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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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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 창세기 1:1, 27, 50:26, 출애굽기 1:1, 40:34, 38, 레위기 1:1-17, 6:8-13, 히브리서 10:5-7, 9:14上, 빌립보서 2:7, 8
실제이신 그리스도를 보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리스도가 실제-이 실제로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한다-이심을 깨닫는 것이다. 우주 안에서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는 하나님께 대한 사람의 경배이다. 우리의 어떠함과 행하는 것과 일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경배를 말할 때 그것은 이 모든 것들을 포함한 것이다.
그리스도를 우리의 실제로 취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우리의 존재로, 우리의 행함으로, 우리의 삶으로, 더 나아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경배로까지 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믿기로 우리는 실제이신 그리스도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무엇인가를 알고 있기는 하지만, 자세한 것에 대하여는 그리 분명치 않은 것 같다. 이것은 수세기 동안 성경 속에 감추어져 있었다. 비록 그것이 성경에 있기는 하지만 충분하게 발견되지 않았고 또 열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 마지막 시대에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 점점 더 열려지게 되었다고 믿는다. 그것은 전보다 더 많이 발견되었고 열려졌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약뿐 아니라 구약의 내용들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보기 위해 얼마의 시간을 들일 필요가 있다. 신약은 매우 간단하고 간결한 반면, 구약은 우리에게 상세한 그림을 보여 준다. 레위기 한 권에서만도 우리는 실제-이로 인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한다-이신 그리스도의 세세한 모든 것들을 볼 수 있다.
창세기와 출애굽기 안의 상태
위의 구절들에서 우리는 레위기로 나아가기 전에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첫구절과 마지막 구절을 각각 읽어 보았다. 이것은 매우 의미 깊다. 태초에 하나님은 하늘들과 땅을 창조하셨고 사람을 창조하셨다.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 자신을 표현하고 그분의 다스림을 위해 하나님을 대표할 목적으로 창조되었다. 사람은 하나님을 표현하며 대표하기 위한 하나님의 창조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창세기를 끝까지 읽은 후에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사람이 죽어 애굽에서 입관된 것을 본다. 얼마나 불쌍하고 가련한가! 만일 이것이 성경의 끝이라면 우리 모두는 끝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궁극적인 최종 완성은 아니다. 창세기 다음에 출애굽기가 있다. 거기에 출구가 있다. 주님을 찬양한다! 그러나 출애굽기의 시작은 창세기의 시작만큼 영광스럽지 않다. 창세기의 시작에서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고 사람을 창조하셨다. 이것은 놀랍다. 그러나 사람은 타락했고, 죽어 애굽에서 입관되었다. 그런 다음 출애굽기는 애굽의 모든 이스라엘 자손들과 함께 시작된다.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애굽에 있었다. 얼마나 비참한가! 그러나 우리가 출애굽기의 끝에 이를 때는 참으로 영광스럽다. 관(棺) 대신 장막이 있다. 주검 대신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있다. 관이 개인적인 반면 장막은 단체적이다.
「회중의 성막」 또는 「회중의 장막」이라는 단어들이 나을 때마다 우리는 「회막(tent of meeting)」으로 고쳐 읽어야 한다. 나는 이 「집회(meeting)」라는 용어를 참 좋아한다. 그것은 개인적인 장막이 아닌 회막이다.
땅 위에 계신 하나님
이제 하나님의 피조물 가운데는 하나님이 거하시기 위한 회막이 있다. 그분은 이제 더 이상 하늘에만 계시지 않고 땅 위의 회막 안에 계신다. 그 다음 레위기에 이를 때 우리는 하나님이 회막에서 말씀하시는 것을 발견한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은 하늘로부터 말씀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땅 위에 회막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회막에서 말씀하실 수 있다. 이것은 참으로 놀랍다! 하나님은 모든 관들 속에 있는 사람들을 일으키셨으며 그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시어 함께 건축하심으로써 회막이 되게 하셨다.
구원받기 전에 우리는 어디에 있었는가? 바로 관 속에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의 단체적인 관이 아니라 세상 가운데서 서로 분리되어 있는 매우 많은 개인적인 관들 속에 있었다. 모든 젊은 형제 자매들과 나이 든 모든 형제 자매들이 동일한 상태에 있었다. 우리는 모두 「애굽」의 관 속에 있었다. 그러나 할렐루야. 주님께서 우리를 관으로부터 불러내시며 세상으로부터 이끌어 내시는 날이 도래했다. 우리에게 실제의 출애굽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분은 우리를 회막 안에 함께 모이게 하셨다.
오늘날 우리는 모두 로스앤젤레스에 회막이 있다고 선포할 수 있다. 하나님께는 회막이 있기 때문에 그분은 하늘로부터 말씀하실 필요가 없다. 주님은 오늘날 지방 교회들 가운데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에 지방 교회들이 회막들이다.
