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
- 청지기
- 조회 수 1030
하나님의 목적에 관계된 흐름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은 그분 자신과 인성을 연합시키는 것이다. 그분은 오늘날 이 한 가지를 겨냥하여 역사하고 계신다. 이 하나 됨은 단순히 함께 연결되거나 합하여지는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그 이상이다. 그것은 함께 연합되는 것, 함께 혼합되는 것으로서 훨씬 더 깊은 문제이다. 그것은 신성과 인성이 하나가 될 때까지 함께 연합되어지는 것이다. 전 성경은 이 한 가지 기본적이고 중심적인 문제, 곧 하나님이 그분 자신과 우리를 연합시키는 문제와 관련이 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이 이것을 어떻게 성취하실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를 행하시기 위해 그분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셨다는 말씀 안에서 분명히 계시된다.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이 되실 때 자동적으로 그분은 우리와 연합되실 것이다.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으로서 우리 안에 들어오실 수 있는가? 이것은 신성하고 매우 비밀한 어떤 것이다. 신성한 생명 뿐 아니라 사람의 생명 안에도 비밀의 요소가 있다. 만일 생명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정의하기에 어려움을 발견할 것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그분이 어떻게 우리에게 생명이 되실 수 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한 가지 비유적인 표현을 쓴다. 이 비유가 곧 물의 흐름이다. 그분은 마치 흘러나오고 흘러들어가는 물의 흐름처럼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의 생명이 되시며, 하늘로부터 흘러나와 우리 안으로 흘러들어 오고 계신다. 이 흐르는 흐름이 어떻게 우리 안으로 들어을 수 있는지를 이해하기는 쉽다. 우리는 단순하게 그것을 마신다. 하나님 자신이 곧 생명수의 흐름이시다. 하나님은 하늘로부터 흘러나와 이 땅에 도달하시며 당신과 내 안으로 흘러들어오신다.
오늘 당신 안에는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흐름이 있는가? 내 안에는 한 흐름이 있으며 언제나 흐르고 있다. 때때로 내가 잠자고 싶어할 때 이 흐름이 나를 각성시킨다. 나는, 『주여, 나는 좀 쉬고 싶습니다. 지금 피곤합니다.』 라고 말한다. 그러나 안에 흐르고 있는 이 흐름은 동의하지 않는다. 안의 이 흐름은 나에게 이런 느낌을 준다. 『너는 피곤하여도 나는 피곤하지 않다. 나는 여전히 흐르고 있다. 그리고 나의 흐름은 너를 강건케 할 것이다.』 그침없이 흐르고 있는 하나의 흐름이 있다. 오, 형제 자매들이여, 당신에게는 그 흐르는 것이 있는가?
흐름의 근원과 본질
성경의 첫번째 책의 둘째 장을 열 때 당신은 사람이 창조된 후에 「생명나무」라 불리우는 나무 앞에 놓여졌음을 본다. 생명나무 옆에는 강이 있으며 이 강의 흐름으로부터 나온 몇 가지 보배로운 재료들-금과 진주와 호마노-이 있다.
이 재료들의 의미가 무엇인가? 그것들은 대단히 의미가 깊다. 이것이 성경 전체의 두번째 장임을 기억하라.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다면 당신은 마지막 두 장에서도 동일한 것을 발견할 것이다. 거기서 당신은 창세기 2장에 열거된 것과 같은 종류의 재료들인 금과 진주와 보석들로 이루어져 있는 한 성을 본다. 거기에도 흐르는 강이 있고 그 기슭에 생명나무가 자란다. 여기서 당신은 강과 생명나무를 다시 한 번 갖는다.
성경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은 얼마나 여러 번 흐르고 있는 생명의 흐름으로서 말씀되어져 있는지!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수로 우리에게 마시우리이다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시 36:8-9).
