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성한 말씀을 누려요. ^^

  • 목록
  • 아래로
  • 위로
  • 0
  • 청지기
  • 조회 수 1111

지난 메시지에서 우리는 니 형제님이 일생 동안 받은 고난을 언급했다. 빈곤과 질병으로 인하여 그는 적지 않은 고난을 받았다. 이뿐 아니라 또한 기독교로부터 수많은 고난을 당했다. 그들은 그에게 많은 멸시와 비평과 반대, 공격을 가했고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내가 유언비어를 마지막 항목으로 나열한 것은 이것이 가장 간교하고 사람을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탄이 거짓말장이요 또한 모든 거짓의 아비임을 알 필요가 있다.

 

만일 여러분이 돌이켜 주 예수님을 생각해본다면, 여러분은 사복음서에서 유대교 사람들도 주님을 이렇게 대했고 그분을 멸시하고 비평했으며 반대하고 공격했음을 볼 것이다. 또한 그들은 그분에 관한 유언비어들을 퍼뜨렸다. 또한 사도행전에서의 유대교도들도 이와같이 사도들을 대했다. 오늘 종교 안에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주의 회복 안에서 참되게 주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을 이렇게 대한다. 멸시, 비평과 반대, 공격 그리고 유언비어이다. 이런 것들은 모두 낡은 방법으로서 사탄의 기본적인 수법이며 사탄의 걸작이다.

 

1934년 여름, 상해에서 내가 니 형제님과 함께 차를 타고 교외에 갈 때 한 가지 깊은 인상을 받은 적이 있다. 그가 차를 운전하여 커브를 돌면서 "형제여, 이제 우리는 이방인으로 향해야 할 것 같네."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의 이 말은 사도행전 13장 47절을 인용한 것이었다. 바울과 바나바가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지만 그들이 거절하고 핍박했기 때문에 바나바와 바울은 그들에게,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고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고 말했다.

 

1934년이 되었을 때 니 형제님의 사역은 완전히 거절당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해 이전에 그의 사역은 항상 기독교를 향해 열려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로부터 얻은 것이 멸시와 비평과 반대, 공격과 유언비어이기 때문에 그는 나에게 "이제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향해야겠다."고 말했다. 그때로부터 우리는 더욱 죄인들을 교회로 인도하는 것을 주의하였다.


함께 봉사하는 형제들로부터 받은 고통

 

이제 우리는 그가 받은 고통의 다른 면인 함께 봉사하는 형제들로부터 당한 고통에 대해 볼 필요가 있다.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지만 이런 고통은 더욱 어려운 것이다. 외부 사람들로부터 온 고통은 우리 밖에서 온 것이고 형제들로부터 받은 고통은 우리 가운데서 온 것이다.


추방

 

니 형제님이 형제들로부터 받은 첫번째 고통은 바로 그들에 의해 교회로부터 추방된 것이다. 내가 여러분에게 말한 적이 있듯이 최초의 교회생활의 실행은 1922년 그의 고향에서 시작되었다. 약 2 년의 기간이 지난 후 어떤 일로 인하여 1924년에 그는 추방되었다. 바꾸어 말하면 그는 형제들에게 거절당했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교회생활로부터 추방되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그가 추방된 것은 교회 중에 선포되었을 뿐 아니라 정식으로 분명한 선언문으로 공포되었으며 거기다가 그 선포는 그가 집에 있지 않고 밖에 나가 있을 때 행해졌다.

 

그는 자신이 추방당한 전체 과정을 내게 상세히 교통해준 적이 있다. 그당시 그는 복주를 떠나 항주에 사역하러 갔었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편지로 그가 추방되었다고 알려주었다. 그가 천사같이 그것을 개의치 않았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도 사람이다. 그는 나에게, 이 일은 그를 매우 분하게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주님은 그에게 묻기를, "앞으로 네가 내 손에 있기를 원하느냐, 아니면 네 자신의 손에 있기를 원하느냐?"고 하셨다. 그러므로 그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항주의 일을 마치자마자 그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곳의 형제들은 거의가 그를 통해 구원받은 학생들이었다. 그들은 공포된 사실에 대해 매우 분히 여겼고 받아 들이려 하지 않았다. 또한 그들은 모두 니 형제님의 편에 서 있었다. 젊은이들은 부두로 그를 맞으러 가서 그가 배에서 내리자마자 그에게 말했다. "니 형제님, 반드시 행동을 취해야 합니다. 당신은 이런 추방을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그들의 말로 그가 또 한 번의 자극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자기편에 서 있겠다는 이들에게 니 형제님은 몸이 불편하고 배멀미가 있으니 그들 중 몇 사람이 밤에 그의 집으로 오라고 말했다. 그날 밤 적지 않은 사람이 왔다. 그들이 아직 도착하기 전 그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말고 자신을 위해 변명하지 말라는 주의 음성을 들었다.

