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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미 창세기 2장 안의 여인을 보았다. 거기에서는 하나님의 영원한 뜻 안에서 하나님이 그분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시고자 어떠한 사람을 얻기 원하시는가를 말하고 있다. 에베소서 5장에는 다른 여인이 있는데, 그 여인은 바로 창세기 2장에 있는 여인의 실제이다. 그것은 사람이 타락한 이후에 하나님이 그분의 원초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어떻게 역사하시는가를 말한다. 이제 우리는 계시록 12장을 보겠다. 여기에도 또 다른 여인이 있는데 역시 창세기 2장과 함께 보기로 하겠다.
계시록은 마지막 때의 일을 언급하고 있다. 이 서신은 모두 22장으로 구성되었지만, 11장 마지막에 이르러서 일이 이미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10장 7절에서, 『일곱째 천사가 소리 내는 날 그 나팔을 불게 될 때에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리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1장에 이르러서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에, 하나님의 비밀과 관계된 모든 일과 하나님과 관계된 모든 일들이 온전히 이루어진다. 11장 15절에서는,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가로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서,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 영원 미래가 이미 시작되었다. 천년 왕국,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영원 미래 안의 일이 모두 이 한 구절 안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앞의 열 한 장 이후에 또한 후반부 열 한 장이 있다.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우리의 대답은 후반 11장은 전반 11장을 보충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12장부터는 어떻게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고,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로 세세토록 왕 노릇 하게 하시는가를 말한다.
계시록 11장 19절에서는 일곱천사가 나팔을 분 이후에 발생한 한 가지 일을 언급하고 있다.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
계시록 안에는 수많은 이상들이 있는데, 이 수많은 이상들 가운데 두 개의 중심 이상이 다른 이상들의 근거이다. 하나는 보좌의 이상(계 4:2)으로서 4장부터 11장의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까지의 모든 이상은 다 보좌에 근거하고 있다. 또 하나는 성전의 이상(11:19)으로서 12장부터 마지막까지의 모든 이상은 다 하나님의 성전에 근거하고 있다.
4장에서 요한은 하나님의 보좌를 보았고 또한 보좌를 둘러싼 무지개를 보았다. 이것은 곧 4장 이후의 일이 모두 보좌의 능력에 근거하고 있으며, 또한 하나님께서 지상의 모든 혈육을 가진 생물과 맺으신 언약을 상기하심에 근거하고 있음을 말한다. 무지개는 하나님께서 땅의 모든 혈육 있는 생물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표시이다.
오늘날 우리는 둥글고 완전한 무지개를 볼 수 없고 기껏해야 절반을 볼 수 있을 뿐이지만, 보좌를 두르고 있는 무지개에는 틈이나 새는 구멍이 없다. 하나님은 미쁘신 분이며, 하나님은 그 언약을 지키시는 분이며, 하나님은 그분이 땅 위의 모든 혈육을 가진 생물과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고 계신다. 하나님이 사람에 대해서 하신 일은 모두 그분이 세우신 언약에 근거한다.
11장의 마지막에 이르러서 또 다른 이상은 바로 하나님의 성전이다. 하나님의 성전 안에서 하나님의 언약궤가 나타났다. 원래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분부하여 산 위의 식양에 따라서 언약궤를 만들어 회막의 지성소 안에 두도록 하셨다. 후에 솔로몬은 성전을 건축했고 언약궤를 성전 안에 두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으로 포로 되어간 이후에 언약궤를 잃어버렸다.
비록 땅 위의 언약궤는 잃었지만 하늘의 언약궤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지상의 언약궤는 하늘의 언약궤에 따라서 지은 것이고, 땅의 그림자는 사라졌지만 하늘의 실체는 여전히 있다. 계시록 11장 마지막에서 하나님은 다시 한 번 언약궤를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
무엇이 언약궤인가? 언약궤는 바로 하나님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자신에 대해서 신실한 하나님이 되겠다고 맹세하시는 것이다. 보좌는 하나님이 우주의 통치권을 가지시는 곳이며, 성전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다. 보좌는 밖을 향해 있고, 세상 사람에 대한 것이지만, 성전은 하나님 자신에 대한 것이다. 무지개가 보좌를 두르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부끄러운 일은 결코 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말하며, 언약궤가 성전 가운데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해서 부끄러운 일을 결코 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이 어떤 일을 정하시면 반드시 성취하신다. 하나님이 하기 원하시는 어떤 일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언약궤는 단지 사람을 위해서 있을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 그분 자신을 위해 있다.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배반하실 수 없고 하나님은 그분 자신에 위배되실 수 없다.
하나님은 영원 과거 안에서 한 무리의 영광스러운 사람들이 나오도록 계획하셨고, 하나님은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도록 정하셨다. 우리는 교회의 상황을 보고서 하나님의 목적에 어떻게 이를 수 있겠느냐고 묻지 않을 수 없겠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결코 도중에서 중단하지 않으시며, 그것은 하나님에게 언약궤가 있고 하나님 자신이 이미 약속하셨기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 공의의 하나님은 사람에 대해서 불의하실 수 없고, 또한 자신에 대해서도 불의하실 수 없다. 사람도 일을 하는 데 있어서 그 자신을 배반할 수 없는데, 이는 사람에게 인격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일을 하시는 데 있어서 그분 자신의 신격을 갖고 계시기 때문에 그분 자신을 배반하실 수 없다. 하나님이 언약궤를 드러내어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것은 곧 그분이 하시려 하시는 일을 반드시 성취하신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 사실을 보게 된다. 무엇으로 말미암아 그분 자신과 그분의 그리스도가 영원토록 왕 노릇 하실 수 있는가? 무엇으로 말미암아 세상 나라를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게 하실 수 있는가? 하나님의 신격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신격에 기초하여 이 일을 완성하신다.
하나님을 방해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 저지당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 언약궤는 여전히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언약을 나타내면서 존속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통해서 이 일을 반드시 성취하실 것이다. 하나님이 어떻게 그분 자신의 신실하심을 통하여 그분 자신이 영원 과거에 예정하신 모든 일을 성취하실 것인가를 말씀하심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이상 중의 여자
계시록 12장 1절은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 아래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 두 별의 면류관을 썼더라』고 말한다. 이 여자는 누구인가? 이것은 수많은 성경 해석가들이 논쟁해 본 문제이다. 어떤이는 그녀는 주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고 한다. 또 어떤이는 이스라엘 나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을 볼 때, 이 여자는 주님의 모친 마리아라고 말할 수 없고 또한 이스라엘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이 이상은 하늘에서 보이신 것이고, 따라서 이 이상은 완전히 하늘에 속한 것이다. 그러나 마리아에게는 이러한 지위가 없고 이스라엘 나라에게도 이러한 지위가 없다.
(2) 이 여자가 사내아이를 낳은 이후에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그 이후에 그녀는 광야로 도망쳤다. 만일 이 여자를 이스라엘 나라로 해석하고 그녀가 낳은 아들을 그리스도로 해석한다면, 사내아이의 승천을 그리스도의 승천으로 해석해야 하는데 이것은 사실에 맞지 않다. 이스라엘 나라가 비록 흩어졌지만,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셨기 때문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실 당시에 이스라엘 나라는 이미 흩어져 있었으며 더이상 하나의 국가가 아니었다. 여기의 일은 사내아이가 하늘로 휴거된 이후에 비로소 발생된 일이다. 이스라엘 나라는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이미 멸망했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이스라엘 나라를 가리킨다고 말할 수 없고 더욱 마리아를 가리킨다고 할 수 없다.
(3) 이 여자는 사내아이를 해산할 때 용을 만났다. 이 용은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지고 있다. 17장에서는 우리에게, 일곱 머리는 곧 일곱 왕이며, 다섯 왕은 이미 망했고 한 왕은 아직 존재하고 있고 한 왕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고 말한다. 열 뿔은 장차 일어날 열 왕이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일곱 머리와 열 뿔의 사건은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사내아이와 이 여자는 모두 장래의 일을 말한 것이며, 그녀를 이스라엘 나라나 마리아라고 말하고 사내아이를 주 예수님이라고 말하는 것은 모두 역사에 맞지 않은 것이다.
(4) 사내아이가 하나님께로 올려간 후에 하늘에는 전쟁이 있었고, 사탄은 하늘에서부터 땅으로 쫓겨났으며, 따라서 하늘에서 큰 소리가 있어 말하기를,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 났고』라고 했다(계 12:10).
