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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새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 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마 25:19-23)
우리의 영적 일에 있어서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시간"은 "영세"를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의 시간 안의 봉사는 영원한 세계를 위한 하나의 준비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시간 안에 넣어 놓으신 것은 우리를 훈련하여 영원한 세계에서 쓰기 위한 것이다. 시간은 우리가 영적 훈련과 교육을 받는 학교와 같은 것이다. 우리는 시간에서 영적 훈련과 교육을 받아 영원한 세계에서 하나님께 합당하게 쓰일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시간에서의 봉사는 영원에서의 봉사를 위한 준비이다.
마태복음 25장에는 주님께서 돌아오신 후 종들에게 하신 말씀이 있다. "네가 작은 일에 충성 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오늘 당신이 만일 잘 배운다면 주님이 오신 후 그가 당신에게 더 크고 더 많은 일을 부탁할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은 배워야 할 때이고 주님이 오신 후 우리는 정식으로 봉사하게 된다. 어떤 형제 자매는 영적 봉사는 왕국시대에만 있고 영원시대에는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요한 계시록 22장을 볼 때 영원한 시대에 있어서도 여전히 하나님께 봉사함을 알 수 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두신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과 함꼐 봉사하는 것을 배우게 하여 하심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오늘 우리의 시간 안에서의 봉사는 영원에서의 봉사를 위한 준비이다.
우리가 구원받던 날부터 주님께서는 자기의 생명을 우리 안에 넣어 놓으시고, 또 구체적인 일에서 우리를 조금씩 훈련하시어 갈수록 우리들이 하나님과 함께 동역하는 것을 배우게 하시고 하나님과 조화되게 하신다. 하나님은 자신의 성품을 사람 속에 조화시키어 사람을 그의 손에 유용한 존재로 만드신다.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성분에 따라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유용도가 결정된다. 하나님의 성분은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데에서만 가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봉사하는 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속에 조화되지 않으면 그 어떤 영적 일도 할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유용하게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성분이 우리 속에서 조화될 때에만 이루어진다. 조화된 그 성분이 바로 영적 유용함이다.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우리 속에 조화시키어 그 생명이 나올 때 우리는 유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시간 안에서 오직 자기의 성분을 하루하루 우리 안에 더해 주신다는 것이다. 우리의 육은 너무 두꺼워서 하나님이 우리 속에서 투과해 나올 수 없다. 얼마이 시간이 지난 후에도 하나님은 우리 속에서 나올 수 없고 몇 년이 지나도 완전히 투과해 나올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오랜 시간을 거쳐 자기 자신을 우리 속에 조화시킬 때 우리는 비로소 유용하게 되는 것이다. 이 시간은 하나님이 우리로 배우게 하시는 때요, 우리가 정식으로 봉사할 때가 아니다. 오늘은 단지 봉사하는 것을 배울 때다. 하나님은 많은 영혼을 우리 앞에 놓으시어 우리로 배우게 하시고 많은 형제 자매를 우리 앞에 놓으시어 우리로 배우게 하신다. 이렇게 우리는 주님 앞에서 계속 배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뜻대로 하지 말고, 우리 방법대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과 같이 배우며 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배우기만 할 뿐 하지 않고 어떤 사람은 하기만 할 뿐 배우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두 가지를 조화시키어 배우면서 해야 하고, 하면서 배워야 한다. 그러면 영적으로 배우는 훈련에서는 무엇을 주의해야 할까? 우리가 복음서를 볼 때 베드로는 주님을 삼 년 동안 따라 다녔다. 베드로는 주님을 따라 다니면서 배웠는가, 했는가? 그는 하면서 배웠다. 그러면 배운 것은 무엇인가?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어떻게 사람 속에 넣어 주는가에 대해 가르치셨다. 베드로는 어떻게 자기의 생각에서 벗어나 주님의 생각 안으로 들어가느냐에 대해 배운 것이다.