 

그러므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에게 모여 어떠한 반응을 기다리고 있을 때에 그는 매우 평온함 가운데서 이렇게 말했다. "형제들이여,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오늘 저녁 짐을 싸서 내일 여기를 떠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잠잠하십시오." 많은 사람이 그의 말에 울었고 실망도 많이 했으며 이로 인해 집회에 다시는 참석하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하여 그는 그곳을 떠나게 되었다. 이것이 1924년에 발생한 일이다.

 

중국어 찬송 468장은 바로 그때 니 형제님이 쓴 것이었다. 나는 영원히 그 찬송을 잊지 못한다. 오십 년이 지난 지금에와서도 이 찬송은 여전히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영을 상쾌하게 한다. 여기에 십자가 지기를 배우고 자신을 위해 변명하지 않고 고통을 당해도 입을 열지 않은 한 사람이 있다.

 

얼마 안 되어 그는 '기독도보'를 낼 부담을 가졌다. 한동안 지난 후 그는 북쪽의 상해로 올 부담을 가졌다. 거기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 바로 그때 상해 교회가 세워졌는데 그것은 바로 1926년 초의 일이다. 그가 십자가의 깊은 역사를 받아들임으로써 주님의 역사는 그로 말미암아 한걸음 더 전진했다.

 

여기서 당신은 한 가지 원칙을 볼 수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생명에서 산출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또한 고통을 거쳐서 산출된다는 것이다. 심지어 성경도 교회의 산출이 여자의 해산하는 수고와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디를 가든 손쉽게 교회를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런 일은 없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산출되지만 또한 사람들의 고난당함으로 산출된다.


이의(異議)

 

니 형제님이 형제들로부터 받은 두번째 고통은 바로 이의들이었다. 비록 어떤 형제 자매들은 니 형제님을 거절하지 않았지만 그에 대해 항상 이의를 갖고 있었다.

 

예를 들면 사역 초기부터 니 형제님보다 나이가 대여섯 살 많은 한 자매가 있었다. 나는 다소 소극적인 것을 말해야 하기 때문에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누구의 약점을 말할 때에는 이름을 말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녀는 주를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니 형제님의 나이는 이십 세였고 그녀는 이십 오륙 세였다. 그녀는 주님을 매우 사랑했고 은사도 있었다. 많은 면에서 사람의 존경도 받았는데 결국 전도여행을 하는 여전도사가 되었다.

 

내가 그녀에 관해 들었던 것은 전쟁시였는데, 그녀는 중국 수도의 한 신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치고 있었으며 기독교계에서 놀라운 인물로 알려졌었다. 그녀는 교회생활 초기부터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녀에게서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아는가? 그녀는 항상 니 형제님에 대해 이의를 표했다. 니 형제님을 추방한 그 여섯 형제들을 따라 그녀는 항상 니 형제님에 대해 이의를 가진 사람이었다.

 

1934년 정월, 상해에서 우리가 세번째 이기는 자의 집회를 가질 때 그녀가 집회에 참석한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항상 집회에서 이의를 가진 사람이었다. 니 형제님이 말씀을 전할 때 그녀는 항상 고개를 흔들었다. 당신은 이것이 일종의 고통임을 아는가? 그녀가 니 형제님보다 연장하고 사람의 존경도 많이 받았지만 니 형제님에 대해서는 이의를 가졌었다.

 

여러분은 수년 동안 니 형제님에 대해 이의를 가진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한 자매를 예증으로 삼았는데 그녀는 가장 강렬한 이의자라고 말할 수 있다. 교회생활이 중국 온 땅에 퍼지던 기간에 그녀는 그 안에 있지 않았다. 초기에는 그녀가 그 안에 있었지만 나중에는 나갔다. 이런 이의는 니 형제님에게 실로 일종의 고통이었다.


성숙되지 않음과 무능함

 

니 형제님이 형제들로부터 받은 또 하나의 고통은 바로 사람의 성숙되지 않음과 무능함에서 온 것이었다. 그가 형제들과 함께 일하고 같이 책임을 짊어졌지만 기타 형제들은 그와 비교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렇게 성숙하고 유능했으나 다른 사람들은 미숙하고 무능했다. 이것은 그에게 참으로 고통이었다.