하나님의 창조와 사람의 타락 후에 그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회막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것은 우리에게 있어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나는 회막을 봄으로 인해 매우 흥분된다. 우리에게 회막이 있으므로 우리는 결코 실망하거나 낙담해서는 안 된다. 회막은 사탄의 모든 죽이는 역사들을 정복하는 영광스러운 승리이다. 하나님은 크게 승리하시며 좋은 결과를 거두신다. 우리는 모두 격동되야 하며 또한 사람들을 격동케 해야 한다. 오늘날 세상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보라. 각 사람 모두가 슬픈 표정과 실망의 빛이 역력하지만 우리는 매우 기뻐하며 열광한다. 오늘날 로스앤젤레스시에도, 할리우드 구역에도 회막이 있음을 인해 주님을 찬양한다.
레위기의 필요성과 우리의 협력
이제 우리에게는 레위기가 필요한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회막에서 실제이신 그리스도를 누리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회막 안에서 행하시는 전부이다. 그분은 다만 실제이신 그리스도를 모든 방면에서 누리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출애굽기 다음에 레위기가 올 필요가 있는 이유이다. 레위기는 하나님이 어떻게 회막 안에서 모든 것 되시는 그리스도를 누리시는지를 말해준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떠한 방도로 그리스도를 누리실 수 있는가? 그것은 반드시 우리의 협력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이 땅 위에 회막을 가지시며 그리스도가 실제로서 하나님께 모든 것이시지만, 하나님께 그리스도를 드릴 사람이 없다고 한다면 이는 사람의 협력이 없음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양식이 풍족하게 저장되어 있는 주방이 있다고 하자. 여기에 무엇이 더 필요한가? 요리사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리사가 아니다. 요리사는 우리들이다. 반드시 우리가 요리를 해야만 하는데, 그럴 때 결국 하나님이 오셔서 우리와 함께 드실 것이다. 일반적으로 가족 중에서 아내만이 요리를 하고 남편은 나중에 아내와 함께 식사에 동참한다. 회막 안에서의 상황도 분명 이와 똑같다.
회막 안에서는 힘을 들여 수고함이 없이 다만 계속 요리하고 먹는 것만 있다. 레위기는 회막과 관계된 모든 것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집회 안에 있는 교회 생활에 관한 책이다. 우리는 회막이며, 또한 바로 집회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아침 저녁으로 언제든지 모여야 한다. 우리가 어느 때라도 항상 모일 수 있다면 이 얼마나 아름답겠는가! 집회에서 우리는 다만 요리를 하며 또 먹는다. 우리가 요리를 할 때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드신다.
그렇다면 우리가 요리하며 하나님과 함께 먹기 위한 모든 음식물은 누구인가? 그것은 그리스도이다. 레위기는 교회 집회에 관한 책이라 말할 수 있고 또한 요리 책이라 부를 수도 있다. 요리하는 아내들이라면 누구에게나 요리책이 있다. 레위기는 그리스도를 요리하는 법을 알려주는 요리책이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요리함으로써 하나님께 음식을 드리고 만족케 해드리는 법을 말해준다. 하나님은 배고프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실제의 주방들인 지방 교회들을 일으키셨음을 인해 주님을 찬양하자. 지금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를 요리함으로써 그분 자신을 만족케 하며 우리 자신들이 만족케 되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우리는 레위기를 거듭해서 아주 많이 읽을 필요가 있다. 이 책에 언급된 모든 것이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다. 이 책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을 만족케 해드리는 그리스도를 요리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확대된 그리스도
출애굽기에서 회막이 세워졌는데, 이전에 우리는 장막이 바로 확대된 그리스도임을 보았다. 장막 안에서는 법궤가 중심이며 내용인데, 법궤는 바로 그리스도 그분 자신이다. 법궤는 하나님의 십계명을 담고 있는 그릇이며, 십계명은 하나님의 표현이자 대표이다. 이것은 법궤가 표현되시기 위한 하나님을 그 내용으로 담고 있음을 의미한다. 법궤는 나무에 금이 입혀진 것으로서 두 종류의 재료로 구성되어 있다. 금과 나무는 각각 신성과 인성의 두 가지 본성을 예표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 모두에 속하신 분이다. 그분은 자신 안에 성막의 바로 그 중심이자 내용인 하나님을 담고 계신다.
그리고 성막은 보다 큰 그릇으로, 그것은 또한 나무에 금이 입혀진 두 가지의 주요한 재료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은 성막이 바로 법궤의 확장, 곧 법궤의 증가임을 계시해 준다. 법궤가 확장될 때 그것은 곧 성막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확장되실 때, 그분이 교회가 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는 바로 그리스도의 확장이다. 엄격히 말하면 교회는 또한 그리스도이다(고전 12:12). 법궤는 개인적인 그리스도이고, 성막은 단체적인 그리스도이다. 우리가 이 땅 위에서 회막으로서의 확장된 그리스도를 가지며 이 회막 안에 하나님의 거처가 있음을 인하여 주님을 찬양하자. 하나님은 확장된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계시며 이 확장된 그리스도로부터 말씀하신다. 우리는 이 확장된 그리스도가 우리 모두를 포함함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증가 안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곧 회막이다. 회막이란 바로 단체적인 방식으로 확장된 그리스도이다.
