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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메시지에서 우리는 새로이 임명받으신 왕의 시험받으심에 왔다(4:1-11). 기름부음 받으신 후에 주님은 시험받으셨다. 하나님의 경륜에 있어서의 순서는 언제나 택하심, 기름부으심, 시험이다. 결혼 생활 안에서 이에 대한 예시를 볼 수 있다. 결혼하기 전에 당신은 분명히 선택을 한다. 여러분 가운데 많은이들이 결혼하기 위해 어떤 사람을 선택했다. 선택한 후에 결혼했고, 결혼한 후에 시험이 왔다. 거의 모든 결혼한 부부들이 결혼의 시험에서 실패했다. 우리가 결혼에는 성공적이었지만 시험에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하늘에 속한 왕은 기름부음 받으시고 임명되신 후에 시험받으러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셨다. 그분은 스스로 광야로 간 것이 아니라 자기 위에 임하신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셨다.
결혼 생활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또한 시험 가운데로 인도하신다. 많은 젊은 형제 자매들이 하나님께 불평하며 말한다. 『주여, 나는 결혼하기 전에 상당히 기도했습니다. 당신은 나에게 이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당신의 뜻이며, 이 사람이 나를 위해 당신이 예비하신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여, 당신은 내가 처음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당신의 주권 안에서 우리가 함께하도록 안배하셨음을 아십니다. 그러나 오늘의 상황을 보십시오. 당신이 나에게 주신 사람을 보십시오. 이것이 당신의 실수입니까, 나의 실수입니까?』 주님도 당신도 실수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주님의 시험이다.
나는 모든 결혼이, 심지어 가장 실수라고 여겨지는 결혼조차도 주권적임을 믿는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어떤 것도 그분의 주권적인 허락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심지어 잘못된 결혼으로 보이는 것조차 포함하여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롬8:28).
어떤 것이 올바른 결혼인지 누가 아는가? 나는 결혼 생활에서 여러 해 동안의 체험을 가지고 있다. 사십 오 년 전에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명확하고 분명하고 단호하게 올바른 결혼이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오늘 이 질문을 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가 영원에 들어갈 때까지 나는 이것을 알 수 없습니다. 여러 해 동안의 결혼 생활 후에 나는 참으로 올바른 결혼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모든 결혼이 올바르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여러분 모두는 올바른 결혼을 한 것이다. 형제들이여, 여러분의 아내는 여러분을 위한 올바른 사람이다. 자매들이여, 여러분의 남편은 여러분을 위한 올바른 사람이다. 여러분이 이것을 믿든 믿지 않든 여러분은 여러분의 상황을 피할 수 없다.
젊은 사람들과 중년이 된 사람들이 결혼한 지 수년 후에, 그들은 잘못 결혼했다고 결론지으며 만일 다시 한번 결혼할 수 있다면 다르게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당신에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당신이 여러 번 더 결혼할 수 있을지라도 당신은 여전히 잘못 결혼했다고 느끼리라는 것이다. 결혼하려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들이 바른 선택을 했다고 생각하지만, 몇 년 후에 그들은 잘못 결혼했다고 느낄 것이다. 이러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결혼 생활의 시험에 넣으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를 단지 결혼 생활에서만 시험하시는 것이 아니라 또한 교회 생활 안에서도 시험하신다. 우리가 처음 교회 생활 안으로 들어 왔을 때, 우리는 밀월의 교회 생활을 체험했다. 우리는 영광스러운 교회 생활을 누렸으며, 모든 것이 놀라왔다.
그러나 빠르든 늦든 우리는 시험에 넣어질 것이다. 장로 직분에 넣어지는 모든 형제들이 시험되며, 그 시험은 대개 다른 장로들로부터 온다. 아마 처음에 당신은 당신의 지방에서 유일한 장로였을 것이다. 당신은 당신을 도와줄 몇몇 다른이들을 구했으며 얼마 후 둘이 더해졌다. 수개월 후에 여러분 셋은 모두 서로서로에 의해 시험되었다. 주님은 이것을 허락하신다.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우리가 어떤 것에 임명된 후에 우리는 항상 시험될 것이다. 주 예수에게 시험이 필요하다면 우리는 어떠하겠는가?
여러 해 동안 이 부분의 말씀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이 부분에 관한 많은 메시지들을 들었지만 그것들 중 어느것도 그 중심을 참으로 만진 것은 없었다. 철저한 이해를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우리가 기름부음을 받고 어떤 것에 임명된 후에는 언제나 시험받으리라는 것을 보아야 한다. 심지어 주 예수님도 예외가 아니었다. 우리가 보게 되겠지만 원칙적으로 모든 시험들은 동일하다.