우리는 이제 마태복음 16장에 기록된 베드로의 역사를 보기로 한다. 주 예수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할 것을 그의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베드로가 주님을 붙들고 간하여 말하기를,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주님은 또 말씀하셨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여기에서 "자기"는 무엇인가? "자기"는 어디에 숨어 있는 것인가? 위의 성경 말씀을 볼 때 "자기"는 사람의 생각에 숨어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 베드로가 참 좋다, 베드로는 주님을 정말 사람한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주님은 이것을 사탄이라고 하셨다. 이것은 사람의 생각이라고 하신 것이다. 여기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것은 "자기"는 사람의 생각에 숨어 있다는 사실이다. 사탄은 항상 사람의 "자기"를 이용한다. 그러므로 사탄을 대적하려면 자기를 버려야한다. 주님께서 베드로를 인도하여 가르쳐 주신 것은 주님께 봉사할 때는 언제나 사람의 생각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생각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생각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서 죽어야 한다는 것이며, 베드로가 그렇게 주님을 사람하는 것은 단지 사람의 생각일 뿐이다.
아, 형제 자매여, 우리는 다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주님께 봉사하려는 마음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때로는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그것까지도 우리의 생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많은 봉사가 주님께서 보실 때에는 가치가 없는 것이며 책망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든지 사람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에 이르러야 한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한 단원이다. 우리는 사람의 생각에서 벗어나올 때 하나님의 생각으로 들어갈 수 있고, 그 때만이 우리가 배웠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마태복음 17장에 기록된, 산 위에서 주님의 형상이 변화된 일을 볼 때 베드로는 또 자기 생각으로 말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누가 그에게 초막 셋을 지으라고 했던가? 여기에서도 베드로는 자기 생각으로 말한 것임이 드러난다. 그가 이렇게 말할 때 하나님은 즉시 말씀하셨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이 뜻은 바로 주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여기에서 모세와 엘리야를 자기 아들과 동등하게 높이라고 했는가? 결코 아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이 말씀은 이제부터 너희들은 모세의 말-율법-도 듣지 말고, 엘이야-선지자-의 말도 듣지 말고 오직 주 예수님의 말을 들으라는 뜻이다. 사복음서를 통해 베드로를 볼 때 그가 옳은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하셨다.
그러나 같은 장, 마태복음 16장 22절에서 주님이 예루살렘에 가서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을 때 베드로는,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말했다. 이 것을 볼 때 베드로 자신으로서는 옳은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에서 베드로가 말한 말은 하나님이 주신 말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뜻이 아무리 좋고, 사람의 방법이 아무리 많아도 영적 일에 있어서는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다.
베드로는 마태복음 26장에서 또 한번 배웠다. 주님께서 팔리시던 날 밤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오늘 밤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실족하리라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고 하셨다. 그때 베드로는 대답하기를, "다 주를 인하여 실족할지라도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실족지 않겠나이다 (버리지 않겠나이다)"고 했다. 베드로에게서는 또 자기가 나왔다. 그는 자기 눈으로 자신을 판단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매우 강하고, 다른 사람과는 다른 존재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한낱 비천한 하녀의 질문에도 이기지 못하고 넘어졌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환경으로 말미암아 그의 "자아"를 나타나게 하시어 그 "자아"를 부수는 것이다. 우리는 사도행전 1장에 나타난 베드로를 볼 때 사복음서에서의 베드로와는 젼혀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의 그는 자기 생각을 완전히 벗어난 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성경을 알고 예언을 알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도 알았다. 비록 그 후에도 그에게 과실이 있었으나 그는 이미 많이 배운 자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 자매여, 우리는 배우며 하나님께 봉사하자. 우리는 언제든지 우리의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을 배우자.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쓸모없는 자가 되고 만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모든 봉사는 다 하나님이 우리 속에 들어보셔서 우리를 거쳐 나오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속에 들어오셨다가 나가실 때 비로소 우리에게 봉사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들어오셨다가 나가지 않는 사람은 다만 다른 사람에게 그의 머리만 부딪히게 할 뿐이요 그의 하나님은 부딪히게 할 수 없다. 우리가 우리의 생각에 빠지는 일은 정말 무서운 일이다. 그 때 우리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나게 할 수 없다. 우리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나게 하려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 벗어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우리의 기도까지도 다 자신의 생각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생각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 때 우리는 비로소 참으로 배우게 되고 참된 봉사가 있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간에서 주님과 동행할 뿐 아니라 왕국에서도 주님과 같이 왕 노릇하게 되며, 영원한 세계에서도 능히 좋은 봉사를 할 수 있게 된다. 주님의 은혜와 긍휼이 있기를 원한다.
워치만 니
[열두 광주리 가득히, "배우면서 하라", 한국복음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