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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이 책에 수록된 메시지들은 1938년부터 1939년까지 영국 런던 및 유럽 대륙에서 전하신 주님의 종 워치만니 형제님의 설교 기록이다. 나중에 영국의 앵구스 키니어 형제(Angus I. Kinnear)가 정리하여 책으로 만들었다. 그러므로 원본이 영어이다.
출판된 지 몇 년이 채 안 되어서 세계 각지에서 판매량이 오륙만 부에 달하였고 또한 이십여 가지에 달하는 언어로 이미 번역되었다. 이 메시지들 속의 생명의 방면은 그리스도인에게 상상을 초월하는 도움을 준다. 특히 미국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의 메시지들로 인해 생명의 전기를 갖게 되었다. 심지어 어떤 그리스도인 단체는 이 책을 읽음으로써 단체 전체가 생명의 전환을 갖게 되었다.
오늘 형제들이 중국어로 번역하여 대만복음서원을 통해 출판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중국어를 아는 형제 자매에게 주는 도움이 영어판보다 적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주님께서 배나 축복하사 이 책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실제적인 인식과 더 진보된 체험을 가짐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이 각지에서 더 자라고 확장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1963년 3월 25일
뉴욕에서 위트니스 리
그리스도의 피
시작에서 우리는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를 철저히 고려해 보기로 하자, 먼저 우리는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일반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크게 다르다는 것을 지적하겠다. 우리는 주님의 산상수훈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의 아들 외에 이런 생활을 실지로 살아 내는 사람이 있을까라는 질문이 일어날 것이다. 이런 질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외에」라는 말이 바로 이 질문의 정답임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관하여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이렇게 정의를 내렸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그는 특별한 일이나 기이한 일을 높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표준으로 삼지 않았다. 우리는 바울이, 그리스도인에 대해 하나님이 정하신 정상적인 생활의 원칙을 말하였다고 믿는다. 간략하게 말하면,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생명을 살아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그분은, 인간의 모든 필요에 대한 유일한 해답은 바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우리에게 분명히 말해준다. 우리 몸에서 그분이 하신 모든 역사는 바로 우리를 제하고 우리를 그리스도로 대치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를 사하시기 위해 우리를 대신해 죽으셨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를 대신해 사신다. 그러므로 여기에 두 가지의 대치가 있는 것을 본다. 하나는 우리를 사하기 위해 십자가 상에서 이루신 대치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의 승리를 위해 우리 안에서 이루신 대치이다. 우리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은 오직 하나, 즉 우리에게 그의 아들을 더욱 계시해 주시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둔다면 우리는 크나큰 도움을 받을 것이고 많은 혼란을 피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두 가지 문제-죄의 행위와 죄의 본성
이제 우리는 로마서 8장을 이 문제를 연구하는 기점으로 삼아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설명하고 또한 실제적이고 실험적인 각도에서 우리의 문제를 연구할 것이다. 먼저 우리는, 로마서의 앞의 여덟 장이 자연스럽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지고 또 이 두 부분의 뜻이 현저히 구분된다는 것을 지적하겠다. 이런 지적만도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로마서의 앞의 여덟 장은 독립된 하나의 단락이다. 1장 1절부터 5장 11절까지는 이 단락의 전반부이고 5장 12절부터 8장 39절까지의 세 장 반은 이 단락의 후반부이다. 이 여덟 장의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이 전·후반부의 주지(主旨)가 다름을 볼 수 있다. 예컨대 전반부의 논의 중에서 우리는 복수의 죄(sins)가 특별히 현저한 것을 발견한다. 그런 반면에 후반부에서는 복수의 죄가 한 번도 나타나지 않고 단수의 죄(sin)가 재삼 사용되며 다뤄지는 주제로 되어 있다. 왜 이런 변화가 있는가?
