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 May
- 조회 수 4401
신약안의 주님과의 인격적인 조우장면(1)-막달라마리아편
성경은 신구약을 다 읽고 보면 너무나 방대해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보통 사람들은 잘 알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요한계시록이 좋다고 요한계시록만 평생외우고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저는 무엇보다 성경은 그리스도...예수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보았고 이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뜻안에 있는 핵심이고 중심이란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사람이 되어 죄도 없으신분이 죄있는 피조물의 모양으로 오셔서 살다가 죽고 부활하셔서 사람속에 생명으로 들어 오신 사실에 대하여 이는 단순한 교리로만 알수 있을수 있겠지만 개인개인에게 다가간 예수는 너무나 섬세하고 너무나 강렬하며 너무나 아름다우며 너무나 매력적이며 너무나 감동적인 분이십니다.
사복음서는 온통 그분과 그분을 따르고 사랑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습니다.
사람이 주님의 은혜를 받으면 그영의 역사로 사람의 혼에 강렬하게 인식하게 되고
혼의 일부분인 생각 감정 의지에 까지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새깁니다.
사탄도 사람의 혼속에 자신을 주입하고 사람을 자신의 영역에서 가두려고 합니다.
오늘부터 여유가 되는대로 성경안에 나타난 그분과 그분을 사랑하던 사람들의 만남의 순간을 묘사해 보고자 합니다.먼저 막달라 마리아를 가장 먼저 말하고 싶습니다.
아마도 주님이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아마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아닌가 합니다...
요한 복음 20장에 나타난 막달라 마리아와 주님의 만나는 장면
1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 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간 것을 보고
주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장사되어 무덤에 간사람도 제자들이 아니라 그당시 가장 천대 받던 창녀였던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그녀의 삶은 주님을 만나기전에는 아무런 삶의 의미도 소망도 없는 어둠의 길이었는데
그녀가 주님을 만나고 나서는 자신의 삶과 소망은 오직 주님이었습니다.
그녀는 큰 죄인이었지만 그만큼 주님의 가장 큰 사랑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유일한 소망이었던 주님이 십자가에 죽고 이젠 그녀를 볼수 없게 되었고
그녀는 이제 살소망이 아무것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삶의 모든것이시고 사랑이었고 대상이었던 주님이 없어졌으니
그녀는 주님의 시신이 있는 무덤에 갈수 밖에 없었고 이른 아침 새벽에 주님을 만나러 갔습니다.
주님의 사랑하는 자녀들은 깊은 사망의 잠에서 깨면 언제나 주님을 찾아 아침에 달려가는 자입니다.
그녀가 달려가서 무덤에 돌이 옮겨진것을 보고 시몬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달려가서 말합니다.
2 시몬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베드로와 제자들은 주님이 살아생전에 서로 수제자가 되려고 경쟁하고 자신을 자랑하던 자였지만
주님이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죽을때는 하나같이 다 도망을 가고 없었습니다.
교회안에 드러나는 많은 봉사를 한다고는 하지만 막상 주님이 지는 심자가는 질수 없을때가 많습니다만 막달라같이 작은 자매가 주님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발견하곤 합니다.
3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
4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아나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놀란 베드로와 사랑하는 제자..아마도 요한이라고 봅니다.얼마나 놀랐던지 뛰어가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주님은 아마도 이런 우리의 모습을 사랑하실겁니다.
우리가 때론 주님을 놓치고 배신하고 낙심에 빠지더라도 주님을 향해 달려 가는 우리의 모습을
주님은 언제나 사랑하십니다.
5 구푸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요한이 컴컴하고 좁은 동굴속에 몸을 구푸려 들어갔더니 주님의 시신을 쌌던 세마포가 놓인 것을 보았으나
요한이 주저하고 들어 가지 않자 베드로가 먼저 들어가서 보게 됩니다
베드로가 한면 미련하고 성질이 급하다고 하지만 한면 단순하고 주님에 대해 절대적이었고
주님은 그런 베드로를 변화시켜서 사용하셨습니다.
요한은 주님을 사랑하고 사려 깊었지만 베드로처럼 단순한 부분은 베드로에 비해 부족했던것 같습니다.
6 시몬 베드로도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7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
주님은 세마포를 벗을때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사탄은 사망으로 그를 없이 하려 했고 무덤속에 가두려 했지만 그는 언제나 부활이시고 승리이시고 당당하시고 여유로우십니다.그분은 미소를 지으며 사탄에게 말했을겁니다. 사탄아..네 쏘는것이 어디 있느냐??
