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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 레위기 2:4-16, 6:14-18
소제의 향료들을 보는 것은 중요하다. 합당한 조리법에는 항상 향료들이 있다. 거기에는 세 가지의 적극적인 것들과 두 가지의 소극적인 것들이 있다. 고운 가루는 향료는 아니지만 소제를 만들기 위한 주된 요소이자 원료이다. 고운 가루에 더해지는 많은 향료들이 레위기 2장에 언급되었다.
기름
첫번째 향료는 기름이다. 우리는 이것을 지난 메시지에서 언급하였다. 우리는 모두, 기름이 예표상으로 신성한 영을 상징함을 알고 있다. 나는 「거룩한」이란 단어 대신에 「신성한」이란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이라는 단어에 대해 많은 왜곡된 관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장에서 나는 「신성한 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원하는데 신성한 영은 바로 하나님의 신성이기 때문이다. 고운 가루는 예수의 인성을 상징하고 기름은 예수의 신성을 상징한다. 따라서 기름은 소제에 첨가된 신성한 향료이다.
고운 가루로 사용된 소제의 첫번째 향료는 신성한 영이다. 예수님은 사람이시지만 그분은 신성한 영과 연합되셨고 기름부어지셨다. 신성한 영은 예수의 인성과 연합되었을 뿐 아니라 그분의 인성에 기름부어졌다. 연합은 기름바름보다 더 깊지만, 기름부음은 더 분명하다. 예를 들면, 레위기 2장에 있는 화덕 위에 올려질 고운 가루는 기름과 연합되어야만 한다. 그 후 그것은 어떤 형태가 되어 부분들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부분들로 나누어진 후에 기름이 그 위에 부어진다. 『번철에 부친 것으로 소제의 예물을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에 누룩을 넣지 말고 기름을 섞어 조각으로 나누고 그 위에 기름을 부을지니 이는 소제니라』(레 2:5-6) 연합된 후에도 여전히 기름이 발라질 필요가 있다. 연합은 안에서 내적으로 발생하는 반면에, 기름 바름은 외적으로 바깥에서 이루어진다.
예수께서 태어나셨을 때 그분은 성령과 연합되셨다. 그분은 성령으로 태어나셨다. 이것은 그분의 인성이 이미 신성한 영과 연합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분이 침례받으셨을 때 성령이 비둘기의 형체와 같이 그 위에 임하셨다(마 3:16). 그분은 신성한 영과 내적으로 연합되셨을 뿐 아니라 신성한 영이 비둘기 형체와 같이 바깥에 임하셨다. 그분은 단지 추상적인 방법으로 기름부어지지 않으셨고 비둘기와 같은 형체로 기름부어지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제의 향료로서 기름을 보는데, 그것은 고운 가루와 연합되었고 또한 고운 가루에 기름 붓는 데 사용되었다. 우리의 소제로서의 예수님은 신성한 영과 연합되셨고 기름부어지셨다.
유향
소제의 두번째 향료는 유향이다. 예표에서, 유향은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과 본성의 향기를 상징한다. 심지어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시기 전에도 그분의 모든 행위와 활동에는 항상 달콤하고 향기로운 어떤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부활 생명이었다. 소제이신 예수의 인성 안에는 신성한 영의 향료와 부활 생명의 향료가 있다.
소금
다른 적극적인 향료는 소금이다. 소금이 의미하는 것을 이해하기는 쉽다. 무엇보다도 먼저 소금은 부패균들을 죽인다. 그것은 부패시키는 요소를 죽이기 때문에 또한 지속케 하는 능력을 유지하고 공급한다. 소금은 죽이고 보존하고 지속케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사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전기를 읽을 때 우리는 이 땅에서의 그분의 모든 활동들이 영원함을 본다. 시대가 바뀌고 수세기가 지났지만 예수의 생명은 여전히 여기에 있다. 그것은 정말로 지속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 주 예수님의 생명과 활동과 행위 안에는 계속적으로 보존시키는 것이 있다. 그분의 활동들은 천연적인 사람의 활동과 같지 않다. 어떤 사람의 활동들은 과거에는 좋았지만 오늘은 그렇지 않다. 어떤 것은 삼십 년 전에는 좋았지만 오늘날은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것들은 끝났다.