 

오십 년 전 중국에서 니 형제님은 매우 특이한 사람이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몇 년을 앞섰는지 모른다. 그가 본 많은 것들을 형제들은 보지 못했다. 그들은 미숙하고 무능했는데 이것은 그에게 일종의 고통이었다. 이것은 내가 이 사역에 들어올 때 본 상태였다. 그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면서도 말하기를 좋아했고 결국은 다른 사람의 어려움이 되었다. 여러분이 알듯이 교회생활에서 좋은 일꾼은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어떤 일을 해내지 못한다. 사람에게 속지 말라.


완악함

 

이어지는 것은 사람의 완악함이다. 아주 실제적인 한 가지 실례를 들겠다. 내가 이 사역에 들어온 것은 교회생활이 시작된 지 십 일 년 되던 해의 일이었다. 나는 니 형제님의 요청으로 상해를 방문했는데 그는 나더러 거기에 4개월간 머물라고 하였다. 그 기간의 끝무렵에 그는 나를 찾아 와서 "이 형제, 우리 동역자들은 형제가 이곳으로 이사와서 우리와 함께 거하며 함께 일하는 것이 좋다고 느끼네. 주님 앞에 나아가서 주님이 형제에게 어떻게 말씀하시는가를 보게."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나는 주님 앞에 나아가서 물었고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매우 분명하였다. 그렇게 해서 나는 사역에 들어왔다. 그는 나를 어떤 책임의 위치에 두었다. 나는 그가 왜 이렇게 하는가에 대해 아주 이상하게 느꼈다. 나는 새로 들어온 사람이고 다른 사람들은 사역한 지 적어도 오륙 년이 되었었다. 나는 새로운 사람에 지나지 않았지만 니 형제님은 내게 중한 책임을 안배하였고 그와 함께 일하도록 지정하였다. 나는 바빠 자기 일에 수고하는 형제들 중에 한 사람만이 제외인 것을 발견했다. 그 형제는 나보다 연로하고 니 형제님보다도 연로하였다. 그당시 내 나이는 26 세쯤이었고 니 형제님은 28 세였고 그 형제님은 35세였다. 주의 일에 들어오기 전에 우체국 국장을 지낸 경력이 있는 형제였다.

 

어느 날 미국에 공부하러 가려고 계획하고 있는 아주 총명하고 학문 있는 한 사람이 우리를 찾아왔다. 그때 그는 구원받은 지 얼마 안 되었지만 미국으로 가기 전에 침례받기를 바랬다. 그는 한두 번 집회를 참석했었고 또 니 형제님은 그의 상태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전에 우체국 국장을 지냈던 그 형제는 "안 된다. 그는 너무 생소하고 한두 번밖에 집회에 참석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사람에게 침례를 주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니 형제님이 "형제님, 무엇을 염려하십니까?"라고 말하자 그는 "그가 아직 구원받지 않았을까봐 염려스럽다."라고 말했다. 그때 니 형제님은, "모든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만일 이 일이 잘못되었다면 주님 앞에서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런데도 그는 "안 된다."라고 말했다. 니 형제님이 무엇이라고 말하든 그는 견제하고 동의하지 않았다. 이것은 참으로 니 형제님으로 하여금 고통을 당하게 했다. 이것은 한 가지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

 

사역 초기에 니 형제님은 기독교의 실행들에서 많은 것들을 취했었다. 그는 어떤 실행에서 성결을 취했고 어떤 실행에서는 침례를 취했으며 또 어떤 실행에서는 다른 것을 취했다. 우리의 집회 방식에 대하여 그는 대체적으로 형제회의 실행을 취했다. 형제회의 모임에서 자매는 입을 열지 못했다. 찬송은 할 수 있어도 기도는 하지 못했다. 오늘날까지도 형제회에서는 집회에서 기도를 포함하여 자매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1932년 이후. 내가 사역에 들어온 그 해에 니 형제님은 집회에서 자매들이 기도하지 않는 것은 교회에게 너무 큰 손실이라고 느꼈다. 그는 자매가 집회에서 기도하는 것이 절대로 옳은 것임을 분명히 보았다. 그러나 대다수의 소위 인도하는 사람들은 집회에서 자매는 말할 수 없고 입을 열어서는 안 된다는 인상이나 가르침을 받았었다. 니 형제님은 그들에게, "집회에서 우리는 마땅히 자매들을 해방해야 하고 그들이 기도하는 것을 허락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안 된다!"고 말했다. 그후 상해에 갔을 때 나는 이런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점점 발견하게 되었다. 내가 여러분에게 솔직히 말을 하거니와, 이 일에 대하여 내가 첫번째로 아멘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하나의 작은 예이다.

