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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안의 통제하는 이상
성경은 개선될 수 없지만 성경 안의 진리는 점진적이며, 성경 안에 있는 신성한 진리의 회복은 더 한층 점진적이다. 사백 년 전에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진리가 약간 회복되었었지만 오늘날에는 그렇지 않다. 진리의 회복은 겨우 20여년 전보다 지금이 훨씬 더 풍성하다. 이것은 성경이 바뀐다거나 우리가 성경을 변역시킨다는 뜻이 아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그렇게 할 권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주님이 그분의 진리의 회복 안에서 움직여 나아가고 계시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성경 안에 있는 진리들을 회복하시는 것은 절대적으로 그분의 건축을 위한 것이다. 내가 처음 반대를 당했던 때는 1958년인데, 바로 그 해에 나는 처음으로 하나님의 건축에 관한 말씀을 전할 부담을 받았었다. 그것이 모든 반대와 비난들의 원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직 하나님의 건축만을 주의했다. 주님께 감사함은 그분이 회복을 옹호해 주셨다는 것이다. 사람의 말은 무가치하고 오직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이 자신의 건축을 위하고 계시다고 말씀하셨다. 온 성경이 이를 위해 있다. 맨 처음, 즉 창세기에서 우리는 금과 베델리엄(진주)과 보석들을 산출하며 흘러가는 강과 생명의 나무를 볼 수 있다(창 2:9-12). 성경의 끝인 계시록에서 우리는 이런 귀한 재료들, 즉 금과 진주와 보석들로 건축된 성을 볼 수 있다(계 21). 그러므로 온 성경은 하나님이 그분 자신을 선택된 사람들 안에 생명으로 분배함으로써 그분의 영원한 거처를 확보하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위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통제하는 이상이다.
하나님의 갈망
만일 우리가 어떤 다른 관점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근시안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성결이나 영성을 찾고 계시지 않는다. 그분은 건축을 찾고 계신다. 1958년에 나는, 우리의 영성은 반드시 하나님의 건축, 즉 교회 생활에 의해 시험되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내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성을 주의하지 않는다고 말했을 때 대적자들은 문맥 중에서 이 문장을 끄집어내어 나를 정죄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들어보라. 이 형제는 하나님께서 영성을 주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것은 이단적인 것이 아닌가?"
만일 이 문장을 그 문맥 안에 두고 본다면 전혀 이단적이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성을 주의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가 얼마나 많이 그분의 교회로 건축되었는가를 주의하실 뿐이다. 개인주의적인 영성은 암과 같은 것이다. 교회의 개인주의적인 지체는 누구라도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암세포이다. 당신은 자신이 영적이거나 거룩하다고 말할지 모르나 당신의 영성과 거룩함은 반드시 교회 생활에 의해 시험되어져야 한다. 아마 당신의 거룩함은 개인주의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만일 그러하다면 그것은 건강하지 못한 것이다. 왜냐하면 참된 거룩함은 하나님의 건축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한 무리의 개인주의적인 영적 인물들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건축을 원하신다. 그분은 한 무더기의 전시용 보석들을 원하시지 않는다. 물론 하나님은 개인들을 필요로 하시지만, 그분은 건축을 위한 재료들로서 그들을 원하신다. 모든 개별적인 돌들은 반드시 건축되어져야 한다. 이것은 단지 교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엄중한 사실이다. 당신은 하나님의 건축 안으로 건축되어졌는가? 아니면 당신은 구원받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주님을 사랑하고 기도하지만 "나는 교회를 주의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자인가? 당신은 "교회에 관해 너무 많이 말하는 것은 좋지 않다. 홀로 주님과 더불어 있거나 성경을 읽는 편이 더 낫다."고 말하는가? 당신은 그것을 누릴지 몰라도 하나님은 당신만큼 그것을 좋아하시지 않는다. 그분은 당신이 당신 자신을 잃어버리기를 원하신다. 당신은 반드시 비춤을 받고 살펴지고 순수하게 되고 정련되어야 하며, 그런 뒤에는 당신이 하나님의 건축을 위해 보석으로 변화될 수 있도록 그분 자신의 모든 것으로 주입되어져야 한다. 이것이 오늘날 하나님의 갈망이다.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부르셨는가? 그것은 바로 땅 위에 그분의 거처를 건축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땅 위에 있는 하나님의 거처인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중심이 되었다. 그들이 성막에 대해서 잘못되었을 때마다 그들은 전쟁에서 패하곤 했다. 그러나 그들이 성막에 대해 올바를 때에는 언제나 승리햇다. 이스라엘 민족이 좋은땅으로 들어간 후에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들의 삶의 중심인 성전을 건축했다. 그들이 성전에 대해 올바를 때는 하나님께 올바랐고 성전에 대해 잘못되었을 때는 하나님께 잘못되었다. 이것이 구약의 간략한 개요이다. 그러면 우리는 신약에서 무엇을 갖는가? 오늘날에는 교회가 있고 장래에는 새 예루살렘이 있다. 그러므로 온 성경에 대한 간략한 개요는 하나님의 건축이다.
강화된 주입의 필요성
이 시대의 어둠과 타락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비추시기 위해 칠배의 강화된 영으로 자신을 행사하지 않으실 수 없게 되었다. 우리에게는 일곱 영의 살피심과 비추심이 필요하다. 아마 당신은 여러 해 동안 교리들에 집착해 왔는지 모른다. 그것들이 당신을 위해 도대체 무엇을 했는가? 타락된 회복의 교회는 수많은 교리를 갖고 있었지만 주님은 그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셨는가? 그분은 그들이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고 미지근했으므로 그분의 입에서 토해 내치기에 알맞다고 말씀하셨다(3:16). 이것이 라오디게아 교회의 상태이다.
우리가 주님께 감사함은 오늘날 그분의 건축에 관한 빛이 그 어느 때보다 훨씬 더 밝다는 것이다. 빛이 우리 위를 비추고 있다. 그것은 몇 가지 부차적인 일들에 있어서 개별적인 이기는 자가 되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건축을 위한 주요한 일들에 있어서 이기는 자가 되는 문제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계시록에서 이긴다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 책에서 이긴다는 것은 타락한 기독교를 이긴다는 뜻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건축을 위해서 소위 말하는 교회의 타락된 상황을 반드시 극복해야만 한다. 계시록을 거듭거듭 읽어 보라. 그러면 그 책의 통제하는 관점이 하나님의 건축임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꼭 우리 앞에 두어야 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건축을 위해 있다. 1장의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는 건축을 위한 것이요, 2장과 3장에 있는 일곱 교회들에게 보낸 일곱 서신도 하나님의 건축을 위한 것이요, 5장에 있는 그리스도의 승천 후의 하늘의 광경과 사자-어린 양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이상도 역시 하나님의 건축을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일곱 등인 일곱 눈을 가지심과 하나님의 일곱 영은 우리를 개인주의적으로 거룩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건축을 위한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길 바란다. 이 시대에 우리는 어둔 밤에 있으므로 우리를 비추고 살피고 정화시키고 정련하기 위해 빛을 발하는 일곱 등이신 칠 배의 강한 영이 필요하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의 강화된 주입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건축을 위한 변화된 돌들이 되도록 그분 자신의 모든 것으로 주입되는 것이 필요하다.
위트니스 리
[요한계시록 라이프 스타디, "하나님의 건축을 위한 어린양의 일곱 눈", 한국복음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