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성한 말씀을 누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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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 전서 12장 12절-14절에서 우리는 두 가지 주된 것, 그 영과 몸을 본다. 몸은 실제적으로 그 영에서 나오는 것이다. 고린도 전서 12장 13절에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영 안에서 한 몸 안으로 침례를 받았고 또 다 한 영을 마시게 하셨느니라』(헬라어 원문 참조)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많은 지체이지만 다 한 영 안에서 한 몸 안으로 침례를 받았다. 이제 우리는 다 이 영을 마시고 있는 것이다. 그 몸은 그 한 영에서 나왔다. 그리고 그 몸은 이 한 영을 마시고 있다.

 

완전한 하나를 주의함

 

나에게는 주의 회복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영과 몸을 보기를 바라는 큰 부담이 있다. 오늘날 기독교는 목적을 이룰 수 없다. 왜냐하면 몸을 전혀 주의하지 않고 합당한 방법으로 그 영에 대하여 주의를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영에 대하여 말하여 왔고, 제 2차 세계 대전 이후 몸에 대하여도 많은 논의가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믿는 이들이 몸을 관심하지 않았다. 몸을 관심한다면 우리는 합당한 하나, 참 하나를 이루는 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몸은 하나다. 한 머리와 한 몸, 한 그리스도와 한 교회가 있다. 몸이란 어느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 모인 신자들의 그룹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사회적 모임이지 몸은 아니다. 몸을 말할 때 우리에게는 언제나 그 몸은 오직 하나라는 깊은 인식이 있어야 한다. 몸은 한 지방에 하나일 뿐만 아니라 온 우주 가운데 하나다. 만일 우리가 분열 안에 있고 한 몸에 주의를 하지 않는다면 몸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종교 대 그 영

 

이 메시지에서 나는 먼저 그 영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우리 중의 많은 사람이 종교를 적극적이지 않은 것으로 보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몇몇 사람이 아직도 종교적인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못 이해하고 있어서 염려된다. 다른 사람에 대하여 너무 종교적이라고 말하고 있는 사람 중에서도 종교가 무엇인지에 대해 분명하지 않은 사람이 많이 있다. 종교란 하나님에 대한 봉사와 예배를 하고 있지만 그 영이신 하나님과는 아무 관계 없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과 관련 있는 어떤 일은 매우 좋은 것 같지만 그 영과 아무 관계 없는 이상 그것은 모두 종교다.

 

기도를 예로 들어 보자. 영 안에서 기도하지 않고 아무리 많은 기도를 한다 할지라도 그 기도는 그 영과 아무 관계가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종교적인 것이다. 성경 연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당신의 성경 읽기와 성경 연구가 그 영과 관계 없다면 그것은 종교다. 종교적이라는 것은 특수한 방법으로 일을 한다든지, 새로운 것에 반하여 옛 것에 머물러 있다든지 하는 문제가 아니다. 종교적이라는 것은 그 영을 떠나서 하나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위하여 최선을 다한 일이라도 그 영과 관계 없다면 그것은 종교가 되는 것이다. 주의 회복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종교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 영의 인도와 역사와 말씀하심

 

사도행전에서 그 영과 관계 있는 몇 군데의 성경 구절을 생각해 보자. 사도행전의 처음을 보면 백 이십 명의 성도들이 아무 것도 착수하지 않고 무슨 일을 하려고 하지 않고 다만 십 일 동안 전혀 기도에만 힘쓴 것을 볼 수 있다(행1:14). 그들의 기도는 절대적으로 그 영 안에 있었다. 그때 놀랍게도 그 영이 그들 위에 임하여 그들은 모두 그 영 안에 있는 백성이 되었다. 그때 이후 그들에게는 무엇을 하든지 무엇을 말하든지 어디에 가든지 그것은 철저히 영 안의 것이었다.

 

오순절날 베드로가 열 한 사도와 같이 서서 말한 것도 그 영으로였다. 그때 베드로는 그 영에 충만해 있었다. 사도행전 4장에서 베드로가 종교적인 지도자들에게 말씀했을 때에도 그는 성령에 충만해 있었다(행4:8).

 

스데반도 성령에 충만한 사람이었다(행6:5). 그가 말한 지혜와 영에 대해서는 아무도 반대할 수 없었다(행 6:10 원문 참조). 스데반은 그 영 안에 살며, 말하며, 사역한 사람이었다.