이것은 전반부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범한 죄들이기 때문이다. 이 죄들은 많을 뿐 아니라 일일히 열거할 수 있다. 그러나 후반부에서 다루는 주제는 죄의 본성이다. 이 죄의 본성은 우리 안에서 운행하는 일종의 본질과도 같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죄를 범하든, 그것들은 다 이 죄의 본질이 하게 한 것이다. 우리는 여러 죄들에 있어서 사함이 필요한 동시에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받아야 한다. 전자는 우리의 양심을 만지고 후자는 우리의 생명을 만진다. 만일 우리의 죄의 본성이 해결되지 않았다면, 설령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해졌다 할지라도 우리 마음 속에 항구적인 평강이 없다.
하나님의 빛이 처음으로 내 마음을 비출 때, 그분 앞에서 나는 내 범죄로 인하여 용서해달라고 그분께 부르짖었다. 죄사함을 얻은 후, 나는 새로운 것, 즉 나의 죄의 본성을 발견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죄를 범했을 뿐 아니라 또한 내 안에 문제가 있음을 발견했다. 나는 나에게 범죄하는 천성이 있고 내 속에 범죄하려는 경향과 나를 유혹해 범죄케 하는 어떤 힘이 있음을 발견했다. 그 힘이 내 속에서 발동할 때 나는 곧 죄를 범하게 된다. 내가 이것을 위해 용서를 구하고 사하심도 얻었지만 얼마 되지 않아서 다시 범죄한다. 그러므로 나는 죄 짓고 용서받고 또 죄짓는 악순환 속에서 살게 된다. 하나님의 사하심에 대해 내 마음에는 감사가 넘친다. 그러나 내게 필요한 것은 용서함만이 아니라 또한 구원하심이다. 나의 모든 행함을 위해서는 용서가 필요하고, 나의 본성을 위해서는 죄의 본성에서 구출됨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두 방면의 구원-피와 십자가
그러므로 로마서의 앞의 여덟 장에서 우리는 구속의 두 방면을 본다. 첫째는 우리 죄들이 사함받는 것이요, 둘째는 우리가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받는 것이다. 이 두 방면을 위해서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것들의 차이점에 주의해야 한다.
로마서 1장부터 8장까지의 독립된 단락의 전반부에서 우리는 주 예수의 피에 대해 두 차례 언급된 것을 본다. 즉 3장 25절과 5장 9절이다. 후반부의 6장 6절부터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음을 말하는 새로운 사상이 도입된다.
전반부의 논의의 범위는 주 예수의 역사, 즉 예수의 피에 근거하여 하나님께서 사람의 범죄를 용서하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것이다. 그 반면에 후반부의 논의 중에서는 피를 계속하여 언급하지 않고 십자가로 대표되는 주님의 다른 면의 역사에 중점을 둔다. 이는 곧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됨과 부활 안에서 그분과 연합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런 구분은 매우 가치가 있다. 우리는 피가 우리의 행위를 처리하는 반면에 십자가가 우리의 어떠함을 처리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피는 우리의 죄들을 제거했고 십자가는 범죄하는 우리의 근본을 강타한 것이다.
뒤에 나오는 장들에서 우리는 두번째 방면의 주님의 역사를 볼 것이다.
우리의 여러 죄들
먼저 우리의 죄들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가치와 이 피가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는 것으로부터 말하기 시작하겠다. 다음 구절들은 이것을 우리에게 설명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롬 3:23).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롬 5:8-9).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은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롬 3:24-26).
이 문제를 연구하는 후반부에서 우리는 타락의 실상과 회복의 길을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이 때 먼저 나는 죄가 하나님께 불순종한 행위로 말미암아 들어왔다는 것을 언급하겠다(롬 5:19). 우리는 불순종이 발생할 때마다 뒤따라오는 것이 범죄임을 기억해야 한다.
