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성한 말씀을 누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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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선 교회가 오늘날 예전과 다른 위치에 서서 주님을 섬기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물어야 한다. 오늘날 교회가 주님을 섬기는 위치는 이전과 같은가 그렇지 않은가? 여기에 절대적으로 상반되면서 모순되는 두 관점이 있다. 한면으로 교회는 황량한 상태에 있고 다른 한면으로 교회는 진보하고 있음을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한다.

 

교회의 황량함

 

사도 시대로부터 시작됨

 

한면으로 말해서, 교회가 지난 이천 년 동안 걸어온 길은 갈수록 빈곤해지는 길이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교회는 완전히 황량한 상태에 있었다. 우리는 오늘날 교회 안에, 많은 죄악과 잘못이 잔존해 있음을 본다. 오늘날 뿐 아니라 심지어 성경 안에서도 우리는 초기 교회의 상황 역시 황량한 것이었음을 본다.

 

바울 시대에도 이미 거짓 목자, 거짓 선지자, 거짓 사도가 존재하고 있었다. 에베소의 상황은 좀 나아보이지만, 실지로 그 교회 또한 황량함 가운데 있었다. 빌립보서에서 바울은 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일을 구하고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빌 2:21). 디모데 전·후서는 바울이 죽음을 앞두고 쓴 것으로, 거기에서도 우리는 교회의 황량한 상태를 보게 된다.

 

디모데 전서는 장로와 집사에 대해 말한다(딤전 3:2,8). 그러나 디모데 후서에 와서 바울은 간증을 오직 충성된 사람에게만 맡길 수 있다고 말한다. 그곳에서는 마치 장로나 집사도 다 신뢰할 수 없는 듯이 말한다. 디모데 전서에서 그는 장로가 어떻게 충성되어야 하는지를 말하지만, 디모데 후서에 와서는 큰 집에 나무와 질그릇이 있음을 면키가 어렵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딤후 2:20).

 

베드로 후서는 또 우리에게 그 당시에도 주님을 팔고 주님을 부인하는 자가 있었다고 말한다(벧후 2:1). 교회가 중세(中世)에 타락했을 뿐 아니라 이미 4세기에도 바벨론으로 포로 되어 갔으며, 심지어 사도 시대에도 황량하게 되었었다. 그러므로 심판이 하나님의 집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필요하다(벧전 4:17).

 

요한의 서신은 바울의 서신보다 삼십여 년 뒤에 쓰여졌다. 거기에서 우리는 심지어 그리스도가 예수임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있음을 본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것들이 곧 적그리스도가 온 것이다(요일 2:22, 4:3). 이뿐 아니라 요한계시록은 주후 90년에서 95년 사이에 쓰여진 것이다. 거기에서는 일곱 교회를 말하는데, 그 가운데 두 교회만이 책망을 받지 않고 나머지 다섯 교회는 모두 심한 책망을 받았다(계 2-3).

 

에베소의 타락으로부터 라오디게아를 주님의 입에서 토해내치겠다는 데까지 타락은 계속된다. 에베소의 등대는 옮겨졌고 라오디게아는 주님의 입에서 토해내쳐졌다. 중간에 비록 회복이 있었지만, 거기에서는 대체적으로 황량했다. 유다서는 단 한 장(章)으로 되어 있는데, 거기에서는 교회에 몰래 들어온 이가 있다고 말한다(유 4).

 

역사에서 볼 때 황량한 상황은 계속되어 왔다. 2세기로부터 천주교 곧 대공교(大公敎)가 대체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2세기부터 3세기 사이에는 지방 교회의 실행이 깨지기 시작했다. 4세기에 이르러 콘스탄틴의 때에는 형식적인 교회가 형성되었다.

 

초기 교회들에서는 사람들이 일단 믿으면 곧 세상을 버렸다. 모든 믿는이들은 돈을 벌기 위해 일하지 않고 교회를 위해 일했다. 성도들은 모든 물건을 함께 사용했다. 형제자매들은 계속 모였으며 사도들의 가르침을 견고히 지켰다(행 2:42-46).

 

믿는 사람들이 모든 것을 과감히 떨쳐 버렸기 때문에 믿는 이들이 믿기를 두려워 했다. 사도행전은 삼천 명, 오천 명이 교회에 더해졌다고 말하는데, 아마도 삼천, 오천의 몇 배 더 되는 사람들은 믿을 담력이 없는 사람들 이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믿는 것이 명예나 지위에 위험을 끼친다고 말했을 것이다. 오순절은 사람들을 들어오게 했을 뿐 아니라 나가게도 했다. 오순절은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일단 사람이 그것을 접하기만 하면 그것은 그의 목숨을 요구했다.