 

형제들이여, 나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처음부터 모든 일이 다 어려웠다. 마치 길을 닦을 때 첫무리는 대가를 지불해야 하고 길이 닦인 후에 다른 사람들은 아주 쉽게 그 위로 차를 몰 수 있는 것과 같다. 니 형제님은 개척자와 같다. 그는 유일하게 길을 개척하는 사람이었다. 한두 가지 일이 발생한 후에 나는 그가 왜 나를 그런 위치에 두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이유는 그가 너무 외로왔기 때문이었다.

 

형제들만 완고하고 완악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때때로 자매들 가운데서 이런 문제는 더욱 크다. 이런 완고함과 완악함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고통은 매우 큰 것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면으로 다른 사람의 완고함과 완악함을 견디기를 배워야 하고 다른 면으로는 영원히 어떤 사람을 향하여도 완고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에게 "좋습니다. 형제님이 그렇게 느끼시면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당신을 따르겠습니다."라고 말하기를 배우라. 너무 자신을 믿지 말고 다른 사람을 믿고 당신의 형제 자매들을 믿기를 배우라. 이것은 좋은 공과이다.


야심

 

네째는 지위에 대한 형제들의 야심이다. 자매들에게는 별로 야심이 없는 것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그러나 형제들 편에서는 이런 야심의 문제가 있다. 다시 말하지만, 내가 주의 일에 들어왔을 때 니 형제님은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 자주 집회에 참석하지 못했었다. 그는 문서의 일을 해야 했고 특별 집회도 돌봐야 했으므로 정규적인 집회는 돌볼 수 없었다. 내가 거기 있었으므로 그는 집회의 책임을 나에게 맡겼다. 그때 아주 진취적이고 모든 면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활달한 한 형제가 있었다. 나는 젊은 사람으로서 그 형제를 매우 감상했었다.

 

주일날에는 대개 세번의 집회가 있었다. 어느 주일 오후 집회 때 나는 그 형제에게 메시지 전해줄 것을 청했다. 니 형제님은 그 일을 알고서 나를 책망하면서 "형제는 그 형제로 하여금 메시지를 전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이 나쁘냐며 이상히 여겼다. 그러나 그때 그는 내게 무엇을 설명해주기를 원치 않았다.

 

나중에 나는 그 형제가 세번째로 교회생활에 들어온 사람인 것을 알게 되었다(두번째 사람은 안과의사인 유형제이고 첫번째 사람은 앞에서 내가 말한 그 완고한 형제이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상해의 내지회에서 나온 사람들이다). 처음부터 그는 인도자가 될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그는 인도자 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여러분은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아는가? 그가 교회에 들어온 1927년부터 그는 계속 장로가 되고자 하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교회에 들어온 지 21년 되던 해인 1948년에 그는 교회를 떠났고 집에서 모임을 갖기 시작했으며 순회 전도사 한 사람을 고용했다. 이것은 사사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이 집에다 경배할 우상을 세우고 또 제사장을 고용한 것과 같다. 이것은 한 예에 불과하다.

 

지난 사십 년 동안 나는 중국의 유명한 전도사들을 보아왔는데 거의 모든 사람이 이 길을 갔었다. 그들은 집회에 와서 어떤 지위를 얻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니 형제님은 항상 교회가 유기체이지 조직이 아니기 때문에 어느 누구에게도 줄 지위가 없다고 말했다. 당신은 치과의사가 무엇을 하는지 아는가? 그들은 의치에게 어떤 지위를 부여한다. 몸에 안착한 것은 다 외부로부터 온 것이고 그 안에 생명이 없다.

