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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0:38)
히브리서 10장 38절은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말했다. 이 말은 하박국 2장 4절을 인용한 것이다. 신약의 다른 두 곳에서도 이 말씀을 인용했다. 한 곳은 로마서 1장이고 또 한 곳은 갈라디아서 3장이다. (여기에서 '살리라'는 '생명을 얻으리라'로 번역할 수 있다 : 중국어 성경 참조).
로마서는 죄인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으리라는 '생명을 얻으리라'에 중점을 두었고, 갈라디아서는 사람이 생명을 얻는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지적하여 '믿음'에 중점을 두었다. 히브리서는 신도들에게 말한 것이므로 '믿음으로 살리라'로 번역하는 것이 더욱 좋다. 여기에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우리 느낌을 의존하는 생활에서 벗어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경지에 들어가도록 인도하는가를 밝히고, 참된 영적 체험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인식하게 한다.
1
적지 않은 형제 자매들이 때때로 이런 영적 어려움을 말한다. 그것은 그가 때로는 느낌이 메마르고 흥미가 없다가 때로는 즐거움을 느끼고 아주 흥분한다는 것이다. 때로는 흑암의 굴 속에서 아무 소망이 없는 것 같다가, 때로는 높은 산꼭대기에 이른 것처럼 아주 자유스럽다. 그들은 메마른 생활을 이기는 어떠한 방법을 바라며 즐겁고 열광적인 광경을 유지하려 한다. 그들은 일생 동안 기쁨이 강처럼 쉬지 않고 흐르는 생활을 갈망하고 항상 높은 봉우리 위의 자유로운 생활을 바란다. 그들은 이렇게만 된다면 일생 동안 큰 소리로 할렐루야를 외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많은 때 그들의 생활은 산꼭대기에 있다가 때로는 산골짜기에 있다. 어떤 때는 높고 어떤 때는 낮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생활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느낀다. 어떤 때는 참으로 즐겁고, 기도하면 할수록 더 기도가 나오고, 간증할수록 더 할 말이 있고, 말씀을 듣는 것도 흥미가 있고 말씀을 읽는 것도 꿀같이 달콤하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이러한 상황은 변한다. 그때는 기도해도 좋고 기도하지 않아도 좋게 느껴진다. 기도한 것과 기도하지 않는 것이 별 차이가 없게 생각되고, 성경은 흰 종이의 검은 글씨에 불과하여 읽어도 되고 읽지 않아도 된다고 느껴진다. 믿지 않는 사람을 만날 때 그에게 간증하지 않으면 마음이 불안하여 억지로 "예수를 믿으면 영생을 얻습니다."라고 말하지만 실지로 마음 속의 느낌은 무덤덤할 뿐이다. 하나님을 가까이하지 않으면 느낌이 좋지 않은 것 같고 하나님을 가까이하려 해도 가까움을 느낄 수 없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러한 체험이 있으므로 파도 같은 생활이 그리스도인에게는 불가피하며 항상 평온한 생활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또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은 파도 같은 생활을 해서는 안 되며 일직선처럼 언제나 평온한 생활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을 볼 때 그리스도인들이 오르락내리락하며 파도 같은 생활을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도 전부 옳다 할 수 없고,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항상 평온해야 한다는 것도 전부 옳다 할 수 없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형제 자매여, 우리가 이것을 깨달으려면 많은 그리스도인의 상태를 합하여 하나의 공통 원칙을 찾아야 한다.
예를 들어 많은 사람들이 동일한 병에 걸렸다 하자. 의사는 이 많은 사람들의 몸에서 동일한 근원과 동일한 상태와 동일한 결과를 찾아 낼 때 동일한 진단을 얻을 수 있다. 병의 동일한 근원과 동일한 상태와 동일한 결과로부터 동일한 진단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오르락내리락하는 생활이 어떻게 시작되어 어떻게 발전되었는가를 보아야만 동일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2
그리스도인은 구원으로부터 시작되므로 우리는 구원부터 보기로 하자. 사람이 구원받을 때 근심이 많은가? 아니다. 아주 즐겁다. 사람이 처음으로 보물을 찾을 때에는 언제나 즐거운 것이다. 형제 자매여, 당신이 주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인 날, 영생이 있음을 알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다시 정죄함이 없음을 안 날, 그날은 당신의 일생에서 가장 즐거운 날이었다. 이러한 즐거움이 영원히 계속될 수 있는가? 아니다. 이렇게 즐거운 느낌은 그 시간이 지나면 지나간다. 이렇게 즐거운 느낌은 며칠 동안이나 갈 수 있는가? 일정하지 않다. 사람에 따라 틀리다.
우리가 아는 바로는 구원받은 후의 그러한 즐거운 느낌은 몇 개월 가지 않는다. 보통 한두 달이 지나면 느낌이 지나간다. 어떤 사람은 한두 주 후면 그러한 즐거운 느낌이 사라진다. 어떤 사람은 구원받은 후 몇 개월 동안 즐거움이 있다. 그러나 그의 성경 읽는 것과 기도와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은 줄어들지 않았으나 그의 즐거움은 구원받을 때보다 줄어들었음을 느낀다.
어떤 사람은 구원받자마자 핍박과 어려움을 당하고 어떤 사람은 구원받은 후 죄를 처리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죄를 자백하고 보상하지만 여전히 즐거움이 있다. 그러나 한동안이 지나면 즐거움이 옛날 같지 않고 심지어 없어져 버린다. 어떤 사람은 구원받고 나서 성경 읽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 된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많지만 항상 달게 느껴지고 하루에 십여 장을 읽어도 많게 느껴지지 않는다. 기도도 아주 즐겁다. 하나님이 그의 기도에 몇 번이나 응답 하셨는지 모르지만 그는 즐겁게 기도한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무엇 때문인지 모르지만 즐겁지 않을 뿐 아니라 걱정이 생긴다. 이때 사탄이 그에게 와서 말하기를, "너는 넘어졌다. 너는 구원받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그 사람은 자신이 어떤 죄를 범했기 때문에 타락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찾아보면 아무 죄도 찾을 수 없다. 이제 그는 모든 것이 다 메마르고, 입맛이 없고, 구원받을 때처럼 활발하거나 기쁘지 않음을 느낀다.
