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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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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의 지혜는 본래 남보다 뛰어났다. 그는 많은 신기한 말을 생각해 낼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어떻게 전파해야 하고 어떤 비유를 써야 하며 어떻게 단락을 구분할 수 있는가와 타고난 구변을 이용하여 청중이 그의 뜻을 완전히 이해하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의 지혜로부터 온 지혜의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정을 아는 데 있어서 사람의 생각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심지어 영적인 지혜를 말할 때에도 사람의 생각은 가장 주된 용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영이 가르치는 말로』 전파했다. 이것이 바로 직감 안에서 얻은 성령의 가르침이다. 믿는이의 생활에서 영 안에 있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없다. 영적인 지식을 말할 때에도 영적인 말을 사용해야 한다. 직감은 성령이 우리에게 계시해준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 줄 뿐 아니라 또한 성령이 나타낸 것들을 말하도록 우리에게 가르쳐준 말을 알게 한다. 많은 때에 믿는이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하나님께 속한 일을 안 후에 자기가 그것에 대해 매우 분명하게 알고 있는 것처럼 그것을 사람에게 전달한다. 그러나 어떻게 표현하든지 이렇게 저렇게 말해도 뜻을 전달하지 못한다고 느낀다. 이것은 영 안의 말씀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믿는이가 주님 앞에서 기다릴 때에 그의 심중에 무언가가 떠오르는 경우가 있다. 그것이 때로는 몇 단어일 수도 있다. 그 몇 단어를 통해 그는 집회에서 하나님이 계시하신 것을 완전히 말해내게 된다. 이 때 그는 하나님께서 진실로 자기를 증인으로 삼은 것을 보게 된다.
이러한 체험은 성령이 우리에게 주신 「구변」의 중요성을 말해준다. 구변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우리의 타고난 구변이고 또 하나는 우리의 영 안에서 성령이 주신 구변이다. 사도행전 2장 4절의 「구변」은 영적인 사역에서 불가결한 것이다. 타고난 구변이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사정을 말해내지는 못한다. 자기 스스로 좋다고 말하는 것도 성령의 뜻을 전달하지 못한다. 오직 영적인―영 안에서 얻은―말씀만이 영적인 지식을 말해낼 수 있다. 때로 우리에게 영 안에서 주님이 주신 메시지가 있다. 그 메시지는 우리 속을 누르는 부담으로 느낄 정도로 우리를 압박하고 불사르며 어떤 것으로도 그것을 제거할 수 없다. 이 때 부담을 털어 놓고 영 안의 메시지를 전파하기 위하여 우리는 성령이 주신 「구변」을 기다린다. 만일 우리가 직감 안에서 성령이 주신 말씀을 얻지 못하고 그것을 사람의 지혜의 말로 대치 한다면 우리는 모든 영적인 유용성을 잃게 됨을 볼 것이다. 그러한 말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당신이 전한 사상이 참으로 좋은 것이라는 느낌을 줄 뿐이다...
「영적인 일」은 반드시 「영적인 말」로 해석해야 한다. 우리는 영적인 방법으로 영적인 목표에 도달해야 한다. 이것이 오늘날 주님이 특별히 힘써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바이다. 목적이 영적인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방법과 수단도 영적인 것이어야 한다. 육에 속한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간에 영적인 것을 이룰 수 없다. 우리가 우리의 생각과 감정으로 영적인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는 것은 쓴물의 근원에서 단물을 내기를 바라는 것이다.
워치만 니
[영에 속한 사람, p.362-364, 한국복음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