사복음서를 다시 한번 읽어보라. 모든 페이지마다 너무나 신선하고 새롭다. 주 예수님이 행한 모든 것은 여전히 너무나도 새롭다. 그 안에 부패의 요소가 없기 때문에 어떤 것도 그분의 활동을 손상케 할 수 없었다. 모든 부패시키는 요소들은 주 예수님의 생명 안에서 하늘에 속한 소금과 함께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의 생명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나는 새 예루살렘 안에서 우리가 자주 사복음서의 내용들을 기억하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주 예수님의 생명, 특별히 그분의 인성 안에는 소금이 있다. 이것이 바로 죽이고 보존시키고 지속케 하는 능력이다.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은 너무나 순수하다. 많은 때 다른 이들을 향한 우리의 사랑 안에는 소금이 없다. 어제는 달콤했었지만 오늘은 쓰다. 이것은 거기에 소금이 없기 때문이다. 소금이 없다면 우리의 사랑은 변질될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모든 형제들과의 관계에 소금을 두어야 한다. 어떤 형제를 좋아하는 것은 좋지만 이러한 관계는 죽인 바 될 필요가 있다. 나는 형제를 좋아하는 것이 죽인 바 될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좋아하는 것 안에 있는 부패시키는 요소는 죽인 바 될 필요가 있다. 거기에는 소금 안에 있는 죽이는 능력이 필요하다.
할렐루야! 예수의 인성은 기름과 유향과 소금을 가지고 있다. 예수의 가장 친한 친구인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 그의 누이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께 그분이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이었다면, 우리는 아마 얼마의 눈물을 흘리고 즉시 그를 보러 갔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 소식을 받으신 후에 그분은 움직이지 않으신 것을 볼 수 있다. 그분은 거기서 최소한 이틀 동안 머물러 계셨다. 그분이 나사로를 사랑하지 않으셨다고 생각지 말라. 그분은 그를 사랑하셨지만, 그분의 사랑 안에는 죽이는 능력, 어떤 부패한 것이든지 죽이는 능력이 있었다. 그분의 사랑은 순수한 사랑이었으므로 그것은 영원한 사랑이었다.
당신이 만일 나에게 내가 아주 잘 알고 있는 어떤 형제가 아프다고 말해준다면,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참된 시험이 될 것이다. 만일 내가 슬퍼하고 내가 당장 가야만 한다고 말하며 이 형제를 만난다면, 그것은 내 사랑 안에 소금도 없고, 죽이는 능력도 없음을 증명한다. 그것은 감정적이고 천연적인 것이다. 그러나 만일 내가 소금이 있는 예수의 인성에 대한 체험을 가지고 있다면, 이 형제와 관련된 그러한 소식을 들을 때 나는 즉시 주님께 돌이킬 것이다. 『주여, 당신은 어떻게 느끼십니까? 나는 나의 천연적인 느낌에 따라 가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십자가로 처리되어야 합니다. 만일 당신이 이 형제의 아픔에 대하여 어떠한 느낌도 가지고 있지 않으시다면, 나는 그것에 대하여 잊어버릴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로 천연적인 우정, 천연적인 사랑, 천연적인 애정을 죽이기 위한 소금이 필요하다. 그리고 소금은 죽일 뿐 아니라 보존하고 유지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지속케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소극적인 향료들
기름, 유향 그리고 소금은 소제의 적극적인 향료들이지만 또한 어떤 소극적인 향료들이 있다. 소극적인 향료들이란 소제에 결코 더해져서는 안 될 향료들을 의미한다. 『무릇 너희가 여호와께 드리는 소제물에는 모두 누룩을 넣지 말지니 너희가 누룩이나 꿀을 여호와께 화제로 드려 사르지 못할지니라』(레 2:11). 왜 우리는 결코 소제에 누룩이나 꿀을 넣지 말아야 하는가? 왜냐하면 이 두 가지 것들은 쉽게 발효되기 때문이다. 어떤 음식에 발효가 시작되면 그것은 부패되고 상하게 될 것이다.