그러나 이러한 메마름도 그리 길지 않다. 한 두 주, 혹은 삼사 일이면 메마른 광경이 지나가고 또 그에게 기쁨이 온다. 사람에게 끌려서 억지로 하던 성경 읽기와 기도와 간증이 이제는 또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이러한 즐거움이 어떻게 다시 회복되었는지는 그도 모른다. 그는 과거의 실패를 생각하며 이러한 즐거움을 지키기 위해 이제 더 조심한다. 더 힘을 다하여 그가 얻은 강렬한 즐거움을 잡으려 한다. 더 조심스럽게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간증한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그의 즐거움은 사라진다. 그는 생각해 본다. "어제나 오늘이나 똑같이 기도하고 성경 읽고 간증을 하는 데 왜 이렇게 큰 차이가 있을까? 왜 어제는 즐거움이 있다가 오늘은 없을까?"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 예수 그리스도가 어떠한 구주이신지도 모르는 것 같다. 그의 느낌에는 그가 모든 것을 다 잃은 것 같고 타락한 것 같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면, 혹은 이삼 주일이 지나면 그 기쁨이 다시 온다. 다시 모든 일에 흥미를 느끼고 삼층천의 체험은 없지만 산꼭대기의 체험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얼마 안 가서 또다시 무미 건조한 생활로 돌아가게 된다.
그는 자신이 이렇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느끼므로 다른 사람이 그의 영적 생활에 대해 물을 때, "나의 생활은 오르락내리락한다."고 말한다. 그가 높다고 말하는 것은 그가 성경을 읽거나 기도하거나 간증할 때 맛을 느끼고 즐거움이 있는 것을 뜻한다. 그가 낮다고 말하는 것은 성경을 읽거나 기도하거나 간증할 때 맛이 없고 메마름을 느끼는 것을 뜻한다. 그가 말하는 '오르락내리락하는' 생활은 그의 느낌으로 아는 그러한 상황을 말한다.
3
형제 자매여! 당신이 구원받은 후 첫번째의 기쁨으로부터 살펴보자. 당신의 높고 낮음은 어떠한 높고 낮음인가? 당신의 병의 원인을 찾아내면 즉시 치료를 받을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의 체험 가운데서 우리는 이런 원칙을 찾아냈다. 그것은 바로 기쁨은 처음에 크다가 후에 작아지고, 메마르고 시드는 것은 처음에 작다가 나중에 커진다. 기쁨의 정도는 갈수록 덤덤해진다(그러나 더 깊어진다). 기쁨의 시간은 갈수록 짧아지고, 메마르고 시드는 정도는 갈수록 짙어진다(그러나 더 얕아진다). 메마르고 시드는 시간은 갈수록 길어진다.
아마 첫번째로 메마르고 시든 것은 삼사 일에 불과하고, 두번째로 메마르고 시드는 것은 일 주일이 되고, 세 번째의 메마르고 시드는 시간은 이 주일이 되고, 네 번째에는 아마 한 달 동안이 될 것이다. 다른 말로 말해서 기쁨은 갈수록 짧고 덤덤해지며, 메마르고 시드는 것은 갈수록 길고 짙어진다. 메마른 시간은 갈수록 길어지고 그 정도는 갈수록 더 깊어진다.
믿는이들에게는 다 이러한 체험이 있다. 오늘날까지도 우리의 메마르고 시드는 것이 기쁨보다 더 많다. 현재가 구원받은 날보다 더 즐겁다고 말하는 형제 자매가 있는가? 우리는 오늘의 내가 구원받을 때같이 기쁘지 않기 때문에 마음 아파하며 자신이 죄를 범했다고 느끼고 실패했다고 느낀다. 구원받을 때 우리는 구름 위에 올라간 것 같았고 산꼭대기에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한 즐거움이 사라졌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이 타락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형제 자매들이여, 우리에게 근본적으로 틀린 것이 한가지 있다. 영적 체험에 대한 오해가 한가지 있다. 우리는 우리에게 즐거운 느낌이 있으면 영적 생명이 가장 높은 지점에 도달했다고 생각한다. 사실은 메마르고 시든 느낌이 든다 해서 영적 생명이 후퇴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내가 시계를 잃었다 하자. 이 시계를 되찾을 때 나는 아주 기쁘다. 삼사 일이 지난 후 나의 기쁨은 시계를 되찾을 때처럼 크지는 않다. 며칠이 지난 후 나의 기쁨은 없어진다. 나의 즐거운 느낌은 없어졌지만 나의 시계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내가 잃은 것은 시계를 되찾을 때 가졌던 즐거운 느낌일 뿐이다.
우리의 영적 생활도 그러하다. 당신이 구주를 찾고 구원을 받았을 때에는 기쁘지 않을 수 없다. 당신이 기쁠 뿐 아니라 하나님도 기뻐하신다. 구원받을 때 즐거워하지 않는 사람은 아직 구주를 찾지 못한 사람일 것이다. 구원받을 때 당신에게 즐거움이 있었지만 얼마 안가서 그런 즐거움이 없어지면 당신은 이미 얻은 것마저도 잃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당신의 즐거운 느낌은 없어졌지만 당신이 얻은 것은 없어지지 않았다.