불순종으로 인해 죄가 들어온 첫번째 결과는 바로 하나님과 사람이 분리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낯으로부터 쫓겨나게 된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장애가 생겼기 때문에 그분은 더이상 사람과 교통하지 못하게 되었다. 성경의 시작부터 끝까지 이런 장애를 죄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첫 단계로 하나님은 그들(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이 다 죄 아래 있다고 말씀하신다. 둘째 단계로 사람 속에서 죄가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교통에 장애가 되었기 때문에 그는 범죄한 느낌-하나님과 격리된 느낌-을 갖게 되었다. 이 때문에 깨어난 양심의 도움으로 사람들은 『내가... 죄를 얻었사오니』(눅 15:18)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뿐 아니라 죄가 사탄에게 하나님 앞에서 참소하는 근거를 주는 동시에 우리 속의 범죄의 느낌은 우리 마음 속에서 사탄에게 우리를 참소할 기회를 준다. 그러므로 세번째 단계로 하나님 앞에서 밤낮으로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계 12:10)가 『너는 죄를 범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를 구속하고 하나님의 뜻 안으로 이끌기 위하여 주 예수님은 죄에 대하여, 죄 있는 양심에 대하여, 사탄의 참소에 대하여 무언가를 하셔야 한다. 먼저 우리의 범죄가 처리되어야 하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해결되었다. 그 다음은 죄 있는 느낌이 처리되어야 하는데, 이것은 주님께서 피의 가치를 우리에게 나타내심으로써 정죄받는 양심으로 평강을 갖게 한다. 마지막으로, 마귀의 공격과 참소에 대해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처리하고 해결해 주셔야 한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피가 하나님을 향하여, 사람을 향하여, 사탄을 향하여 모든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계속 전진하려면 절대적으로 주님의 피의 가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우선적인 것이다. 십자가에서 주 예수님이 우리의 대치물이 되신 것에 대해 우리는 기본적인 인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우리의 범죄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의 피의 기능에 대해 우리는 분명한 이해를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리는 아직 올바른 길에 접어 들었다고 말할 수 없다. 이제 이 세 가지에 대해 더 자세히 보기로 하자.
피는 주로 하나님을 위한 것임
속죄를 위한 피는 먼저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위치를 다룬다. 우리의 범한 죄를 위하여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사하심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심판에 떨어지게 된다. 또 죄 사함은 하나님이 우리의 행함을 소홀히하시거나 감찰하시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께서 피를 보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피는 주로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것이다.
만일 당신이 피의 가치를 깨달으려 한다면 반드시 피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를 받아들여야 한다. 만일 피에 대해 하나님이 정하신 가치를 조금도 모른다면 나는 영영 나에 대한 피의 가치를 알 수 없다. 오직 성령의 계시로 그리스도의 보혈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를 깨달을 때 비로소 피의 가치를 인식하게 되고, 우리에게 피가 얼마나 귀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피의 첫번째 방면은 하나님을 향한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구약에서 신약에 이르기까지 피라는 단어는 항상 속죄의 사상과 연관되어 있다. 나는 피라는 단어가 성경에서 백 번 이상 언급되었다고 생각한다. 언급되는 곳마다 피가 하나님을 위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구약 달력에는 우리의 죄와 매우 큰 관계가 있는 하루가 있는데 그 날은 곧 속죄일이다. 죄 문제에 대하여 속죄일보다 더 분명하게 묘사하고 설명한 것은 없다. 레위기 16장은 속죄일에 속죄 희생의 피를 지성소로 가져가 하나님 앞에 일곱 번 뿌렸다고 말한다. 이 일에 대하여 우리는 분명해야 한다. 속죄의 날에 속죄 제물은 회막의 바깥 뜰에서 회중 앞에서 드려졌다. 거기서의 모든 것은 완전히 노출되어 누구나 다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대제사장 외에 누구도 장막 안에 들어올 수 없도록 명하셨다. 오직 피를 가진 대제사장만이 피를 거기에 뿌려 하나님 앞에서 속죄하도록 하셨다. 왜 그렇게 했는가?
