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성한 말씀을 누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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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마9:38).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막11:22).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 함이로라』(고후5:7).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롬1:1).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롬1:14).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고후12:1).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고후12:4).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12:7).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10).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마13:9).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 것과 옛 것을 그 곡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마13:52).
『에브라임이 열방에 혼잡되니 저는 곧 뒤집지 않은 전병이로다』(호7: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

 

 

오늘은 우리가 하나님의 정하신 길이 어떠한 길인가를 볼 수 있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 주시기 바란다. 내가 여러 성경 구절을 읽는 것을 보고 왜 그럴까를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내가 이곳 저곳을 읽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러분은 먼저 호세아 7장 8절의 『에브라임이... 뒤집지 않은 전병』이라는 말씀을 주목하기 바란다.

 

형제들이여, 우리가 무엇을 하든 하나님에게는 다 양면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새도 날개가 두 개 있어야 하늘을 날 수 있고 잎사귀도 양면이 있어야 완전하게 보인다. 문(門)에도 두 짝이 있다. 우주 가운데의 모든 것에 다 균형이 있는 것이다. 자연과 같이 영적인 면에도 균형이 필요하다.

 

호세아 7장 8절은 「에브라임이... 뒤집지 않은 전병』이라고 말했다. 뒤집지 않는 전병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다 전병을 만들어보지는 않았지만 먹어보기는 했을 것이다. 전병은 어떻게 굽는 것인지 모르더라도 두부를 튀기거나 요리하는 것은 보았을 것이다. 두부를 튀길 때나 요리할 때 한쪽만 튀기거나 익히고 뒤집지 않는다면 한쪽은 너무 익혀지고 한 쪽은 너무 날 것일 것이다. 그 이유는 한쪽을 굽는 화력은 너무 크고 다른 쪽에는 화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요리를 하거나 두부를 튀길 때에는 한면에 필요한 화력만큼 다른 면에도 화력이 필요하다. 만일 한면만 계속 굽는다면 결국에는 한면은 타고 다른 면은 날 것이 될 것이다. 탄 음식은 사람에게 공급할 수 없고, 양식이 될 수 없다.

 

오늘 나는 에브라임이 이방인과 혼잡하여 어떻게 뒤집지 않은 전병이 되었는가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은 「뒤집지 않은 전병」이라는 단어를 주의하기 바란다. 이 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생활의 원칙이다. 어떤 일을 너무 지나치게 중요시하는 사람은 뒤집지 않은 전병이다. 한 면만을 불에 구우면 그 면을 익힐 수는 있지만, 만일 그것을 뒤집어 굽지 않는다면 반대쪽이 익지 않을 뿐 아니라 아무 쓸모 없게 된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양면의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어떤 일에 대해 지나치게 한 면만 중시하는 것은 뒤집지 않은 전병임을 보여 주겠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어떤 것이 뒤집지 않은 전병인가? 어떤 사람은 개인적인 영적 생활에 너무 중점을 두고 단체 생활을 잊어버린다. 그 사람은 뒤집지 않은 전병이다. 어떤 사람은 단체 생활에 너무 중점을 두고 개인 생활을 잊어버린다. 그러한 사람은 뒤집지 않은 전병이다.

 

어떤 사람은 너무 공의에 중점을 두므로 그에게서 은혜를 조금도 볼 수 없다. 이러한 사람이 뒤집지 않은 전병이다. 공의는 옳은 것이다. 그러나 너무 공의에만 중점을 두고 은혜면을 잊어버리는 것은 뒤집지 않은 전병이다. 어떤 사람은 전적으로 남의 비위를 맞춰 주고 대우를 잘 해준다. 그러나 그에게 공의의 원칙은 조금도 없고 남에게 상처를 안 주려고 할 뿐이다. 이러한 사람은 은혜 면에만 너무 중점을 두고 공의 면을 주의하지 않는 경우이다. 이것 또한 뒤집지 않은 전병이다.

 

또 어떤 사람은 객관적인 진리만을 주의하고 그 사람 속에 성령의 역사하심을 잊어버린다. 이러한 사람도 뒤집지 않은 전병이다. 주관적 진리만을 주의하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성취하신 사실들을 주의하지 않는 사람도 뒤집지 않은 전병이다. 뒤집지 않은 전병이 무엇인가에 대해 더 많은 예를 말할 수 있지만 시간 제한상 이상 몇 가지 예만 언급한다.