 

지금까지도 황량함이 연속됨

 

당초의 상황은 오늘날의 상황과 매우 달랐다. 우리는 이 땅에서 마치 교회가 하락한 적이 없는 것처럼 살 수 없다. 우리는 가인과 같은 제사를 드릴 수 없다. 가인의 원칙은 바로 이미 타락이 발생했는데도 타락이 없는 것처럼 생활했다는 것이다(창 4:3-7).

 

가인 이전에 아담이 있었는데, 하나님은 그에게,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을 수 있으리라고 명하셨다. 이것은 아담에 대한 저주였다(창 3:19). 가인의 잘못은 그가 땅을 갈고 징벌을 받은 데 있지 않다. 그의 잘못은 그가 아담의 타락을 정죄하지 않은 데 있다. 그는 가책의 느낌이 없이 나가서 땅을 갈았다.

 

사람이 죄를 범하고도 범죄의 느낌이 없는 이것이 바로 가인의 원칙이다. 명백히 죄 가운데 있는데도 도리어 범죄한 적이 없는 것같이 행동한다. 아벨은 양을 지켰고 하나님은 그의 제물을 기뻐하셨다. 왜냐하면 그가 타락의 존재를 인정했고 피흘림의 가치를 알았기 때문이다.

 

가인은 달랐는데, 그는 마치 아무 일이 없고 심판이 필요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이 땅에서 사는 동안 황량한 느낌이 없이 살 수 없다. 왜 우리가 오늘날 외적으로 종파를 떠나고 다른 사람들과 분리되어야 하는가? 교회가 타락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분파가 있고 많은 사람들이 이름뿐인 교우(敎友)이다. 이러한 타락한 상황 아래서 우리의 느낌은 둔할 수 없다.


교회의 진보

 

그러나 다른 한면에서 볼 때, 교회는 이 이천 년 이래 계속해서 진보해 왔다. 겉으로 볼 때 교회는 황량하다. 그러나 충심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회복은 한 차례 한 차례 더 깊어지고 많아졌다.

 

복주(福州)에 있을 때, 나는 몇몇 자매들에게 교회의 역사는 곧 우리 개인의 역사와 같다고 말했다. 당신에게 묻겠다. 개인의 역사로 말한다면, 어느 때가 가장 풍성한 때인가? 우리는 구원받을 때, 의롭다 함과 거룩케 됨과 거듭남을 얻게 되고, 우리 안에는 그리스도께서 사시며 성령은 우리의 능력이 되신다. 이 모든 것을 우리는 구원받는 순간 얻게 되었다. 비록 당신이 이러한 것들을 이미 얻었다는 것을 알지 못할지라도, 이러한 것들은 이미 당신 안에 있다.

 

그리스도인은 어느 때 빈곤해지는가? 점차적으로 이 모든 풍성들을 잃어버릴 때이다. 이것이 구원받고 나서 얼마 후에 그들이 어두움과 시련 가운데 떨어지면, 이러한 모든 것들을 잃어버리게 되는 이유이다.

 

며칠이 지나서, 주님의 긍휼로 우리는 이러한 잃어버린 것들을 되찾아오게 된다. 다시 얼마가 지날 때 또 시련이 오고 우리는 또 타락한다. 주님의 긍휼이 다시 우리에게 임할 때, 우리는 또 부흥되고 이러한 잃어버린 풍성들을 다시 한 번 되찾아 오게 된다. 매번 되찾아온 것은 이전에 얻은 것보다 더욱 견고하다. 결국 이러한 모든 것들은 우리의 것이 된다.

 

야곱은 그의 일생 동안 여러 차례 올라갔고 또한 여러 차례 내려갔다. 그러나 그는 임종 때가 되어서 지팡이를 붙잡고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었다. 그는 잃은 모든 것들을 다시 되찾아왔다. 그는 완전히 구원받은 사람처럼 하나님 앞에 돌아올 수 있었다.