이 일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에베소서 6장에서는, 교회는 이 땅에서 또한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과 싸워야 한다고 말한다. 사탄은 아직도 공중에 있다. 역사상 이러한 일이 발생되지 않았던 만큼 주 예수님의 때를 가리킨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5) 용이 땅으로 쫓겨난 이후에, 그 용은 그 사내아이를 해산한 여인을 핍박했다. 아마도 이것이 마리아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근거가 될 것이다. 그렇다. 마리아는 주 예수님을 해산한 후 애굽으로 도망갔었다. 그러나 주님이 승천하실 때에는 그녀가 애굽으로 도망가지 않았다. 14절부터 16절에서는 말하기를,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낮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받으매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 가게 하려 하되 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키니』라고 했다. 마리아라고 하든 이스라엘 나라라고 하든 그리스도가 승천하실 때에 역사상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마리아를 지칭한 것도 이스라엘 나라를 지칭한 것도 아니다.
(6) 또 하나의 증거가 있다. 17절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과... 더불어 싸우려고』. 이 여자는 사내아이를 해산했고, 이 사내아이가 보좌 앞으로 을려진 이후에도 많은 자녀들이 땅에 있었다. 그러므로 이것도 결코 마리아가 아님을 증명하고 있다. 그 다음의 성경을 보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 이스라엘 나라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고 말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이스라엘 나라가 예수의 증거가 된다고 말하는 것은 구약과 신약이 섞이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이 여자는 마리아를 가리킨 것이라고 말할 수 없고 또한 이스라엘 나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이 여자는 누구인가? 구약 성경 중에서 오직 한 여자만이 뱀과 관련되어 있다. 즉 창세기 3장 속의 하와이다. 신약 성경에서도 오직 한 여자만이 뱀과 관련되어 있는데 바로 이 여자이다. 이 부분이 바로 성경의 전후가 상합되는 곳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특별히 여기에서 큰 용이 바로 옛 뱀, 즉 창세기의 그 뱀이라고 지적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이미 분명히 보이셨다. 그 한 마리의 유일한 옛 뱀, 특별히 강조점이 그 옛 뱀의 「그」 자에 있다.
그러므로 이 여자는 바로 창세기의 그 여자이다. 해, 달, 별이 창세기 1장에서 언급되었듯이, 계시록도 해, 달, 별이 있으며, 창세기 3장에 뱀이 있듯이, 계시록에도 뱀이 있다. 여자의 후손이 창세기 3장에서 언급된 것처럼 계시록에도 있다. 창세기 3장에서 해산의 고통을 언급했고 여기에서도 언급했다. 이 두 군데의 성경을 합해 보면, 계시록의 이 여자가 만난 상황은 바로 하나님의 영원한 뜻 가운데서 예정하신 이 여자가 마지막 때에 와서 만나는 상황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 창세기 2장의 여자는 바로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말하고 있고, 에베소서 5장의 여자는 장래 교회의 위치에 관해서 말하고 있으며, 계시록 12장의 여자는 마지막 때를 드러내고 있다. 또 한 여자가 영원 세계 안의 일을 언급하고 있는데, 다음에서 보겠다.
이 여자가 이상 가운데 나타날 때 성경은 먼저 기록하기를, 그녀가 『해를 입고 발 아래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 두 별의 면류관을 썼더라』고 했다. 이것은 시대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1) 이 여자는 해로 옷 입었다. 해는 주 예수님을 가리킨다. 그녀가 해로 옷 입었다는 것은 그 날 해가 가장 밝게 비췰 때에, 그녀의 몸을 비추었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이 시대에 그녀를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신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녀와 그리스도의 관계이고, 은혜시대와의 관계이다.
(2) 이 여자의 발 아래는 달이 있었다. 여기의 「발 아래」라는 어구의 헬라어 의미는 밟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달이 그녀의 발 아래 숨어 있다는 것이다. 달빛은 반사되는 빛이며 달 자체가 발하는 빛이 아니다. 율법 시대에 있는 것은 모두 은혜시대의 실제를 반사했으며 율법은 예표에 지나지 않았다. 성전의 언약궤도 예표이고, 성소 안의 향과 진설병도 예표이고, 제사장이 드린 제물도 모두 예표였다. 소나 양의 피도 모두 예표였다. 이 여인의 발 아래 달이 있는 것의 의미는 율법 안의 것들이 다 그녀 아래 숨어 있고 그녀에게 예속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녀와 율법 시대와의 관계를 말하고 있다.
(3) 이 여자는 머리에 열 두 별의 면류관을 쓰고 있었다. 열조 시대에 가장 중요한 인물은 아브라함에서부터 열 두 지파의 탄생까지의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여자가 머리에 쓰고 있는 열 두 별의 면류관은 바로 그녀와 열조 시대와의 관계를 말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이 여자는 은혜 시대와 관계 있을 뿐 아니라 또한 열조시대와 율법시대와도 관계가 있다. 다만 그녀와 은혜시대와의 관계가 비교적 많다. 이 여자는 은혜 시대의 성도들을 포함하고 있을 뿐 아니라, 또한 열조 시대와 율법 시대의 성도들을 포함하고 있다.
사내아이의 탄생
2절에서는, 『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써 부르짖더라』고 말한다. 여기의 「아이를 배어」는 상징적인 것이지 실제적인 것이 아니다. 무엇을 가리켜서 아이를 배었다고 말하는가? 그것은 곧 어린아기가 모태 안에 있는 것이며, 그 의미는 바로 어린아기와 그 어머니가 완전히 하나이고 한 몸이라는 뜻이다. 어머니가 먹으면 그 아기도 영양분을 얻고, 어머니가 병에 걸리면 그도 영향을 받으며, 어머니가 어떠하면 그 아기도 어떠하다. 어머니와 그는 하나로 연합된 것이다.
또 한면으로, 이 어린아기는 어머니와 다르다. 그는 어머니로부터 생명을 받았기 때문에 어머니와 하나이고 분명히 하나라고 말할 수 있지만, 여전히 아들은 다른 존재이다. 그에게는 그의 장래가 있고 그의 장래와 그의 어머니의 장래는 다르다. 그는 태어난 후에 하나님의 보좌로 올려질 것이고 그의 모친은 광야로 도피하게 될 것이다.
또 한 가지의 요점이 있다. 그 여자가 아이를 배었을 때에는,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어머니뿐이다. 그 아이를 볼 수 없고 외면적으로 어머니를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아들은 명백히 그의 존재를 가지고 있고 다만 그의 모친 안에 포함되어 있을 뿐이다. 그는 존재하고 있으며 또한 그의 어머니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3절에서는,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면류관이 있는데』라고 말한다. 이 뱀은 몇천 년이 지나면서 이전의 모습과 완전히 달라졌다. 본래는 한 마리 뱀이었지만 이제는 커졌고 용으로 변했다. 이 용의 형태는 어떠했는가? 그에게는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었고, 머리에는 일곱 면류관을 쓰고 있었다. 이것은 바다로부터 올라온 짐승과 같은 모습이었다.
13장 1절은 말하기를,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람한 이름들이 있더라』고 했다. 이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에게도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 또한 면류관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사탄의 목적, 곧 그가 얻기 원하는 것이 바로 면류관이며 통치권을 차지하는 것임을 보여 준다.
용과 짐승의 다른 점이 여기에 있다. 용의 면류관은 머리에 있으나 짐승의 면류관은 뿔 위에 있다. 머리는 결정권을 나타내고 뿔은 집행권을 나타낸다. 머리는 통제하고 뿔은 집행한다. 다시 말하면, 뿔은 머리의 말을 들으며 머리가 움직이면 뿔도 움직인다. 짐승이 한 모든 것은 모두 용의 통제에 의한 것이다.
4절에서는, 『그 꼬리가 하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라고 말한다. 이사야 9장 15절에서, 꼬리는 거짓말하는 것, 사람을 속이는 것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계시록 2,3장에서 말한 별은 천사를 가리킨다. 여기에서도 하늘의 별들이 언급되고 있는데 이들은 마땅히 천사를 가리키는 것이어야 한다. 하늘에 있는 삼분의 일의 천사들이 용의 속임을 받아서 용과 함께 타락했고 함께 쫓겨났다.
같은 절에서 계속 말하기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라고 한다. 한 여자가 하나님의 영원한 뜻 안에 예정되었으며, 또한 하나님은 한 사내아이를 얻기 원하신다. 이 용은 하나님이 여자에게서 얻기 원하시는 것을 계속 방해하고 있고, 이 용은 이 여자가 곧 한 사내아이를 해산할 것을 알고 있으며, 그래서 그 용은 이 여자 앞에 서서 그녀가 해산한 후에 그녀의 아이를 삼키려고 기다리는 것이다.