당신에게 물어보겠다.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변함이 있는가, 없는가? 없다. 하나님에게 변함이 있는가, 없는가? 없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영생이 회수되었는가? 아니다. 당신의 느낌이 아주 열광적일 때에도 그러하고, 당신이 얼마나 열광하든지 메마르고 시들든지 당신이 얻은 것에는 항상 변함이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오르락내리락하는 생활은 그의 느낌 안의 상태일 뿐, 이것으로 그의 영적 생명의 높낮이를 판단할 수 없다(이것은 범죄함으로 타락한 그리스도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들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이 없으시고, 주 예수도 변함이 없으시고, 성령 또한 변함이 없으시다. 당신이 얻은 그 영생은 여전하다. 당신이 잃은 것은 처음 영생을 받을 때 가졌던 기쁜 느낌일 뿐이다.
어느 아이가 하늘에서 비가 오는 것을 보고 그의 아버지에게 물었다. '해가 어디로 갔어요?' 그 아이는 의자 위에 서서 해를 찾아도 찾지 못했고, 옥상에 올라가 찾아도 찾지 못했다. 참으로 해가 없어졌는가? 태양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다만 잠시 검은 구름에 덮였을 뿐이다.
우리의 영적 체험도 이러하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에게 변화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느낌이 변한 것이다. 하늘의 태양이 변한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검은 구름이 태양을 덮었을 뿐이다. 만일 그가 자신의 감정을 따라 생활하지 않는다면 그의 하늘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형제 자매여, 우리는 감정의 구름과 안개를 초월하여 생활해야 한다. 감정의 구름과 안개 속에 살아서는 안 된다.
기쁨은 갈수록 덤덤해지고 그 시간은 갈수록 짧아진다. 메마르고 시드는 것은 갈수록 짙어지고 그 시간은 갈수록 길어진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체험 가운데 나타나는 동일한 현상이요, 결코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다.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므로 반드시 안배하는 손이 있을 것이다. 이 손은 대체 누구의 손인가? 하나님의 손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쁨을 갈수록 덤덤하게 하시고 그 시간을 갈수록 짧게 하시고, 우리의 고갈의 농도를 갈수록 짙게 하며 그 시간을 갈수록 길게 하신다.
이것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체험을 말하는 것이지 비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나 특출한 그리스도인의 체험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비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란 범죄하고 실족한 그리스도인이다. 그들에게는 기쁨이 없는 것이 당연하다. 특출한 그리스도인이란 처음 시작할 때부터 전심으로 자신을 내려놓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추구한다. 특별한 체험이 있을 때마다 그들에게는 특별한 기쁨이 있다. 이렇게 특출한 그리스도인이나, 비정상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제외한 것이다. 우리가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정상적인 보통의 그리스도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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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손길이 우리의 기쁨을 감소시키고 우리의 고갈을 증가시키신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는 데에는 어떤 목적이 있는가? 아래와 같은 목적이 있다.
(1) 자신을 위하지 않게 함
당신이 열광하거나 기쁠 때에는 성경을 읽고 기도하면 아주 맛이 있다. 맛이 있기 때문에 성경을 읽는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읽는가? 당신은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는가, 당신에게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기도하는가? 만일 맛을 얻기 위해 성경을 읽고 당신의 필요를 위해 기도한다면 그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당신은 여전히 자신을 영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에게 기쁨이 있으므로 하나님을 위하고 있으며, 자신이 산꼭대기에 있고 아주 영적인 줄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당신의 기쁨을 가져가 당신을 고갈 가운데 넣는다. 이때 당신의 영적 상태는 어떠한가? 당신은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간증하기가 힘들 것이다.
하나님이 여기에서 당신에게 가르치시는 공과는, 당신이 산꼭대기의 체험이라고 여기는 것이 참된 영적 체험이 아니요 당신의 육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이다. 본래 당신은 육의 나쁜 면을 나타냈지만 지금은 육의 좋은 면을 나타낸 것이다. 이제 하나님은 당신의 기쁨을 가져가 당신을 고갈된 느낌 안에 생활하게 하심으로써 당신이 기도하는가 안 하는가, 당신이 성경을 읽는가 안 읽는가, 간증을 하는가 안 하는가를 보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이 너무 긴 기간 동안 고갈되어 눌림을 받을까 하여 당신에게 또 한번 즐거운 느낌을 주시고, 또 당신이 영의 최고점에 이르렀다고 생각할 때에는 당신의 즐거운 느낌을 또 가져가시는 것이다. 당신이 고갈되므로 낙심하여 그리스도인이기를 싫어할까 하여 당신에게 기쁨을 조금 주고 하늘에 속한 것을 맛보게 하시는 것이다.
두 번째의 고갈이 올 때에 하나님은 당신에게 무엇을 찾아내었는가를 물을 것이다. 당신은 또 자신이 잘못했다고 생각한다. 사실 하나님의 목적은 당신이 하나님을 위해서 한 것인지 당신의 기쁨을 위해서 한 것인지를 당신에게 보이려고 한 것이다. 이러한 체험이 어떤 사람에게는 대여섯 번이요, 어떤 사람에게는 예닐곱 번이다. 대부분이 한동안은 즐거웠다가 고갈되고, 또 한동안 고갈되었다가 즐거워한다. 이러한 순환은 하나님이 그의 목적을 이루실 때까지 계속된다. 그 목적은 바로 당신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을 위하고 자신을 위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즐거움과 고갈로 대하는 첫번째 이유이다.