첫번째 언급된 소극적인 향료는 누룩이다. 성경에서 누룩은 언제나 악한 것들을 상징한다. 세상적인 것, 죄된 것, 부패에 관련된 것들이나 모든 악한 것들은 성경에서 누룩과 같은 것이다.
그 다음 꿀은 무엇인가? 성경에서 꿀은 좋은 어떤 것을 상징한다. 우리의 미움은 누룩이고, 우리의 사랑은 꿀이다. 우리의 교만은 누룩이고, 우리의 겸손은 꿀이다. 우리의 모든 선한 행위는 꿀이다. 우리의 사랑은 좋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것은 발효될 수가 있다. 많은 경우 미움은 사랑처럼 많이 변질되지 않는다. 함께 살고 있는 다섯 명의 형제들이 서로 미워하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들이 그들의 미움으로 너무나 차갑기 때문에 오히려 그들이 발효되기란 어려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서로가 너무 사랑할 때 그들은 그들의 천연적인 사랑에 의해 무방비 상태가 될 것이다. 그럴 때 그들은 단시일 내에 모두 발효될 것이다.
교회 안에서 우리는 교만하거나 겸손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하는 형제를 얻기를 원하지 않으며, 그가 항상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 형제를 얻는 것 또한 좋아하지 않는다. 이것이 꿀이다. 꿀은 달콤하고 너무나 간교하다. 우리는 미움이 나쁘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사랑이 나쁘다고 말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레위기 2장은 우리가 소제에 어떤 누룩이나 꿀도 넣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누룩이나 꿀은 하나님께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들은 주님께서 흠향하시는 향기와 같이 제단으로부터 위로 올라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결코 교만하지도 겸손하지도 말아야 한다. 우리는 단순히 적당량의 소금과 기름과 유향을 함께 취해야 한다. 이것이 그 영이요 부활이요 십자가이다. 소금은 바로 우리의 천연적인 사랑, 우리의 천연적인 애정, 그리고 우리의 천연적인 인내를 십자가로 처리한다. 이러한 모든 「좋은」 것들은 그것이 발효의 원인이기 때문에 십자가로 처리되어야만 한다. 나는 항상 인내심 많은 사람을 두려워 한다. 만일 당신이 항상 나에 대해 인내한다면 당신은 어느 날 나에 대해 세상에서 가장 비판적인 사람이 될 것이다. 어떠한 종류의 천연적인 인내도 감상하지 말아야 한다. 모든 천연적인 좋은 것은 반드시 소금에 의해 십자가로 처리되어야만 한다.
소금은 십자가이고 유향은 부활이다. 예수의 인성인 소제 안에는 십자가의 죽음이 있고 또한 부활이 있다. 소금은 죽이고 보존하고 지속케 하는 능력을 제공하며 유향은 향기로운 부활 생명이다. 이 장 안에 있는 소금은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이라 불리운다.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레 2:13). 하나님께서 우리와 하신 언약에 있어서 기본적인 요소는 십자가, 즉 주님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이다. 이것이 바로 그분의 언약이 영원한 이유이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것은 영원한 언약이 되었다. 그러므로 소제 안에는 그리스도의 인성, 그리스도의 신성,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이 있다. 십자가는 죽이고 보존하기 위한 것이고 부활 향기는 그분의 인성 전체의 향기를 위한 것이다.
이것은 단지 우리에게 교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만일 우리가 소제를 계속 먹는다면 우리는 결국 우리가 먹는 그것이 될 것이다. 소제는 예수의 인성, 예수의 신성, 예수의 십자가, 그리고 예수의 부활을 포함한다. 거기에는 고운 가루, 기름, 유향, 그리고 소금이 있다. 이 소제 안에는 어떤 누룩이나 꿀이 있을 여지가 없다. 사람이신 예수의 생명 안에는 어떤 종류의 불순함이나 부패가 있을 지위가 없었다. 만일 우리가 그러한 예수의 어떠함으로 주입된다면, 고운 가루와 기름과 소금 그리고 유향을 갖게 될 것이고 어떠한 누룩이나 꿀도 없을 것이다.
