 계속해서 말하지 못한다. 이는 그분이 내가 어리석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을 들으시지나 않을까 두렵기 때문이다.

 

형제 자매들이여, 주님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 대한 주된 훈련을 그분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으로서 알게 하는 데 계속해서 두셨다. 그분은 사람들 가운데 계시지만 그분 자신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지는 않으신다. 그분은 안에 거하시지만 그분의 내주하심을 의식하는 것은 허락치 않으신다. 그분은 정말로 여러분 안에 계시고 참으로 여러분 안에서 역사하시고 놀라운 일들과 거대한 일들을 하시고 계시지만 그분의 기질은 우리가 말하는 과시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기질이 아니다. 그분은 그분 자신을 감추시는 하나님이시다.

 

또 다른 하나의 예를 들겠다. 어느 날 밤, 문들은 잠겨져 있었고 그분의 제자들 중 몇 명이 함께 모여 있었을 때 주님이 나타나셨다. 나중에 도마가 그들과 함께 했었을 때,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선언했다. 주님은 그의 약함 안에서 그를 생각하게 되었고 어느날 그분은 그에게 보고 만져보도록 허락하셨다. 그때 도마는 머리를 숙이고, 『나의 주이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말하면서 경배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29)라고 말씀하셨다. 『너의 기질은 보기를 좋아하는 기질이지만 나는 볼 수 없는 것을 믿는 기질을 좋아한단다 왜냐하면 나는 내 자신을 감추길 좋아하기 때문이란다』.

 

베드로는 그의 첫서신을 쓰기까지 상당한 체험을 갖게 되었고, 『너희가 보지 못한 분을 사랑하는도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것이 놀라운 일이다. 결코 본 적도 없는 어떤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어느 곳에서 찾아 볼 수 있겠는가? 그러나 베드로는 너희가 주님을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라고 말하고 계속해서,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기뻐하니』(벧전 1:8)라고 말한다. 믿음과 사랑은 보이지 않는 한 분 안에 있다.

 

주님, 우리로 하여금 주님께서 당신에 대한 우리의 관념과 얼마나 다른가를 보여 주소서. 우리의 집회들 안에 충만함이 흐를 때 우리는, 『오, 주님이 참으로 우리 가운데 계시도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런 상태는 실제에 대한 증거는 아니다. 또 한편으로 집회 분위기는 무겁고 여러분은 『아! 나는 사랑 해야만 하는 주님을 사랑하지 못한다 대가 지불하기를 얼마나 실행했는가! 나의 생활 가운데서 그분께 영광을 드리는 데 얼마나 실패했는지!』라고 생각하고 있는 여러분 자신을 발견할 때 그분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은 그때 여러분의 생활 가운데서 적극적으로 일하신다.

 

때때로 길거리에 나와 있을 때나 방 안에 있을 때, 『내 인생의 목적은 무엇일까? 주님은 내 인생에서 무엇을 얻고 계시는 것일까?』라는 생각들이 여러분에게 떠오르지만 이러한 일을 여러분 안에서 역사하시는 분이 바로 주님이심은 깨닫지 못한다. 나는 여러분 존재의 깊은 속에 그렇게 희미하게 기록된 것들과 여러분이 생각했던 그런 작은 제안들은 완전히 여러분 자신의 것이었는데 이는 그것들이 너무나 자연스러웠기 때문이었고 또한 그것들은 주님의 행하심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그분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은 여러분의 생활 안에서 역사하시지만 그분 자신을 효과적으로 잘 감추시기 때문에 여러분은 그분의 행동에 대해 거의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그분은 내적으로뿐 아니라 외적으로-여러분의 가정에서, 사업에서, 여러분의 모든 환경에서-도 역사하고 계신다. 그분은 많은 환경들을 만들어 내시고 여러 면에서 활동하시면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그분의 행하심에 대해 아무것도 감지하지 못하게 하신다 할지라도 여러분은 이러한 것들이 바로 자연스럽게 발생한다는 생각에 이른다. 그러나 여러분의 생활의 내적 상태든 외적 상태든 모두 그분의 통제 아래에 있다.

 

교회가 거의 이천 년 동안 이 땅에 지속해 온 이 사실은 바로 그분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 그분의 역사하심의 결과이다. 어떤 일의 수행을 더 크게 과시하면 할수록 신성의 내용은 더욱더 감소하고, 일을 조용히 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것에 대해 더욱더 모르고 신성의 내용은 더욱더 커진다는 것은 흔히 있는 사실이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은 그분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께로 처리되기 때문에 그것은 보이는 것에가 아니라 믿음에 근거를 두어야만 한다.