A. 성령에 이끌림
1절은 『그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라고 말한다. 물로 침례를 받고 하나님의 영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후 예수는 하나의 사람으로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움직이셨다. 이것은 그분의 인성 안에 있는 왕의 사역이 성령에 따른 것임을 가리킨다.
첫째로 성령은 기름부음 받은 왕을 마귀에게 시험을 받게 하려고 이끌었다. 이 시험은 그분에게 천국의 왕이 될 자격이 있는지를 입증하기 위한 시험이었다. 마귀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디아볼로스(diabolos)로서 참소자, 비방자를 의미한다(계12:9-10). 마귀 곧 사탄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참소하고 사람들 앞에서 우리를 비방한다.
B. 사십 주야를 금식하심
2 절은 주 예수께서 사십 주야를 금식하셨다고 말한다. 사십 주야는 시험과 고난의 시간이다(신9:9, 18, 왕상19:8). 새로이 기름부음 받은 왕은 그 영에 인도되어 그 기간 동안 금식하셨다. 그 목적은 그분이 왕의 사역에 들어가기 위함이었다.
C. 유혹자의 유혹들
1. 돌들을 떡덩이로 바꾸라
첫번째 시험은 인간 생활의 문제, 즉 먹고 사는 문제였다. 우리의 친척과 친족, 특히 나이든 세대의 사람들은 항상 우리가 어떻게 먹고 살 것인지를 염려한다.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좋지만 어리석은 방법으로 그를 사랑해서는 안 된다. 너는 잘 살기 위해 너의 필요를 생각해야 한다.』
1933년 내가 주님에 의하여 부담을 받고 그분의 인도로 나의 직업을 떠났을 때 나의 친족들은 말했다. 『너는 좋은 직업을 가지고 있고 네 가족을 돌보고 다른이들을 도와 주기 위해 돈을 잘 벌고 있쟎느냐? 너는 주일날에 말씀 전할 수 있고 주중의 집회에도 참석할 수 있는데 왜 네 직업을 그만 두어야 하느냐? 많은 이들이 그와 같은 직업을 구하려 해도 얻지 못하는데 너는 그만 두려고 하니 우리는 네가 어떻게 먹고 살 수 있을지 염려스럽다. 우리는 네가 어떻게 네 아내와 아이들을 돌볼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나는 그들의 충고를 듣지 않았으며, 그들은 내가 전시간으로 주님을 섬기기 위해 직업을 내려놓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많은 때에 나의 친족들은 우리에게 먹을 것이 있는지를 보려고 그들의 어린 딸을 우리 부엌으로 몰래 보냈다. 그들은 우리가 굶지나 않을까 하고 염려했다. 우리의 생활 문제는 우리를 깊이 만지며, 심지어 주님도 그에 관해 시험을 받으셨다.
주님은 사십 주야를 금식하시도록 인도되었다. 이 사십 주야 후에 그분은 육체적으로 주리셨으며, 유혹하는 자는 그에게 와서 이렇게 말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을 떡덩이가 되게 하라』(3절). 이 제의에 주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고 대답하셨다(4절).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이 그 동안 금식하셨기 때문에 아무 것도 먹지 않으셨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말씀은 주 예수께서 금식하고 계시는 동안 먹고 계셨음을 계시한다. 육신적으로 그분은 금식하고 계셨지만 영적으로는 먹고 계셨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대한 원칙을 본다. 주님의 사역과 경륜 안에서 만일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육신적인 요구를 낮추고 영적인 요구를 돌아보는가를 모른다면 우리는 주님의 사역을 위한 자격을 갖추지 못한다. 주님의 사역을 위한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 우리는 시험받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육신적인 요구를 내려놓아야 한다. 잘 살고 잘 입고 잘 먹고 합당한 집을 갖는 것은 모두 부차적인 것이다. 영적인 음식을 먹는 것이 일차적인 것이다.
침례를 받으신 직후 주 예수님은 그분이 육신의 필요를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영적인 필요를 관심하신다는 것을 온 우주에 선포하실 수 있는 상황 안으로 이끌리셨다. 사십 주야 동안 그분은 모든 육신의 음식을 저버리셨으며, 육신의 요구를 잊어버리셨다. 그러나 그분은 영적인 필요를 돌보셨다. 그분은 자신의 육신적인 몸을 공급하기 위해서는 먹지 않으셨지만 자신의 영에 영양을 공급하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드셨다. 사탄이 주 예수께서 그동안 광야에서 아무 것도 드시지 않았다고 생각한 것은 전적으로 착오였다. 그분은 육신적인 음식은 금식하고 있었지만 영적인 음식에는 참여하고 계셨다. 이것이 우리의 생활에 대한 시험이다.