정말 이장면이 영화의 한장면 처럼 실감나지 않는지요? 저는 어릴때 이장면이 너무 강렬하게 제가슴에 와 닿았습니다.그리고 그분은 죽고 부활하셔서 신성한 부활을 이루셨지만 그는 여전히 인성을 가지시고 사람의 삶을 존중하셨습니다.그증거가 머리를 쌌던 수건을 개켜 놓고 가신 것입니다. 수건을 그냥 신성한 능력으로 정돈해 놓으신 것이 아니라 부활하셨지만 육신의 손으로 직접 개켜 놓았다는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령 받았다고 직장도 그만두고 학교도 그만두고 오로지 목회만 하겠다고 능력 받겠다고 기도만 하겠다고 나오지만은 그가 자가용을 몰면서 교통법규를 마음대로 위반하여도 감각이 없을수도 있습니다.
정녕 온전한 사람으로서의 인격을 갖추었는지는 의문스럽습니다.주님은 참으로 정리정돈과 규모있는 생활을 하시는 분이시고 절제와 인내가 많으신 합당한 사람이시란것을 볼수 있습니다.
그분은 부활하셔서 신성한 몸을 가지셨지만 그는 자신을 보러 온 사람들에게 간증이 되시고 사람의 삶을 존중하셨습니다.
8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9 (저희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10 이에 두 제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베드로와 요한이 마리아의 보고를 받고서 뛰어갔고 무덤에서 없어진 것도 보고 세마포와 수건이 개켜진것도 보았지만 그들은 그냥 다시 거처로 돌아가 버렸고 다시 막달라마리아만 남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계시와 예언의 말씀에 대한 지식과 믿음이 없었습니다.주님이 다시 살아나실거라는 믿음...
그러나 막달라는 말씀은 없었지만 지극한 사랑이 있었습니다.그래서 주님을 만날수 있었습니다.
고린도 전서13장에 믿음 소망 사랑 그중에 사랑이 제일이라 하셨습니다.
마리아가 얼마나 다시 외로워 졌겠는지요..우리의 삶속에 항상 형제자매들이내주변에 가까이 있고 주님을 같이 누리고 집회도 하고 찬양도 하지만 언젠가는 항상 마리아처럼 혼자 있게 됩니다.때론 지체들이 항상 같이 모여서 집회만 하면 좋겠다고 하고 개인적으로 누리는 지체를 간혹 판단할때도 있지만 개인적인 누림은 언제나 필요 한것입니다.나자신도 과거에는 획일화 되고 강요된 누림을 사역을 가장 잘 다르는 길이라 주장했지만 참된 은혜의 누림은 물흐르듯이 흘러가는것입니다.사망이 교회안에 가득찬것 같지만 그것을 인위적으로 바꾸려 할때 주님의 기름부음은 즉시 멈추어집니다.자신도 모르게 주님은 언제나 제자들과 군중들속에 환호를 받았지만 항상 혼자있기를 원하셨습니다.
주님은 항상 그렇게 외로울때 우리를 찾아 오십니다.
주님은 베드로와 요한과 막달라마리아 중에 누구를 더 사랑하시겠는지요~~
제자들도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도 제자들을 사랑하시겠지만
주님을 더욱 찾는 자가 주님을 더 사랑하는 자입니다.
주님을 많이 사랑하는자가 주님을 더욱 찾는 자입니다.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참으로 제자들이란 사람들도 한심한 면이 있는것 같습니다.
약한 자매를 그무서운 무덤가에 혼자두고 자기들만 갈수있겠는지요...
아니면 마리아가 한사코 가지 못하겠다고 버티었던것이었겠지요...
주님이 없는 세상은 돌아가봐야 공허한 것이니까요?
그녀는 여자의 몸으로 컴컴한 무덤동굴속으로 들어가서 다시 확인해 보려고 했습니다.
그때 두천사가 주님이 계셨던 곳에 나타났습니다.
12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13 천사들이 가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가로되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천사들이 마리아에게 네가 왜 우느냐고 물었을때 마리아는 내주를 어디다 누가 가져다 두었는지 몰라서 운다고 했습니다.그말속에는 주님이 없다면 나는 어떻게 살수있겠냐는 반문이 섞여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기도할때 주님이 없다면 내가 어떻게 이땅에 살수 있겠느냐고 물을때 주님은 항상 답을 주셨습니다.
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의 서신 것을 보나 예수신 줄 알지 못하더라
우리의 삶속에 다가오는 고난과 모진 환경과 아픔이 있지만 주님은 때론 너무나 침묵하시는때 가 많습니다.
그러나 알고보면 그분은 우리의 등뒤에서 서계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는 이장면이 성경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 으로 새겨져 있습니다.이장면은 감동 그자체입니다~~!!
주님과 마리아가 막 눈을 마주치기 일보직전일때의 긴박감과 감동과 폭발적인 뜀///
내 삶이 너무나 메마르고 삭막하고 찬양과 넘치는 기쁨과 행복이 끊어질때 나는 이장면을 항상 생각합니다.