 

빌립도 그 영 안에서 복음을 전했다. 빌림이 전도를 하려고 마음에 결정할 것이 아니다. 그는 다만 그 영 안에 살고 걷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 영이 병거에 타고 있는 에디오피아 사람에게 가라고 말씀했을 때 빌립은 달려갔다(행8:29-30).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고 침례를 준 후에도 빌림이 떠나려고 한 것이 아니고 그 영이 그를 이끌어 간 것이다(행8:39). 전도자 빌림이 어디로 가는 것은 그의 결정으로 인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 영의 인도하심에 인한 것이었다. 그 영이 빌립을 인도하여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게 한 것이다. 복음을 다 전하고 빌립을 이끌어 간 것은 그 영이었다.

 

우리 모두, 특히 젊은이들은, 그 영 안에는 어떤 운동 같은 것이 없음을 강하게 느껴야 한다. 그 영이 인도해야 하고 그 영이 일하고, 그 영이 말씀하고, 심지어 우리의 생활도 그 영으로 살아야 한다. 교회 안의 사람들은 절대적으로 그 영에 적셔지고 그 영과 하나되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우리가 말하는 것이 그 영의 말함이며, 우리가 하는 일이 그 영의 행함이며, 우리의 모든 일이 그 영의 역사일 것이다. 사도행전에서는 어떤 종류의 운동도 볼 수 없다. 그대신 그 영의 인도와 역사와 말씀하심을 본다.

 

엄밀하게 말하면 사도행전 전체에서 회의가 이루어진 것은 15장에 한 번뿐이다. 이것은 오늘날의 기독교 회의와는 다르다. 기독교에서는 무엇을 할 것인가, 어디에 사람을 파견할 것인가를 위해 회의가 빈번하게 열리고 있다. 기독교에서는 사람의 파견을 회의로 결정한다. 이것은 하나의 운동이다. 그러나 사도행전에는 그러한 회의가 없다.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은 토론이나 결정을 하기 위해 모이지 않았다. 그들은 『어디에 필요가 있는가? 우리들은 어디에 갈 것인가? 몇 사람을 보낼까?』라고 묻지 않았다. 인위적 결정에 의해서는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모든 일에 사신 그 영을 따를 뿐이었다.

 

베드로의 행동과 사역은 베드로 자신으로 인해서가 아니고 성령에 의해서였다. 스데반과 빌립이 행한 일도 회의에서 결정한 결과가 아니다. 다만 그들은 그 영 안에 있었다. 그 영이 모든 일을 인도했다. 사도 바울에게서도 마찬가지였다. 사도행전 13장에서 안디옥의 선지자들과 교사들은 회의를 열고 모든 문제를 토론한 것이 아니다. 다만 그들은 기도하고 금식했다. 그들이 기도하고 있을 때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라고 하셨다(행13:2). 거듭 말하거니와 토의도 결정도 없었다. 다만 성령이 말씀하신 것이다.


운동이 아닌 성령의 산 운행

 

이러한 예(例)로 우리는 사도행전에는 운동이 없음을 보았다. 오직 예수의 산 인격의 살아 있는 운행만이 있다. 이 산 인격이 성령이다.

 

바나바와 바울이 거짓 선지자나 마술사와 대결하고 있을 때, 바울은 성령이 충만하여 그에게 말했다고 말씀하고 있다(행13:9-10) 사도행전 13장 2절에서 바나바의 이름이 바울 앞에 있다. 그러나 말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은 바울이다. 바나바와 바울이 회의를 열어서 바나바가, 『바울이여, 당신은 가말리엘 문하에서 배웠읍니다. 당신은 나보다 학문이 많습니다. 우리는 이제 사역에 종사하고 있으니 지금부터 당신이 주로 말하고 내가 돕는 자가 되도록 결정합시다.』라고 한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결정의 기록이 아니고 어떤 경우에 바울이 자발적으로 성령이 충만하여 먼저 말하기 시작했다고 했을 뿐이다.

 

사람의 토론이나 결정은 하나도 없었다. 오직 살아 계신 인격, 성령의 운행이 있었다. 만약 우리가 바나바와 바울이었다면 누가 말할 것인가를 토론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영이 충만한 사람이 먼저 말씀한 것이다. 당신에게 그 영이 있다면 당신이 말하면 된다. 그러나 그 영이 없다면 잠자코 있어야 한다.