장막을 치시매
회막은 하나님을 이 땅으로 이끈다. 하나님은 더 이상 하늘에 계시지 아니하고 이곳 회막 안에 계신다. 회막인 확장된 그리스도가 하나님을 이 땅으로 이끄신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시매』(요 1:1, 14). 헬라어에서 「거주하다(dwelt)」라는 단어는 「장막을 친(tabernacles)」을 의미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셨다. 말씀이신 그분은 하나님이셨으며, 이제 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시고 하나님을 하늘로부터 이 땅의 회막 안으로 이끄신다. 오늘날 하나님은 회막 안에 계신다. 이것은 정확히 고린도 전서 14장에 언급된 것으로 사람들이 지방 교회의 집회에 와서,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25절, 미국 표준역)라고 말하는 바로 그것이다. 오늘날 하나님은 회막 안에 계시며, 이 회막은 곧 확장된 그리스도이다. 확장된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이 땅으로 이끄신다.
제물이신 그리스도
그러나 이것은 한 부분에 불과하다. 그리스도는 회막이실 뿐 아니라 모든 제물들이시기도 하다. 그분은 장막이시며 또한 모든 제물들이시다. 장막은 하나님을 사람에게로 이끌고, 제물들은 사람을 하나님께로 이끈다. 이것은 일방적인 교통이 아니라 오고 감이 있는 쌍방 교통이다. 그리스도는 장막으로서 오시며 또 제물들로서 가신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함께 우리에게 오시며 또 우리와 함께 하나님께로 다시 가신다. 바꿔 말하면 그분이 오심으로써 하나님을 우리에게로 이끌며, 그분이 가심으로써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끈다.
우리는 죄로 충만하지만, 장막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우리에게로 이끄셨다. 우리에게는 또한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끌 제물이신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회막 안에 있지만, 우리가 어떻게 그것에 접근할 수 있는가? 우리에게는 제물들이 필요하다. 제물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끄신다.
장막이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우리와 연합되는 수단이시다. 그렇지만 장막은 우리에게로 연결될 뿐, 우리와 연합될 수는 없다. 그러나 제물이신 그리스도는 우리와 연합되실 수 있다. 우리가 모든 제물들을 먹을 때 그것은 우리 몸에서 소화된다. 음식은 소화됨으로써 우리와 연합된다. 제물들은 그리스도가 우리와 연합되는 데 유용하다.
이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보다 많은 주관적인 체험들을 갖는다. 그리스도는 다만 우리에게로 연결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와 연합되고 섞여진다. 그분은 요한복음 6장 57절에서,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우리가 먹는 그것이 된다. 우리가 통닭을 먹은 후에 그 통닭은 우리의 일부가 된다. 레위기에 나오는 거의 모든 제물들은 먹기에 좋은 것들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음식이 될 뿐 아니라 우리의 음식도 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끄시는 것은 이 길로 말미암아서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선물
지금 하나님은 회막 안에 계시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접촉하기 위해서는 모든 제물이신 그리스도를 선물할 필요가 있다. 다비의 새번역에 따르면 「드리다(offer)」라는 단어는 반드시 「선물하다(present)」라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그리스도를 각종 선물로 드릴 필요가 있다. 제물이신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일종의 선물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번제물, 소제물, 화목 제물, 속죄 제물, 속건 제물을 드릴 필요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것을 선물하고자 한다면 우리가 그것을 반드시 소유해야만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합당한 방식으로 대가를 지불해서 얻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문제이다. 많은 때 우리는 하나님께 드릴 선물도 없이 집회에 온다. 이것이 우리가 하루 내내 그리스도에 대해 수고함으로써 약간의 좋은 소출을 얻을 필요가 있는 이유이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께 선물로 드릴 무언가를 가져 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것을 요구하고 계신다는 것이 아니다. 그분의 갈망은 오직 우리가 그분께 그리스도를 선물로 드리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요구에 부응하려고만 한다면 그것은 그렇게 즐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선물을 드린다면 하나님께 정말 달콤함과 기쁨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회막 안에서 우리에 대한 어떤 요구도 없으시다. 그분의 원함은 오직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한 어떤 것으로 그분께 선물을 드리는 것뿐이다.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이 갈망하시는 유일한 선물이시다.
오늘날 하나님은 영과 실제 안에서 그분을 경배하는 참된 경배자들을 찾고 계신다(요 4:24). 그리스도는 우리가 마땅히 그분께 드려야 할 모든 선물들의 실제이시다. 우리는 그분을 우리와 연합시키기 위해 반드시 그분을 먹어야만 한다. 그럴 때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이고 그분은 우리가 하나님께 선물하는 바로 그 선물이 되신다. 이것은 하나님을 만족케 하며 또한 우리도 만족케 할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회막의 풍성함과 충만함을 볼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집회 안의 교회 생활이다.
위트니스 리
[실제이신 그리스도, "회막과 모든 제물들", 한국복음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