이는 구속 사업에서 대제사장은 주 예수를 대표하기 때문이다(히 9:11-12). 그러므로 예표에 있어서 대제사장은 구속 사업을 하는 일꾼이다. 대제사장을 제외하고 누구도 그 안에 들어가거나 접촉할 수 없었다. 이뿐 아니라 대제사장이 들어갔을 때 그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은 피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었다. 그 피는 하나님이 이미 받으시고 그 안에서 만족을 얻으신 그것이다. 그것은 대제사장이 지성소 안에서 하나님과 갖는 교역(交易)이다. 이 교역의 유익을 얻은 사람들은 그 교역을 보지 못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도록 정하셨다. 그러므로 피는 먼저 하나님을 위한 것이다.
이것보다 더 초기의 예표는 출애굽기 12장과 13장에서 말한,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속하기 위해 피 흘린 유월절 어린 양이다. 나는 이것이 구속에 관한 구약의 또 하나의 좋은 예표라고 생각한다. 피는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발라졌고 이스라엘 백성은 피가 발라진 집 안에서 어린 양의 고기를 먹었다. 하나님은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피가 사람에게 드려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드려지기 위해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또 다른 예증을 얻는다. 그 이유는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발라진 피를 집 안에서 양고기를 먹는 사람들은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만족하셨음
하나님의 성결과 공의는 우리 인류를 위해 드려질 수 있는 무죄한 한 생명을 요구하신다. 피에는 생명이 있는데 이 피는 나와 나의 죄를 위하여 반드시 부어져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정하심이기 때문에 반드시 이렇게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공의를 만족시킬 피를 그분께 드릴 것을 요구하신다. 그분은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 가리니』라고 하셨다. 오, 그리스도의 피는 완전히 하나님을 만족케 하였다!
여기서 나는 새로 믿은 형제들에게 몇 마디 하겠다. 이는 우리가 이 점에서 자주 곤경에 빠지기 때문이다. 주님을 믿기 전에 우리는 양심의 괴로움을 받아 보지 못했을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깨우실 때 비로소 양심이 살아난다. 본래 우리의 양심은 죽었다. 양심이 죽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완전히 버리고 하나님께 아무 쓸모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얼마 후, 우리가 주님을 믿었을 때 깨어난 우리의 양심은 아주 예민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참된 문제를 야기시킬 것이다. 죄악의 느낌은 우리에게 크고 두려운 것이 되어 심지어 우리로 피의 참된 효능을 보지 못하게까지 한다. 결국은 우리로 길을 갈 힘을 잃게 한다. 우리는 우리의 죄가 참되다고 느낀다. 어떤 특별한 죄들이 여러 차례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심지어 우리의 죄들을 그리스도의 피보다 더 크게 느끼는 지경에 이르게 한다.
이때 우리의 모든 괴로움은 피의 가치를 느껴 보려는 데서, 주관적으로 우리에 대한 피의 의미를 평가해 보려는 데서 온다. 우리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한다. 피의 가치는 우리가 감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먼저 피는 하나님에게 보여지기 위한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피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우리의 평가를 발견하게 된다.
그 반대로 만일 우리가 우리의 느낌으로 평가해 보려고 할 때 아무런 수확이 없고 어둠 속에 남아 있게 된다. 이것은 완전히 말씀에 대한 우리의 신뢰에 달려 있다. 우리는 피가 하나님께 귀하다고 그분이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믿어야 한다(벧전 1:18-19).
만일 하나님께서 죄들을 갚은 것으로서 피를 받으실 수 있고, 속죄의 대가로 피를 받으실 수 있다면, 우리는 안심하고 우리의 죄 빛을 갚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게 된다. 만일 하나님이 이미 이 피로 만족하셨다면, 이 피는 받으실 만한 것이다. 이 피에 대한 우리의 평가는 그분의 평가를 따라야 한다. 더하거나 덜하지 말아야 한다. 이 피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 이상이 되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지만 결코 그분의 평가 이하가 되어서도 안 된다. 그분이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임을 기억하라.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은 그분 보시기에 이 피가 받을만한 것이라고 그분을 온전히 만족케 했다고 능히 말씀하실 수 있다.