많은 아내들이 이 시험에 견디지 못했다. 모든 아내가 자신의 안전을 매우 염려한다. 아내들은 좋은 음식과 의복과 집을 갖기를 갈망한다. 바꿔 말해서 그들은 잘 살기를 갈망한다. 이것이 많은 형제들을 난처하게 만든다. 형제들은 교회의 길을 취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지만 그들의 아내는 기꺼이 따르려고 하지 않는데, 이는 잘 산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 중 많은 이들은 우리가 처음 교회의 길을 취하기 시작했을 때 우리의 아내들이 『우리의 장래는 어떻게 되는가? 우리는 어떻게 사는가? 우리의 의식주는 어떻게 되는가?』라고 말했음을 간증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교회의 길을 택하고 하나님의 경륜의 길을 가려 할 때 직면하는 시험이다.
우리가 첫번째 통과해야 할 시험은 우리의 생활에 관한 시험이다. 우리는 육신의 음식보다는 영적인 음식을 더 관심해야 한다. 우리가 사느냐 죽느냐는 이차적인 문제이다. 우리는 오직 우리의 영이 공급 받는가, 즉 우리의 영이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 자신으로 더불어 잔치를 누리는가를 주의해야 한다.
어떤 목사들과 선교사들과 성경 교사들은 교회의 길을 보았으며 나와 그것에 대하여 철저하게 이야기했다. 그러나 이 길이 좁다는 것을 알고 그들은 만일 이 길을 간다면 그들의 생활이 어떻게 될까를 염려했다. 이 사랑스런 사람들의 아내들은 그들의 남편이 이 좁은 길을 택하는 것을 무척 반대했다. 그들은 만일 그들의 남편이 교회의 길을 간다면 그들의 생활 수준이 낮아지리라는 것을 알았다.
사십 오 년 전에 중국에서 이 길은 매우 좁았으며 우리는 우리의 생활에 관하여 매일 시험에 처해 있었다. 몇 차례나 우리 중 어떤이에게는 먹을 것이라고는 조금도 없고 단지 일 달러밖에 없었다. 이 좁은 길을 택하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믿음으로 살아야 했다. 그것은 매우 어려운 것이었지만 우리는 여러 해를 믿음으로 살았다.
나는 우리의 생활 수준이 매우 낮았던 그 시험의 날들 동안 우리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으로 잔치를 누렸음을 간증할 수 있다. 우리의 체험은 주 예수께서 광야에서 받으셨던 것과 동일했다. 그분은 광야로 가실 것을 스스로 선택하지 않으셨으며 자신의 선호에 의해 가시지도 않았다. 그분은 성령에 의해 그곳으로 인도되었다.
이와같이 우리는 하나님에 의하여 교회 생활의 광야 안으로 인도되었다. 오십 년 전에 교회는 참으로 광야에 있었다. 거의 매일 우리는 그날 저녁 우리가 무엇을 먹을 것인지에 관해 시험받았다. 그러나 그때는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잔치를 누린 때였다. 한편으로 우리에게 많은 육신의 음식은 없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풍성한 말씀으로 잔치했다.
오늘날 교회 생활 안에서도 원칙은 동일하다. 교회의 길을 취함에 있어서 우리가 치러야 할 첫번째 시험은 우리의 생활 수준이 낮춰지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육신의 영역에서 오는 시험이다. 교회의 길을 택한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매일의 생활에서 이 문제에 관해 시험될 것이다.
우리는 온 우주에게 우리의 관심이 육신의 음식을 위하는 데 있지 않고 영적인 음식을 위하는 데 있음을 보여 주도록 시험받아야 할 것이다. 광야에 있는 날들 동안 예수는 그분의 육신의 음식을 관심하시지 않고 영적인 음식을 관심하셨다. 그분은 육신적으로는 금식하고 계셨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계셨다. 광야에서 그분은 단지 떡으로만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았다.
a. 하나님의 아들로 간주함으로 사람의 입장을 포기하도록 유혹됨
이제 우리는 첫번째 시험의 중점에 왔다. 그리스도의 침례시에 아버지는 하늘을 열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라고 선포하셨다(3:17). 하늘에서 난 소리는 나사렛에서 온 작은 사람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선포했다. 이 선포가 있은 직후에 성령은 그분이 그의 육신적인 생활을 돌아보는 가를 보기 위해 시험하러 광야로 인도했다. 그러자 유혹하는 자는 하나님 아버지의 선포에 근거하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을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말함으로 이 사람을 유혹하러 왔다(3절).