성령과 우리들

 

사도행전에서 한 번의 회의가 15장에서 행해졌다. 사도들과 장로들이 어떤 문제를 위해 모였다. 사도행전 15장 28절에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하며 결정한 것을 볼 수 있다.

 

회의를 할 때는 어떠한 결정이든지 그 일이 그 영의 결정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성령과 우리는 그것이 좋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몇 년 동안 이 구절의 말씀에 어떠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성경을 읽었다. 15장에서의 결정은 온 교회와 함께 사도들과 장로들뿐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사도와 장로들은 그 영이 결정한 것을 따랐기 때문에 그것은 성령과 사도와 장로들에 의한 결정이었다.


주를 경외함

 

사도행전 15장의 사도들과 장로들의 경험에서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에 따라서 결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더우기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제의하거나 가르쳐서는 안 된다. 우리 중에 그러한 자격을 부여받은 사람은 없다.

 

사도행전 시대에도 베드로와 바울도, 다른 사도들도 혼자서 결정하거나 지시하도록 자격을 부여받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주를 경외해야 한다. 우리는 주(主)도, 지배자도 아니다. 또 결정의 주(主)도 아니다. 오직 주 예수만이 결정의 주(主)다. 그분만이 지배자이다. 우리는 혼자서 결정하지 말고 그분을 경외해야 한다.

 

가령 내가 당신의 종이며 당신이 나의 주인이라고 하자. 내가 당신을 제쳐놓고 어떤 일을 결정하고 다른 사람에게 지시하고 또 그들을 대신해서 무엇을 결정했다고 해 보자. 이것은 당신에 대한 모욕이 아니겠는가? 당신은 주인이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과거에 이 일에 관하여 모두 죄를 범했다. 왜냐하면 우리들 가운데서 많은 결정을 해왔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는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결정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주님은 어디에 계셨을까? 이와 같은 결정을 할 때 주님은 우리 가운데 계시지 않았다. 그 영은 없이 자신만 의지한 것 같다.

 

우리는 결정하고 지시하는 대신 기도하면서 주님을 기다려야 한다. 우리는 주님을 경외해야 한다. 그는 우리의 주인이고 우리는 그의 종이다. 우리는, 『주여, 당신은 나의 주인입니다. 나는 결정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명령할 자격을 부여받지 않았고 그러한 지위도, 권위도 없는 사람입니다. 주여, 나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의 뜻과 당신의 마음을 알고 싶습니다. 주여, 나에게 원하는 것과 나와 동역하는 사역자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 주시기 원합니다. 나는 당신에게 교회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지 묻습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우리는 모두 이런 태도를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주를 모욕하는 자가 되고 결국 그는 우리를 버리게 된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기독교의 상태 그대로다. 기독교가 주의 임재를 잃은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기독교 안의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을 결정의 주(主)로, 역사(役事)의 주인으로 여겨왔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을 고용하고 어떤 사람들을 해고하고 명령을 내리고 결정을 했다. 그들은 선교사단을 결성하고 회의를 열고 사역하는 사람을 어디에 파견할 것인가에 대하여 결정을 했다. 우리는 기독교 역사의 비극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기도와 주의 인도하심에 주의해야 할 필요

 

주님은 우리들에게 대학 구내에 가도록 부담을 주셨지만 이것을 하나의 운동으로 바꾸어서는 안 된다. 당신 스스로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하는 결정은 모두 그 영에 대한 모욕이다. 만약 이와같은 일을 했다면 회개해야 한다. 또 필요하다면 다른 사람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들이 할 일에 대해서 지시를 했기 때문이다.

 

우리들 중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어디에 가야 한다고 명령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주님께 대해 얼마나 큰 모욕인가! 당신은 누군가? 누가 당신에게 다른 사람에게 제안하도록 권위를 부여했는가? 당신은 다른 사람을 주께 접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젊은 형제 자매들이여, 당신은 기도해야 한다.

 

그렇다. 우리는 대학에 대하여 주께서 부담을 주셔서 인도함을 받았다. 그러나 젊은 사람들은 이 문제를 주님께 가져가 기도하며 주님께 다시 한번 자신을 바쳐서 말해야 한다 『주여, 나는 당신과 함께 가고자 합니다. 주여, 내가 어디에 가기를 원하십니까?』

 

모든 사람은 주님의 인도가 분명할 때까지 기도해야 한다. 당신이 어디에 가야 할지를 다른 사람이 지시해야 한다고 기대하지 말라. 그것은 조직이요 종교다. 인도자로부터 가장 작은 자에 이르기까지 우리 모두는 주를 접하기 위해 주님의 임재에 나가야 한다.