(2) 의지의 능력을 사용함
당신에게 산꼭대기에 있는 듯한 즐거운 느낌이 있을 때 일을 하면 힘이 드는가? 조금도 힘들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성경을 읽든지 기도를 하든지 간증을 하든지 다 가볍고 자연스러울 것이다. 본래 당신은 말이 많고 자신을 나타내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을 친밀하게 느끼며 접촉할 때 하루 종일 집에만 있고 사람을 만나지 않는 것이 제일 좋게 느껴질 것이다. 이때 당신은 자연스럽게 타고난 약점을 이길 수 있고 아주 기쁠 것이다. 원래 당신은 성질이 급하여 화를 잘 내고 폭발을 잘 하는 사람인데 이제는 아주 잘 참고 사람을 잘 용납한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당신의 기쁨은 날아가는 것 같다. 당신은 고슴도치와 같아서 어떤 사람과 부딪치기만 하면 화를 낸다. 당신이 기쁨을 느낄 때에는 생활과 일이 힘들지 않지만 당신이 고갈될 때에는 생활과 일이 아주 힘든 것을 느낄 것이다. 당신이 고갈될 때에는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간증을 하는 데 당신의 의지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이때 당신은 의지로 성경을 읽고, 의지로 기도를 하고, 의지로 간증을 하여 당신의 본분을 다한다. 이것이 힘이 들지만 계속해 나간다. 당신이 기쁨을 느낄 때에는 이러한 일을 하는 데 힘든 것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당신이 메마름을 느낄 때에는 이러한 일을 하는데 아주 힘이 든다. 만일 당신이 참으로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변함없이 계속해 나가지 못할 것이다.
형제 자매여, 당신은 어떤 체험이 당신의 참된 영적 체험이라고 생각하는가? 당신이 알아야 할 것은, 고갈을 통과하여 얻은 체험만이 영적인 체험이라는 것이다. 당신이 기쁠 때의 상태는 당신의 진실한 영적 체험이 아니라 당신의 감정의 힘일 따름이다. 당신이 고갈되었을 때에는 당신의 의지의 힘을 사용한 것이요, 당신의 '참 자아'가 행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당신에게 고갈되는 것을 허락하셨다. 이것은 당신이 고갈될 때 당신의 의지의 능력을 사용하도록 훈련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작은 배 한 척을 타고 어느 곳에 간다 하자. 어느 때 어떤 곳에 가기로 결정하고, 배가 떠날 때 순풍이 불면 돛으로 가기가 참으로 좋다. 얼마 안 가서 바람이 그쳤다. 그러면 우리는 노를 저어 전진하는가. 닻을 내려 두 번째 순풍을 기다리는가? 우리는 반드시 힘써 노를 저어 빨리 목적지에 도달하기를 바랄 것이다. 이때 우리는 자신의 힘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예일 따름이다.우리의 감정이 열광할 때에는 순풍이 배를 전진하게 하므로 우리가 힘을 쓸 필요가 없다. 우리는 일 년 내내 다 순풍으로 가기를 바라고 순풍이 배를 몰기를 원한다. 역풍을 만나면 닻을 내려 놓고 전진하려 하지 않는다.
형제 자매여, 하나님은 어떤 때에는 당신에게 순풍을 주어 힘들이지 안고 전진하게 하신다. 그러나 어떤 때에는 하나님이 당신에게 역풍을 주시어 당신으로 하여금 그가 이미 주신 부활의 능력을 사용하게 하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갈됨을 허락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기쁨이 없고 열광됨이 없을지라도 우리가 거듭날 때 얻은 능력을 사용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당신은 역풍을 만나더라도 전진할 수 있게 된다. 부활의 능력은 죽음에 둘러싸인 가운데서 더욱 현저히 나타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감정을 도울 수 있으시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요, 다만 우리를 다스리는 수단일 뿐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가 의지를 훈련하여 우리의 느낌이 고갈될 때에도 여전히 우리의 의지를 사용하여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간증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우리의 의지를 사용하는 능력은 갈수록 강건해지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일생동안 감정의 힘으로만 전진하려고 하면 영원히 성장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기쁨의 느낌을 점점 약하게 하고 그 시간을 짧게 하시고, 고갈되는 느낌을 점점 짙어지게 하고 그 시간도 점점 길게 하신다. 그리하여 당신이 의지의 능력을 사용하여 강건한 경지에 이르게 한다.
우리의 과거의 체험을 관찰해 볼 때 우리의 기쁨과 고갈은 파도 모양이었다. 또한 우리가 기쁘다고 느꼈을 때 큰 진보가 없었고, 고갈되었다고 느꼈을 때에 기쁨을 느낄 때보다 더 진보가 많았음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고갈된 그 기간에 진보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가장 괴롭고 고갈될 때 실족된 줄로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의 체험을 비추어 볼 때, 우리가 연약하다고 느낄 때 진보했고 기쁘다고 느낄 때에는 얼마 진보하지 않았다. 순풍이 볼 때 당신은 두 팔의 힘을 사용하는가? 사용하지 않는다. 역풍을 만날 때 당신의 두 팔은 더 강해질 수 있다.
우리가 성장하는 데에는 우리의 의지를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당신이 고갈될 때 당신의 의지의 힘을 사용하여, "나는 진보한다"라고 말하면 진보할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의 눈은 기쁨만을 주목하며, 이 기쁨을 그의 영적 체험의 최고점으로 생각한다. 그가 의지의 능력을 써서 전진할 때 실제적인 영적 진보가 있음을 모르는 것이다.
(3) 환경을 이길 수 있음
고갈된 느낌은 가장 이기기 어려운 것이다. 만일 당신이 고갈된 느낌을 이긴다면 당신은 당신의 환경을 이길 수 있다. 환경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것은 바로 당신의 감정이다. 감정을 이길 수 있으면 환경을 이길 수 있다. 만일 당신이 의지의 힘을 사용하여, "나는 성경을 읽겠다. 나는 기도하겠다. 나는 간증하겠다."라고 말한다면 고갈된 느낌을 이길 수 있다. 형제 자매여, 이것을 기억하라. 무릇 환경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은 바로 감정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이며, 무릇 환경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먼저 자신의 감정을 이기는 사람이다.