사탄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우리는 사십 일 전에 하나님 아버지에 의하여 네가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선포를 들었다. 이제 네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해 보아라. 「돌들아, 나는 너희가 떡덩이로 변하기를 원한다.」고 한 번 말해 보라. 만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너는 아무도 할 수 없는 무언가를 함으로써 너 자신과 나와 온 우주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것을 입증해야 한다.』
새로이 기름부음 받은 왕은 사람의 입장에 서서 그분의 인성 안에서 금식했다. 다른 한편으로 그분은 또한 아버지 하나님이 그분의 침례 때에 선포한 대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3:17). 천국을 위한 그분의 사역을 성취하려면 그분은 하나님의 대적인 마귀 사탄을 패배시켜야 했다. 그분은 이것을 하나의 사람으로서 해야 했다. 그러므로 그분은 하나님의 대적을 맞서기 위해 하나의 사람으로 서 있었다.
마귀는 이것을 알고 그분을 유혹하여 사람의 위치를 떠나 하나님의 아들의 위치를 취하게 하려 했다. 아버지 하나님은 사십 일 전에 그분이 아버지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하늘로부터 선포하셨다. 그 간교한 유혹자는 그분을 유혹하는 근거로 아버지 하나님의 선포를 이용했다. 만일 그분이 대적 앞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위치를 취했다면 그분은 대적을 패배시키는 위치를 상실했을 것이다.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는 것은 확실히 이적일 것이다. 이것은 마귀가 하나의 유혹으로 제의한 것이다. 많은 때에 어떤 상황에서 이적을 이루려 하는 생각은 마귀로부터 오는 유혹이다. 첫사람 아담에 대한 마귀의 유혹은 먹는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창3:1-6). 이제 둘째 사람 그리스도에 대한 유혹도 또한 먹는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먹는 것은 언제나 마귀가 사람을 유혹하는 데 사용하는 함정이다.
b. 사람의 위치에 서심으로 유혹하는 자를 패배시킴
4절은 『예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고 말한다. 유혹하는 자는 새 왕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의 위치를 취하도록 유혹했다. 그러나 그분은 「사람」이라는 성경의 말씀으로 대답했다. 이것은 그분이 대적을 처리하기 위해 사람의 위치에 서 있었음을 가리킨다.
귀신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른다(8:29). 그러나 악한 영들은 예수가 육신으로 온 것을 시인하지 않는다(요일4:3). 그 이유는 그들이 예수를 한 사람으로 시인하면 그들의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귀신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시인하지만 마귀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게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구원받을 것이기 때문이다(요20:31).
주 예수에 의하여 말해진 「사람」이라는 말은 유혹자에게 있어서 죽이는 말이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했다. 『사탄아, 나의 위치를 하나님의 아들로 제안함으로 나를 유혹하지 말라. 나는 하나의 사람으로서 여기에 있다. 만일 내가 다만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면 나는 결코 여기에 있을 수 없으며 너에게 시험받을 수도 없다. 그러나 나는 하나의 사람이기 때문에 시험받고 있는 것이다. 사탄아, 나는 네가 하나님의 아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의 아들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안다. 첫 사람 곧 하나님께서 너를 패배시키고 그분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창조하신 사람은 너에게 패배당했다. 따라서 하나님은 나를 둘째 사람으로서 너를 패배시키기 위해 보내셨다. 이제 너는 나의 위치를 하나님의 아들로 제안함으로 사람으로서의 나의 위치를 떠나도록 유혹하고 있다. 그러나 네게 말하노니, 사탄아, 나는 한 사람으로서 여기에 서 있다.』
귀신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외쳤지만 악한 영들은 예수가 하나의 사람으로서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은 인정하지만 그분이 하나의 사람이라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악한 영들이 어떤 사람도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기를 원치 않는 이유는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구원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가 하나의 사람이라는 것도 감히 인정하지 않는데 이는 만일 그들이 그렇게 하면 패배할 것이기 때문이다.
귀신들을 처리함에 있어서 예수는 사람의 아들이다. 죄인들인 우리를 구원함에 있어서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우리가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을 때 우리는 구원받는다. 그러나 만일 귀신들이 그분을 하나의 사람으로 인정한다면 그들은 패배할 것이다. 그러므로 주 예수는 사탄을 패배시키기 위해 하나의 사람으로서 강하게 서 계셨다. 이 첫번째 시험에서 예수께서 사람의 위치를 취하심으로 사탄은 패배당했다.