 

나는 이름을 말하고 싶지 않지만 오늘 중국에 나와 나이가 비슷한 유명한 전도자들이 모두 이 길을 갔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 못할 사실이다. 그들은 우리와 한동안 모임을 가진 후에 주의 일에서 어떤 지위를 얻고자 하는데 결국에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하리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를 떠나 이 길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이것은 무엇인가? 야심이다. 니 형제님은 공개적으로 우리에게 교회생활에서 지위를 얻고자 하는 사람은 영원히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또 한 젊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매우 가식적이고 간교했다. 그는 항상 가장 영적인 체 했다. 왜 그런가? 이는 그의 야심 때문이었다. 초기에 상해 교회의 모든 성도가 그에게 속다시피했다. 그러나 점차 이리의 꼬리가 드러났다. 앞에서 인도하는 사람이나 동역자들은 그의 모든 것이 거짓된 것임을 알았다. 그래서 모두 이 일을 처리하는 데 동의했다. 한 번은 교회가 긴급집회를 가졌는데 모든 성도가 다 참석했다. 그 중 한 동역자는 일어나서 대중 앞에서 그의 거짓됨을 드러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이 그를 정죄하러 일어났다. 모든 회중이 다 그를 정죄했다. 그는 떠난 후에 당시 최고의 신학교에 의해 교수로 초빙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기독교이다.

 

나는 여러분 젊은이들에게 교회 안에 형제들에게 지위를 추구하는 야심의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이것은 니 형제님으로 하여금 많은 고통을 당케 했다. 그는 나에게 이 일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결국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지나가게 했다. 그는 자신에게는 누구에게 줄 지위가 없고 다른 사람도 자신에게 지위를 준 적이 없다고 말했다. 누구든지 남고자 하는 자는 남고 떠나고자 하는 사람은 떠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때에 야기된 분열은 바로 이런 야심으로 인한 것이었다.

 

야심이 있는 사람은 자신에게 야심이 있다는 것을 시인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분열을 야기시킨 다음 그들은 항상 핑계를 대며 코트 곧 교리의 코트를 입는다. 그들은 교회가 어떤 교리에서 잘못되었고 주님 앞에서 자신은 이에 대해 분명해졌다고 말한다. 이것들은 모두 거짓된 것이고 핑계이며 야심을 덮는 코트에 지나지 않는다.


거역

 

또 한 가지 내가 발견한 것은 바로 형제들의 거역(때로는 자매들의 거역도 포함된다)이다. 젊었을 때 이스라엘의 역사를 읽던 중 그들이 모세를 거역한 것을 읽었을 때 나는 그것을 이상히 여겼고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러나 교회생활 안에 들어온 후 나는 거역을 발견했다. 밖으로부터 온 공격이 있을 뿐 아니라 더욱 속으로부터 나온 거역이 있었다. 결국 거역뿐 아니라 공격도 있게 된다. 이런 공격은 형제들로부터 온 곳이다.

 

나는 여러분에게 또 한 가지 니 형제님에게 많은 고통을 준 실제적인 일이었던 그의 혼인에 대해 알려주겠다. 1934년까지 그는 아직 결혼하지 않았었다. 그는 아마 32세였을 것이다. 그 모친은 중국식 가정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혼사를 매우 관심했다. 장자인 그가 여태 결혼을 하지 않는 데에는 악간 복잡한 이유가 있었다.

 

1934년 10월쯤 항주에서 특별집회가 있었는데 니 형제님은 남쪽으로 동역자인 이연여 자매를 만나러왔다. 그녀는 니 형제님보다 여덟 살이 더 많았고 또한 동역자 중 가장 연장자로서 40 세 정도였었다. 니 형제님의 어머님은 그녀에게 니 형제님이 결혼하도록 도와야 한다고 말했다. 이 연장한 자매는 돕기 원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니 형제님의 모친은 니 형제님을 만나러 갔고 그는 결혼할 것을 승락했다. 열흘간이 특별집회를 마친 그 다음날 그는 결혼했다. 나는 니 형제님의 신랑 들러리로 선택되었다. 또한 연장한 빌립 란 형제님은 사회자로 요청되었다.

 

이 혼인 이전에 큰 풍랑이 일어났었다. 이 풍랑에는 세 가지 원인이 있었다. 첫째는 니 자매(니 형제님의 부인)의 고모 때문이었다. 니 자매는 어려서 양친을 잃고 고모의 손 아래서 자랐다. 이 고모는 자기 조카가 가난한 전도사에게 시집가는 것을 찬성하지 않았다. 사오십 년 중국 사람들은, 특히 상류사회에서는 전도사를 거지와 같이 여겼다. 니 자매는 상류사회의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동의하지 않았고 특히 고모가 동의하지 않았다. 그들은 일어나 반대하기 시작헀고 기독교 인사들이 이 일을 알고서 야합했으며 교회 가운데 육에 속한 사람도 합세하여 이 일에 참여했다. 세 방면에서 일어나 니 형제님을 반대했다.