5절에서는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라고 말한다. 이 사내아이와 여자의 관계를 알려면, 갈라디아서를 보아야 한다. 갈라디아서 4장 26절에서는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고 했다. 또한27절 후반부에서는 말하기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고 했다.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바로 새 예루살렘이다. 새 예루살렘은 바로 하나님이 장래 영원 미래 안에서 얻기 원하시는 그 여자이며, 목표로 하시던 바이다. 그 여인은 바로 창조 안에서는 하와이었고, 은혜시대 중에서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은혜시대가 막 끝나려고 할 즈음에는 해산하고 있는 여자이며, 장래 영세 안에서는 바로 새 예루살렘이다.
여기에서는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 많은 아들을 갖고 있다고 했는데, 결코 어머니는 어머니이고, 아들은 아들인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의미하고 있는 바는 하나가 나뉘어져서 다수가 되고 다수가 합해져서 여전히 하나가 된다는 뜻이다. 즉 수많은 아들을 합할 때 한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한 어머니가 다섯 아들을 낳으면 여섯 명이 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다섯 아들이 더해져서 한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각각의 아들들은 어머니의 일부분들이며, 한 어머니가 자신의 일부분을 떼어서 이 아들에게 주고, 또 일부분을 떼어서 저 아들에게 주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그녀가 낳은 것 같지만 사실은 그녀 자신이다. 어머니는 아들 외의 한 개체가 아니라 수많은 아들의 총체인 것이다. 전체를 보면 어머니이지만, 하나하나를 볼 때에 아들인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 가운데 있는 모든 사람들을 합해 보면 바로 한 여인이고, 하나를 몇으로 나누어서 보면 몇 아들들이다. 이것은 하나의 특별한 원칙이다.
계시록 12장에서 말하는 바 여자가 한 사내아이를 해산하는 것도 이러한 의미에서이다. 이 여자가 한 사내아이를 해산함은 하나의 이상이자 하나의 상징이다. 여기의 「해산하다」는 그녀로부터 분리되어 나온다는 말이 아니라 그녀 안에 이러한 한 사람이 있다는 뜻이다.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이 여자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뜻이다.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다 분깃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짊어져야 할 책임을 감당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 중에서 한 무리의 사람을 택하시는 것이다. 이 한 무리는 수많은 사람들 중의 일부분이고, 하나님이 선택해내신 무리이며, 사내아이 곧 이 여자가 해산한 사내아이인 것이다. 전체는 어머니이고 소수는 바로 사내아이인 것이다.
여기의 사내아이는 바로 11절의 「여러 형제」들이다. 이것은 곧 한 사람이 아니라 상당히 많은 사람이고 상당한 수가 합해져서 한 사내아이가 됨을 말한다. 다만 어머니와 비교할 때 이 사내아이는 적은 수이다. 이 무리를 전체와 비교해 볼 때 비록 숫자는 적지만, 하나님의 계획이 그들 위에 있고 하나님의 목적이 그들에게 있다.
5절에서는,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고 말한다. 계시록에서,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린다는 말이 세 번이나 언급되었다. 첫번째는 2장 26절과 27절로서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룻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고 말한다. 이것은 매우 분명히 교회 중의 이기는 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마지막 한 번은 19장 15절에 나오는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이것은 주 예수님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12장의 한 번은 누구를 가리켜 말한 것인가? 만일 교회의 이기는 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면, 바로 주 예수님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여기에서 주 예수님을 가리켜 말할 가능성이 있는가? 없다. (절대적으로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뒷부분에서 예수님도 여기에 포함된다는 것을 말하겠다.) 왜 그럴 가능성이 없는가?
첫째, 이 사내아이는 해산하자마자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올라갔는데 태어나자마자 곧 바로 보좌로 올라간 것은 주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님을 보여 준다. 왜냐하면 주 예수님은 삼십 삼 년 반을 사시고 죽고 부활하신 후에야 비로소 승천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사내아이가 교회 가운데 이기는 자를 가리켜 말한 것임을 믿는다. 이 사내아이는 교회 중의 일부분이며, 이들이 바로 이기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사내아이는 교회 가운데 이기는 자를 가리키며, 주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다만 사내아이는 주 예수님을 포함한다. 주 예수님은 첫번째 이기는 자이셨으므로 모든 이기는 자는 주 예수님 안에 포함되어 있다). 사내아이와 어머니는 서로 다르지만 또한 하나이다. 이기는 자들은 교회와 다르지만 또한 교회 안에 있다.
사내아이의 휴거
12장 5절에서는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고 말한다. 여기의 휴거는 데살로니가 전서 4장에서 말한 휴거와 다르다. 데살로니가 전서 4장에서는 공중으로 휴거되는 것을 말했고,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으로 휴거되는 것을 말했다.
왜 사내아이가 하나님 보좌가 있는 곳으로 휴거되는가? 이는 이미 한 사람-교회의 머리-이 이미 보좌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한 사람만을 보좌에 있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을 보좌에 있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원래 목적은 수많은 사람들로 보좌에 올라오게 하시는 것이요, 수많은 사람들로 통치권을 갖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와 교회가 함께 그분의 목적을 성취하기를 원하시지만, 교회 중 많은 사람들이 이때에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올라갈 수 있을 정도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소수의 사람들만이-이기는 자들-하나님의 보좌 앞에 올라갈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목적에 도달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휴거된 것이다.
사내아이가 휴거되자 곧 두 가지 일이 발생했다.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일천 이백 육십 일 동안 저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6-7절)라고 말한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개의 「그리고 곧(and)」(한국어 성경에서는 and의 의미를 살리지 못하고 있음-역자 주)이라는 말에 주의해야 한다. 5절에서는 사내아이가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휴거되었다고 말하고, 6절에서는 (그리고 곧)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갔다고 하며, 7절에서는 (그리고 곧)하늘에 전쟁이 있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여자가 광야로 도망간 것은, 사내아이의 휴거됨으로 인한 것이고, 하늘의 전쟁도 역시 사내아이의 휴거됨으로 인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하늘의 전쟁의 상황을 보기로 하자. 먼저 미가엘을 보자. 그의 이름의 뜻은 의미심장하다. 「미가엘」의 뜻은 『누가 하나님과 같으냐?』이다. 이 한 마디 질문은 너무나 멋진 표현이다. 사탄의 목적은 오직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것인데, 미가엘은 누가 하나님과 같으냐 고 묻는다. 사탄은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하고, 또한 사람을 하나님과 같이 되라고 유혹하지만, 그러나 누가 하나님과 같으냐라는 이 질문은 사탄의 권위를 흔들어 버린다. 『너는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지만 어림없다.』 이것이 바로 미가엘의 이름이 계시하고 있는 바이다.
사내아이가 휴거되자 곧 하늘에서는 전쟁이 발생되었다. 다시 말해, 하늘에서 전쟁이 일어난 이유는 바로 사내아이가 휴거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볼 때, 휴거는 단지 개인적인 문제일 뿐 아니라, 더욱 여러 시대에 걸쳐 내려온 전쟁-즉 옛 뱀이 수천 년 동안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던 것을 종결하기 위한 것이다.
하늘에서 전쟁이 시작되자 미가엘은 그의 사자들과 함께 용과 전쟁을 벌인다. 용은 바로 옛 뱀이다. 이 용은 하나의 뱀이 변화된 것으로서 그의 능력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커진 것이다. 그러나 사내아이가 들려 올라가자, 그 용은 더이상 커질 수 없게 되었을 뿐 아니라 더우기 그는 하늘에서부터 쫓겨났다. 그러므로 휴거는 사탄으로 하여금 더이상 하늘에 있지 못하게 하는 일종의 사역이다.
미가엘이 그의 사자들과 함께 용과 전쟁을 벌였고 용도 그의 사자들과 함께 전쟁을 치루었는데,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8절부터 9절을 보자. 『그들이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큰 용이 내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쫓기니라』.
이 전쟁의 결과로 용은 패배하였고 하늘에서 더이상 있을 곳을 얻지 못하고 내어쫓겨났다. 본래 주 예수님의 죽으심은 사탄이 사람의 타락 가운데서 얻은 지위를 처리했다. 다시 말하면 구속이 사탄의 합법적인 지위를 이미 파괴한 것이다.