새로이 기름부음 받은 왕은 자신의 말이 아닌 신명기 8장 3절의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원수의 유혹에 대처하셨다. 이 말씀은 주 예수께서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분의 떡으로 취하고 그로 인하여 살았음을 가리킨다. 4절에서 「말씀」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레마(rhema)이다. 레마는 즉각적인 말씀으로서 로고스(logos)와 다르다. 이 시험에서 주님이 신명기로부터 인용한 모든 말씀은 성경에 항상 있는 로고스였다. 그러나 그분이 그 말씀들을 인용할 때 그 말씀들은 그분의 상황에 적용된 즉각적인 말씀인 레마가 되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이 호흡해 내신 것이다(딤후3:16). 그러므로 성경에 있는 말씀들은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온 말씀들이다.
2. 성전 꼭대기로부터 뛰어내리라
a. 하나님께서 그를 보호하실 것임을 보이라고 유혹함
5절은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라고 말한다. 새 왕에 대한 마귀의 첫번째 유혹은 사람의 생활에 관한 것이었다. 이에 패하자 그는 그의 두번째 유혹을 종교적인 것으로 돌려서 성전 꼭대기로부터 새 왕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보여 주도록 유혹했다.
6절에서 마귀는 그분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라 하였느니라』고 말했다. 주 예수님은 이렇게 하실 필요가 없었다. 그것은 다만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분이 기적적인 행동을 할 수 있음을 보이라는 유혹이었다. 종교에 있어서 기적적으로 일을 한다는 생각은 마귀의 유혹이다.
두번째 시험은 종교의 문제였다. 종교에서 가장 자극적인 것은 기적이다. 인간의 관념에 따르면, 기적이 없는 어떤 종교도 능력이 없으며 가장 능력 있는 종교는 기적의 종교이다. 그러므로 사탄은 새 왕을 성전 꼭대기로 인도하여 천사들이 그를 보호하리라고 말함으로써 거기서 뛰어내리도록 유혹했다.
당신은 결코 이런 종류의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고 생각지 말라. 어렸을 때 나는 종종 내가 초자연적인 사람이며 초자연적인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생각했다. 당신의 그리스도인 생활 가운데 이런 종류의 관념을 갖고 있지는 않았는가? 종종 우리는 어떤 것을 할 필요가 있을 때에도 시험받고 때로는 할 필요가 없을 때에도 시험받는다. 이때에 예수께서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릴 필요가 없으셨다.
가끔 기적의 필요가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한번은 나의 막내 처남이 심각한 병에 걸렸었다. 그때 나는 그를 치료하기 위해 기도함으로 나 자신을 과시하려는 유혹을 받았다. 나는 생각했다. 『지금이야말로 내 처가와 친척들에게 내가 놀라운 사람이라는 것을 입증할 때이다. 나는 단지 한 번 기도함으로 내 처남을 고칠 것이다. 성경에서도 예수께서 병을 고치셨고, 그분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고 말씀하시며, 우리는 다른이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만일 내가 나의 처남에게 이 기적을 베푼다면 나의 장모는 내가 놀라운 사람이라는 것을 확신할 것이다. 그녀가 보기에 나는 너무 종교적이고, 매일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믿음에 대하여 말한다. 만일 내가 처남에게 가서 「주 예수여, 저를 치료하소서.」라고 말했을 때 그가 즉시 일어선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상상해 보라! 그가 치료될 뿐 아니라 내가 드러날 것이다. 나는 장모가 보기에 얼마나 놀라운 사람이겠는가!』
그것은 주님의 기름부음과 주님의 인도와 안내였는가 아니면 유혹이었는가? 그것은 분명히 유혹이었다. 당신은 과거에 이러한 유혹을 받지 않았는가?
많은 젊은 그리스도인들은 기적을 보이려는 것에 관해 특이한 관념을 갖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나는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요 나의 임마누엘이신 주님의 임재 안에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다른이들에게 보이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말할지 모른다.
나는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사랑스런 한 형제를 안다. 그는 주님께서 자기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확신했으므로 주님께 몇 일 내로 이십만 달러를 주실 것을 구했다. 그는 『주여, 당신이 나와 하나이심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셔야 합니다. 당신은 그들에게 내가 당신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마다 내게 주신다는 것을 보여 주셔야 합니다. 주여, 나는 당신이 이십만 달러를 주실 것을 구합니다. 몇 일 후에 당신은 그것을 나에게 주셔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이 형제는 먹는 것과 잠자는 것을 중단하고 이 액수의 돈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어떤 종류의 기도인가? 그것은 자신을 과시하려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는 것이었다. 원칙적으로 우리는 모두 여러 번 이와같이 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방법으로 유혹을 받아왔다.