(4)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기쁨의 시간은 갈수록 짧아지고, 고갈의 시간은 갈수록 길어진다. 기쁨의 농도는 갈수록 덤덤해지고 고갈의 농도는 갈수록 짙어진다. 결국에는 두 물이 한 곳에 모인 것처럼 기쁨과 고갈에 아무 차이가 없는 것 같다. 바꾸어 말해서 당신은 가장 심한 고갈 가운데서 가장 즐거운 생활을 누릴 수 있고 가장 기쁜 가운데서 가장 고갈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이 모순된 것 같지만 영적 생활의 실제는 그러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경지로 이끄신다. 많은 사람들에게 항상 감정을 따라 생활하는 경향이 있다. 그의 기쁨이 사라지면 무엇이든지 다 사라진다. 하나님이 당신을 당신의 감각으로부터 이끌어 내실 때 당신은 기쁨이 당신에게 영향을 줄 수 없고 고갈된 느낌도 당신에게 영향을 줄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면 감정의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마비된 사람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분명 기쁨과 고갈의 느낌이 있다. 그러나 밖의 이 느낌이 우리 안에까지 영향을 주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밖의 느낌을 관리할 수 있을 때 주 안의 기쁨을 안에서 누릴 수 있다. 그러한 기쁨은 깊고, 요동치 않는 것이다.
형제 자매여, 당신은 감정의 생활을 의지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변한 것은 당신의 느낌일 뿐 당신의 마음이 아니므로 그러한 느낌을 상관할 필요 없다.
예를 들어 당신이 성경을 읽을 때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기도를 해도 잘 하지 못하고, 일을 해도 힘이 없고, 모든 것에 전같은 기쁨이 없으므로 이미 타락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당신의 마음은 어떠한가? 만일 당신의 마음에 변함이 있다면 당신은 정말 타락한 것이다. 그러나 당신의 마음에 변함이 없다면 당신은 결코 타락한 것이 아니다.
당신에게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여전히 있다면 다만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면 된다. 당신의 느낌이 어떤가에 상관하지 말라. 당신의 느낌에 성경이 읽기 싫고 아무 맛이 없는 것은 다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당신에게 읽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 있다. 당신이 서너 마디의 기도를 해도 아무 맛이 없게 느껴진다 해도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기도하느냐 않느냐이다. 만일 당신이 기도하지 않으려 한다면 왜 무릎을 끓는가? 당신의 기도에 대한 좋고 나쁜 느낌과, 기도하고 안 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당신이 사람에게 간증한 몇 마디가 그렇게 좋지 않게 느껴진다 해도 그런 느낌을 상관할 필요 없다. 다만 당신의 마음이 간증하고자 하는가 안하는가만 물으면 된다. 당신의 간증하려는 마음이 변했는가, 안 변했는가? 당신은 세상을 사랑하는가, 안 하는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변했는가, 안 변했는가? 만일 당신의 마음에 변함이 없다면 당신이 어떻게 느끼든지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오르락내리락하는 생활은 다 느낌에 따른 것이라는 점이다. 당신 안에 실제 상태는 파도와 같이 그렇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아니다. 실족은 당신의 마음이 변하는 데서 온다. 당신의 마음에 변함이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실족한 것이요 타락한 것이다. 당신이 일어서면 일어서는 것이고, 일어서지 않으면 일어서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보통 말하는, 파도같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생활과 다른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을 배우기를 갈망하신다. 의인은 감정으로 인하여 살지 않는다. 감정은 당신에게 아무 것도 얻게 할 수 없다. 어떤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이 열 번 스무 번의 훈련을 통하여 감정의 힘을 사용하지 않게 하신다. 그 사람의 고갈을 갈수록 짙어지게 하고 그 시간을 길게 하는 것은 그 사람을 믿음으로 사는 경지에 이르게 하기 위함이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지만. 구원을 받은 사람에게는 반드시 고갈의 시간이 길고 기쁨의 시간은 짧아지는 체험이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고갈된 생활을 하고 있다. 어떤 이는 일년 중에 삼사 일밖에 기쁨이 없고 어떤 이는 삼사 년이 지나도 고갈만을 느끼며 기쁨은 조금도 없다. 이것은 바로 그 사람을 훈련하며 그의 감정의 힘의 무익함과 의인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삶을 알게 하는 것이다.
5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은 그리스도인 생활의 원칙이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감정으로부터 이끌어내어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데로 들어가게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의 진리를 얻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그는 우리가 감정으로 얻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믿음 안에서 얻기를 원하신다. 진리를 얻는 과정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생활 안으로 이끄신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인 체험에 있어서 언제나 하나의 큰 어려움을 겪는 것은 오르락내리락하는 체험들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새로운 진리를 들으면 아주 기뻐한다. 이삼 일이 지난 후, 또는 두세 달이 지난 후에는 그 진리를 잃어버린 것 같다. 그때 얻은 것들이 이제는 다 없어진 것 같다. 그들의 느낌은 이것을 아주 큰 어려움으로 느낀다. 그러므로 많은 형제 자매들이 대체 영적 체험의 과정이 어떤 것인가, 바꿔 말해서 영적인 사람이 되는 진보법이 어떤 것인가를 묻는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겠다. 예를 들어 당신이 성질과 조바심을 이길 수 있는 새로운 진리를 들었다 하자. 로마서 6장 6절의 진리, 즉 당신의 옛 사람이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죄의 종 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임을 안 후에 당신은 정말 기뻐서 집에 돌아와 사람들에게 말한다. "오늘부터 나는 다시는 화를 내지 않는다. 나는 이제 이길 수 있는 진리를 얻었다."