주 예수님은 그분이 주는 물은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생수의 샘이 되리라고 말씀하신다(요 4:14). 그분은 다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그분께로 와서 마시게 하라, 그분을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말씀하신다(요 7:37-38).
이 모든 말씀들이 한가지 것-흘러나오신 하나님이 여전히 이 땅 위에서 생명으로 인성 안으로 흐르고 계심-과 관련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형태로 흘러 나오셨느냐고 물을지 모른다. 그분은 그분의 아들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흘러나오셨으며, 그 다음에는 그분의 영 안에서 흘러나오셨다. 하나님은 원천 바로 그 근원이시고, 아들 그리스도는 샘, 이 신성한 물의 저수지이며, 성령은 산 흐름이시다. 아버지 하나님은 원천이시고, 그리스도는 저장소가 되셨으며, 성령은 항상 흐르고 있는 흐름이 되셨다.
오순절날에 주님은 성령 안에서 그분 자신을 부어 주셨다. 사도행전 2장 23절에 있는 「부어 주셨다」라는 단어를 주목하라. 그분이 성령을 부어 주셨을 때 성령은 흐르고 있는 신성한 물의 흐름이 되셨다.
그때 이래로 거의 이천 년 동안 성령은 이 세상에 흐르셨다. 이 흐름은 결코 멈춘 적이 없었으며, 또 영원까지 흐를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은 바로 그 근원이시다. 아들 그리스도는 저수지 안에 저장된 신성한 물이 해방되기 위해 치심을 받은 반석이시다. 그분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생수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의 영 바로 그것이다. 성령은 흐르고 있는 신성한 생명의 영이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 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이것을 부어주셨느니라』(행 2:32-33). 그분이 부어주신 성령은 신성한 생명을 갖고 흐르고 있다. 그 때로부터 흐르고 있는 신성한 생명의 흐름이 있는데, 이 흐름이 곧 성령 자신이시다.
우리는 이 흐름의 근원을 상고해 보아야 한다. 우주의 가장 높은 곳에 보좌가 있다. 오직 하나의 보좌가 있으며 이 보좌 위에는 어린양(the lamb)이 앉아 계신다. 어린양은 누구인가? 어린양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시고 다시 사시고 높여지신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가 어린양이다. 그러면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이 그리스도는 가장 놀라우신 분이다. 이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이 연합되신 분이다. 그분은 하나님이 성육신되시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되시고, 음부에 내려 가시고, 음부와 사망으로부터 다시 일으키심 받으시고, 하늘들 위의 하늘, 하나님의 우편으로 높여지신 분이다.
그분은 인성 안에 계신 바로 그 하나님이셨다. 그분은 우리를 우리의 죄들로부터 구속하시기 위해 죽으시고 우주 안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높여지신 분이다. 그분이 어린양이신 것과 또한 그분이 보좌 위에 계시는 것을 주목하기 바란다. 어린 양(a lamb)은 매우 겸손한 동물이지만 보좌는 권위가 충만하다. 죽임당하신 어린양,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은 지금 보좌에 높여지사 우주의 충만한 권위를 가지고 계신다.
형제들이여, 이것을 깨닫는가? 오, 그것은 얼마나 의미가 깊은지! 어린양 안에 하나님 자신이 계신다. 하나님은 빛이시고 어린양은 등이라는 말씀이 있다. 마치 빛이 등 안에 있는 것과 같이 하나님도 보좌 위의 어린양 안에 계신다. 오, 나는 이 그림이 여러분 안에 참으로 깊은 이상을 새기기를 바란다. 이것은 온 우주의 가장 높은 지점이다.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자기 안에 계신 하나님과 함께 보좌 위에 앉아계시고, 바로 이 보좌로부터 신성한 생명의 강이 흘러나온다.
이 물의 흐름 안에 무엇이 포함되어 있는지를 주의하여 보라. 그와 같은 곳으로부터 흘러나오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얻으시고 도달하신 모든 것, 그분이 가지신 모든 것과 그분의 모든 어떠하심이 그 안에 포함되어 있음에 틀림없다.