만일 마귀가 생활 문제로 우리를 유혹하지 않는다면 그는 종교 문제로 우리를 유혹할 것이다. 당신은 종교 안에서 위대한 사람이 되거나 능력 있는 사람으로 인정되기를 갈망할지 모른다. 모든 사람들이 성전 꼭대기에서 걸어내려올지라도 초자연적인 사람인 당신만은, 다른이들보다 능력이 많은 당신만은 뛰어내릴 수 있다. 이렇게 함으로 당신은 기독교 안에서 위대한 사람이 된다.
모든 종교의 「거물들」은 이러한 유혹에 무릎을 꿇은 사람들이다. 만일 당신이 기독교 안에서 유명하게 되었다면, 초자연적인 사람으로 인식되는 데 성공했다면 당신은 이미 이 시험에 굴복한 것이다. 당신은 이미 원수에게 패배한 것이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시험에서 원수를 패배시키기를 갈망한다면 당신은 성전에서 뛰어내리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당신은 가능한 한 천천히 그곳에서 걸어내려와야 한다.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당신이 약하고 무능하다고 생각하게 하라. 그러나 당신은 자신에게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나는 능력 안에서 행하지 않는다. 나는 생명 안에서 행하고 있다. 나는 능력을 주의하지 않고 생명을 주의한다.』
이것을 말하기는 쉽지만 행하기는 어렵다. 기회가 주어질 때 당신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지는 않겠지만 달려내려올 것이며, 최소한 당신이 좋은 주자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가능한한 다른이들보다 빨리 달릴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원수를 패배시키려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당신이 어떤 사람 또는 그 무엇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아무 것도 하지 말라. 다른이들로 하여금 당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게 하라. 사실상 나는 아무 것도 아니며 나의 그리스도가 모든 것이다. 만일 당신이 아무 것도 아닌 위치를 취한다면 당신은 원수를 죽일 것이다. 당신은 유혹하는 자를 도살할 것이다.
b.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음으로 유혹하는 자를 패배시킴
마귀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고 예수를 유혹했을 때 예수는 그에게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7절)고 말씀하셨다. 주 예수님이 성경을 인용함으로써 첫번째 유혹하는 자를 패배시켰기 때문에 그는 그분의 방법을 모방하여 아주 간교하게 성경을 인용함으로써 두번째로 그분을 유혹했다. 어떤 것에 관해 성경을 한 방면으로 인용할 때 우리는 유혹하는 자의 속임으로부터 보호되기 위해 다른 방면도 주의해야 한다. 이것이 유혹하는 자의 두번째 유혹에 맞서기 위해 새 왕이 여기에서 한 것이다. 많은 때 우리는 유혹하는 자에게 『또 기록되었으되』라고 말해야 한다.
주 예수는 성경을 인용함으로써 첫번째 유혹에서 사탄을 패배시켰다. 따라서 두번째 유혹에서 유혹하는 자도 또한 말씀을 인용했다. 그는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예수여, 당신은 성경을 인용했습니다. 나도 성경을 압니다. 한 구절을 당신에게 인용하겠옵니다.』
그러나 주 예수님은 『또 기록되었으되』라고 말씀하셨다. 「또」라는 말은 매우 강한 것이다. 당신은 성경을 인용할 수 있고 원수는 할 수 없다고 생각지 말라. 사탄은 당신이 아는 것보다 더 많이 안다. 그러므로 가장 좋은 안전 장치는 균형이나 확증을 위하여 「또」라는 단어를 갖는 것이다. 그러면 두번째 유혹에서도 원수는 패할 것이다.
주 예수는 사탄에게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7절)고 하셨다.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성전 꼭대기에 가지도 말고 뛰어내리지도 말라. 만일 당신이 어쩌다 거기에 있는 것을 발견했다면 당신은 내려올 길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당신은 결코 의도적으로 그곳에 가지 말라. 그러나 만일 당신이 실수로 그곳에 있다면 주님께 당신을 용서해 주시기를 구하고 한발 한발 내려오도록 도와 달라고 구하라. 그러나 보이기 위하여 당신을 내던지지 말라. 주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시험하는 마귀의 제안을 취하지 않으심으로 유혹하는 자를 이기셨다.
3. 마귀에게 경배하라는 시험
a. 세상 나라들과 그 영광을 얻도록 유혹함
8절과 9절은 『마귀가 또 그분을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들과 그 영광을 보이면서 말하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고 말한다.