당신은 산꼭대기에 올라간 것 같다. 당신은 자신이 높은 꼭대기를 체험했다고 생각한다. 이런 체험이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는가? 유지될 수 없다. 며칠 안 가서 당신의 조바심하는 성질이 또 나올 것이다. 만일 당신이 남편이라면 집에 가서 아내의 잘못을 이것저것 볼 때 하루 이틀은 성을 내지 않을 수 있지만 끝까지 인내할 수는 없게 된다. 그럴 때 당신은 그것이 어찌된 일인지를 모른다. 당신은 전에 이 진리를 깨달았으니 다시는 화를 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또 성질이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그 진리는 믿을 수 없는 것인가?
이때 당신은 한 척의 배처럼 당신의 환경에 부딪쳐 구멍이 생겨 진리가 당신에게서 흘러나간 것 같다. 당신은 하나님께 간구하여, 그의 말씀이 다시 한번 당신 몸에 이뤄져 이길 수 있게 해 달라고 한다. 그 후에 또 당신을 조바심나게 하는 일이 부딪힌다. 당신은 인내하고 또 인내한다. 그러나 끝에 가서는 더 이상 인내하지 못하여 또 실패한다. 당신은 왜 지난 번에 그 기쁘던 진리가 어떻게 해서 다 흘러나가 버렸는가를 정말 깨닫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시련이 갈수록 심해질 때 당신은 로마서 6장 6절의 말씀이 자신에게 아무 효력을 발하지 못한다는 느낌에 낙심한다. 이럴 때에는 빛이 다 사라지고 완전히 흑암에 빠진다. 당신이 그날 산꼭대기 위에 서 있을 때에는 하나 하나를 다 말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오늘에 이르러서는 그 모든 진리가 당신에게 있어서 춤추는 갈대처럼 전혀 힘이 없다.
이런 상태는 어떻게 된 것인가? 당신은 산봉우리에서 내려와 깜깜한 굴 속으로 들어간 것 같다. 당신이 산꼭대기를 체험한다고 느낄 때 하나님은 당신을 이끌어 당신을 모든 것이 흑암뿐인 환경 가운데 놓으신다. 당신은 굴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다. 조금 기다리면 하나님은 당신을 굴 속에서 이끌어 내신다. 당신은 두 번째 산의 꼭대기에 이른 것처럼 정상의 즐거움을 누린다. 언제나 영적 체험의 진보의 원칙은 산꼭대기에서 굴 속으로, 굴로부터 나와 다시 산꼭대기로 올라가게 된다.
예를 들어 우리가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의 산상보훈을 듣고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행하여야 하는가를 알았다 하자. 당신은 듣고 또 받았으므로 정말 산꼭대기에 이른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 진리가 당신의 것이 된 것은 아니다. 다만 당신이 그렇게 느꼈을 뿐 하나님 보시기에는 당신이 아직 그것을 얻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은 어떻게 하시는가? 하나님에게는 아주 좋은 방법이 있다. 그것은 바로 당신을 산꼭대기에서 평지로 이끌어 굴 속으로 들어가게 하며 아주 어려운 상태에 놓고 당신으로 하여금 시련을 받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이상적인 산봉우리로부터 내려오게 하며 어두운 굴 속으로 들어가게 한다.
이럴 때 당신은 전에 얻은 교훈과 진리와 느낌은 다 함께 없어진 것 같다. 당신은 하나님께 탄식하며, "하나님! 나는 당신의 진리를 잡을 줄 모릅니다. 당신이 당신의 진리로 저를 잡아 주소서!"라고 말하게 된다. 당신은 처음에 진리를 듣고 받을 때 그 진리가 당신의 것이 되었고 당신이 그 진리를 붙잡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당신의 가족들과 당신의 동료들과, 많은 일들이 당신을 괴롭히고 둘러싸고 묶기를 허락하신다.
이럴 때, 당신이 붙잡았던 진리는 갈대와 같고, 다 날아간 것 같다. 당신은 로마서 6장 6절의 말씀이 별로 쓸모 없고 마태복음 5장에서 7장의 교훈이 너무 이상적인 것이라 말할지도 모른다. 당신은 진리를 잡던 당신의 손을 점점 풀어 놓고 마지막에는 손을 내려놓게 된다. 이러한 굴 속에서의 상태가 이 삼 일이나 사오 개월에 지나간다고 생각지 말라. 어떤 때에는 일이 년이나 사오 년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시련 가운데서 당신은 모든 것이 다 없어졌다고 생각한다. 한달, 두 달, 일년, 이 년이 지날 때 당신은 진리를 잃고 당신의 손을 내려 놓는다. 이때 하나님은 당신에게 전에 들었던 진리를 생각나게 하신다. 그 진리는 바로 당신이 처음에 들었던 강한 진리이다. 이제는 아주 작은 소리로 당신에게 말한다.
"로마서 6장 6절에서 우리의 옛사람이 주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라고 하지 않았더냐?" 이때 하나님은 당신을 믿을 수 있는 경지에 이끄신다. 처음에 당신은, "정말일까? 나는 얻지 않았고 아직도 얻지 못했는데?"라고 생각할 것이다.
당신은 감히 전같이 당당하지 못하고 잠잠히 지나간다. 당신에게는 모든 것이 다 없어진 것 같다. 그러나 그 말씀이 또 와서 당신을 깨우친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생각나게 하며 하나하나를 생각나게 한다. 그럴 때 당신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여전히 실패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믿을만하다."