 

그렇다. 주님은 대학에서 역사하신다. 그러나 그의 주권에 의하여 당신이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는 다른 수백 사람에게는 가도록 인도할지 모르나 당신에게는 그대로 머물러 있도록 명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일어나는 일이 운동이 아니라 절대로 주께서 인도하는 것임을 증명한다.

 

우리는 모두 주의 임재 앞에 나아가 얼마 동안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몇 년 동안 이 교훈을 배우며 실행하여 왔다. 우리는 어떤 종류의 운동 안에도 있지 않다. 모든 것을 주의 임재 앞에 가져와야만 한다. 내가 당신을 대신해서 주님 앞에 갈 수 없다. 당신 자신이 주님 앞에 가지 않으면 안 된다. 누구도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주님 앞에 갈 수 없다는 교훈을 배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성직자-평신도라는 계급 제도로 되어버린다. 내가 주님 앞에 갈 수 있다면 당신도 주님 앞에 갈 수 있다. 최근에 구원받은 가장 새로운 사람이라 할지라도 역시 스스로 주님 안에 나아가야 한다.

 

결국 우리는 『나는 거기에 간다. 주님께 물어본 결과 주님이 거기에 가도록 나를 인도하셨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결코 어느 형제가 당신에게 그렇게 하도록 권했다는 이유로 가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또 누구에게든지 어느 곳에 가야 한다고 명해서도 안 된다. 그보다도 당신에게 주님이 인도하고 계시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의 운동 안에 있는 것이 되며 우리가 하는 일에는 아무런 영적 가치도 없게 될 것이다.

 

하루가 지나면 확실해질 것이라고 기대하지 말라. 열흘이 되어도 확실치 않을지도 모른다. 많은 경우 나는 백 날이 되어도 주의 인도하심이 확실치 않았었다. 나는 『주여, 긍흘히 여겨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기도했다. 마침내 분명한 것이 임했는데 주님의 인도하심을 알게 되었다. 주님의 그와 같은 인도에 의하여 행동했을 때에는 언제나 후회가 없었다.

 

하나님의 새 언약의 경륜은 그 영의 문제이다. 사도행전 16장 6절은 바울과 그와 함께한 사람들이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이 「비두니아」에 가고자 할 때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셨다(행16:7).

 

그러나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은 회의를 열어 그때의 상황에 대하여 토의하지 않았다. 오히려 바울은 주의 손길을 기다렸다. 그럴 때 밤이 되어 바울은 환상을 보게 되었다. 사도행전 16장 9절에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했다. 바울과 동역자들은 주님이 마게도냐에서 복음을 전하라고 부르신 줄로 결정했다(행16:10).

 

환상을 본 후에도 바울은 과연 주께서 그들을 마게도냐로 인도하고 계신지 아닌지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이로 인해 사도들은 자신의 결정에 의하지 않고 다만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 기독교의 비극은 너무도 많은 사람이 주의 임재를 갖지 않고 주의 인도하심에 주의하지 않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모든 실행상의 문제에 대해서도 그들 자신이 주님이 될 정도까지 자신을 높이고 있다.


주님 앞에 직접 감

 

기독교의 비극의 역사를 우리들은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우리들은 그의 인도하심을 따르지 않음으로 주님을 모욕하고 그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인간적인 어떠한 결정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주의 회복 안의 모든 사람은 주님 앞에 직접 가서 기도해야 한다. 만약 누가 나에게 그가 어디에 가야 할 것인가를 묻는다면 나는 그에게 다만 한 마디 『기도하라.』라고 말할 뿐이다.