종교적인 영역에 있어서 그의 유혹이 패하자 마귀는 새 왕에게 그의 세번째 유혹을 제시했다. 이번에는 이 세상의 영광의 영역 안에 있는 문제였다. 그는 그분께 세상의 모든 나라들과 그 영광을 보였다. 간교한 자의 유혹은 언제나 첫째는 사람의 생활로, 둘째는 종교로, 세째는 세상의 영광으로 온다. 어떤 유혹에도 이 세 항목이 모두 있을 것이다. 세번째 항목은 세상 영광과 승진과 야망과 지위와 장래를 약속하는 문제이다. 이 모든 것이 세상의 영광이다.
누가복음 4장 6절에서는 세상의 나라들과 그 영광은 마귀에게 넘겨 준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는 그가 원하는 자에게 그것들을 줄 것이다. 사탄이 타락하기 전에 그는 천사장으로서 하나님에 의해 세상의 지배자로 임명되었다(겔28:13-14). 그러므로 그는 이 세상 임금이라 불리운다(요12:31). 그는 이 세상의 모든 나라들과 그 영광을 손에 쥐고 있다. 그는 경배를 받기 위해 이 모든 것을 새로이 기름부음 받은 왕에게 유혹으로 제시했다. 하늘에 속한 왕은 이 유혹을 이겼지만 장래 올 적그리스도는 이기지 못할 것이다(계13:2,4).
이 유혹은 야망과 승진의 문제를 포함한다. 심지어 성도들 가운데에도 인도자가 되기 위한 갈망이 있다. 이것은 세상 영광을 위한 갈망이다. 인도자가 되려는 당신의 애씀은 당신의 야망이다. 이것은 세상 영광이다. 이 점에 있어서 당신은 유혹을 받을 때마다 이 유혹 뒤에 당신의 경배를 얻으려고 하는 유혹자가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사탄은 주 예수께 만일 자기를 경배하면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주겠노라고 말했다. 모든 야망 뒤에는 감추인 우상이 있다.
만일 당신이 지위나 승진이나 이름을 얻으려고 야망적이라면 그 야망 뒤에는 우상이 있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어떤 우상도 경배하지 않는다면 결코 당신의 야망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세상의 어떤 영광을 얻기 위해서 당신은 어떤 우상을 경배해야 한다. 우상을 경배함이 없이 지위를 얻기란 불가능하다. 당신이 어떤 지위를 추구하고 있을 때마다 깊은 속에서 당신은 우상을 경배하고 있음을 안다. 이 때문에 사도는 탐심은 우상 숭배라고 말했다(골3:5).
당신보다 몇 년 늦게 교회 생활 안으로 들어온 어떤 형제들이 인도자들이 되었고 당신은 제쳐졌다고 느낀다 하자. 만일 당신이 이에 대하여 불평하며 왜 그들은 인도자들이 되었고 당신은 되지 않았느냐고 묻는다면 이것은 당신이 세상 영광을 추구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가령 열 명의 자매들의 그룹 가운데에서 세 명이 어떤 특별한 봉사에 있어서 인도하도록 임명되었다 하자. 만일 다른 일곱 명이 이에 대하여 아무런 느낌이 없다면 그들은 승리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왜 그 세 명이 임명되었느냐고 묻는다면 이것은 그들이 헛된 영광 곧 이 세대의 영광을 구하고 있음을 가리킨다.
이 문제에 있어서 우리 모두가 약하다. 야망과 지위를 위한 이 갈망이 교회 생활 안으로까지 스며들어올 수 있다면 하물며 다른 것들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더 깨어 있어야 하겠는가!
b. 다만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김으로 유혹하는 자를 패배시킴
10절에서 주 예수님은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사탄은 헬라어로 대적자(adversary)를 의미한다. 그는 하나님을 반역하는 하나님의 왕국 밖에 있는 원수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왕국 안에 있는 대적자이다. 새 왕은 다만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는 사람의 입장에 섬으로써 마귀의 제의를 꾸짖고 그를 패배시키셨다.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을 얻기 위해 어떤 것을 경배하고 섬기는 것은 언제든지 경배를 받고자 하는 마귀의 유혹이다.