 

교부 시대부터 마르틴 루터의 개혁 때까지

 

교회의 역사 또한 마찬가지이다. 에베소서의 계시는 가장 높은 정점에 이르렀지만, 이것은 반드시 그 때 교회의 체험이 가장 풍성했다는 뜻은 아니다. 에베소서에 있는 교회는 마치 초신자와 같다. 교회가 진보하는 동안 믿음으로 의롭게 됨, 거룩케 됨, 교회의 합일(合一), 복음 전파, 십자가의 진리 등은 갈수록 분명해졌고, 이후에 회복된 것이 이전 것보다 분명했다.

 

우리는 교부 클레멘트(Clement)가 고린도 교회에게 쓴 편지로부터 그들의 복음 전파는 오늘날 우리가 본 것만큼 분명하지 못함을 볼 수 있으며, 심지어 어거스틴(Augustine)의 「참회록(Confessin)」과 토마스 아켐피스(Thomas Akempis)의 「그리스도를 본받음」에 들어 있는 진리도 오늘날 우리가 본 것만큼 그렇게 분명하지는 않다. 그들의 계시 안에는 보물이 있지만 진흙과 모래도 있다.

 

우리는 오늘날 교회가 이 두 가지 모순 사이에 있음을 보아야 한다. 외적으로 말해서 교회는 갈수록 나빠지고, 내적으로 말해서 그 질(質)은 갈수록 좋아진다. 다비(J.N.Darby)는 그의 책에서 교회를 황량한 집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가 또한 부흥의 집임을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바울 이후, 그의 계시와 필적할 수 있거나 그가 진리를 본 만큼 분명하게 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애석하게도 오늘날 그는 없다. 만약 그가 살아 있다면, 당신은 그에게 오늘날의 견해는 어떠냐고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한면으로 외면의 교회는 갈수록 타락하고 갈수록 아래로 내려간다. 그러나 다른 한면에서 교회의 내적인 질은 갈수록 좋아진다.

 

일단 진리가 회복되면, 그것은 결코 다시 잃어버린 바 될 수 없다. 믿음으로 의롭게 됨의 진리는 시련의 불 가운데서 산출된 것으로, 오늘날 절대로 다시 잃어버린 바 될 수 없다. 내가 여러분에게 묻겠다. 다시 천 년이 지난다면, 교회가 믿음으로 의롭게 됨의 진리를 잃어 버리겠는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는 모두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말한다. 지난 이천 년의 교회 역사 가운데 천여 년 동안 이 진리는 잃어버린 바 되었지만 오늘날 일단 회복된 이후로는 더이상 잃어버린 바 되지 않을 것이다.

 

교회는 마르틴 루터 이전 천 사백여 년 동안 이미 갈라디아서를 갖고 있었지만, 믿음으로 의롭게 됨이라는 이 진리는 잃어버린 바 되었었다. 그러나 오늘날 루터의 회복으로 인해 믿음으로 의롭게 됨의 이 진리는 더이상 잃어버린 바 되지 않을 것이다. 이전 사람들은 믿음으로 의롭게 됨에 관해 교리상으로 다투었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미 이 도(道)를 위해 피를 흘리고 이 도는 다시 잃어버린 바 되지 않을 것이다. 교회가 오늘날 얻은 것은 결코 흔들릴 수 없는 것이다. 모든 진리는 갈수록 더 견고해질 것이다.

 

개교(改敎) 이후로부터 오늘날까지

 

개교 이후에 하나님은 또 다비 등과 같은 한 무리의 사람들을 일으키셨다. 그들은 하늘에 속한 이상과 육체가 제거되어야 할 필요성 등을 보았다. 또 피어슨(Pearson Smith)은 믿음으로 거룩케 됨을 회복했다. 이외에도 귀용 여사, 뮐러(Muller)는 믿음을 보았다. 또한 이반 로버츠(E. Roberts)와 근대의 스팍스(Sparks)가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교회가 오늘날처럼 이렇게 분명하고도 풍성했던 날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교회의 끊임없는 회복

 

전체 성경은 66권이다. 오직 한 권이 끝맺음이 없는데 그것은 바로 사도행전이다. 사도행전은 머리는 있지만 꼬리는 없는 것이다. 기타 다른 책은 끝맺음, 종결이 있다. 사도행전 28장 이후에 또한 아주 많은 이야기가 있다.