 

우리는 어떠한 진리에 대해 지나치게 주의해서는 안 된다. 항상 모든 진리에 균형을 갖고 중점을 두어야 한다. 성경에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사실이고, 둘째는 원칙이다. 우리는 성경에 있는 사실을 믿어야 하고 원칙을 순종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사실에만 중점을 두고 원칙을 주목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람은 한쪽면만 계속 굽는 뒤집지 않은 전병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원칙에만 중점을 두고 그리스도가 이룬 사실은 주목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람들도 한쪽만 계속 굽는 뒤집지 않은 전병이다. 이렇게 한 극단으로 치우치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이상한 모습의 생활을 하게 하며 온전한 경지에 이르지 못하게 한다.

 

오늘 여기에서는 여러분이 이 한 가지 사실에 주의하기 바란다. 그것은 우리가 균형잡힌 그리스도인이 되고 뒤집지 않은 전병이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뒤집지 않은 전병에 관한 예를 다 말할 수 없었으므로 몇 가지만을 언급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균형잡힌 그리스도인이 되는가에 대해 말하겠다. 이것에 대해 주님은 어떻게 말씀하셨으며 바울의 본은 어떠한가를 보기로 하자. 사복음서는 주님의 명령을 보여주고. 바울의 서신에서는 바울의 체험을 보여 준다.


주님의 명령

 

첫째, 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요구이다. 이것을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한다. 주님은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마13:9)고 말씀하시고, 「천국의 제자된 가르침을 받은 서기관마다 마치 새 것과 옛 것을 그 곡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마13:52, 원문 참조)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지식을 언급한 것이다. 믿는이로서 뒤집지 않은 전병이 되지 않으려면 반드시 지식면에서 진보해야 한다.

 

둘째로,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 이유는 주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라』(마11:22, 원문 참조)고 하셨기 때문이다.

 

세째로, 주님은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마9:38)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열심이다. 복음 전파에는 반드시 열심이 있어야 한다.

 

네째로, 주님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생명을 가리킨다. 여기에서는 특별히 사랑을 가리키고 있다. 우리는 다른 면에서는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할 수 없지만 사랑하는 마음 면에서는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은 온전함을 추구해야 한다.

 

주께서 사마리아를 지나실 때 저희가 받아들이지 않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눅9:54)라고 말했다.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두 제자를 책망하시며 가라사대 「너희는 너희의 마음이 어떠한가 모르는구나』(눅9:55, 중국어 성경 참조)라고 말씀하셨다. 오, 우리는 자신이 어떠한 마음을 품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이렇게 분류하는 것은 내 임의로 한 것이 아니다. 사복음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주님의 명령을 이 네 방면으로 귀납(歸納)시킬 수 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의하라고 하신 것은 믿음이 아니면 열심이고, 지식이 아니면 생명이었다. 항상 이 네 가지 중의 하나였다.


바울의 본

 

바울은 꼭 그러한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11:1)고 말할 수 있었다.

 

바울의 지식을 말한다면, 하나님까지도 그의 지식이 너무 높을까 두려워하시고 사탄의 사자를 그에게 주어 그를 눌러서 자고하지 못하게 하셨다. 바울은 낙원에 대해 말할 때, 그가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고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을 들었다고 말한 것을 볼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매우 많은 것을 보여 주셨음을 알 수 있다. 바울 속에는 아직 하지 않은 말이 많았다. 오늘도 우리는 그에게 물어볼 것이 많을지 모른다. 바울은 다 알면서도 말하지 않았다. 그는 매우 많은 비밀을 깨닫고 알고 있었다. 그는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다」고 말하며 「내가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줄 생각하노라』고 말했다.

 

믿음을 말할 때, 바울은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 함이로다』(고후5:7)라고 말했다. 그가 에베소에서 야수와 함께 싸울 때 심지어 살 소망까지도 다 끊어졌다. 그러나 그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의뢰함으로 유익을 얻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적을 행했고, 병도 고쳤고, 선지자 노릇도 했고, 독사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가 탄 배가 큰 풍랑을 만났을 때 모든 사람이 구원될 희망을 잃고 며칠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 사람들이 볼 때 아무런 방도가 없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에게 차분히 권면하여 사람들을 안심시켰다. 바울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행 27:25) 때문이다. 이것이 바울의 믿음 생활이었다.