교회의 사역은 바로 주님이 구속 안에서 이미 성취하신 것을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집행하고 사탄이 사람의 타락으로 인해서 얻은 합법적인 지위를 끝내는 것이다. 구속은 타락에 대해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처리이며, 하나님의 나라는 타락에 대해서 교회가 한 처리이다. 심판의 일은 그리스도의 일이었지만, 심판의 집행은 교회의 일이다. 사탄은 구속 안에서 심판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형벌을 받고 있는 중이다.
용과 그의 사자들이 하늘에서 쫓겨난 이후, 10절에서는 『내가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가로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라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나라이다. 사탄이 쫓김을 받았고, 사탄의 사자들도 쫓김을 받았고, 따라서 하늘에 더이상 그들의 장소가 없게 되었을 때,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이요, 능력이요, 나라요, 그리스도의 권세이다.
더 나아가서 계시록 11장 15절과 12장 10절을 읽어보자.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가로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이것이 주제이다.
12장 10절을 보자.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가로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다』고 했다. 이것은 주제가 이미 실현된 것이고 이미 성취된 것이다. 이 성취의 열쇠는 사내아이의 휴거이다. 하늘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사탄이 쫓겨난 이유는 사내아이가 들림받았기 때문이다. 사탄이 쫓겨난 결과는 우리 하나님과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임한 것이다. 이기는 자들의 휴거는 사탄을 쫓아내고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온다. 이기는 자들의 사역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오기 위한 것이다. 주님의 사역은 이미 완성되었으며, 따라서 그분은 이미 보좌에 앉아 계신다. 이제는 이기는 자들이 이것을 가져와야 한다.
누가복음 10장에 또한 여기와 일치되는 곳이 있다. 10장 17절에서는, 『칠십 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냈음을 말한다. 18절을 보자.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이것은 사탄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말한다.
이 일은 언제 이루어졌는가? 계시록 12장에서이다. 어떻게 해야만이 사탄을 하늘에서부터 떨어지게 할 수 있는가? (18절의 근거는 바로 17절이다.) 사탄이 하늘 위에서 떨어지게 되는 것은 교회가 귀신을 쫓아냈기 때문이다. 17절에서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은, 한차례 귀신을 쫓아냄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교회가 이 땅에서 계속 귀신을 쫓아낼 때, 비로소 사탄이 하늘에서 떨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주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인해 사탄의 권위는 단번에 파괴되었다. 그러나 사탄으로 하여금 그의 권세를 완전히 잃게 하고, 그의 하늘에서의 권세를 잃게 하며, 그의 모든 권세를 끝내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땅에서 계속해서 사탄을 처리함에 달려 있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수차례 귀신이 정복당함으로써 사탄이 쫓겨남을 당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여기에 하나의 저울이 있다 하자. 한쪽에는 사탄이 있다. 우리는 사탄이 얼마나 무거운지를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쪽 저울 위에 계속 물건을 올려 놓는다. 계속 더하고 또 더한다. 사탄을 한번 더 처리할 때마다 우리는 저울의 다른 쪽에다 물건을 더 놓는 것이다. 마침내, 마지막으로 조금더 올려놓을 때 상대쪽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처음에 우리가 저울의 다른 쪽에 계속 물건을 올려놓았을 때에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실지로는 매번 다 유효하다. 마지막 하나를 더할 때, 저울의 상대쪽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마지막 하나는 누가 더했는지 모르지만, 그 앞서 더해진 하나하나가 마지막으로 더해진 하나와 합해져서 효력을 발휘한 것이다.
교회의 사역은 바로 우리 모두가 사탄의 일을 대항하고, 우리 모두가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다. 귀신를 쫓아낸다는 것은 꼭 우리가 어느 귀신을 만나서 싸워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마귀의 모든 일과 모든 권세를 다 쫓아낸다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의 권위를 굳게 붙잡고 각 위치에 굳게 서서 한 형제가 중량을 조금 더하고 다른 형제가 또 중량을 조금 더한다면, 언젠가 사탄은 하늘에서 떨어지게 될 것이다.
사탄으로 하여금 하늘에서 떨어지게 하는 일은 하나님이 손수 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이 직접 하신다면 그것은 매우 쉬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교회로 하여금 하도록 하신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교회가 실패함으로 할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이기는 자들이 나와서 교회의 위치에 서서 수행함이 필요한 것이다.
이기는 자들이 교회의 위치에 굳게 서서 교회가 해야 할 일을 수행했으므로 그 결과는 바로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이다. 계시록 12장의 사내아이가 바로 교회의 위치에 서 있는 이기는 자들이며, 그렇기 때문에 이 사내아이가 휴거되자마자 사탄이 하늘에서부터 떨어지고 나라가 임하게 되는 것이다.
사내아이의 원칙
성경에서 이 사내아이는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자라』고 했다. 하나님의 목적은 바로 여기에 있다. 교회의 사역은 바로 사탄으로 하여금 권세를 상실케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오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는 아비가일(삼상 25:3)의 성질을 가져야 하고 그리스도와 동역하는 성질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교회는 결코 하나님의 목적에 이르지 못했고, 심지어 하나님의 목적조차도 모르고 있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 하나님은 어떻게 하시는가? 하나님은 한 무리의 이기는 자들-하나님의 목적에 도달할 수 있고 하나님의 요구를 성취할 수 있는-을 선택하신다. 이것이 바로 사내아이의 원칙이다.
이 원칙에 대해서 성경에는 많은 예들이 있다. 하나님은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사람들을 무엇을 위해서 선택하셨는가? 출애굽기 19장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해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을 제사장 나라로 선택하셨다. 무엇을 가리켜서 제사장 나라라고 하는가? 그 의미는 온 국민이 다 하나님을 섬기고 모두 제사장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더 제사장이 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금송아지를 섬겼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도리어 우상을 숭배했던 것이다.
그후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하기를, 『누구든지 여호와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출 32:25)고 했다. 그래서 레위 자손들이 모두 그 앞에 모였다. 모세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그 친구를 각 사람이 그 이웃을 도륙하라 하셨느니라』(출 32:27)고 했다.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가장 큰 죄이므로 하나님은 그들로 하여금 칼로 형제들을 살육하도록 했다. 레위 자손들은 모세의 말대로 준행했다. 레위인들은 인정(人情)을 돌아보지 않고 하나님을 기꺼이 섬기기 원했으며, 그래서 하나님은 레위인을 제사장으로 선택하셨다.
그 이후부터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제사장이 될 수 없었고, 레위 지파만이 제사장이 될 수 있었다. 전체 이스라엘 백성은 그 이후부터 레위인을 통해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갈 수 있었다. 본래 전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섬겼지만, 전체가 실패함으로 인해서 하나님은 실패한 단체 중에서 한 무리를 선택하시어 전체 이스라엘 백성을 대신하게 하셨는데, 이들을 이기는 자들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레위인들은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고, 또 자기 자신들이 원해서 이기는 자들이 될 수도 없었으며, 또한 그들 자신이 누구보다 더 뛰어나다고 여기지도 않았다. 만일 그러했다면 레위인도 끝났을 것이다. 레위인이 하나님에 의해서 제사장으로 선택된 것은 바로 전체 이스라엘 백성의 제사장 됨을 대신한 것이다. 본래 이스라엘 백성이 드려야 할 바를 이제는 레위인이 그들을 대신하여 드리는 것이다. 레위인의 하나님 앞에서의 봉사는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 앞에서의 봉사로 간주되었다. 제사장은 레위인들만이 될 수 있었지만, 이들의 봉사로 유익을 받는 것은 전체 이스라엘 백성이었다.
그러므로 이기는 자들의 사역도 교회를 위한 것이다. 일은 그들이 했지만, 일의 유익을 얻는 것은 교회이다. 이기는 자의 영광은 여기에 있다. 일은 이기는 자들이 한 것이지만, 영광은 전체가 다 누리는 것이다.