 

나는 신랑 들러리를 한 다음 북쪽으로 가 휴식을 취했다. 그러나 이런 일이 생겼다는 전보를 받고서 상해로 다시 돌아왔다. 간단히 말하면 이것은 큰 풍랑이었다. 어느 날 아침 니 형제님은 나를 찾아와서 결혼으로 인해 이런 풍랑이 발생한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하며 이렇게 말했다. "보십시오. 우리 모든 사람의 이름이 이 큰 도시의 가장 큰 신문에 실렸습니다."

 

나는 그 안의 자세한 것을 말하고 싶지 않다. 결국 니 형제님은 상해를 떠나 차로 천 리 밖에 있는 한 성으로 갔다. 나는 상해에 남아서 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거기 머물게 되었다. 그러므로 교회생활에는 항상 청명한 하늘이 있고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다 천사라고 생각하지 말라. 그렇지 않다. 그들이 다 천사라 할지라도 사탄은 남몰래 작은 귀신들을 집어넣을 것이다.

 

내가 또 여러분에게 가장 큰 풍랑을 말해주겠다. 초기에 중국은 경제적 상황이 좋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에 의해 일으켜져 믿음으로 섬기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생활했다. 내가 여러분에게 나의 간증을 말한 적이 있다. 이제 한 가지 더 말해주겠다.

 

1936년, 나는 이 사역에서 북쪽의 고성 북편으로 보내심을 받았다. 그떄 우리 가운데 사역에서는 사람을 보낼 뿐 누구에게 공급하는 것이 없었다. 그들은 "이 형제님. 우리에게 형제님이 북편으로가야 한다는 주님의 인도가 있는데 형제님은 어떻게 느끼십니까?"라고 말했다. 나는 "아멘!"하고 그곳으로 갔다. 그곳에 간 후의 모든 필요는 오직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앙망해야 했다.

 

당시 내가 북편에 갔을 때 이 도시가 상당히 큰 것을 보고 마음 속으로 자전거 한 대를 살 수 있다면 행동하기가 편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이를 위하여 기도할 때 "가서 사라!"는 주님의 느낌이 있었다. 나는 주님께, 지금 내 주머니 속에 돈이 있으나 이것은 이사 비용으로 족할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깊은 속에는 주님이 돈을 주시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이것이 금요일 혹은 토요일의 일이었다.

 

주일 만찬을 마치고서 2 원이 들어 있는 헌금 봉투를 받았다. 주일이 지나고서 월요일에 한 연장한 형제가 나를 찾아와 긴 대화를 가졌다. 그는 떠나면서 티 테이블 위에 한 봉투를 두고 갔는데 그 위에는 "이 형제님, 이것은 당신을 위한 것입니다."라고 쓰여져 있었다. 그가 떠난 후 봉투를 뜯어보니 그 안에 10원이 있었다. 또 같은 날 등기 편지를 받았는데 그 안에 20 원짜리 환어음이 들어 있었다. 그 돈은 먼곳에서 누군가가 내게 부쳐준 것이었다.

 

나는 우체국에 그 환어음을 바꾸러 갔을 때 자전거 점포에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모든 면에 만족스런 자전거를 발견하여 그것을 사게 되었다. 자전거에다 전호 붙은 세금까지 해서 32원이었다. 내가 자전거를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마음이 매우 즐거웠다. 그래서 서실로 가서 무릎 꿇고 주님께 감사했다. 기도할 때 주님은 내게, 주일 저녁부터 받은 헌금이 32 원이라는 것을 보여주셨다. 자연히 나는 주님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주의 신실하심에 감사드렸다.

 

이것은 우리가 어떻게 생활했는가에 대한 하나의 예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때 주님에 의해 일어난 사람은 많았으나 경제적 상태가 좋지 못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시험을 당하고 병든 사람도 많았다. 어느 날 니 형제님은 우리에게 동역자의 삼분지 이가 폐결핵으로 죽었다는 통계를 보여 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연령도 많지 않았었다. 다 삼십 오세에서 사십 세 사이였다. 내가 여러분에게 니 형제님이 항상 수입의 삼분지 일로 남을 도왔다는 것을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런 면에서 필요로 하는 금액은 너무나 컸다.

 

여기서 나는 여러분에게 니 형제님의 이야기를 간략하게 말해주겠다. 1940년, 41년에 약제사인 니 형제님의 둘째 동생은 중국에서 몇 가지 약품을 생산하고 있었다. 그러나 경영을 잘 하지 못해서 니 형제님의 도움을 요청했다. 그래서 니 형제님은 그 경영을 사역의 필요를 돕기 위한 기회로 삼았다.