여기에 실례로서, 만유를 포함한 물 한 잔, 그 안에 모든 것이 포함돼 있는 한 잔의 물이 있다면 정말 좋을 것이다. 이 컵의 내용물이 흘러나을 수 있도록 구멍을 낸다면 과연 그 흐름 안에 무엇이 포함돼 있을까, 말해보라. 당신은 모든 것이 포함돼 있을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분명히 모든 것이 포함돼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앉아계시는 보좌로부터 당신이 그 내용물을 결코 다 쓰지 못할 양의 물의 흐름이 흘러나온다. 만유를 포함한 삼일 하나님이 여기에 있고, 인성이 여기에 있으며, 십자가에 못 박힘과 장사됨의 요소가 여기에 있고, 부활과 승천과 권위와 주 되심과 머리 되심, 그리고 모든 것이 여기 이 흐름 안에 포함되어 있다. 얼마나 풍성한가 ! 얼마나 놀라운 만유를 포함하심인지! 이것이 오늘날 우리 안에 흐르고 있는 흐름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 흐름 안에서 생명나무가 자란다고 말한다. 생명나무란 무엇인가? 그것은 간단히 생명이신 그리스도이다. 많은 경우 성경이 나무를 그리스도의 비유로 언급한다는 것을 생각하라. 이 나무가 생수 안에서 자란다는 사실은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성령의 흐름 안에 계시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성령이 흐르는 곳에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발견된다. 마치 생수의 흐름이 성 전체에 생명의 공급인 생명나무를 가져오는 것처럼, 성령도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가져다 준다.
그림을 한 번 더 보라. 여기에 생수의 흐름이 있고, 흐름 안에는 언제나 생명나무가 자라고 있다. 이렇게 볼 때 흐름은 성 전체에 생명의 공급을 가져온다. 성령은 양식이자 생명공급이신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이끌어오신다.
이것이 그토록 중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나는 당신 안에 이렇게 흐르고 있는 흐름이 있느냐고 물음으로써 그것을 강조하기를 원한다. 바로 이 순간 당신 안에 그것이 흐르고 있는가? 불신자들에게는 그것이 없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어떤 믿는이들은 그들 안으로 흐르는 이 흐름이 있지만 계속하여 그 흐름 안에 있지 못한다. 그들 안에 삼일 하나님의 생명이 있지만 그들은 계속하여 이 생명의 흐름 안에 있지 못하는 것이다.
많은 때 당신은 당신이 이렇게 흐르는 흐름의 밖에 있음을 의식한다. 그런데 때로는 당신이 그 흐름 안에 있는 것을 안다. 그럴 때 당신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실로 매우 간단하다. 당신은 다만 계속 그 흐름 안에 있으면 된다. 당신 안에 흐르는 흐름이 끊긴다고 느껴질 때마다 당신은 즉시 주님께로 돌이켜 그 이유를 찾아야 한다. 왜 당신 안에 흐름이 멈췄는가? 당신은 그것을 발견해 내어 흐름이 회복될 때까지 주님과 그것에 관해 처리해야 한다.
당신이 어디엔가 가고자 하고 무언가를 하고자 할 때 그것을 속행함으로써 그 흐르는 흐름이 멈추리라는 느낌이 든다면 당신은 곧 멈추어야 한다. 흐름을 유지하기 위해 멈추라. 흐름을 유지하기 위해 당신은 주님께 속하지 않은, 다시 말해서, 당신 안에 흐르고 있는 흐름에 속하지 않은 그런 모든 활동들을 삼가야 한다.