사사 시대에 이르러서, 이스라엘 백성은 미디안 사람들에 의해서 압박을 받고 매우 어려운 상황 아래 떨어지게 되었다. 그 후에 하나님은 한 지파의 한 집에서 기드온 한 사람을 일으키시어 한무리의 사람을 이끌어 대적을 몰아내도록 하셨으며, 이것은 온 나라로 자유를 얻게 했다. 전쟁은 원래 온 나라의 일이었지만, 혹자는 두려워하고 혹자는 태만했기 때문에 소수 무리를 일으켜 전쟁을 하도록 했고, 그 결과 온 전체가 유익을 얻게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 됨에서 돌아을 때도 이와 같은 원칙이 적용되었다. 본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하시기를, 포로 된 지 칠십 년 만에 모두 본토로 돌아가리라고 하셨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전부 돌아오지 않았고 오직 소수 사람들, 즉 에스라, 느헤미야, 스룹바벨, 예수아 등등 여호와의 인도함을 받은 자만이 돌아와서 성전을 건축하고 예루살렘 성을 중건했다. 그들 소수 무리가 한 일이 이스라엘 온 나라가 한 일로 간주되었고, 이스라엘 온 나라가 부흥되는 것으로 간주되었고, 이스라엘 전체가 돌아온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므로 이기는 자의 원칙은, 특별히 신령한 개인이 장차 면류관을 얻고 영광을 얻는 것이 아니다(장래 개인이 면류관을 얻고 영광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비록 그들이 면류관을 얻고 영광을 얻을 것이지만 그것은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기는 자가 이기는 자로서 일을 수행하는 이유는 자신이 영광을 얻고 면류관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바로 교회가 서야 할 위치에 서서 교회를 위해서 일을 하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 앞에서 그녀의 합당한 상태에 있어야 하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야 하며, 감당해야 할 책임을 감당해야 하고, 서 있어야 할 위치에 서 있어야 한다. 그러나 교회는 실패했고, 합당한 상태에서 벗어났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마땅히 감당해야 할 책임을 지지 못하며, 마땅히 서 있어야 할 위치에 서 있지 못했던 것이다. 다만 한 무리 사람들이 그러한 위치에 서서 교회를 대신해서 그러한 일을 하고 있고 그러한 책임을 지고 있는데, 이 무리가 이기는 자들인 것이다.
이기는 자들이 한 일은 온 교회가 한 일로 간주된다. 어느 승리자가 있는 곳이라면, 하나님은 이미 거기에서 승리를 얻으셨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사내아이의 원칙이다.
우리가 사내아이의 문제를 고려하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이 그분의 영원한 뜻 가운데서 한 무리의 이기는 자들을 필요로 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볼 때 교회가 실패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교회를 대신해서 서 있을 수 있는 이기는 자를 부르기 원하시는 것이다.
여기의 사내아이는 특별히 마지막 시대의 이기는 자들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사내아이는 해산되자마자 곧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올라 갔으며, 즉시 하늘에서는 전쟁이 벌어졌으며, 사탄이 하늘에서 쫓겨났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어려운 점이 사내아이의 휴거로 인해서 해결된 것이다. 이는 마치 사내아이가 나오면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되지 않을 수 없는 것 같다. 이것은 오늘날 하나님이 부르시고 주의하시는 일이며, 하나님은 그분의 원래 목적을 성취할 수 있는 이와 같은 사람을 얻기 원하신다.
이기는 자의 근거와 태도
계시록 3장 21절을 보자.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여기에서 사내아이가 보좌에 앉을 수 있는 것은 그가 이미 승리를 얻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그들이 어떻게 승리를 얻었는지, 동시에 또한 그들이 어떠한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를 보기로 하자.
계시록 12장 11절을 보자. 『또 여러 형제가 어린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로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 하였도다』.
『여러 형제가... 저를 이기었으니』. 「저」는 사탄이다. 그들은 사탄을 이긴 것이며, 그들은 사탄으로 하여금 그들에게서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했다. 그들이 이길 수 있었던 원인은 첫째로, 어린양의 피로 인함이고, 둘째로, 그들의 증거하는 말로 인한 것이다. 또 한면으로, 그들은 죽기까지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는 태도를 지녔다.
(1) 어린양의 피
첫째로, 『여러 형제가 어린양의 피와... 저를 이기었으니』.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를 얻을 수 있는 근거는 어린양의 피에 달려 있다. 피는 죄 사함을 위한 것일 뿐 아니라, 또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구원을 얻게 할 뿐 아니라, 더욱 사탄을 이기는 근거이다.
아마도 어떤이들은 피가 성장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크게 소용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마치 그들은 어느 정도 성장하면 피의 한계를 넘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우리는 이러한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해야 한다. 어떠한 사람도 피를 뛰어넘을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여러 형제가 어린양의 피로... 저를 이기었으니』라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사탄의 주된 역사는 참소(고소)하는 일이다. 사탄은 흥악한 살인자인가? 그렇다. 사탄은 거짓말장이인가? 그렇다. 사탄은 유혹하는 자인가? 그렇다. 사탄은 공격하는 자인가? 그렇다. 이뿐 아니라 또한 사탄의 주된 일은 참소하는 것이다. 12장 10절은 말하기를,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라고 한다.
사탄은 주야로 형제들을 참소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참소하는 자이며, 또한 우리 양심 안에서 참소하는 자이다. 사탄의 참소는 사람으로 하여금 약해지고 무력해지게 할 수 있다. 사탄은 사람을 참소하여 사람으로 자신이 아무 쓸모 없는 사람이라고 상상하게 하며, 사람으로 사탄과 전쟁할 위치를 상실하는 정도에까지 이르게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죄를 처리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죄에 대해서 마땅히 느낌이 있어야 하지만, 사탄의 참소를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사탄의 참소를 받아들이면 온종일 자신이 틀렸다고 느끼게 된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곧 자신이 틀렸다고 생각하고,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에도 자신이 틀렸다고 느끼므로 자신의 기도가 하나님의 응답하심을 얻게 될 것인지를 의심하게 된다. 연단에 올라가서 말씀을 전하고서도 자신이 틀렸기 때문에 소용이 없다고 생각한다. 주님께 연보를 드리고서도 하나님은 이와같이 잘못된 사람의 헌금은 받지 않으실 거라고 생각하여 헌금했던 것을 후회한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은 주로 주 예수님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주 예수님이 어떠한 승리를 얻으셨는지 등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자신의 잘못됨 즉 자신의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고 여기며 온종일 자신의 잘못됨을 생각한다. 일할 때에도 자신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휴식을 취할 때에도 자신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길을 걸어갈 때에도 자신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성경을 읽을 때에도 자신이 잘못됐다고 생각하며, 기도할 때도 자신이 잘못됐다고 생각하며, 자신을 좋다고 생각하는 때는 한번도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참소이다. 사탄이 만일 우리를 이러한 상황에 빠뜨렸다면, 사탄이 우리를 이긴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 있는 사람은 사탄 앞에서 연약하다. 사탄의 참소를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은 사탄 앞에서 이기는 자가 될 수 없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계속적으로 자신의 잘못됨을 생각하고 이것을 또한 그리스도인의 겸손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이 바로 사탄의 참소를 받아들이는 것임을 누가 알리요.
그렇다. 만일 우리에게 죄가 있다면, 우리는 자백해야 하고 처리해야 하지만, 우리가 배워야 할 또 하나의 공과는 바로 우리 자신을 보지 말고 오직 주 예수만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종일 자신에 관한 생각에 빠져 있다면, 이것은 일종의 병적인 상태이며 이러한 상태는 사탄의 참소로 말미암아 발생된 것이다.
어떤 하나님의 자녀들의 양심은 죄의 느낌이 부족하다. 이러한 사람들은 어떤 영적인 용도가 없다. 그러나 또한 수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양심이 연약하여 예수님의 사역을 인식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우리가 그들에게 대체 무슨 특별한 죄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특별한 죄가 있음을 말해내지 못한다. 그런데도 그들은 항상 자신은 틀렸고 약하며 아무 소용이 없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다. 그는 자신을 만지고서 불안을 느끼고 즐거움을 잃는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참소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탄이 매번 우리에게 이러한 느낌을 줄 때마다 우리는 약해지고 그를 대적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탄의 참소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사탄의 주된 일은 바로 참소이다. 사탄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참소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참소하고 우리의 양심 안에서 참소하며 우리의 양심을 연약하게 하고 담대하지 못하게 한다.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일에서 양심은 실로 중요한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 전서 8장에서, 만일 사람의 양심이 파괴되면 그는 침륜하게 된다고 말했다. 여기에서 말한 침륜은 영원한 멸망이 아니라, 바로 개인이 세워지지 못하고 연약하게 되어 쓸모없게 된다는 뜻이다. 디모데 전서 1장에서도, 사람이 양심을 버리면 믿음에 대해서 파선(破船)한 것과 같다고 했다. 배가 파선되면 항해를 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앞에서 서 있을 수 있느냐 없느냐의 열쇠는 곧 그의 양심에 거리낌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 그가 만일 사탄의 참소를 받아들인다면, 그의 양심은 즉시 손상을 받게 될 것이고, 양심이 손상을 받으면 일을 할 수 없게 될 것이며, 하나님을 위해서 전쟁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사탄의 주요한 방해 공작 중의 하나가 바로 참소로서 우리가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사탄의 참소를 이길 수 있는가? 하늘에 소리가 있어 말하기를, 『여러 형제가 어린양의 피로... 저를 이기었으니』라고 했다. 피는 승리를 얻는 근거이며, 피는 사탄을 이기는 도구이다. 사탄은 참소할 수 있지만, 우리는 『그의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선포할 수 있다(요일 1:7).