믿는이들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게 하는 보혈
이 피가 하나님을 만족케 한 고로 또한 우리를 만족케 한다. 그러므로 피의 두번째 방면의 가치는 사람에 대한 것이다. 이는 곧 그분이 우리 양심을 깨끗케 한 것이다. 우리가 히브리서를 읽을 때 이 방면에서의 피의 효능을 본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히 10:22).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 중의 하나이다. 이 말씀들을 우리는 자세하게 읽어야 한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우리에게, 주 예수의 피가 우리의 마음을 씻었다고 말하지 않았다. 마음을 피와 연결시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피가 역사하는 범위에 대해 우리가 잘못 이해하기 때문에 『주여, 당신의 피로 내 마음을 죄에서 씻어주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심히 부패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렘 17:9)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씻음보다 더 기본적인 일을 하셔야 하는데, 이는 곧 우리에게 새 마음을 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곧 버릴 옷을 빨거나 다리미질하지 않는다. 이와같이 우리는 우리의 육체가 씻을 수 없을 정도로 부패한 것을 보아야 한다. 육체는 반드시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한다. 우리 안에서의 하나님의 역사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어야 한다. 성경은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겔 36:26)라고 말한다.
나는 성경에서 주님의 피가 우리의 마음을 씻었다는 말씀을 보지 못했다. 피의 역사는 이렇게 주관적이지 않고 온전히 객관적이며 하나님 앞에서의 문제이다. 히브리서 10장에서 피의 씻음을 말할 때 마음을 언급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거기서는 피와 양심과의 관계를 말한 것이다. 『우리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이것은 무슨 뜻인가?
이는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간격이 있기 때문에 거리낌 있는 양심을 갖게 되고 언제든지 그분을 가까이하려고 할 때 잘못을 느끼게 된다는 뜻이다. 거리낌 있는 이 양심은 나와 하나님 사이에 장애가 있다는 것을 느끼도록 끊임없이 나를 일깨워 준다. 이제 보혈의 역사로 하나님 앞에서 가로놓인 장애물이 제해지는 새로운 결과가 산출되었다.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 안에서 이 사실을 나에게 설명하셨다. 내가 이 사실을 신뢰하고 받아들일 때, 내 양심은 즉시 깨끗케 되고 죄책감도 제거되며, 하나님에 대해서 나의 양심은 더이상 거리낌을 갖지 않게 된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하나님과 교통할 때 거리낌 없는 양심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가를 알고 있다. 믿는 마음과 아무 참소가 없는 마음은 우리에게 똑같이 중요하다. 이는 서로가 상호보완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양심에 불안을 느낄 때마다 우리의 믿음은 새어나가고 즉시로 우리는 하나님을 대면하여 볼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교통을 계속 유지하기 위하여 우리는 반드시 때에 따른 피의 가치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매일, 매시간, 매분, 단기적인 것을 장부에 기록하시기 때문에 오직 피로 말미암아야 하나님을 가까이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피를 의지하고 피를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근거로 삼는다면, 영원히 이 피의 효능은 상실되지 않는다. 보혈 외에 우리가 무엇으로 지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이 참으로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가, 아니면 다른 것으로 나아가는가를 스스로 물어 보아야 한다. 피로 말미암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간단히 말해서 피로 말미암는다는 것은 내가 내 죄를 시인하고 정결함과 속죄가 필요하다는 것을 시인하기 때문에 주 예수님이 이루신 역사를 힘입어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는 뜻이다. 나는 결코 나 자신의 업적이 아닌 그분의 공로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가까이 한다. 예를 들어, 나는 오늘 아침 특별히 인자했다거나 참을성 있었다거나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했다는 것을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근거로 삼지 않는다.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마다 나는 피로 말미암는다.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고 할 때에 누구나 다음과 같은 유혹을 만날 것이다. 즉 하나님이 이미 우리를 다루어오고 계시기 때문에-우리를 그분 앞으로 더 이끌기 위하여 그분은 십자가의 더 깊은 공과를 우리에게 가르치려고 이미 여러 과정을 채택하셨음-우리 앞에 새로운 표준을 세우셨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가 그 표준들에 이르지 않고서는 결코 하나님 앞에서 청결한 양심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양심의 청결함은 결코 우리의 업적에서가 아닌 오직 주 예수의 피 흘린 역사를 의지하는 데서 온다.