 

당신은 확실해질 때까지 기도하라. 그 후에 가라. 다른 누구에게도 당신이 어디에 갈 것인가를 물어서는 안 된다. 우리 중의 누구도 주님이 아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만이 주(主)시다. 당신은 주님에게, 『주여, 나는 어디에 가야 되겠습니까?』라고 묻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주님의 인도하심을 얻지 못했다면 다른 사람에게 가서 당신이 무엇을 할 것인가 말해 주기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


주께서 보내심의 확신이 있음

 

그저 단지 어떤 슬로건과 같이 『나는 흐름을 좇고 있다』라고 말하지 말라. 참 흐름은 주님 자신이다. 운동을 불러 일으키는 일은 얼마나 큰 잘못인가! 그것은 주님에 대한 모욕이다. 이것은 주님을 침해하는 것이다. 주의 회복 안에 있는 우리들에게는 결코 운동이 있어서는 안 된다. 운동을 은폐하려는 구실로서 「흐름」이라는 말을 사용해서도 안 된다.

 

여러분 중의 몇 사람은 흐름에 대해서 말할 때 사실은 운동을 뜻하고 있다. 운동을 일으키는 일이나 그것을 좇도록 다른 사람을 권하는 일은 무서운 잘못이다. 거듭 말하노니 주의 회복 안에서 이루어지는 어떠한 이사(이주)에 대해서도 직접 주님 앞에 가서 기도해야 한다. 몇 개월 동안 기도한 후 토론이나 회의에 의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피닉스」에 갈 부담을 갖고 다른 사람은 또 다른 곳에 갈 부담을 가지는 것을 보기 원한다. 만약에 천사들이 당신은 왜 거기에 왔느냐고 묻는다면 그때 당신은 『천사들이여, 당신은 주님이 나를 여기에 보낸 것을 알지 못하는가?』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당신에게는 권위가 있다.

 

그러나 어떤 형제가 당신을 파견한 것이라고 말한다면 아무 의미도 없다. 누군가가 당신에게 어디에 가야 한다고 말했을지라도 그것은 무의미하다. 당신에게는 주님이 보냈다는 확신이 있어야한다. 『나는 흐름을 따라서 여기에 왔다』고 말해서도 안 된다. 아마 일 년이 지난 후에는 당신은 소위 흐름에 따랐다고 한 일을 후회할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으로부터 아무런 확신을 얻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신은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은 주님이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주님은 내가 여기에 오도록 요청하셨고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을 기뻐하셨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이 정도로 주님의 인도가 분명해야 한다. 우리들 중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지시한다든지,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결정해서는 안 된다.

 

이제는 주님 앞에서 참으로 돌이킬 때이다. 『주여, 우리는 당신을 침해하거나 모욕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인도하심을 기다리며 당신만을 경외합니다.』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주의 회복이다. 기독교의 불쌍한 역사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누구로부터 명령을 받거나 누구를 명령해서는 안 된다. 다만 주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라. 이것이 합당한 길이다.


몸에 의하여 조화됨

 

예를 들어 인도자들이 많이 기도한 후 어떤 문제에 대하여 참으로 부담을 가졌다고 하자. 그때 그들이 해야 할 일은 교통을 통하여 자신의 부담을 성도들에게 전함으로 성도들이 기도하도록 요청하는 것이다. 결국 성도들은 주님으로부터 개인적인 인도를 받아서 그에 따라 움직이게 될 것이다. 이와같이 하면 어느 누구에게도 개인주의나 거스림이 없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몸을 가져야 하는 이유이다. 한면으로 그 영을 갖고 다른 면으로 몸을 갖는다. 그 영과 몸이 우리의 평형을 유지한다. 당신은 주님의 인도가 몸의 느낌과 일치하는가 않는가를 체크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조화되어야 한다.

 

몸에 의한 조화를 들을 때 어떤 사람은 인도자들이 결정하여 그들이 어디에 갈 것인지를 명령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밖의 결과는 같을지 모르나 안의 성질은 절대적으로 다르다. 예를 들어 내가 인도자로서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결정한다고 하자. 결정한 후 다른 사람에게 어디로 가야 한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주님에 대한 모욕이다. 이와 같이 한다면 그 사람에게는 기도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기도하는 대신 내 말을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이같이 하는 것은 주님의 지위를 뺏고 내 자신을 주(主)로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주님에 대한 최대의 모욕이다.

 

나는 『형제들이여, 당신들 중에 몇 사람이 어떤 도시에 이사할 필요가 있다는 주님의 부담을 같이 나누었으면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철저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결국에 누군가가 주님으로부터 부담을 받아 거기에 가도록 인도될 것이다. 주님으로부터 부담을 받은 후 당신은 몸을 돌보아야 한다. 이와같이 함으로써 영의 면과 몸의 면의 양면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기도와 교통

 

우리는 몸이 실제적으로,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할지 모른다. 이 몸은 교통 안에 있다. 그리고 이 교통은 하나 안에 있다. 그것은 부분적인 교통이 아니요, 분열이나 의견에 관련된 교통도 아니다. 이 교통은 오직 몸의 교통이다. 교통은 기도로 이어진다. 기도와 교통을 할 때 주의 인도하심이 분명해진다.