소제에 대한 다른 인식
레위기 2장은 또한 소제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다른 이해를 계시한다. 우리는 이미 번제에 관해서는 이것을 보았다. 거기에는 수송아지, 양이나 염소, 그리고 산비둘기나 어린 집비둘기가 있었다. 소제 또한 인식에 있어서 세 부류 혹은 세 단계가 있다. 『네가 화덕에 구운 것으로 소제의 예물을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어 만든 무교병이나 기름을 바른 무교전병을 드릴 것이요 번철에 부친 것으로 소제의 예물을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에 누룩을 넣지 말고 기름을 섞어... 네가 솥에 삶은 것으로 소제를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와 기름을 섞어 만들지니라』(레 2:4-5, 7).
번제에 있어서 인식의 정도는 크기에 따라 다르지만, 소제이신 예수를 인식하는 데 있어서는 고난의 정도에 따라 다르다. 화덕은 일종의 고난을 상징하고, 솥은 다른 종류의 고난을 상징하며, 프라이 팬은 또 다른 종류의 고난을 상징한다.
우리가 어떤 것을 화덕 안에 둘 때 고난이 그 안에 있다. 그것은 감추어진 고난, 더 깊은 종류의 고난이다. 사복음서 안에 있는 주님의 고난의 어떠함은 마치 화덕에 있는 고난과 같다. 그것들은 너무나 감추어져 있어서 단지 그분만이 아실 뿐 다른이들은 알지 못한다. 예를 들면 그분이 겟세마네 동산에 계셨을 때 그분은 기도하고 계셨지만, 그분과 함께 있었던 제자들조차 그분의 고난의 정도를 알지 못했다. 그분은 정말 일종의 화덕 안에 계셨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고난당하신 예수에 대한 가장 깊은 인식이다. 그분의 고난은 너무나 내적인 것이어서 다른 이들로부터 어떠한 동정도 받으실 수 없었다. 그분은 화덕 안에 놓여졌다. 화덕이나 솥에서 고난당하신 분으로서의 그리스도를 드리는 것은 우리의 이해와 체험에 근거한 것이다. 우리의 인식은 예수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체험으로부터 나온다.
오븐 안에서 구워진 떡이나 과자들은 일정한 형태가 있다. 모든 떡이나 과자는 어떠한 모양을 가지고 있다. 보다 깊은 이러한 방식에서 우리가 예수를 체험하고 인식한 것은, 한 가지 모양 이상의 어떠한 것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사용된 「떡」의 히브리 말은, 「구멍이 난 떡」들을 말한다. 이것은 구멍이 뚫어져 있고 많은 구멍을 가진 떡이다. 사복음서를 읽을 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온전하셨지만, 그분의 전체가 다 성하지는 않으셨음을 본다. 그분은 온전하셨지만 그분은 구멍이 뚫려지셨고 관통되어지셨다. 나는 우리 중 많은 이들이 심지어 한 개의 구멍도 없을까 두렵다. 우리는 온전하지 않으면서도 아주 성하다. 온전케 되는 것은 옳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그렇게 성하게 유지해서는 안 된다. 교회 생활 안에서는 우리가 더 많은 구멍을 가질수록 좋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 전체를 그렇게 다 성하게 유지해서는 안 되며, 깨지고, 구멍이 나야 하고, 관통되어져야 한다. 복음서들 안에 있는 예수의 생명은 계속 구멍이 뚫려지신 분이셨다. 이것이 바로 그분이 쉽게 우리를 먹이시는 이유이다. 구멍이 뚫어진 떡을 먹기는 참으로 쉽다.