 

얼마 안 되어서 제약회사에서 일하는 형제들은 더 높은 지위를 얻으려는 야심 때문에 교회 형제들 가운데 오해를 조작해냈다. 이런 오해들은 눈덩이같이 구를수록 더욱 커졌다. 상해 교회 전체가 일어나 니 형제님을 반대할 정도로 커졌다. 그러므로 니 형제님은 할 수 없이 상해를 떠나게 되었다. 같은 시기에 상해는 일본의 통치 하에 있었다. 상해에 있는 일본 헌병대는 상해 교회에게 기독교의 위장조직에 참여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 조직은 일본 당국의 명령을 들었다. 교회는 그렇게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모임을 중지당했다.

 

이러한 혼란 하에 니 형제님은 그의 사역을 중단하고 상해를 떠나 내지로 들어가 중경에서 그의 제약 회사를 계속했다. 그의 사역은 그때의 중단으로 육 년간 중단되었다. 어떤 사람은 그가 너무 바쁘고 사업에 점유되었기 때문에 사역할 시간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것은 완전히 유언비어였다. 그가 사역을 중단하게 된 것은 너무 바쁘기 때문이 아니라 형제들의 거역 때문이었다. 이것이 몇 년 동안 그가 받은 가장 큰 고통이었다.

 

육 년의 세월이 지난 후 1948년에 우리 가운데 큰 부흥이 일어났다. 그런 부흥을 통하여 거역했던 사람들은 모두 후회하고 니 형제님에게 회개하며 죄를 자복했다. 이렇게 하여 니 형제님은 다시 사역을 하게 되었다. (한 마디 말하고 싶은 것은 많은 사람들이 니 형제님을 거역하고 반대했지만 그들은 교회를 반대하지 않았다. 이것은 하나의 간증이다. 교파로 돌아간 사람은 거의 한 사람도 없고 다 교회 안에 머물렀다.)

 

내가 또 한 가지 알려 주고 싶은 것은 그때 부흥이 일어났을 때 상해 교회는 집회 장소를 짓기로 했다. 당시 땅을 사는 데에는 십만 오천 달러가 필요했고 동시에 내부에 삼천 명, 외부에 이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집회소를 짓기 위해서는 십만 달러가 필요했다. 이런 액수는 당시로 볼 때 상당히 큰 부담이었다.

 

어느 날 니 자매님이 나를 찾아와 "이 형제님, 니 형제님이 교통할 것이 있다고 오늘 저녁 저희 집에 오시랍니다."라고 말했다. 그날 나는 그를 찾아갔다. 그는 나에게 37개의 금덩어리를 넘겨주었는데 한 개가 백 돈이나 되었다. 도합 삼천 칠백 돈의 황금이었다. 그때의 싯가로 열 돈이 오십 불이었다. 그는 이것을 땅 사는 데 사용하라고 말했다. 내가 이것이 어디서 생겼느냐고 물으니까 그는 제약회사를 경영하여 생긴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매우 놀랐다. 그때 땅을 사서 집회소를 짓기 위해 헌금한 지 육 개월이 지났다. 형제들의 헌금 총액은 삼천 칠백 돈의 황금이었다. 니 형제님이 내게 건네준 것과 똑같은 금액이었다.

 

이것은 일부분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때의 부흥 이후 그는 훈련을 갖기 시작했는데 얼마 안 되어 공산당이 쳐들어와 많은 돈을 들여 산 훈련센타를 점유했다. 그 센타는 작은 산에 있었는데 그 위에 지은 작은 집도 다 압수당했다. 그는 1952년에 감금되어 이십 년간 옥살이를 하고 감옥에서 순교했다.


일생 동안 고난을 당한 사람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지만, 나의 관점과 그에 대한 나의 지식에 따르면 그는 일생 동안 하루도 안일한 날을 보내지 못하고 계속 고난을 당했다. 이 많은 고난을 거쳐서 그는 천연적인 생명과 혼을 처리하는 것과 자아를 처리하는 것을 배웠다. 한쪽에 제쳐놓음을 당했던 육 년 동안 그가 배운 마지막 공과는 겉사람의 파쇄였다. 천연적인 사람이 파쇄되어야 영이 해방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그는 지식이나 교리만을 사람에게 전해주지 않았다. 그의 모든 가르침 안에는 참된 체험이 있었다. 그는 고난으로부터 이 공과들을 배웠다.