이장면은 말로서 다 표현이 안되는 장면입니다.우리가 성경을 읽을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않는다면 주님을 마리아처럼 사람으로서 그분을 접촉한 체험이 없다면 참으로 심각한 오류와 메마름과 지식의 성에 빠져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그분을 만날때 자신의 부족함과 자신의 죄인됨과 그분의 무한하신 긍휼과 사랑앞에 굴복하고 엎드리지 않을수 없습니다.성경을 더욱 연구하고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것도 좋지만 이것이 일단 먼저 전제가 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영안에 산다는 것은 무엇이겠는지요..영안에 산다는 말이 말씀안에서 발견한 하나의 강한 빛이라면
은혜라는 말은 그 빛이 우리에게 도달하여 우리에게 반응하는 실재적 현상이라고 봅니다.
우리가 체험된 은혜가 없다면 우리가 본 빛이 맞고 이론적으로 바르다고 하여도 공허한 것입니다.
우리가 집회중에 많은 빛을 신언중에 쏟아 낸다고 하여도 은혜가...즉 기름부음이 쏟아지지 않는다면 뭔가 공허한것이 남게 되더군요..
주님은 하나님의 보좌의 신성한 능력을 소유한 분이셨지만 그는 언제나 인간으로서 고뇌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죽은 나사로앞에서 고뇌하셨고 제자들이 잠들어 있는순간에 십자가에 달려 돌라가시기 전날밤 힘든상황에서 고뇌하시고 기도하셨습니다.가롯유다가 자신을 팔아 넘기려 할때도 고뇌하셨습니다.
친어머니를 두고 십자가에서도 고뇌하셨습니다.
장면장면마다 그분이 얼마나 사람중의 사람이셨는지..눈물이 나오지 않을수 없습니다.
우리가 많은 메시지를 보고 뭔가 당장 무엇을 이루고자 행동에 옮길수 있지만 그러한 상황에 힘들어 하고
어려워하는 약한 자들과 자기자신에 대하여 고뇌하는 봉사자가 되기 원하고 주님앞에 가져가기 원합니다.
고뇌하지 않는 봉사자와 고뇌하지 않는 헌신은 기름부음이 없습니다.
기름부음이 없다는 것은 곧 주님으로서 흘러나오는 배려와 고려와 사려깊은 생명의 표현이 메말랐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지나온 긴시간들 속에서 이런것을 저는 발견했습니다.여호와 증인이나 언제나 자신만만한 어떤 종교단체들의 대표자들은 언제나 자신만만하고 의기양양하고 패기에 넘칩니다.그들은 그리스도의 인성입으신 방면을 부인하고 생명의 인치심과 적심과 분배를 모르고 오직 하나님의 신성한 능력만을 말합니다.
우리 또한 우리가 말하는 것은 이단이 아니고 정통적일지 모르지만 그분의 기름부음이 없이 말하고 행하는 것은 언제나 이단적인 방면으로 표현되고 변질 되어 질수 있는 것입니다.
종교안에서도 얼마든지 거룩한 말씀과 예언과 빛비춤이 충만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근원과 본질을 만지는데 많이 실패했고 거의 본질에서 멀어져 가고 있고
외형적인 모습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패기만만한 베드로와 요한과 그제자들은 십자가를 질때는 다달아나고 없지만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앞에 언제나 부끄러운 막달라의 등뒤에서 주님은 나타나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사랑이 본질을 변화시키는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것을 보여준 극단적인 예입니다.
15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가로되 주여 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여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을 보고 너무나 반가운 나머지 만지려 했지만 주님은 나를 만지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주님은 하나님 보좌우편에 자신이 이루어 놓은 모든 역사를 인정 받고 이 우주안에 가장 크고 위대한 일을 이루시기 위해 마음이 다급하시고 바쁘셨는데도 막달라 마리아를 보러 나타나셨습니다.
왜냐하면 막달라마리아만은 대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승천후에 오순절날 나타나셔도 충분했지만 막달라는 아니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런 주님이십니다.우리가 이런 부분을 성경안에서 이해한다면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을 사랑하지 않을수 없습니다.저는 막달라 마리아의 이야기를 보면서 교회안에 생명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이해할수 있었습니다.성경의 가장 큰 핵심이 무엇인지도 알것 같았습니다.주님은 하나님의 경륜안에서 행정을 펼치는데 제자들도 필요했고 바울같은 사람도 필요했고 많은 자녀들이 다 필요했지만 생명안에서는 막달라 마리아 같은 본보기가 필요했던것 같습니다.
막달라는 부활하신 주님을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이었습니다.막달라가 만난 주님은 부활하셨지만 여전히 인간 예수였습니다.제자들은 할일이 없어 고기잡으러 갔지만 막달라는 무덤가를 밤늦도록 서성였습니다.
오늘밤도 긍휼과 은혜를 베푸셔서 변화되지 않고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내 마음을 주님께 회복시켜 달라고
간절히 기도해봅니다.... 오주예수여... 당신을 사랑합니다.
긴 글이지만..주님이 사람을 인격적이고 애정 넘치는 방식으로 만나주시는..
사랑의 이야기가 우리의 마음을 만지고 적십니다..
베드로와 요한 보다도..마리아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