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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uge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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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에 있는 영
생각의 장벽과
감정의 담을 넘어야
도달할 수 있어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의 자아가
파쇄되는 것이지만
때로 우리는 실행만으로도
도달할 수 있어
우리는 실행을 주의하게 됩니다.
그러나 영을 접촉한 후에는
실행은 반대가 되어야 하며
그럴 때 접촉한 영을
흘려 보낼 수 있게 됩니다.
가장 좋은 것은 우리의 존재가
그러한 사람이 되는 것이지만
만일 실행만으로도
그러한 상태에 도달했다면
그 영의 접촉은
자신의 실행을 부인하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을 거절했다면
이제는 생각을 사용해야 하고
감정을 부인했다면
이제는 감정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그리고 열렬하였다면
이제는 침잠해야 하고
안의 느낌을
조금씩 읽어야 합니다.
섬세하게
부드럽게 그리고
그 빛이 나의 생각과
나의 느낌이 될 때까지
이것이 영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방식이 아니면
사역을 외적으로 따르는 것입니다.
생명의 방식이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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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8
그리고 실행만으로 영을 접촉하는 길을 계속 간다면.. 어느 시점에는 더 강하게 말하고 더 강하게 외쳐야 겨우 영을 접촉하게 되는데 그럼 이런 두 실행의 충돌이 더 강하게 발생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영을 읽으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아무(?) 문제도 발생하지 않겠지만^^
제가 충분히 이해했는지 모르겠지만, 어떤 부분은 조금 만져지는 것 같네요. 보통은 집회에서 어떤 실행으로 영을 접촉하려는 목소리가 압도적으로 크기 때문에 영을 "읽으려는" 시도는 묻혀 버리는 것 같습니다. 마치 잔잔한 호수에 계속 돌을 던져서 호수에 비친 모습을 보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것처럼요. 호수에 돌 던지면서 노는(?) 단계도 필요하겠지만 언젠가는 멈추고 호수 안에 비친 광경을 보고 싶습니다. "돌 던지는 종교"가 되기 전에요...^^
아멘 가장 이상적인 것은 외치는 단계에 이미 영을 접촉하고 영을 읽은 것이 내포되어 있어야 하는데(https://www.localchurch.kr/8951) 우리는 항상(?) 그럴 수는 없기 때문에 영을 접촉하기 위한 다양한 실행상의 도움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도움이 가끔은 영을 해방하는 것과 동일시(?) 되기도 하고 그것이 습관이 되면 항상 호수에 돌을 던지면서 자신이 이미 호수에 비친 모습을 보았다는 영적 망상에 빠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목적을 위한 실행이 목적을 대치하는..
영을 접촉하지 못했음을 증거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 영은 우리의 새로워진 생각과 파쇄된 감정을 필요로 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