 

오늘 우리들은 이 모든 공과들을 승계받았다. 나는 여러분에게 니 형제님에게서 본 고난보다 내 일생을 도운 것이 없다고 간증할 수 있다. 그에 대해 받은 인상을 나는 종신토록 잊지 못한다. 그런 인상들은 나의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가장 큰 도움이었다. 나는 이것이 또한 교회에게 크나큰 도움이라고 믿는다. 오늘 우리는 확실히 이런 유산을 물려받았다. 이것은 니 형제님이 지불한 큰 대가로 얻어진 것이다. 이 대가는 바로 그가 받은 고난이다.

 

내가 거듭 말하거니와 니 형제님은 일생 고난을 당한 사람이다. 그에게는 자녀가 없었고 그의 아내는 그보다 칠팔 개월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먼저 세상을 떠나고 그 다음 그가 주님께로 갔다. 그는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유명도 남기지 않고 그냥 그렇게 가버렸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그는 적지 않은 것을 남겨 주었다. 여러분은 내 말에 동의하는가? 여기에 교회들이 있고 수많은 영적 축복이 있다. 이것들은 모두 그로 말미암아 남겨진 것이다.


위트니스 리
[정상적인 교회생활의 회복, "니 형제님이 일생 동안 받은 고난과 배운 공과", 한국복음서원]

 

lilygerethe님 포함 1명이 추천

추천인 1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kakao talk
퍼머링크

댓글 0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찬양노트의 말씀방입니다. image 청지기 12.02.20.18:01 4918
32 주님의 사역자의 성격―주관적이지 않아야 함 청지기 12.03.05.15:38 943
31 워치만니 형제님 조카 손녀의 간증 2 청지기 12.03.05.15:28 1092
30 회복의 밝은 빛들―죠지 뮬러 편 청지기 12.03.05.15:00 1176
29 하나님의 다루심을 받음 청지기 12.03.05.14:53 998
28 교회의 황량함과 진보 청지기 12.03.05.13:12 1082
27 그분의 사역을 위한 첫번째 하나님-사람의 생활 청지기 12.03.05.12:37 1020
26 척량과 흐름 청지기 12.03.03.14:34 1195
25 서머나 교회 청지기 12.03.03.14:17 1771
24 교회의 정통―인도의 말씀 청지기 12.03.03.14:11 1291
23 워치만니의 편지 청지기 12.03.03.14:02 1253
22 시험 받으심 청지기 12.03.03.13:55 944
21 하나님의 긍휼 청지기 12.03.03.13:46 1181
20 더 깊은 기쁨 청지기 12.03.02.17:38 875
19 워치만니 형제가 한 동역자에게 보낸 편지 청지기 12.03.02.17:32 1080
18 주님의 사역자의 성격―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있어야 함 청지기 12.03.02.17:25 1216
17 주님의 사역자의 성격―사람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함 청지기 12.03.02.17:19 1165
16 사무엘―하나님께 합한 사람 청지기 12.03.02.16:47 1310
15 사무엘에 관한 역사―진부하고 기울어가는 아론의 제사장 직분과 그와의 관계 청지기 12.03.02.16:37 1304
14 나실인의 원칙 청지기 12.03.02.16:30 1296
13 부르심받은 자의 승리 청지기 12.03.02.16:24 925
12 그 영과 몸 청지기 12.03.02.16:19 1226
11 신성한 흐름 청지기 12.03.02.16:13 1030
10 일보다 생명을 더 중요시 함 청지기 12.03.01.20:07 908
9 세계 정세와 주님의 움직이심의 방향 청지기 12.03.01.20:03 1341
8 축하의 밤 & 당부 청지기 12.03.01.19:47 865
7 한 여인이 한 사내아이를 낳다 청지기 12.02.20.18:50 1284
6 영 안에서의 생활과 집회 청지기 12.02.20.18:29 927
니 형제님이 일생 동안 받은 고난과 배운 공과(속) 청지기 12.02.20.17:57 1111
4 니 형제님이 일생 동안 받은 고난과 배운 공과 청지기 12.02.20.17:52 927
3 역사 안의 몇 차례 주님의 중대한 회복 청지기 12.02.20.17:42 1015
2 역대로 교회에 혼란이 발생한 원인 청지기 12.02.20.17:34 980
1 하나님의 이기는 자들! 청지기 12.02.20.17:23 16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