한 흐름
오순절날에 시작되어 모든 세대를 거쳐 바로 오늘에 이르도록 흘러온 신성한 생명의 흐름은 정확히 한 흐름이다. 어디로 가며 어디로 흐르든지 그것은 많은 흐름이 아니고 오직 한 흐름이다. 그것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출발하여 안디옥으로 흐르고, 안디옥으로부터 아시아로 방향을 바꾸어 흐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주님은 그 흐름이 유럽 쪽으로, 마케도니아로 향하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사도는 그 흐르고 있는 흐름 안에서 그것에 대해 분명치 않은 가운데 일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그는 그 흐름이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에 분명해졌고, 그는 그것을 따라야 했다. 그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흐름은 마케도니아로부터 좁은 길을 따라 고린도로, 로마로, 스페인으로, 유럽의 모든 곳으로 갔다. 역사는 우리에게 그 흐름이 유럽으로부터 서쪽, 아메리카로 또 서쪽으로부터 동쪽과 남쪽으로 흘렀음을 말해준다. 교회사를 읽을 때 우리는 이 흐르는 흐름이 결코 멈춘 적이 없는 것을 발견하며, 이 흐름이 흘러가는 곳마다 그것이 정확히 하나였음을 알게 된다. 그것은 예루살렘에서 하나였으며, 안디옥, 아시아, 유럽 등 그것이 흘러간 모든 곳에서 하나였다. 결코 두 흐름이 없었다는 것에 대해 분명해지기 바란다. 오직 한 흐름이 있다. 그러므로 당신은 계속 이 흐름 안에 있어야 한다.
사도행전과 사도 바울에 의해 쓰여진 서신들을 읽는다면 당신은 그 당시 복음을 전파하며 주님을 위해 일하고 있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흐름 안에 있지 않았다는 것을 볼 것이다. 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그들은 흐름 안에 있지 않았다. 예를 들면 빌립보서 첫번째 장에서 사도는 어떤 이들이 투기와 분쟁으로 복음을 전파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복음을 전파했지만 성령의 한 흐름 안에 있지 않았다.
사도행전에서 또 하나의 예를 발견할 수 있다. 바나바를 생각해 보라. 초기에 바나바는 사도 바울과 함께 일하고 있었다. 두 사람 다 그 한 흐름 안에 있었다. 그러나 시일이 지난 뒤에 바나바는 어떤 이유로 사도 바울과 함께 가는 것에 동의하려 하지 않았다. 그 둘은 나뉘어졌다. 당신은 사도행전에서 그 분열 후에 바나바에 대한 기록을 조금이라도 발견하는가? 아니다! 그는 흐름의 밖에 있었다. 그는 여전히 주님을 위하여 일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흐름의 밖에 있었다.
형제여, 당신은 이 문제에 대해서 분명한가? 당신이 교회사를 주의깊게 공부한다면 세대를 거치는 동안 항상 성령의 한 흐름이 있었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위해 일해왔지만 그들 모두가 그 한 흐름 안에 있던 것은 아니다. 당신이 주님의 긍흘과 은혜를 받는다면 당신은 오늘날 흐르고 있는 바로 그 흐름 안으로 인도되어질 것이다.
이제 이 문제에 관한 나의 개인적인 간증을 하나 하고 싶다. 내가 이 빛을 받은 것은 정확히 삼십 년 전이었다. 1933년에 나는 북중국으로부터 상해까지 처음으로 워치만 니 형제님을 만나기 위해 가게 되었다. 나는 거기서 여러 달 동안 그와 함께 머물렀다. 내가 북중국의 나의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떠나려 할 때 니 형제님은 내게 와서 이렇게 말했다. 『이 형제님, 나는 당신의 가족이 상해로 이사와서 주님의 일을 위해 우리와 함께 머무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느껴집니다. 이 문제를 주님께로 가져가 보시지 않겠습니까?』
이 문제를 주님께로 가져갔을 때 나는 빛을 받았다. 주님은 나에게 사도행전에 있는 주님의 일의 흐름, 성령의 흐름이 하나임을 보여주셨다. 그분은 나에게 사도행전 안의 지도에는 예루살렘에서 출발하여 안디옥으로 달리고, 거기서 아시아로 또 거기서 유럽으로 달리는 오직 하나의 노선이 있음을 보여주셨다. 결코 둘이 아니고 오직 하나의 흐름만이 언제나 있었음을 내가 본 것이다.