 

『기도와 교통을 하지 않았을 때에도 결과적으로는 누가 나에게 어디에 가도록 명령한 것과 같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왜 기도하며 교통해야 하는가?』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우리는 주님을 경외하기 위해서 기도하며 교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우리들이 기도도 하지 않고 다른 사람과 합당한 교통도 하지 않는다면 주님을 모욕하거나 그의 지위를 범하게 된다. 더우기 기도와 교통이 없이 어느 곳에 이사한다면 시련과 환난과 박해가 올 때 흔들릴 것이다. 『어느 형제가 여기에 파견한 것이니까 그가 틀렸을지도 모른다. 사람을 좇아서는 안 된다.』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도와 교통을 했다면 당신은 주님을 경외하고 당신을 주께서 인도하고 계신다는 확신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당신이 어느 곳에 가더라도 주님이 그곳에 보냈다는 확신이 있고 밖의 환경이 어떠할지라도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확신에 넘쳐 주님의 뜻과 인도가 당신에게 있고 그곳에서 죽을 준비도 되어 있다고 확신할 것이다. 확신뿐만 아니라 강하여져서 당당한 권위도 가지게 될 것이다. 『고난과 박해여, 모두 물러가라! 천지의 주재이신 우리 주(主)가 우리를 여기에 보낸 것이다.』라고 선포할 수 있다. 사람이 아닌 주님의 보내심을 받았으므로 기도할 권위가 있다. 여러분 모두가 사람에 의해 파견된 것과 주님에 의해서 파견된 것과의 차이를 볼 수 있기 바란다.


즐거운 한 영과 달콤한 하나

 

몸 안에서는 청년이나 장년이나 노년 모두가 하나다. 젊은 사람과 나이 많은 사람들 사이의 어떠한 의견 차이도 절대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몸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교통을 가질 필요는 있다. 나이 많은 분들은 젊은 사람들과의 교통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항상 즐거운 분위기와 좋은 영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로스엔젤리스에는 세 개의 집회소가 있으나 달콤한 하나가 있는 즐거운 한 영이 있을 뿐이다. 젊은 사람들은 주의 간증을 위해 대학에 가는 일에 충실해야 하고 나이 많은 분들은 젊은 사람을 간섭하지 말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그들의 배후에서 지원하고 굳게 세워야 한다. 젊은 사람들은 나이 많은 분을 존경하고 그들의 도움과 기도와 현명한 조언을 구해야 한다. 이것이 이루어진다면 우리 사이에 얼마나 즐거운 상태가 있을 것인가!

 

몸은 하나다. 어느 교회에 아무리 많은 집회소가 있을지라도 여전히 교회는 하나다. 대북교회는 17개 이상의 집회소를 가지고 있다. 대학교 상급생과 최근에 갓 졸업한 학생만 해도 봉사하는 청년들의 수는 일천 명이 넘는다. 이들 천여 명의 봉사자들은 17개의 집회소 전부에 흩어져 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하나다.

 

2 년 전에 주님의 긍휼하심을 힘입어 장로, 집사, 여집사였던 많은 연장자들이 주의 목적을 위해 봉사하던 자리에서 물러났다. 약 800명에 이르는 이들 연장자들 중 대부분의 사람은 1948년 초창기 이래 교회 안에 있었던 사람들이었으나 젊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대신해서 봉사할 수 있도록 양보했다. 1 년 반 후 젊은이들은 표준에 도달했다. 그들은 나이 많은 분들과 절대로 하나다. 그들은 나이 많은 분들을 존경하고 나이 많은 분들은 젊은이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과 함께 서서 지원해 주고 그들을 소중하게 여긴다. 그들은 모두 하나다. 대북에 있는 교회에는 말할 수 없는 즐거운 분위기가 있고 모두가 주님을 누리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주님이 원하시는 온 땅 위의 놀라운 간증이다.