「모든 죄」란 큰 죄나 작은 죄를 무론하고 그분의 아들의 피가 깨끗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사탄은 우리가 틀렸다고 하지만 우리에게는 주 예수님의 피가 있다. 주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수많은 죄에서 씻으실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의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우리는 이유 없는 참소를 거절해야 할 뿐 아니라, 이유 있는 참소도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설사 어떤 일에서 틀렸다 하더라도 다만 그분의 아들 예수의 피가 필요할 뿐 사탄의 참소는 필요치 않다. 죄가 필요로 하는 것은 보혈이지 참소가 아니다. 하나님은 죄가 있으면 참소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문제는 단지 여기에 있다. 우리가 죄를 범하고서 죄를 자백하는가, 자백하지 않는가? 우리가 자백한다면 또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만일 당신에게 죄가 있어서 당신이 머리를 숙이고 하나님을 향해서 죄를 자백한다면, 주 예수님의 피가 즉시 당신을 깨끗케 하실 것이다. 우리가 자신에게 죄가 있음을 조금 더 많이 생각한다고 해서 조금 더 거룩해지리라고 여기지 말라. 우리가 자신에게 죄가 있음을 조금 더 느낀다고 해서 조금 더 거룩해지리라고 생각하지 말라. 우리는 다만 자신에게 다음과 같은 한마디를 물어보아야 한다. 『나는 어떻게 주 예수님의 피를 대하고 있는가?』
그렇다. 우리는 죄가 있지만, 그분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씻었다. 「모든 죄」는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큰 죄이든지 작은 죄이든지, 기억하고 있는 죄이든지 기억하고 있지 않은 죄이든지, 보았던 죄든지 보지 않았던 죄이든지, 자신이 사함받을 수 있다고 여기는 죄이든지 자신이 사함받을 수 없다고 여기는 죄이든지를 막론하고 다 하나로 그 안에 포함되어 있고 모든 죄가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피가 한두 가지의 죄만을 씻는 것이 아니고, 또한 수많은 죄들을 씻는 것도 아니며, 모든 죄를 씻어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죄 없다고 말하지 않고 죄가 있다고 말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탄의 참소를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그것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보혈이 있으므로 하나님 앞에서 여전히 정결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혈을 믿는 것보다 사탄의 참소를 더 믿어서는 안 된다. 범죄는 이미 하나님의 영광을 손상시켰지만, 우리가 보혈을 믿지 않는다면 더욱 하나님의 영광을 손상시킬 것이다. 범죄는 수치스러운 일이지만, 보혈을 믿지 않음은 더욱 수치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우리는 어린양의 피를 믿는 것을 배워야 한다.
로마서 5장 9절을 보자.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왜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올 때마다 계속 마음에 불안과 자신의 잘못됨과 자신이 틀렸음을 느끼는가? 이것은 그들의 소망이 틀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적극적인 것을 하나님에게 바치기를 소망했으나 자신에게 결코 하나님께 드릴만한 그러한 적극적인 것이 없음을 발견하기 때문에 사탄의 참소를 받는 것이다. 그 참소는 다음과 같다. 『너는 이러한 사람이다. 너에게는 하나님께 드릴 만한 좋은 것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에게는 적극적인 선함이 없고 우리 자신에게는 원래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어떤 좋은 것이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오직 한 가지-피-를 하나님 앞에 놓을 수 있고 오직 피를 통해서만 의롭게 될 수 있다. 우리 자신에게는 적극적인 의가 없고 다만 구속으로 인하여 얻은 의가 있을 뿐이다.
우리가 매번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오는 것은, 이 보좌가 은혜를 주는 곳이지 공의를 요구하는 곳이 아니므로 은혜를 얻기를 앙망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매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첫번째 자격은 곧 우리의 구속함 받은 신분에 의한 것이지 우리가 진보한 그리스도인이 된 것에 의한 것이 아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이라도, 『나는 요 며칠간 아주 좋았기 때문에 기도할 담력을 갖고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가 매번 하나님 앞에 나갈 때마다, 우리의 지위, 우리의 근거는 모두 피에 있다. 우리는 어떤 영적인 성장도 보혈의 효능을 대치할 수 없고, 모든 영적인 체험도 피의 역사를 대치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설사 어떤 사람의 영적인 분량이 사도 바울 같고, 사도 요한과 같고, 사도 베드로와 같을지라도, 그들이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서는 여전히 보혈이 필요하다.
때로 우리에게 죄가 있으면 사탄이 와서 참소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죄가 없을 때에도 사탄은 와서 참소한다. 때로는 우리에게 죄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 우리에게 하나님께 드리는 적극적인 의가 없기 때문에 사탄은 여전히 우리를 참소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어떤 것이 아닌 오직 피로써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 우리가 깨끗하게 되는 것도 피로 인함이요,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음도 피로 인함이다. 우리는 결코 사탄의 참소를 받지 않는다.
보혈이 영적 전쟁의 근거이다. 우리가 피의 가치를 모른다면 전쟁을 할 수 없다. 우리의 양심이 약해진다면 우리는 전쟁을 할 수 없다. 우리 자신에게 있어서 흠없는 양심, 청결한 양심을 지키지 못한다면 우리는 사탄과 싸울 수 없다. 사탄은 수천 가지의 이유로 우리에게 말할 것이고, 우리가 일단 받아들이면 우리는 실패하게 된다. 사탄은 수천 가지의 이유로 우리에게 말하지만, 우리의 유일한 대답은 바로 피이다. 사탄의 어떠한 이유라도 피로써 대답할 수 없는 것은 없다. 영적 전쟁에는 흠없는 양심이 필요하고, 오직 피만이 우리에게 흠없는 양심을 줄 수 있다.
히브리서 10장 2절은,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라고 했다. 그리스도인의 양심은 보혈이 있기 때문에 죄를 깨닫지 않게 될 수 있다. 당신이 이 위치에 서기만 하면, 당신이 피를 믿기만 하면, 사탄은 당신에게서 일할 수 없게 된다. 우리의 생각은 우리가 죄를 범했기 때문에 사탄과 전쟁을 할 수 없다고 하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죄가 있음을 아시고 피를 예비하신 것이다.
주님은 죄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피가 있기 때문에 방법이 있지만, 계속 사탄의 참소를 받는 사람에 대해서는 주님께도 방법이 없다. 그것은 사람이 사탄의 참소를 받아들이는 것은 보혈의 능력을 부인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보혈을 믿으면서 동시에 사탄의 참소를 받아들이는 믿는이는 없다. 반드시 둘 중에서 하나가 나가야 한다. 참소가 들어오면 피가 나가야하고, 피를 믿으면 참소가 나가야 한다.
주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대제사장과 중보자가 되셨다(히 2:17-18, 4:14-16, 7:20-28, 8:6, 9:15. 요일 2:1). 그분은 변함없이 제사장이시고 언제나 중보자이시다. 그분이 이와같이 되신 것은 우리를 사탄의 참소에서 보호하시기 위함이다. 그것은 사람이 그분을 구주로 영접하는 것은 순간적인 일이지만, 사람이 사탄의 참소를 받는 것은 일생 동안 직면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중보자」라는 단어는 헬라어에서 「변호를 위임받은 자」라는 뜻이다. 주님은 우리의 중보자이시며, 우리의 변호자이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말씀하신다. 우리는 참소자의 편에 서 있는가, 아니면 중보자의 편에 서 있는가? 만일 중보자가 우리를 위해서 변호하고 있을 때에, 우리가 도리어 참소자의 말을 믿는다면, 이것은 우습지 않겠는가? 우리는 주 예수님이 우리의 중보자이시고, 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변호하심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피가 사탄을 처리하는 근거임을 보아야 한다. 우리가 만일 피의 가치를 안다면, 이 땅에 평안하고 즐거운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증가하게 될지 모른다.