히브리 단어 「과자」는 매우 얇은 과자들을 의미한다. 아마도 그것들은 속이 빈 과자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 단어의 어근은 「비어 있는(empty)」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주 얇고, 속이 많이 비어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람들이 먹기에 좋다. 그러나 그분의 내적인 고난에 대해서는 분명한 형태가 있다. 이것이 바로 소제이신 예수에 대한 가장 깊은 인식이다. 그리스도를 소제로 회막에 가져오는 사람들은 이러한 그분의 고난의 깊은 인식을 가져야만 한다.
소제에 대한 두번째 인식은, 기름과 섞여진 고운 가루를 솥에 굽는 것이다. 솥은 화덕보다 더 열려 있는 것이다. 이것은 보다 쉽게 다른 이들에게 실제가 되기 위한 열린 고난을 상징한다. 그것은 부분들로 분리되기 때문에 어떤 모양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화덕 안에 있는 떡과 과자처럼 그렇게 다양한 형태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세번째 인식은, 바로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어 프라이 팬에 굽는 것이다. 여기서의 고난은 보다 피상적이며 거의 어떤 형태가 없다. 이것은 소제이신 예수님에 대한 가장 낮은 인식이다. 우리가 처음 구원받았을 때 우리 중 대부분은 예수님에 대해 이러한 인식을 가졌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인성의 공급을 받고 자랄 때 우리는 최소한 조금이라도 화덕 안에 떡과 과자로서 구워지신 예수에 대한 인식을 가져야만 한다. 주님의 인성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체험은 반드시 점점 더 깊어지고 높아져야 하며 형태에 있어서도 보다 깊고 높아져야 한다.
첫열매의 소제
이러한 세 가지의 인식 외에도 첫 열매들에 대한 소제의 인식이 있다. 『너는 첫 이삭의 소제를 여호와께 드리거든 첫 이삭을 볶아 찧은 것으로 너의 소제를 삼되』(레 2:14). 첫녹색의 낟알은 신선한 이삭의 껍질을 벗긴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특별한 인식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그러한 세 단계의 일반적인 인식 외에도 예수의 인성에 대한 특별한 인식이 있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의 소제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약간의 새로운 체험을 갖는다. 집회에서 어떤 형제의 간증은 생동감있고 새로우며 신선한 느낌을 주곤 한다. 그것이 바로 소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을 더욱 많이 가질 필요가 있다. 만일 우리가 수확물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푸르고 신선한 이삭들을 가질 수가 있겠는가? 우리는 반드시 어느 날 우리가 많은 신선한 이삭들을 새로운 수확물로 얻게 될 것을 기대하며 좋은 땅에서 수고해야만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이것을 특별한 종류의 소제로 회막에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소제를 먹는 방법
이제 우리는 소제를 어떻게 먹는지를 보는 것이 중요하다.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소제가 일반인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제사장들의 특별한 음식이다. 『그 나머지는 아론과 그 자손이 먹되 누룩을 넣지 말고 거룩한 곳 회막 뜰에서 먹을지니라... 무릇 아론 자손의 남자는 이를 먹을지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 중에서 그들의 대대로 영원한 소득이 됨이라 이를 만지는 자마다 거룩하리라』(레 6:16, 18).
소제는 제사장들의 음식이다. 만일 우리가 교회 생활 안에서 제사장으로서 어떤 기능도 갖고자 하는 갈망이 없다면, 우리는 이 음식을 먹기 위한 위치를 갖지 못할 것이다. 제사장은 회막에서 섬기고 봉사하는 사람이다. 집회에서 우리가 기능을 발휘하는 것과 발휘하지 않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만일 우리가 기능을 발휘한다면 우리는 더욱더 많이 누릴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기능을 발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제사장으로서 소제를 누리기 위한 위치를 잃을 것이다. 우리는 제사장이 되어 소제의 특별한 음식을 누리기 위해 온전한 방식으로 기능을 발휘해야 한다.