내가 잘못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내 속에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무거운 느낌이 있다. 즉 『오늘 내가 조금 조심하여 선하게 살았고 주님의 말씀을 열심히 읽었기 때문에 기도를 잘 할 수 있었다!』 혹은 정반대로 이렇게 생각한다. 『오늘 나는 식구들과 약간의 문제가 있었고, 아침부터 아주 답답하고 걱정스러웠다. 지금도 명쾌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내게 분명 무슨 문제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못하겠다.』
대체 당신이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당신은 믿을 수 없는 당신의 느낌이나 오늘 당신이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하였다는 느낌을 의지하여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가? 아니면 비교적 멀리 있는 견고한 것 곧 하나님이 바라보시고 만족하신 그분의 흘린 피를 의지해 하나님을 가까이하는가?
만일 피가 변할 수 있다면 이것을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근거로 삼는 것도 무가치할 것이다. 그러나 피는 한 번도 변한 적이 없고 또한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당신은 항상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하나님을 가까이할 수 있는데, 이 두려움 없는 담대함은 당신 개인의 업적이 아닌 보혈로 말미암은 것이다. 오늘이든 내일이든 어제든, 당신이 어떤 업적을 쌓았다 할지라도 일단 지성소에 들어왔다는 느낌이 있을 때 당신은 유일하게 믿을 만한 흘려진 피를 당신이 설 발판으로 삼아야 한다. 오늘 당신이 얼마나 선하게 살았든 악하게 살았든 혹은 범죄했든간에 당신이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근거는 영원히 오직 하나 즉 그리스도의 피이어야 한다. 이것이 지성소로 들어가는 근거이다. 이것 외에 다른 근거가 없다.
그리스도인의 다른 많은 체험과 같이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에도 시작(초기)과 지속(진보)의 양면이 있다. 전자는 에베소서 2장이 우리에게 말해주고, 후자는 히브리서 10장이 우리에게 말해준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의 시작은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서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기』(엡 2:13) 때문이다. 이 후로 우리가 계속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도 여전히 피로 말미암은 것이다. 사도는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지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19, 22)고 말했다.
시작할 때 나는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가까이 하였고, 이후로 이 새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서도 나는 여전히 그분의 피를 의지해야 한다. 우리는 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고서 다른 것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혹 당신은 『이것은 간단한 것이고 복음의 초보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어려움은 곧 복음의 초보를 떠난 데서 비롯된다. 우리는 우리가 진보하였기 때문에 이 초보를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영원히 복음의 초보를 떠날 수 없다. 우리가 시작할 때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가까이한 것같이 이후에 하나님을 가까이할 때에도 언제나 우리는 동일하게 피로 말미암아야 한다. 종착지에 이르러서도 우리의 근거는 오직 한 가지, 즉 이 피를 의지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제멋대로 방임하는 생활을 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뒤에서 보겠지만, 그리스도의 죽음의 다른 방면은 우리가 이런 생각을 할 여지를 조금도 주지 않는 것을 보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피로 만족하고, 피가 있는 것으로 만족하자.
우리가 약해질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약함을 주의한다고 해서 강해지는 것은 아니다. 비록 우리가 근심과 걱정을 느낀다 할지라도 이것들은 우리의 성결함을 조금도 돕지 못한다. 이것들이 우리를 조금도 돕지 못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러므로 우리는 이 피로 말미암아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하나님을 가까이 하자.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자. 『주여! 제가 이 피의 가치를 아직 충분히 알지는 못하지만 이 피가 이미 당신을 만족케 한 것을 압니다. 그러므로 이 피만 있으면 저는 족합니다. 이 피가 저의 유일한 의지입니다. 지금 저의 성장의 여부나 업적이 있는가의 여부가 나의 근거가 아님을 알았습니다. 언제든지 당신 앞에 나올 때 저는 당신의 보혈만을 의지하겠습니다.』
이렇게 할 때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양심은 참으로 깨끗케 된다. 이 피를 떠나서는 양심은 영영 깨끗케 될 수 없다. 오직 이 피만이 우리를 두려움 없고 담대하게 한다.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이 말씀은 히브리서 10장 2절에 있는 놀랄 만한 말씀이다. 우리의 모든 죄가 다 씻음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롬 4:8)라는 바울의 말에 반향할 수 있다.