『여러 형제가 어린양의 피로... 저를 이기었으니』. 이 말씀은 얼마나 귀한가! 형제들이 그를 이김은 그들의 장점으로 인함이 아니고, 그들의 성장으로 인함도 아니고, 그들의 체험으로 인한 것도 아니다. 형제들이 저를 이김은 어린양의 피가 있기 때문인 것이다. 사탄의 참소가 있을 때마다 우리는 피를 사용해서 처리해야 한다. 우리가 피를 받아들이자마자 사탄의 능력은 소멸될 것이다. 우리의 모든 것은 피를 의지해서 해야 하고 매일 우리에게는 피가 필요하다. 우리가 구원받는 그날 피를 의지하고 피를 믿는 것같이, 그 이후에도 날마다 우리는 피를 의지하고 피를 믿어야 한다.
피는 유일한 근거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수많은 이유 없는 참소로부터 벗어나도록 구원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이 쇠사슬을 부수기 원하신다. 우리는 매일 참소를 받는 것이 겸손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참소를 이기는 것을 배워야 한다. 우리가 참소를 이기지 못한다면 이기는 자가 될 수 없다. 이기는 자는 반드시 피의 가치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피의 가치가 얼마나 큰지는 모르지만, 다음과같이 말할 수 있다.
『주여, 당신이 평가한 피의 가치에 따라 나에게 적용하소서.』 우리가 평가한 가치가 아니라 주님이 평가한 피의 가치에 따라서 사탄의 능력을 처리해야 한다.
(2) 자기의 증거하는 말
두번째는, 『여러 형제들이...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양심이 흠이 없기 때문에 입에서 증거가 나오는 것이다. 양심에 흠이 있다면 입으로 어떤 말도 해낼 수 없고 말할수록 소리가 작아질 것이다. 여기의 증거는 사람에게 하는 말이지 자신에게 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피가 있기 때문에 담대함을 가지며, 사람 앞에서 또한 증거할 수 있게 된다. 당신은 죄인이 사함받았음을 증거할 뿐 아니라, 사람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열납됨을 증거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더욱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할 수 있다.
「증거」는 바로 안에 대체 무엇이 있는가를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다. 증거의 말은 반드시 말해내야 하는 것이다. 이기는 자는 그리스도의 승리를 수차 선포해야 한다. 이 사실을 말하고 또 말하는 것을 사탄은 가장 두려워한다.
왕국이 임한다는 것은 하나의 사실이다. 주님이 왕이 되심도 하나의 사실이다. 그리스도는 승리자요, 영원히 승리하신 분이라는 것도 사실이다. 사탄이 패배했음도 사실이다. 그 강한 자가 이미 결박되어서 합법적으로 정죄되었음도 하나의 사실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사탄의 모든 행위를 파괴하신 것도 사실이다. 이 사실을 선포하는 것이 바로 증거이다. 그리스도는 이러한 분임을 증거하고 그리스도는 저런 분임을 선포하는 것이 곧 증거하는 것이다.
증거하는 말은 사탄이 두려워하는 것이다. 사탄은 당신의 메시지를 두려워하지 않지만, 당신의 선포를 두려워한다. 사탄은 당신이 신학을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지만, 당신이 선포하는 것은 두려워한다. 사탄은 당신이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무서워하지 않으나 당신의 선포는 무서워한다. 사탄은 당신이 영적인 사실을 선포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예수는 주이시다.」는 영적인 사실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주이시라고 연설하고 예수님이 주이시다라고 해석하지만, 사탄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믿음으로 예수님이 주이시다라고 선포할 때에 사탄은 무서워하게 된다. 사탄이 두려워하는 바는 메시지가 아니고, 신학도 아니고, 증거하는 말이다.
여기에 예수의 이름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라는 하나의 영적인 사실이 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사람에게 선포할 뿐 아니라 또한 사탄에게 선포해야 한다. 많은 때에 우리는 사탄이 듣도록 말하고 고의로 그가 듣도록 말하는데, 이것이 증거하는 말이다. 당신 혼자서 방 안에 있을 때에도 큰 소리로 말할 수 있다. 당신은 『예수는 주시라.』, 『주 예수님은 강한 자보다 더 강하시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미 사탄을 묶으셨다.』 등등의 말을 선포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증거하는 말이다.
그리스도인은 무엇이든지 기도에 의지해야 한다. 그러나 때로는 증거하는 말이 기도보다 더욱 능력이 있다. 마가복음 11장23절에서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를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하셨다.
주 예수님은 여기에서 그가 간구하는 대로 이루어 주신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그가 말하는대로 이루어 주신다고 하셨다. 중국에 다음과 같은 성어(成語)가 있다. 「출구성장」(出口咸章: 입으로 나오는 것이 글이 된다는 뜻임). 우리 그리스도인 가운데서는 「출구성사」(出ㅁ成事: 입으로 나오는 것이 성취된다는 뜻임)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한 마디 말씀으로 창조하셨다. 마가복음 11장23절의 일에 대해서 우리는 이것을 산에게 말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단지 믿음으로 말하기만 하면 사실이 될 수 있다. 많은 경우에 기도의 힘은 선포하는 힘보다 못하다. 우리는 증거하는 말로 사탄을 처리해야 한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그 안에 많은 증거하는 말이 있음을 보게 된다. 3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문 입구에서 어느 앉은뱅이를 보았을 때, 베드로가 한 바는 그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3:6)고 말한 것뿐이었다.
이것을 곧 증거하는 말이라고 한다. 하나님이 그를 처리하시도록 기도하고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선포함으로써 그를 처리한 것이다. 또한 16장에서 바울은 귀신을 쫓아냈는데, 역시 선포하는 말을 사용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16:18). 그 귀신은 이렇게 명할 때 즉시 나왔다.
우리는 다음의 예를 들어 말할 수 있다. 복음을 전파하는 두 자매가 있었다. 어느 날 그들이 시골 마을에 가서 며칠 머물렀을 때였다. 그곳에 한 귀신들린 여자가 있었는데 그녀의 가족들이 이 두 자매를 초청했다. 그들은 기도한 후에 가야 된다고 느꼈으므로 그곳에 갔다. 거기에 도착해서 그 여자를 보았는데 그녀는 옷을 바르게 입고 있었으며 모든 것이 다 좋았다. 그래서 그들이 이 여자가 정말 귀신들린 사람인가 하며 의심할 정도였다.
그들이 그 여자에게 메시지를 전할 때에도 그녀는 매우 분명하게 들었다. (사실 분명하게 들은 것이 아니라 잘 듣는 척했던 것이다.) 그들은 조금 이상하다고 느끼고 그 여자에게 물었다. 『당신은 주 예수를 믿습니까?』 그 여자는 『나는 수년이 되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두 자매는 그녀로 인해 어리둥절하게 되었고 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자매들이 다시 그 여자에게, 『당신은 예수가 누구신지 아십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 여자는, 『예수가 누구인지 당신들이 와서 보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리고서 그 여자는 앞쪽의 큰 객실로부터 뒷쪽의 어느 방으로 자매들을 인도했다. 그 여자는 거기에 있는 한 우상을 가리키면서, 『이분이 예수입니다. 나는 수년 동안 믿어왔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때 한 자매가 증거의 말을 해야 한다고 느꼈다. 주의하기 바란다! 그녀가 한 말이 바로 우리가 여기에서 말한 증거하는 말이다. 그 자매는 그녀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사람에게 말한 것이 아니라 귀신에게 말함) 『너는 1900여년 전에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에서 와서 사람이 되셨고, 삼십 삼년 반 동안을 사시며 너와 같은 귀신들을 얼마나 많이 쫓아냈는지 기억하느냐? 너희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해치려고 했던 것을 너는 기억하고 있지? 너희와 너희에게 속한 무리들이 모두 일어나서 그분을 살해하려고 했고, 과연 너희들에 의해서 그분은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그때 너희들은 정말로 기뻐했을 것이다. 그러나 삼 일 후에 그분은 죽음에서 부활하셨다! 너희들의 모든 권세가 그분에 의해서 깨어졌지 않느냐? 너는 사탄 수하의 악한 영일 뿐이다. 그분이 음부에서 나오시던 그날, 하나님이 하늘에서 소리를 발하여 모든 생물들과 모든 영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오늘 이후로 예수의 이름이 나타날 때마다, 모든 혀가 자백할 것이요, 모든 무릎이 꿇을 것이라.」고 하신 것을 너는 기억하느냐! 내가 너에게 말한다. 내가 이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이 여자에게서 나가라!』
그녀가 이렇게 선포하자마자 이 귀신은 즉시 이 여자를 땅에 거꾸러뜨리고는 도망가버렸다. 『너는 기억하느냐?』라는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하다. 그녀는 계속 이 한 마디 말을 사용했다. 이것이 바로 증거이다. 우리가 사탄에게 설교한다면, 사탄도 많은 설교를 할 것이다. 우리가 만일 사탄과 논쟁을 벌인다면, 그의 「이론」도 많고도 많다. 그러나 우리가 사실을 말한다면, 영적인 사실을 말한다면 그에게는 방법이 없다.