다른 요점은 소제가 단지 남자들만을 위해 있다는 것이다. 『아론의 자손들 가운데 모든 남자들이 그것을 먹을지니라』. 이것은 자매들에게는 아무런 몫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회막에서 기능을 발휘하는 모든 자매들은 남자들이다. 그리고 기능을 발휘하지 않는 모든 형제들은 자매들이다. 성경에서 남자가 되는 것은 강한 자가 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는 아무 흠도 없는 남자이다. 여자가 된다는 것은 약한 자가 된다는 뜻이다(벧전 3:7). 남자들은 강한 자들이고 여자들은 더 약한 자들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당신이 남자인가는 당신이 강한가 약한가에 달려 있다. 만일 우리가 회막에서 약하다면 우리는 여자이다. 만일 우리가 기능을 발휘하는 데 있어서 강하다면 우리는 남자일 것이고, 이 음식을 먹기 위한 합당한 위치 안에 있는 것이다.
소제는 반드시 회막의 뜰 안에서 먹어야만 한다. 이것은 당신이 가정에서 먹는 음식이 아니다. 엄밀히 말한다면, 우리는 가정에서 소제이신 그리스도를 합당하게 누릴 수 없다. 우리는 반드시 교회 집회 안에 있어야만 한다. 이것은 가정을 위한 음식이 아니고 하나님의 집을 위한 음식이다. 우리는 반드시 그분이 거하시는 장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섬기고 수고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이 음식을 먹을 수 있는 합당한 위치를 가질 것이다. 우리 중 많은 이들이 가정에서 그리스도의 어떠함을 누리고 있는 동안에는 결코 우리가 교회 집회 안에서 누리는 것만큼 그분을 누리지 못함을 간증할 수 있다. 여기에 높고, 풍성하며 어디에도 비교할 수 없는 어떠함이 있다. 가정에서 소제를 준비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을 누릴 수는 없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누림을 위해 우리가 준비한 것을 교회 집회 안에 가져와야 한다. 이것이 회막의 뜰 안에서 먹는 음식이다.
우리가 소제를 먹기 위하여 올 때 우리는 그것을 어떠한 누룩이나 꿀과 함께 먹어서는 안 된다. 소제 그 자체 안에는 아무 누룩이나 꿀이 없다. 그리고 우리는 이 제물과 더불어 이러한 소극적인 향료들에 속한 어떤 것도 먹어서는 안 된다. 소제이신 그리스도를 누리기 위해서는 누룩이나 꿀과 아무 관계도 갖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그러한 높은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누리기 위해서는 천연적으로 나쁘거나 좋은 것은 어떤 것도 반드시 거절해야만 한다. 우리는 반드시 소금에 절여져야 한다. 우리가 사용해야 하는 유일한 향료들은 기름과 유향과 소금-신성한 영, 부활 생명 및 십자가의 끝냄-이다.
소제를 먹는 데 있어서 마지막 요점은 그것을 입에 대는 사람은 누구든지 성화되고 분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참으로 사실임을 간증할 수 있다. 많은 때 우리가 집회에서 소제이신 그리스도를 누린 후에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더 분별된다. 우리는 소제를 잔치로 누리기 때문에 더 분별되고 더 성화된다. 우리가 소제이신 주 예수님을 실제로 누린다면, 우리는 세상적인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완전히 분별될 것이다.
소제는 너무도 거룩하기 때문에 그것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세상으로부터 분별되어 주님을 위하여 거룩하게 되어야 한다. 우리가 이런 방법으로 주 예수를 맛본다면 우리의 일상적인 행함에 놀라운 변화가 있게 될 것이다. 그분은 너무나 거룩하셔서 우리를 성화시키고, 분별시키고, 거룩케 하실 것이다. 만일 우리가 소제이신 그분을 먹는다고 주장하면서 여전히 동일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면, 나는 우리가 실제로 소제이신 그분을 먹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그리스도의 인성인 참된 소제는 거룩하다. 그것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분별되고 성화되고 거룩하게 된다.
위트니스 리
[실제이신 그리스도, "소제의 향료들", 한국복음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