 

요한, 베드로, 바나바, 바울 이후 모두 로마에 갔고 모두 심판을 받았다. 또 다른 많은 형제자매들의 상황도 있지만 사도행전은 언급하지 않았다. 왜 사도행전은 머리만 있고 꼬리가 없는가? 오늘날 우리가 거기서 사도행전을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복음이 아직 다 전해지지 않았고 주님이 아직 오시지 않은 오늘 우리는 사도행전을 쓰고 있는 것이다.

 

에베소서 2장의 거처, 4장의 각종 은사와 성도를 온전케 함은 그들로 믿음 안에서 함께 하나로 돌아가게 하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있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건축하게 한다. 또한 5장의 교회는 흠이 없고 주름이 없고 더러운 것이 없고 책망할만한 것이 없고 비평할만한 상황이 없으며 완전히 영광스러운 것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상황은 오늘날 아직 이르지 못했다. 우리는 아직 여기에서 이 교회의 회복을 계속하고 있다.

 

내가 영국에 있을 때 스파크 형제는 나에게, 성경에서 어느 장(章)이 가장 이뤄지기 어렵냐고 물었다. 나는 가장 이뤄지기 어려운 것이라면 마땅히 에베소서 4장의 성도를 온전케 함일 것이라고 말했다. 에베소서 4장을 읽고 나는 이 장이 실현될 방법이 없음을 아주 걱정했다. 다른 장에 대해서는 확신이 있었지만 그러나 이 장에 대해서는 나에게 아직 확신이 없었다.

 

이천 년 동안 에베소서 4장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 현재의 이러한 상황에 다시 이천 년을 더한다면 아마 아직 실현될 수 없을 것이다. 사람으로 본다면 이렇게 될 때 주님이 오실 수 없게 된다. 그렇다. 외적으로 교회가 황량한 상태에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문제는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의 풍성을 받아들이며, 이러한 풍성들을 얻기 위해 대가를 지불하는 한 무리의 사람이 있는가 없는가에 있다.


천한 것들에서 벗어나서 회복의 길을 걸음

 

오늘 우리는 어떤 위치에 서 있는가? 우리는 이 두 가지 모순 사이에 서 있다. 외적으로 우리는 황량한 상황을 정죄하기를 배워야 하며, 또한 그들 가운데서 나오고 모든 타락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 때문에 우리는 교회의 입장에 대하여 분명해야 하며,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천한 그릇에서 귀한 그릇을 분별해내야 한다. 귀한 그릇은 나면서부터 귀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분별됨을 통해 귀하게 된다. 성경은 사람이 만일 천한 일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면, 귀한 그릇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딤후 2:21). 귀한 것은 분별로부터 나온다. 무릇 천한 것에서 분별되지 않고 어떤 것에 대해서도 신중하지 않은 사람이 천한 사람이다. 어떤 사람이 천한 사람인가? 천한 그릇과 함께 섞여 있어도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없는 사람이 곧 천한 사람이다. 이것이 교회의 한 방면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동시에 몸 안에 살기를 배우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살기를 배우고, 회복의 길을 취하기를 배워야 한다. 하나님 보시기에 교회는 이미 그리스도의 충만한 신장의 분량으로 가득하다. 이 일은 과거에 없었고 어제도 없었지만, 오늘은 있다. 오늘 주님이 하시는 것은 이전에 하신 것들보다 더욱 많다. 오늘 그리스도인은 이 시대의 하나님의 진보적인 사역의 표준에 이를 수 있어야 한다. 다만 외적인 황량함을 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더 나아가 우리는 오늘 주님이 하시는 일을 보아야 한다.

 

주님이 그분의 일을 언제 멈추실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이 오늘날 돌을 예비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 뿐이다. 어느 날 모든 돌들이 다 예비될 것이며, 그 날은 곧 성전이 완성되는 날일 것이다.


교회 회복의 예표

 

구약에는 교회에 관한 두 개의 예표가 있다. 하나는 회막이요, 또 하나는 성전이다. 회막에 관해 말하는 사람은 매우 많다. 이것을 다루는 책은 적어도 백 권은 될 것이다. 그러나 성전에 관해 말하는 책은 한 권도 발견하기가 어렵다. 사람들은 회막의 예표는 중시하나 성전의 예표는 중시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회막과 성전이 거의 비슷하고 중복된 예표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이 두 개의 예표는 완전히 다르다. 회막은 잠시적이고 외면적인 반면 성전은 영구적이고 이면적이다. 회막은 광야에 있었고 성전은 솔로몬 왕에 의해 건축되었다. 광야에 있는 회막은 이 땅에서의 교회의 상태를 예표하고, 왕국 안에 있는 성전은 하나님 앞에서의 교회의 영원한 상태를 예표한다. 만약 우리가 이 빛을 본다면, 우리는 오늘날의 상황에 대해 매우 분명해질 것이다.