나는 주님께 이렇게 말했다. 『주여, 당신께 감사합니다. 중국에 당신의 일의 두 흐름이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설사 북중국에 당신을 위해서나 당신에 의해서나 혹은 당신을 통하여 행하여지는 어떤 일이 있다 하더라도 나의 일은 맨 먼저 상해에 가서 거기서 한 흐름에 연합됨으로, 거기로부터 어떤 일이 흘러나가 북중국에 미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한 흐름이 있을 것입니다』.
바로 다음날 니 형제님이 나를 만나러 왔을 때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형제님, 나는 이 문제에 대해 매우 분명합니다. 나는 당신이 제안하시는 것을 해야 합니다. 오늘부터 당신과 함께 상해에서 일하겠습니다.』
오, 형제들이여, 그 때로부터 참으로 어떠한 흐름이 있었는지! 나는 그것이 얼마나 풍성하고 얼마나 놀라운지, 그리고 그것이 모두 내가 바로 그 당시에 흐르고 있는 흐름 안으로 옮겨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당신에게 결코 말로 다 할 수 없다. 오, 성경의 빛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생명과 능력과 힘과 권위가 내 안으로 흘러들어 왔다. 내가 어디에든 갔다면 자신의 생각으로 가지 않고 흐름 안에서 간 것이었다.
흐름은 나를 휩쓸어갔다. 나는 마치 해류(흐름)를 따라 떠내려가는 보우트와 같았다. 어디든지 흐름이 가는 곳이면 나도 흐름에 실려 보내어졌다. 그것은 아주 쉬웠다. 그것은 나의 힘도 나의 기운도 나의 인내도 아닌 오직 하나, 흐르고 있는 흐름이었다. 형제들이여, 그 때부터 주님은 나에게 점차적으로 생명의 흐름과 일의 흐름과 간증의 흐름과 몸의 교통의 흐름을 보여 오셨다.
흐름의 순환
이 성령의 흐름은 그리스도의 몸의 교통이다. 그것은 우리의 신체적인 몸 안의 피의 순환과 비슷하다. 피는 항상 한 부분에서 다른 부분으로 흐르고 이내 다시 되돌아온다. 성령의 흐름은 정확히 이 땅 위에 사는 성도들 가운데 흐르고 있는 몸의 교통과 같은 그러한 방식으로 흐른다.
요즈음은 신성한 흐름의 흐름이 서방 세계를 향하고 있는 것이 나에게 매우 분명하다. 이 서방 세계로의 흐름은 그리스도의 몸의 교통에 속한 어떤 것이다. 그것은 높여지신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출발하여 모든 세대를 통하여 흘러서 현재의 시점에 이르른 것이다. 그것은 많은 지방과 나라를 거쳐 흘러왔으며, 이제 서방 세계로 돌이켰다. 이것이 몸의 교통의 흐름, 높여지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간증의 흐름, 성령의 역사의 흐름이다.