우리는 성경 안의 사실을 알아야 하고 또한 이러한 사실을 믿어야 한다. 우리는 사탄의 공격을 받지 않도록 보혈의 덮여짐 아래 있어야 하고 그런 다음 사탄에게 증거해야 한다. 사탄이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가 그에게 증거하는 말이다.
그리스도인 체험 중에서, 때때로 우리는 매우 약해짐을 느끼며 심지어 하나님 앞에 나가서 기도조차도 할 수 없음을 느낀다. 이때에 우리는 영적 사실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주님의 승리의 사실을 기억해야 하며, 사탄에게 주 예수님이 승리하셨음을 선포해야 하고 주 예수님이 주이심을 선포해야 한다. 선포함이 증거하는 것이요, 증거함이 선포하는 것이다.
우리는 주 예수님의 주 되심을 선포하고, 주님이 이미 승리자이심을 선포하며, 사탄이 주님의 발 아래 이미 짓밟혔음을 선포하고, 주님이 이미 우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또한 그들의 모든 권세를 이길 수 있는 권세를 주셨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증거하는 말이며, 사탄으로 더이상 서 있을 수 없게 하는 증거의 말은 사탄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는 것이다. 예수님의 사역은 우리에게 우리를 보호하는 보혈을 주셨을 뿐 아니라 더욱 사탄을 패배시킬 수 있는 증거하는 말을 주셨다.
(3) 생명을 아끼지 아니함
위에서는 승리를 얻는 근거에 관해서 말했다. 그러면 이기는 자 자신이 당한 어려움들은 어떻게 하는가? 그들 자신은 시련을 받고 또한 수많은 어려움을 당한다. 그러나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12:11).
이것은 이기는 자의 전쟁 중에서의 태도이다. 여기의 「생명」은 두 가지 뜻을 갖고 있다. 하나는 육체의 생명을 가리키고 다른 하나는 혼의 능력을 가리킨다(「생명」을 「혼」으로 번역할 수 있다). 우리는 먼저 혼의 능력-천연적인 능력-에 관해서 보겠다.
무엇을 천연적인 능력이라고 하는가? 천연적인 능력은 우리가 원래부터 가지고 있는 것, 아직 십자가의 처리를 통과하지 않은 능력, 즉 우리 사람의 인격 안에 포함된 것을 말한다. 어떤 사람은 그의 천연적인 능력이 그의 총명이고, 그는 무엇이든지 자기의 총명에 의지하여 한다. 어떤 사람은 말주변이 그의 천연적인 능력이고, 그는 꼭 특별한 성령의 능력을 얻지 않고서도 매우 말을 잘한다.
그러나 사람은 십자가로 천연적인 능력을 처리함이 없이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 교회의 실패는 사람이 그의 천연적인 재능을 교회에 가져오는 데에 있다. 우리는 반드시 두려워하고 떨면서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는 정도로 하나님의 다루심을 받아야 하며(입으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그러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럴 때 비로소 하나님 손에서 유용하게 된다.
우리는 사람을 거룩한 체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며, 그렇게 하는 것은 아무 소용도 없거니와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것도 아니다.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사람의 천연적인 모든 것이 파쇄되고 사람 자신에게서 나오는 그러한 것들이 다 제거되어야만 그리스도가 표현될 수 있으며,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 「자아」를 제거하시도록, 반드시 어느 날 우리의 천연적인 생명의 척추뼈를 부러뜨리시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항목별로 처리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이와 같이 부분적으로 외적인 일을 처리할 뿐 그 안의 천연적인 생명을 여전히 방치해 둔다면, 이것은 소용이 없고 도리어 우리로 교만하게 하며 자신을 매우 훌륭하다고 여기게 하여 우리 안의 천연적인 상황을 더욱 처리하기 어렵게 만든다. 반드시 어느 날 우리의 잘해보겠다는 선한 마음,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는 우리의 능력이 파쇄됨으로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자백하는 데 이르러야 하며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서 그분의 능력을 표현하실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에 의해서 우리가 천연적인 힘으로는 교회 안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단계에까지 이끌려야 한다.
많은 사람이 목적이 옳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당신은 일을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주님은 당신에게 무엇을 사용해서 일을 하는가를 물으실 것이다. 당신이 열심이 있다고 하면, 주님은 『그 열심이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실 것이다. 당신은 능력이 있다고 말하지만, 주님은 『그 능력이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실 것이다. 문제는 당신이 무엇을 하느냐에 있지 않고 당신이 무엇으로 하느냐에 있다. 문제는 선한가 선하지 않은가에 있지 않고 이 선한 것이 어디에서부터 출발했느냐에 있다.
우리는 십자가를 체험적으로 배워야 한다. 십자가는 우리를 처리하여 우리로 자신을 의지하여 움직이지 못하도록 한다. 우리가 단지 십자가의 교리를 말하는 것은 소용이 없고, 단지 십자가의 교리를 듣는 것도 소용이 없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십자가를 통과하고, 십자가의 처리를 받은 사람이다. 당신이 전한 메시지가 옳은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당신은 또한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물어야 한다.
사도 바울도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고전 2:2-4).
전반부는 그의 메시지를 말했고 후반부는 그가 어떠한 사람인가를 말하고 있다. 우리는 바울과 같은 사람은 연단에 올라가면 아주 여유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바울 자신은 어떠했는가? 그가 전한 메시지는 십자가에 관한 것이었고, 그 자신은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다고 말했다.
우리가 십자가를 알 때, 우리는 연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게 된다. 우리가 십자가의 처리를 받았다면, 우리는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고 감히 교만하지 않게 될 것이다. 우리가 교만하고 자기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근본적으로 십자가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십자가는 하나님에게서 나오지 않은 것은 제거하고 오직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만을 남겨두는 것이다. 십자가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은 움직일 수 없지만, 사람에게서 나온 것은 십자가를 만나기만 하면 무용하게 된다.
어떤 형제는 다음과같이 말했다. 『나는 이전에는 이렇게 저렇게 사람을 구원시켰는데, 십자가를 통해 이렇게 처리받고 저렇게 처리받아 십자가에 의해서 완전히 처리되고 나니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같이 되어 버렸다.』 이것은 그가 예전에 한 바가 모두 자신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은 십자가에 의해서 죽을 수 없고, 만일 십자가로 죽일 수 있는 것이라면 반드시 사람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십자가를 통과해도 여전히 일어나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다. 십자가를 통과할 때 일어나지 못하는 것은 곧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다. 주 예수님은 하나님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십자가를 통과했어도 여전히 일어나실 수 있었다. 모든 혼의 생명, 육의 생명에 대해서 우리는 그것을 사랑하지 말아야 하며, 죽음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이 생명을 남겨 두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승리하는 근거는 어린양의 피와 증거하는 말과 우리의 태도이다. 우리의 태도는 다음과 같아야 한다. 『자신의 노력을 의지해서 살 수 없고, 우리는 자신에게 재능이 있다고 여겨 자신을 신뢰하는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행해야 하며 우리는 자신이 연약한 사람임을 알고 있다.』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함」의 또 다른 의미는 육체의 생명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죽더라도, 자신의 생명을 잃어버릴지라도 하나님을 위해 서 있어야 한다. 욥기 2장에서 사탄이 하나님 앞에서 말하기를,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 모든 소유물로 자기 생명을 바꾸올지라』(2:4)고 했다.
사탄은 여기에서 사람이 모든 것보다 생명을 중시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이기는 자는 자기의 생명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고 하신다. 이기는 자의 태도는, 사탄이 내 몸에서 무엇을 하든지 설사 내 생명을 원할지라도 개의치 않으며, 나는 결코 사탄에게 굴복하지 않고 오직 변함없이 하나님께 충성을 다한다는 것이다. 이기는 자의 태도는 주님에게, 『주여, 나는 당신을 위해서 있습니다. 어떤 것도 심지어 내 생명까지도 당신을 위해서 버릴 수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워치만 니
[거룩하고 흠이 없어라, "한 여인이 한 사내아이를 낳다", 한국복음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