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 Eugene
- 조회 수 1289
사람이 자신의 본성을 거슬러
말이 많아질 때가 있는데
바로 생명의 체험의 세번째 단계에서
그런 성향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 시점은 안에 기름부음을 느끼면서도
아직 자아가 완전히 파쇄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이런 불완전한 상태가
종종 말이 많은 것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즉 그는 안에 기름부음의 느낌이 있으므로
무언가 말을 해야겠다는 느낌은 있지만
자신의 말을 통해 그 부담이 충분히 해방되지는 않기 때문에
그 부담이 내려질 때까지
말을 계속 하려는 성향이 있게 됩니다
즉 이것은 생명의 체험의 네번째 단계에 이른 사람이
적은 말로도 안의 부담을 충분히 해방할 수 있는 것과는 달리
많은 말을 해야 부담이 어느 정도 해방되고
종종 그렇게 많은 말을 할지라도
부담이 쉽게 해방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이럴 경우 듣는 사람들은
때로는 그의 말을 통해 공급받는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많은 때 그에게 무언가 부담이 있는 것 같은데
만지는 것은 오히려 그의 생각에 불과한
모순된 상황에 접하게 됩니다
이런 경우 우리는 한 면에서 그의 공급을 누리면서도
그의 장황한 말에 대해
외적인 방식으로 조절하려고 시도할 수 있는데
결국 근본적인 문제는 그의 존재에 있기 때문에
외적인 방식의 조절은 일시적인 효과만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상태는 근본적인 다루심
자아의 파쇄를 통과할 때
근본적인 해결의 시작점을 찾을 수 있으며
이 시점부터 우리는 열 마디로 충분한 것을
더 이상 백 마디로 말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말이 많은 것은
주님에 대한 내적인 인식이 있지만
아직 그분과의 연합이 충분하지 않음을 드러내는
외적인 징표일 때도 있습니다
주님과의 완전한 연합을 가로 막는
내실의 휘장이 아직 남아 있는..
댓글 4
한 분은 차에 탓을 때부터 계속 회복과 말씀과 주님에 대한 말을 계속하였지만,
한 분은 말이 없으시고 집에 도착 즉시 거실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였습니다.
교통의 시간에 앞에 분은 회복되신지 3개월(? 1년 이내)된 교단 배경의 자매님이었고
뒤에 분은 10년이 되시고 자식을 잃은 환경이 있으신 자매님이었습니다.
그 때 제가 깨달은 교훈(?)은 회복의 오래된 지체는 자신의 말보다는 남의 말을
들어주는 분이구나 생각하며 본으로 기억하였던 적이 있습니다.
지금의 저를 보면 아직 들어주는 자가 아닌 말하는 자임을 돌이킵니다.
주님에 대한 내적 인식이 있으며 주님과의 연합이 충분한 자로 발견되기 원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