이제 당신은 믿을 수 있다. 이렇게 믿은 결과 당신은 굴에서 나와 두 번째 산꼭대기에 올라간다. 흑암은 지나갔으나 시험은 여전히 있고, 어려움은 여전히 있으나 당신은 이겼다. 이번에 당신이 얻은 진리는 참으로 당신의 것이다. 당신이 첫번째 산꼭대기에서 접한 모든 진리는 감정 안에서 당신의 것이라고 여긴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굴 속에서 당신 자신을 의지하는 무기를 없애신다. 하나님은 당신을 구원하여 감정적인 생활을 벗어나 믿음으로 사는 경지 안으로 들어가게 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로 진리를 얻게 하는 순서는 이러하다. 하나님은 먼저 그의 종의 말씀과 영적인 책을 통하여, 또는 당신이 성경을 읽을 때 직접 깨닫게 하여 진리를 당신에게 전해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진리를 전한 후에 즉시 역사하여 그 진리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게 하신다. 그 뜻은 바로 하나님이 환경에서 역사하여 당신이 그 진리에 설때까지 당신 속에서 그냥 지나가게 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처음에 당신은 당신이 들은 진리를 당신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험을 받을 때에는 그 진리가 당신의 것이 아님을 느끼며 당신은 서서히 그 진리를 잃어버리게 된다. 주님은 당신이 잃어버릴 시간에 역사하신다.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진리가 당신의 생명 안에 짜여지게 한다. 굴 속에서 나올 때 당신은 흑암 가운데서 잃어버렸던 진리가 당신의 것이 되었음을 보게 된다.
어떤 형제 자매들은 크게 기뻐하고 흥분하는 것을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감정에서의 흥분이 도리어 믿음 생활을 방해하는 것을 모른다. 하나님은 반드시 당신의 느낌에서 얻은 것을 다 제하시고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만 남게 하신다. 하나님은 이제 당신을 자신의 느낌이나 흥분은 조금도 없이 냉정하게 믿게 하여 당신을 산꼭대기에 오르게 한다. 이번에도 당신에게는 기쁨이 있지만 첫번째의 기쁨과는 완전히 다르다. 이번에는 하나님이 당신을 참으로 이기게 하셨다. 이것은 앞에서와 같은 상상적인 이김이 아니다. 당신은 이제 굴을 거쳐 두번째 산봉우리로 올라간 것이다.
어떠한 신도든지, 어떠한 진리에 대한 영적 체험을 얻으려 할 때 먼저 느낌에서 얻고, 굴의 시험을 거친 후에야 참으로 얻게 된다. 당신이 새로운 진리를 듣고 아주 기뻐할 때 당신은 즉시 그 아래에 굴이 기다리고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당신이 굴 속에 들어갈 때 그것이 하나님의 인도라는 것을 모르고, 도리어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면 당신은 위험하게 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원칙을 모르기 때문에 굴 속에 갇혀 나올 수 없게 된다. 하나님의 목적은 당신의 밖의 느낌과 밖의 지팡이를 제하고, 말씀만이 당신을 붙들어 당신으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능력을 갖게 하는 것이다. 모든 영적 진리는 굴의 체험을 거쳐야만 믿을만한 것이다.
처음에 당신은 진리를 듣고 받아들였다. 교사는 여기에 필요하다. 그는 우리에게 진리를 전해준다. 그러나 우리가 진리를 듣고 깨달았다 해서 우리의 것이 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항상 당신을 산꼭대기에서 평지로 데려와 당신을 굴 속에 들어가게 하신다. 그래야만 당신은 두 번째 산봉우리에 올라갈 수 있다. 그러한 진리만이 참으로 당신의 것이다.
위험한 것은, 특별히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첫번째 산봉우리에 이르러 무엇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나팔을 부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다. 듣는 사람도 그것을 듣고 진리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인도로 굴 속에 들어간 후에는 그들이 듣고 전파한 진리가 틀린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당신은 첫번째 산봉우리에 있을 때 그것을 성급하게 알릴 필요 없다. 당신은 반드시 굴 속에 떨어질 것이며, 굴 속에서의 시간은 일정치 않다. 굴을 거친 후의 진리만이 당신의 것이 된다. 당신에게 굴의 체험이 있은 후에만이 그 진리가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하나님이 이렇게 당신을 인도하는 것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고 감정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하기 위한 것이다. 굴 속에서 나올 때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이 당신을 구하지 않았다면 통과할 수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참된 것이다. 어떤 감정도 참된 것이 아니다. 어떤 형제 자매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에 굴 속으로 들어가게 될 때 그가 얻은 진리를 완전히 잃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굴의 시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느낌에서 얻은 진리를 실제 체험으로 변케 하신다. 바꿔 말하자면 우리는 굴 속에 있을 때 실제로 진리를 얻는다.
시를 잘 쓰는 어떤 형제가 어느 날 토기장이의 집에 가서 자기 굽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화병 위에 꽃을 그리고 글자를 쓰고 도기 굽는 가마 속에 넣어서 구웠다. 그 형제는 "불을 거치는 것이 이 화병들에게 고통스러울 텐데 굽지 않으면 안 되는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불을 거치지 않은 화병은 그 색채가 견고하지 않다. 그 도기는 반드시 불에 넣어 구워야 한다. 굽지 않으면 안 된다. 도기 가마 안에 넣어 굽는 화병 중에 어떤 것들은 온전한 화병이 되고 어떤 것들은 불을 이겨내지 못하여 쓸모 없는 것이 된다. 이 형제는 이것을 보고 감동을 받고 돌아와서 베드로가 말한 불의 시험을 주제로 하여 시를 썼다. 그 시 속에서 그는 자신을 화병으로 비유했다. 대강의 뜻은 이러하다.