 

하나님은 출애굽기에서 이미 회막을 가지셨고, 이 회막은 이스라엘 백성이 어디를 가든 따라 다녔으며, 후에 그것은 실로에 이르렀다(수 18:1).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일이 발생했으며, 그들은 죄를 범했다. 그들 가운데에는 왕이 없었고 각 사람은 자신의 눈에 옳게 보이는 대로 행했다(삿 21:25). 이후에 블레셋 사람들이 왔으며 그들은 이스라엘과 적이 되었다. 그 때 사무엘, 사울, 다윗이 일어났다.

 

당시 늙은 엘리의 두 아들은 죄를 범했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싸움에 패했다. 그들은 곧 언약궤를 옮겨오려고 했었다. 언약궤는 바로 간증궤이며 또한 시은(施恩)의 궤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궤가 그들을 도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돕지 않으셨으며, 언약궤는 회막을 떠나 다곤의 신당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하나님은 언약궤로 인하여 이스라엘을 보호하려 하지 않으셨으며 또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언약궤를 보호하기도 원치 않으셨다.

 

언약궤는 회막을 떠난 이후 다시 돌아오지 않았으며,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마친 후에야 성전 안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예레미야 7장 12절은 예레미야 당시에도 사람들이 여전히 실로에 갔다고 말한다. 언약궤가 회막을 떠났으므로 하나님도 회막을 떠나신 것이다. 언약궤는 회막을 등지고 성전을 향해 간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상태이다.

 

솔로몬의 때에 이르러 왕은 기브온으로 제사를 드리러 갔다. 솔로몬은 기브온에서 지혜를 구했으며, 그가 얻은 지혜는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었다. 성경은 그가 일어나서 거기서 제사를 드렸으며 그가 드린 것은 일천 번제였다고 말한다(왕상 3:4).

 

역대 하 1장은, 실로에 놋단이 있었고 또 제사장도 있었지만, 그 안에 이미 언약궤가 없었다고 말한다(대하 1:3-5). 언약궤는 이미 회막을 등지고 성전을 향해 갔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간증이며 또한 오늘날 우리의 길이다. 우리의 길은 언약궤를 따라 가는 것이며, 기브온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성전을 향하는 것이다.

 

오늘 하나님은 금과 은과 나무와 돌과 놋과 철을 예비하고 계신다. 어느 날 때가 이르면 솔로몬이 나타날 것이다. 그 날 사람들은 모든 재료들이 이미 다 준비되었기 때문에 어떤 일하는 소리도 듣지 못할 것이다(왕상 6:7). 솔로몬이 왔을 때 성전은 완성되었다. 솔로몬의 성전 재료는 그 때가 되어서야 잘라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비록 소리가 있지만, 그 날이 이를 때 모든 것이 조화되어 거기에 성전이 있게 될 것이다.

 

교회의 황량함은 사실이지만 성전의 간증은 지난 이천 년 동안 줄곧 계속되어 왔다. 하나씩 하나씩 진리가 회복되었으며, 이러한 회복들은 적은 것이 아니다. 오늘 비록 각종 다른 소리들이 있지만 모든 재료는 이미 준비되었다. 지금 재료가 하나하나 예비되고 있다. 그 때가 되면 임시적(臨時的)인 일이 필요 없고 다 준비된 재료를 함께 맞추기만 하면 된다. 성전은 그때 건축되는 것이 아니라 맞춰지는 것이다.

 

오늘날 하나님의 사역은 그리스도의 몸을 온전케 하는 것이요, 믿음 안에서의 하나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엡 4:12-13). 하나님은 역대로 이 일을 해오고 계신다. 오늘 그분이 하신 것은 어제 하신 것보다 많고 더 전진된 것이다. 주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씀하셨다(요 5:17). 주님의 사역은 갈수록 좋아지며, 내용에 있어서도 갈수록 풍성해진다. 오늘 우리가 만약 회복의 길을 향해 올라간다면, 반드시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서 일하시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워치만 니
[워치만 니 사역 재개 메시지 기록, "제 55장 교회의 황량함과 진보", 한국복음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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