그 참소자를 이김
우리가 말한 바에 비추어, 이제 우리는 방향을 돌려 대적에게 얼굴을 돌릴 수 있다. 왜냐하면 피에는 사탄을 향한 방면이 있기 때문이다. 이 시대 안에서 사탄의 가장 맹렬한 활동은 바로 형제들을 참소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계 12:10). 그러나 우리 주님은 대제사장의 특별한 직분 안에서 그분의 피(히 9:12)로 말미암아 사탄을 대적하신다.
이 피는 어떻게 사탄을 처리했는가? 이 피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능히 사람 편에 서시게 함으로써 사탄을 처리한다. 타락은 사람 속에 무언가를 가져와 사탄으로 하여금 사람 속에서 설 발판을 갖게 하였다. 결국 하나님은 그분 자신의 손을 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지금 사람은 마음 속으로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롬 3:23) 동산 밖에 있다. 인간이 저지른 일로 인하여 사람 속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이것이 제거되기 전에는 하나님은(이치상으로) 그를 보호하실 수 없다. 주님께 감사드리자. 피가 이 장애물을 제거하고 사람과 하나님,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회복했다. 지금 하나님이 사람 편에 계시기 때문에 사람은 유리한 위치에 서 있다. 지금 사람은 아무 두려움 없이 사탄을 대할 수 있다.
여러분은 요한 일서 1장 7절의 말씀을 기억하는가? 나는 다비의 번역을 가장 좋아한다. 그는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종류의 죄(every sin)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말한다. 요한은 총괄적으로 「모든 죄」라고 하지 않고 모든 종류의 죄, 모든 항목의 죄라고 말했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아,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하나님은 빛이시다.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모든 것이 빛 아래 드러나게 되어 하나님께서 일목연하게 모든 것을 보실 수 있지만 그분의 피는 우리의 모든 종류의 죄를 능히 깨끗케 할 수 있으시다. 아, 어떠한 씻음인지! 이것은 내가 내 자신에 대해 깊이 알지 못하거나 하나님이 나를 온전히 알지 못하시기 때문이 아니다. 또한 이것은 내가 어떤 것들을 숨기거나 하나님이 어떤 것들을 소홀히 하셨기 때문이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빛 가운데 계시고 나도 빛 가운데 있을 때 보혈이 나의 모든 종류의 죄를 씻는다는 것이다. 내가 다시 말하지만, 피로 족하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약함에 억눌리거나 심지어 때로 시험을 받음으로 어떤 죄는 결코 사함받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다음 말씀을 기억하자.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종류의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큰 죄, 작은 죄, 아주 검은 죄, 그렇게 검게 보이지 않는 죄, 우리 생각에 용서받을 수 있는 죄 또는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 의식하는 죄, 의식하지 못하는 죄, 기억하는 죄, 이미 잊어버린 죄 모두가 「모든 종류의 죄」라는 단어 안에 포함된다. 할렐루야!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종류의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피가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이미 하나님을 만족케 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빛 가운데서 우리의 모든 죄를 보셨고 그분께서 피로 말미암아 우리 죄들을 용서하셨는데 사탄이 무엇을 근거로 우리를 참소할 수 있겠는가? 사탄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참소할지라도,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31).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는 아들의 피를 사탄에게 보여준 이것이 가장 유력한 답변이기 때문에 사탄은 더이상 소송을 걸 수 없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3-34).
그러므로 이 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보혈의 절대적 부요(富饒)이다.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히 9:11-12).