몸의 우주적 하나

 

청년들이여, 우리는 운동을 하는 자들이 아니다. 또 단지 대학의 어떠한 것을 위한 자들도 아니다. 우리는 오직 주의 회복을 위한다. 전세계를 내게 준다 해도 『나는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 나는 다만 주의 회복만 원한다.』라고 말할 뿐이다. 하나를 손상시킴으로써 회복을 침해하는 것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틀린 일이다. 우리는 운동이나 사역을 위한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의 존재는 주의 회복을 위해서 있다. 그것은 하나 위에 건축되는 것이다. 만약 이 하나를 잃는다면 우리는 더 이상 회복을 위한 사람들이 아니고 기독교의 일부분이 되고 만다. 우리가 기독교와 가장 분별되는 것은 바로 이 유일한 하나이다. 우리는 이 하나를 주의한다. 대학 내의 사역으로 인해서 하나가 손상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를 파괴함으로 주의 회복에 상처를 주는 일은 두려워해야 할 심각한 문제이다.

 

우리가 말하고 있는 하나란 몸의 우주적 하나를 말한다. 우리는 이 하나를 그저 우리 사이에만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믿는 자들과 함께 실행하는 것이다. 우리는 카톨릭 교회나 모든 교파나 자유 그룹 안에 있는, 그리스도 안에 포함된 모든 신자들을 사랑한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사랑할지라도 그들의 분열에 휩쓸릴 생각은 없다. 유일한 하나 안에서 우리와 하나 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것은 그들에게 달려 있다.

 

비록 그들이 이것을 원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그들을 사랑한다. 우리는 분열을 일으키는 어떠한 일도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 유일한 하나를 지키기 위해서 어떠한 어려움과 희생도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분리나 분열을 일으키는 일은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우리는 숫자에 주의하지 않는다. 우리의 관심은 오직 하나에 있다. 숫자가 많으면서 분열투성이인 것은 원치 않는다. 단 500 명일지라도 항상 하나를 갖는 편이 더 좋다.


주의 회복의 실제를 가짐

 

젊은이들은 주의 목적을 위해 대학 내에 갈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것이 운동이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할지라도 우리 사이에 분열을 가져오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오직 주님만 바라본다. 주께서 이를 위하여 필요한 은혜를 주시기 바란다. 우리는 분열을 가져오는 어떤 것도, 또 분열의 인상을 주는 아주 작은 것까지라도 물리친다. 우리는 어떠한 역사도, 어떠한 운동도, 또 어떠한 증가마저도 주의하지 않는다. 다만 몸의 유일한 하나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우리는 숫자가 적을지라도 이 하나의 실제 안에 있다. 만약 이 하나를 잃으면 주의 회복이 실제를 잃게 된다.

 

교회 안에서 성도들과 함께 두 가지 요소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바로 그 영과 몸이다. 우리는 『이것이 그 영인가? 이것은 몸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분열을 일으키는 것인가?』라고 물어 보아야 한다.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이 그 영에 의한 것이어야 하며 하나를 위한 것임이 분명해야 한다. 우리는 그 영과 전혀 관계 없는 운동을 하고 싶지 않다. 또 유일한 하나의 뜻에 있지 않은 기독교의 분열과 혼란을 되풀이하고 싶지도 않다. 항상 그 영과 몸만을 염두에 두도록 주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할 뿐이다.

 

몸은 그 유일한 하나 안에서 실제적인 방법으로 표현된다. 우리는 우리의 지방만이 아니라 온 땅에서의 이 하나에 관심을 갖는다. 성도들 사이나 모든 교회 사이에 분열을 일으키는 어떤 것도 피하지 않으면 안 된다. 되풀이해서 말하거니와 우리는 주의 회복에만 관심을 갖는다. 주의 회복은 절대적으로 그 영과 유일한 하나에 있다. 주께서 은혜와 긍휼을 베푸심으로 회복 안의 우리들을 지켜 주시기를 간구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독교의 불쌍한 역사의 되풀이가 될 것이다. 주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겨 그와 같은 되풀이가 되지 않도록 은혜를 주시기 바란다.

 

우리에게는 주의 회복을 위해 열심히 기도할 필요가 있다. 「그 영 안에」와 유일한 하나가 지켜지도록 열심히 기도할 필요가 있다. 그 영 안에 있는 것, 또 몸의 유일한 하나 안에 있는 것만이 주의 회복 안에서 지켜야 할 것이다.


위트니스 리
[그 영과 몸, "제 1장", 한국복음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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