주님은 사탄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하다. 『사탄아, 사람으로서 나 예수는 하나님만 경배하고 섬긴다. 너는 하나님의 원수이다. 나는 결코 너를 경배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의 영광이나 세상 나라들을 주의하지 않는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 가라!』
만일 우리가 우리의 체험을 살펴본다면 우리는 모든 유혹들이 이 세 방면, 즉 우리의 생활의 문제 안에 있는 유혹과 종교적인 기적의 유혹과 세상 영광의 영역 안에 있는 유혹을 포함하고 있음을 볼 것이다. 하루종일 우리는 우리의 생활, 종교, 세상의 위치의 방면에서 시험을 받는다. 그러나 예수는 원수의 유혹의 모든 방면을 이기셨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으셨다. 『나의 생활은 두번째이다. 나는 종교적인 능력을 주의하지 않는다. 그리고 세상 영광은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나는 오직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말씀만을 안다. 나는 오직 하나님을 섬기는 것만을 주의한다.』
그러므로 시험을 거치신 분으로서 주 예수는 천국의 왕이 되실 자격을 갖추셨다.
D. 결과
11절은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보라 천사들이 나아와 시중드니라』고 말한다. 첫사람 아담에 대한 마귀의 유혹은 성공했다. 그러나 둘째 사람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유혹은 완전히 실패였다. 이것은 그가 새 왕의 천국 안에서 설 자리가 없음을 가리킨다. 주 예수께서 사탄을 패배시키신 후에 천사들이 나와서 고난받는 사람으로서 시험을 받은 왕을 시중들었다(눅22:43).
왕뿐 아니라 모든 왕국의 백성들도 그들의 일상 생활의 문제와 종교적 능력의 문제와 세상 영광의 문제를 이겨야 한다. 만일 우리가 이 세 유혹들을 이기지 못한다면 우리는 왕국 밖에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왕국 백성이 되려면 이 세 가지 것들이 우리의 발 아래 있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이 세 유혹들을 죽이고 『나는 나의 생활과 종교적인 능력과 세상의 지위를 주의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사탄은 우리에게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매일의 생활에 대하여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 사도 바울의 예를 생각해 보라. 바울은 말했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4:12). 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가난하건 부하건 나에겐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는 결핍에서나 풍부에서나 살 수 있다. 나의 매일의 생활 문제는 나를 염려케 하지 못한다.』
더우기 종교적인 능력을 관심하는 대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체포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약하셨던 것처럼 약해야 한다. 만일 그분이 약하지 않으셨다면 누가 그분을 체포하여 십자가에 못 박았겠는가? 그분이 체포되고 희롱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그분은 자신의 어떤 능력도 나타내지 않으셨다. 그분은 어떤 종교적인 능력을 전람하는 것을 거절하셨다. 그대신 그분은 극도로 약하셨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고 말했으며, 그는 또한 『우리는 그분 안에서 약하다』고 말했다(고후13:4). 많은 악한 사람들은 바울에게 도전하면서 『만일 네가 참 그리스도의 사도라면 너는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바울이 감옥에 있었을 때 주님은 그를 위해 어떤 기적도 행하지 않으셨다.
바울의 상황은 감옥에 갇혔던 침례 요한의 상황과 동일했다. 투옥된 지 얼마 후에 요한은 자기 제자들을 주님께 보내어 따지면서 말하기를, 『당신이 오실 분이십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이를 기다려야 합니까?』라고 했다(11:3).
요한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만일 당신이 오실 분이시라면 왜 나를 위하여 무언가를 하시지 않습니까? 당신은 당신의 선주자요 천거자인 내가 감옥에 있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당신은 능력이 없으십니까? 당신은 전능하신 그리스도가 아닙니까? 만일 그렇다면 나를 위하여 무언가를 하십시오.』
주님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대답하셨다(11:6).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하다. 『그렇다, 나는 어느 것이나 할 수 있으나 너를 위하여는 아무 것도 하기를 원치 않는다. 너는 나의 천거자요 나의 선주자이지만 나는 너를 위해 아무 것도 주의하지 않는다. 나는 오히려 너의 머리가 잘려지기 원한다. 요한아, 나를 인하여 실족하려느냐?』
근래의 니(Nee) 형제님의 체험이 이에 대한 예이다. 그는 1952년부터 그가 죽을 때인 1972년까지 감옥에 있었다. 그 이십 년 동안 주님은 그를 위하여 기적적인 방법으로 어떤 것도 행하지 않으셨다.
우리에게는 이 세 종류의 유혹 곧 우리 생활의 유혹과 소위 종교적인 능력의 유혹과 헛된 영광의 유혹을 이길 필요가 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것들을 정복한다면 우리는 참으로 우리의 하늘의 왕을 따르는 왕국의 백성들이다. 할렐루야, 우리의 하늘의 왕은 유혹하는 자를 이겼고 이 세 가지 유혹들에서 그를 패배시켰다.
위트니스 리
[마태복음 라이프 스타디, "왕의 기름부음 받으심(4)", 한국복음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