그분은 오직 한 번 속죄자가 되셨지만, 그분이 대제사장과 중보가 되신 것은 거의 이천 년이 되었다. 그분은 하나님 앞에 서신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요일 2:2)이시다. 히브리서 9장 14절에 『하물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못하겠느뇨』라는 말씀을 주의하라. 이 말씀은 그분의 사역의 부요함을 말해준다. 하나님에 대해 그리스도의 피는 충분한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무슨 태도로 사탄을 대해야 하는가?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사탄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참소할 뿐 아니라 또한 양심 안에서 우리를 참소하기 때문이다. 사탄이 우리와 다투는 것은 이것이다. 즉 『너는 이미 범죄하였고 계속 죄를 범할 것이다. 너는 연약한 자이며 하나님은 더이상 너에게 어떠한 것도 하실 수 없다.』
이 때문에 우리는 우리 속을 살피게 되고, 자기를 보호하기 위하여 자신 안에서나 느낌 안에서 혹은 자신의 행위에서 사탄이 틀렸다는 것을 충분히 증명할 수 있는 증거를 찾으려고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는 유혹되어 우리가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다른 극단에 빠져 침체와 절망에 굴복하게 된다. 그러므로 참소는 사탄의 가장 흉악하고 효력 있는 무기이다. 사탄은 우리 죄를 지적해 냄으로써 이 죄들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참소한다. 만일 우리가 그의 참소를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즉시 넘어진다.
우리는 왜 이렇게 쉽게 사탄의 참소를 받아들이는가? 이는 우리가 여전히 우리 자신의 의(義)를 갖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런 바램은 근거가 잘못된 것이다. 이 방면에서 사탄은 항상 성공적으로 우리를 틀린 방향으로 향하게 한다. 이로써 사탄은 승리하여 우리를 무력하게 만든다. 만일 우리가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것을 배웠다면, 육체의 본성은 범죄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죄를 범하여도 의아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여러분은 내 말의 뜻을 이해하는가? 우리가 우리의 참 근성을 모르고 우리 자신이 얼마나 무능한지를 모르기 때문에 우리 자신에 대해 한 가닥 기대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탄이 우리를 참소할 때 우리는 넘어지고 만다.
하나님께서 능히 우리 죄를 처리하여 주실 수 있지만 그분은 결코 참소 아래 있는 사람을 처리하실 수 없다. 그것은 이런 사람이 피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비록 피가 그를 위하여 유리한 말을 할지라도 그는 돌이켜 사탄의 말을 듣는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변호자이시지만, 참소를 받는 우리들은 참소하는 자 편에 서 있다! 우리는 아직도 우리가 죽음 외에 달리 가치가 없는 자임을 모른다. 뒤에서 우리는 우리가 오직 십자가에서 죽기에만 합당하다는 것을 볼 것이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이 참소자를 응수(應酬)하실 수 있고 또한 그분이 이미 그를 응수하신 것을 아직 모른다.
우리의 구원은 온전히 주 예수를 바라보고 어린양의 피가 각종 죄들로 조성된 상황에 응수하시고 또한 그분이 이미 그 죄들에 응수하셨다는 데 있다. 이것이 우리가 마땅히 서야 할 믿을 만한 기초이다. 절대로 우리의 선한 행실로 사탄에게 응수하지 말고 항상 보혈로 그에게 응수하라. 그렇다. 우리는 죄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찬양하자! 이 피가 우리의 모든 종류의 죄를 깨끗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이 피를 보셨고 그의 아들은 이 피로 말미암아 사탄의 참소에 응수하셨기 때문에 사탄에게는 더이상 우리를 공격할 근거가 없다. 오직 이 피를 신뢰하고 얻은바 위치를 떠나지 않은 사람만이 사탄의 참소를 그치게 하고 그를 달아나게 한다(롬 8:33, 34). 이 체험은 끝날까지 계속되어야 한다(계 12:11).
아! 만일 우리가 하나님이 보시는 대로 그의 사랑하는 아들의 보혈의 가치를 조금 더 본다면 우리는 어떠한 해방을 받게 될지!
워치만 니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 "그리스도의 피", 한국복음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