 

나는 우리가 대체로 중요하다고 의식할 때 하나님이 흔히 가장 능력있게 함께하신다는 것을 이러한 말씀들을 통해 우리 중 몇 사람이 깨달을 수 있도록 도움줄 것을 믿는다. 더 큰 것들을 찾지 말라. 그것들 이상의 것들을 찾지 말라. 여러분의 기대를 어떤 큰 이상이나 어떤 큰 체험에 두지 말라. 또한 밖의 어떤 것을 기대하지 말라. 이는 그분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이 여러분의 생활 안에서 힘있게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여러분의 책임은 안에 있는 그분의 음성에 반응함으로서 그분과 동역하는 것이다. 그 음성은 『아주 작은 소리』이고 여러분 자신의 느낌들 중 한 부분에 완전히 속한 것 같아서 그것을 거의 음성으로는 인식하지 못한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 새겨져 있는 그 음성에, 『아멘』해야 한다. 이는 그분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이 비밀스럽게 또한 끊임없이 그곳에서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위트니스 리
[일곱 광주리 가득히2,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 한국복음서원]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kakao talk
퍼머링크
이전글 : 애정(affection)

댓글 0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찬양노트의 말씀방입니다. image 청지기 12.02.20.18:01 4925
180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떠나심 청지기 24.11.21.13:56 115
179 신약 경륜 안에서의 인도직분 Jacob 24.01.24.23:14 1139
178 재정적인 지원과 관련된 교통 1 Jacob 22.10.07.22:35 1065
177 몸의 원칙 안에서 교회의 책임을 감당함 Jacob 21.08.16.21:26 609
176 말씀의 사역이란 무엇인가 Jacob 21.01.01.20:03 1144
175 속사람 안으로 강건케 됨 1 Jacob 18.06.23.18:40 2691
174 증가를 위해 체계를 바꿈 Jacob 18.06.07.13:59 1821
173 교회의 봉사로부터 사역의 봉사를 분별함 Jacob 18.04.03.21:52 2540
172 사람들이 교회를 다스릴 때, 성령께는 아무 권위가 없음 3 Jacob 18.02.02.21:04 2301
171 부흥의 일 vs 계시에서 나온 일 2 Jacob 17.09.23.11:39 2405
170 봉사는 주님의 영을 갖는 문제임 1 Jacob 17.08.14.14:44 2989
169 '특수 식물'을 자라게 함 1 Jacob 17.07.16.21:27 2608
168 주님의 상 집회에는 하나님 앞에 어떤 순서도 없음 3 Jacob 17.06.22.16:37 3126
167 몸의 생활은 영을 따라 행하는 것의 결과임 1 Jacob 17.06.09.17:10 2538
166 온 몸에 유익을 주는 몸의 교통 5 Jacob 17.05.20.17:33 1951
165 교회의 주인들은 성도들임 1 Jacob 17.05.09.10:40 2338
164 길을 평탄케 하는 개척자 4 청지기 12.05.29.21:40 5447
163 자기의 날짜를 계산하라 3 청지기 12.05.03.11:53 5232
162 합일 청지기 12.05.03.11:48 4550
161 혼의 잠재력 2 청지기 12.05.03.10:53 4130
160 예수의 인성의 풍성한 공급 청지기 12.05.03.10:38 3060
159 소제의 향료들 청지기 12.05.03.10:32 3377
158 하나님의 요구들과 하나님의 양식 청지기 12.05.02.13:49 2665
157 회막과 모든 제물들 청지기 12.05.02.13:37 3215
156 생명의 성장이란 무엇인가 청지기 12.05.02.13:34 2968
155 세 가지 생명과 네 가지 법 청지기 12.05.02.13:28 3048
154 영과 혼의 분별 청지기 12.05.02.13:19 4651
153 부모 청지기 12.04.30.18:32 3708
152 부부 청지기 12.04.30.18:21 3287
151 청지기 12.04.30.18:12 2638
150 금욕주의 2 청지기 12.04.30.18:04 2893
149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의 목적을 이루는 집회 청지기 12.04.24.11:01 2334
148 그리스도의 승리로 그분을 전람하는 집회 청지기 12.04.24.10:54 2286
147 영의 정상적인 상태 청지기 12.04.24.10:37 2624
146 생각으로 영을 보조하는 원칙 청지기 12.04.24.10:29 2034
145 영의 법칙들 청지기 12.04.23.19:55 2579
144 영적 노정의 위험 청지기 12.04.23.18:43 1828
143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성장하는 길-여김 청지기 12.04.23.18:26 2065
142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성장하는 길-앎 청지기 12.04.21.14:31 2121
141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그리스도의 십자가 청지기 12.04.21.14:26 2126
140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그리스도의 피 청지기 12.04.21.14:19 1968
139 속 부분과 감추인 부분을 파 내기 청지기 12.04.20.14:10 1285
138 혼의 처리 청지기 12.04.20.14:06 1207
137 마음과 영의 처리 청지기 12.04.20.13:57 1165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 청지기 12.04.20.13:53 1259
135 애정(affection) 청지기 12.04.20.13:50 1006
134 부활 후의 십자가의 부르심(2) 청지기 12.04.20.13:45 1030
133 부활 후의 십자가의 부르심(1) 청지기 12.04.20.13:37 978
132 깊은 곳과 깊은 곳이 서로 부름 청지기 12.04.20.11:21 10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