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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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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피동적이 되는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헌신과 성령께 순종하는 그 의미를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다. 많은 믿는이들은 두뇌의 사상이 그의 영적 생명을 가로 막은 것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두뇌의 (1)활동이 멈추어 지는 것과 (2)혼란된 활동이야말로 영적 생명을 저지한다는 것을 모른다. (3)정상적인 두뇌의 활동은 유익하고도 필수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합당히 활동하는 두뇌만이 하나님과 동역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는 인도하심을 받는 정상 궤도는 생각에 있지 않고 직감에 있다는 것을 아주 주의 깊게 말한 적이 있다. 이것은 가장 중요한 것으로 우리는 결코 이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믿는이들이 좇는 것은 직감 속의 계시이지 결코 생각 속의 사상이 아니다. 생각을 좇아 행하는 것이 바로 육체를 좇아 행하는 것이며 이것은 잘못된 길로 안내한다. 그러나 우리는 생각이 이차적인 일에 있어서까지 아무 소용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생각을 하나님과 직접 교통하고 계시를 얻는 기관으로 여긴다면 이것은 크게 잘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은 직감을 돕는 한 부분의 일을 감당할 수 있다. 직감으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느낌이 직감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자기의 감정의 위장인가를 점검하기 위해서는 생각이 필요하다. 내적인 느낌이 하나님의 뜻인가 아닌가, 성경적인가 아닌가를 아는 데에도 생각이 필요하다. 우리가 직감으로써 무엇을 알지만 또한 그것을 확증하기 위해 우리의 생각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실수할 가능성이 있는지. 만일 생각의 보조가 없다면 우리는 무엇이 참으로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인지를 규정하기가 너무 어렵다.
인도를 받는 정상 궤도에서는 생각도 필수적인 것이다. 비록 우리가 직감의 인도하심을 알지만 많은 부분에 있어서 반 이성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생각으로 직감과 변론할 것이 아니라 생각으로써 그 일이 하나님의 뜻에서 나온 것인지를 살펴 보아야 한다. 직감으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일은 아주 신속히 이루어진다. 그러나 우리는 시간을 두고 생각으로써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직감에서 나온 것인지 성령에서 나온 것인지를 반복하여 추론해 보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하나님에게서 나왔다면 우리가 시간을 두고 추론하고 있을 때 직감은 더 정확한 느낌을 발하여 우리로 하여금 더 깊은 믿음으로 그 일을 하나님에서 나온 일로 여기게 한다. 생각의 이러한―또 오직 이러한 고찰―작업은 유익하고 정상적인 것이다. 만일 그 일이 자신의 혈기와 사상과 감정에 속한 것이라면 수 차례의 상고를 거친 후에 양심은 반항의 음성을 발하게 된다. 이상의 추론은 어떤 일이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인지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방해가 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더욱이 직감에게 스스로 증명할 기회를 부여한다. 만일 어떤 일이 정말 직감에서 나왔다면 그것이 생각의 이성의 추론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그 반대로 이성의 추론을 두려워 하는 많은 인도하심은 다 자신에서 나왔을 것이다. 생각이 인도하는 위치에 서지 말아야 하지만 각종 인도가 하나님에게서 나왔는지를 살피기 위해서는 생각이 필요하다.
워치만 니
[영에 속한 사람, p.593-594, 한국복음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