주께서 내게 그려주신 꽃과 글
그 색깔 아름답지만
손으로 만지고 물로 씻을 때 견디지 못하네
불 속을 통과하지 않는 한 아무 것도 견고치 못해
아, 나는 도기 가마 안에 들어가야만 해
가마 안에는 눈물과 원망 있지만
변치 않는 아름다움
얻기 위해 참고 받아들이리
때가 차서 나오는 날
밖의 아름다움 안에도 견고해
모든 글과 그림 나와 하나되어
닦아내고 씻어내도 없어지지 않을 때
왕 앞에, 모든 사람 앞에 놓여져도 좋으리
이 화병에 꽃을 그리고 글을 썼어도 불을 거치지 않으면 부딪히고 씻을 때 지워지듯이 우리가 진리를 얻는 체험도 그러하다. 우리가 생각 안에서 깨닫고 느낌 안에서 흥분했던 진리들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 모든 진리는 시험을 거쳐야 한다. 당신이 인내에 관한 진리를 들었을 때 당신이 만나는 일들은 다 당신을 조급하게 한다. 언제나 당신이 받는 시험은 감정 안에서 얻은 진리와 상반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당신을 가마 안에 넣어 굽는다. 많은 사람들이 가마 안에 들어가서 다시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불을 거치고 나오면 견고해진다. 이때 당신은 또다시 산봉우리에 올라가게 된다. 전에 느낌에서 얻은 진리는 쓸 수 없지만 지금은 쓸 수 있다. 전에는 갈대였지만 지금은 예리한 검이다. 전에는 외관상으로만 보기 좋았지만 지금은 안에도 튼튼하다. 전에는 생각과 감정 안에 있던 것이 지금은 실지로 당신의 것이 되었다.
당신은 새로운 진리를 들을 때 기뻐하지만 그 후에는 시험이 잇달아 온다. 당신은 반드시 불을 거쳐야 한다. 충성된 것과 충성되지 않은 것의 분별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 화병의 색채와 외모가 좋다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불을 거치고도 존재할 수 있어야 쓸모 있는 것이다. 우리의 감정에서 얻은 것은 우리의 것이라 할 수 없다. 반드시 불을 거쳐야 실제로 얻게 된다.
그러므로 처음에 어떤 새 진리를 듣고 아주 기뻐할 때 결코 그 진리를 얻은 줄로 생각지 말라, 또한 굴 속에서 사방이 어둡고 빛이 조금도 없을 때에도 결코 당신이 당초에 얻은 진리를 잃은 줄로 생각지 말라. 굴 속에 있을 때가 바로 실제로 얻을 때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목적은 당신의 감정의 생활을 제하여 당신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게 하는 것이다.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지 감정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원칙이다.
모든 영적 체험의 과정은 항상 이러하다. 먼저 감정에서 기쁨을 맛보고(첫번째 산봉우리), 그 후에 굴의 체험이 있고, 다음에라야 참된 즐거움(두 번째 산봉우리)이 있다. 이때야말로 참으로 얻은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영적 체험의 초보에 있어서 먼저 우리의 느낌에서 즐거움을 맛보게 하시는가? 여기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다. 만일 당신이 맨처음에 그 진리의 맛을 느끼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모든 새로운 진리에 있어서 하나님은 먼저 우리에게 기쁨을 맛보게 하신다. 맛을 본 우리에게는 아쉬운 느낌이 들 것이다. 우리가 굴 속에 있을 때에도 여전히 아쉽다. 우리는 시험을 받고 굴에서 나올 때 그 진리의 즐거움을 완전히 누리게 된다. 먼저 맛을 보고, 시험을 거친 후에, 풍성하고 무한한 누림을 갖게 된다.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인의 길을 어떻게 가야 하는지 알 수 있다. 굴의 시험을 거치지 않고 얻을 수 있는 진리는 없다. 믿음이 생활의 원칙이요, 느낌은 신뢰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으로 하여금 당신의 느낌을 벗어나 하나님을 믿게 하신다. 느낌 안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당신은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
어떤 형제는, "왜 느낌에서 얻은 진리는 계산하지 않고 굴의 체험을 거친 것만을 계산하는가?"라고 묻는다. 그 답은 이러하다. 우리가 어떠한 진리에 대해 느낌 안에 즐거움이 있을 때 우리는 진리를 다 얻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아직 아무 것도 얻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굴 속으로 들어가게 하심은 진리를 실제로 우리의 것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굴 속에 들어가면 흑암뿐이요, 부축함이 조금도 없고, 하나님의 말씀은 다 헛된 것 같고, 그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조차도 모른다.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과 사실들이 아무 효력도 없는 것 같다.
느낌으로는 이것들을 다 잃은 것 같지만 한동안이 지나면 그 진리가 다시 당신을 찾아온 것 같다. 느낌으로는 다 없어진 것 같지만 지금은 이러한 진리들이 실제로 나타나 믿을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은 우리를 느낌으로 얻었다고 생각하는 데에서 벗어나게 하여 실제로 얻게 하신다. 우리가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여전히 느낌일 뿐이다. 반드시 굴을 거쳐야 한다. 굴속에서 얻은 체험만이 실제적인 체험이다.
형제 자매여,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지 밖의 감정에 의해 사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면 고갈 가운데에서도 즐거운 생활을 할 수 있고, 가장 즐거울 때에도 가장 고갈된 생활을 할 수 있다. 산골짜기에 떨어지고 굴 속으로 들어갈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을 앙망하고, 굴에서 나와 산봉우리에 올라갈 때까지 기다릴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다. 그러므로 형제 자매여, 믿음으로 살려면 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기쁨을 구하고, 절대로 퇴보를 원하지 않아야 한다. 성경을 읽을 때, 어떤 때에는 맛이 없더라도 퇴보하지 말라. 기도할 때, 어떤 때에 효과가 없다고 느껴지더라도 퇴보하지 말라. 간증을 할 때, 어떤 때는 힘이 없다고 느껴지더라도 퇴보하지 말라. 굴 속에 처하여 빛 없는 흑암에 있을지라도 후퇴하지 말아야 한다.
당신의 밖의 느낌이 어떠하든지 항상 후퇴하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살 수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을 얻을 수 있다. 형제 자매여,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지 감정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라.
워치만 니
[열두 광주리 가득히,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한국복음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