삼십 년 전 내가 젊었을 때 니 형제님이 어느 날 내게 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그의 손 아래서 배우는 한 젊은이었고, 많은 때 그는 나에게 몇 가지 기본적인 공과들을 가르쳐 주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형제님, 성령의 흐름이 이미 거기에 있지 않는 한 그 어떤 곳에도 우리가 일을 시작하러 갈 수 없다는 것을 아십니까?』
오 나는 이 말을 얼마나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지! 어떤 곳에 성령의 흐름이 이미 있지 않는 한 당신과 내가 결코 거기에 일하러 갈 수 없다. 니 형제님은 계속하여 말했다. 『오, 형제님, 성령의 흐름이 있는 곳을 깨닫는다면 단순하게 그 흐름과 함께 가십시오. 거기서 주님을 위해 일한다는 것은 그저 당신에게 쉼이 되고, 그 일함 위에 당신이 누울 수 있는, 침대가 될 것입니다. 성령의 흐름 안의 일은 짐지는 것이 아니고 내려놓고 쉬는 것입니다.』
나는 이 말이 나에게 얼마나 많은 도움을 주었는지를 당신에게 말로 할 수 없다. 그 때부터 나는 내가 성령의 흐름과 함께 가야 한다는 공과를 배웠다. 나는 성령의 흐름이 흐르지 않는 어떤 곳에 가서도 주님을 위해 일하거나 주님을 위한 일을 시작할 수 없다. 나는 그것을 할 능력이 없고, 그것을 할 자격이 없으며, 주님으로부터 그것을 하라는 명령을 받지도 않는다. 내가 해야 할 것은 다만 흐름과 함께 가는 것이다.
좀더 깊은 개인적인 간증을 하나 하겠다. 나는 원래 미국에 올 의도가 없었지만, 성령의 흐름이 나를 이곳으로 옮겨왔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우기 나의 의도는 곧 극동으로 되돌아가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흐름이 여전히 서쪽으로 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돌아갈 수가 없었다. 내 방향은 동양인 반면에 그 영의 흐름은 서양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이 흐름에 의해 옮기워지는 것이었다.
이 흐름 안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지! 오, 여기에 생명이 있고, 여기에 교통이 있고, 여기에 간증이 있고, 여기에 하나님의 역사가 있음이여! 오늘날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다만 흐름과 함께 가는 것이며 성령의 역사의 흐름에 자신을 굴복시키는 것이다. 이 문제에 있어서 나에게 개인적인 자유가 없다. 그것은 나의 생각에 따르는 것이 아니고 그분의 흐름에 따르는 것이었다. 어떤 찬송가의 말씀은 이렇게 말한다.
"내 맘대로 안 가고 주의 인도 좇으면
생수 넘쳐 흐르고 맘에 빛이 비취네"
건축에 관계된 흐름
흐름이 흐르는 데서 금과 진주와 보석이 나온다. 창세기 2장의 그림을 보라. 이 보배로운 재료들은 하나님의 거처를 건축하기 위한 것이다. 흐름이 있는 곳마다 교회의 건축을 위해 산출된 재료가 있을 것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거처인 성막을 보라. 대제사장의 견대와 흉패 위에 보석이 물려 있는 금이 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교회가 금과 은과 보석으로 건축된다고 말한다. 이것은 성령의 흐름이 흐르는 데서 나오는 재료들이다.
계시록에서 우리는 새 예루살렘 성 전체가 금과 진주와 보석으로 건축되어 있다는 말씀을 본다. 이 모든 재료들은 어떻게 해서 생겨나는가? 단순히 신성한 생명의 흐름이 흐름으로부터 생겨난다. 신성한 생명의 흐름이 있는 곳에 교회의 건축을 위한 어떤 재료, 보배로운 어떤 재료가 생겨날 것이다.
당신과 나는 교회의 건축을 위한 재료를 결코 생산하지 못한다. 오직 신성한 생명의 흐름, 성령의 흐름만이 이것을 할 수 있다. 그것은 수 세대에 거쳐 흘러왔고 오늘날도 여전히 흐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가는 옷마다 금과 진주와 보석들이 하나님의 건축을 위해 산출된다.
주님께서 우리로 이 그림에 깊은 인상을 받게 하시기를 바란다. 그분께서 언제나 우리로 계속하여 생명의 흐름 안에, 교통 안에, 간증 안에, 사역 안에, 하나님의 집의 건축 안에 있게 하시기를 바란다. 또한 우리가 이 목적을 위해 기도하기 바란다.
위트니스 리
[신약의 인도직분과 사도들의 가르침, "신성한 흐름", 한국복음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