 

바울이 지식이 있고 믿음이 있을 뿐 아니라 생명 또한 매우 성장했다. 그는 진정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고 말하고,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1:21),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후4:11)고 능히 말할 수 있었다.

 

또 한면인 복음 전파에 있어서 바울에게는 더이상 열심을 낼 수 없을 정도의 열심이 있었다. 그는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했다. 그는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것이 없고』라고 했다. 형제들이여, 여러분이 어느 지방에서 복음을 전할 때 더이상 전할 곳이 없을 정도로 복음을 전했는가? 바울의 말에 의하면 그는 모든 사람의 얼굴을 다 아는 것 같았다. 그는 길에서나 바다에서도 복음을 전파했고, 감옥에서도 전했다. 그가 로마에서 매인바 되었을 때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도 간증을 했다. 그러므로 그를 지키던 간수도 복음을 받아들였다. 그 간수는 본래 바울을 지키던 간수였다. 그러나 이제 바울이 전한 그리스도가 그 간수를 지키게 되었고, 그 간수는 그리스도의 죄수가 되었다.

 

나는 주님의 명령과 바울의 체험에 대해서만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도 이땅에서 균형잡힌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이 네 가지에 주의해야 한다. 우리에게 열심이 있어야 할 뿐 아니라 믿음도 있어야 하고 지식 면에서 성장해야 할 뿐 아니라 생명도 자라야 한다. 만일 이 네 가지 중 한 가지라도 부족하다면 균형이 없게 된다. 여러분은 이제부터 신약을 읽을 때 바울의 체험을 열심과 믿음과 지식과 생명의 네 방면의 특징을 따라서 보라. 이것이 바울의 체험의 대체적인 네 방면이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열심을 갖고 믿음을 갖도록 격려하셨을 뿐 아니라 지식도 증가해야 하고 생명도 성장해야 한다고 하셨다.

 

먼저 믿음에 대해 말하겠다. 오늘날 교회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은 교회가 황폐하고 주님을 바라보는 눈길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완전하신 주님이 계시지만 그를 믿는 우리에게는 여러 유형이 있다. 내가 말하는 것은 범죄하는 면에 있어서의 차이, 즉 어떤이는 성질이 있고, 어떤이는 교만한 것 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탄은 이러한 것들을 몇 백 가지의 모양으로 만들 수 있다. 내가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유형은 선한 면을 말하는 것이다. 형제 자매들이여, 여러분은 사람들을 접촉할 때 그들에게서 각 사람의 장점을 느끼지 못했는가?


한 극단으로 치우치는 예

 

중국 귀주(貴州)에 주님을 위해 열심이 있는 한 외국 선교사를 만난 적이 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 재능 있는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모든 것에 개의치 않고 중국 내륙에 복음을 전하려는 마음이 있었다. 그는 경자(庚子)년에 중국에서 복음을 전했다. 참으로 그에게는 복음 전하는 재능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열심에만 지나치게 주의하는 바람에 다른 면에 부족함이 많았다.

 

상해(上海)에서 성경을 잘 외우는 외국 선교사를 만난 적이 있다. 나는 그 사람처럼 성경을 한 구절 한 구절 잘 외우는 사람을 못 봤다. 그의 성경 해설에도 빛이 있었다. 그의 지식은 정말 뛰어났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그렇지 못했다. 그가 병들었을 때에는 아무런 도리가 없었다. 감기에만 걸려도 곧 의사를 찾는다. 그는 믿음에 대해 지식이 있고 잘 전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어찌된 일인지 확신이 없었다. 동시에 그의 생명 면도 그의 지식보다 못 했다.

 

또 내가 알고 있는 한 여선교사는 참으로 양같이 온유하다. 만일 당신이 그녀와 함께 기도한다면 곧 감동을 받게 된다. 그녀는 전혀 화내지 않는다. 그녀가 있는 곳에는 늘 하나님의 임재가 있었다. 그녀는 생명 면에서 정말 진보한 자매였다. 그러나 그녀는 지식적으로는 아는 것이 없었고 믿음과 열심도 있지만 그녀의 생명보다는 성장하지 못한 것이었다.

 

또 한 선교사는 믿음은 매우 크다. 주머니 속에 한 푼도 없어도 믿음이 있었다. 내가 그녀와 함께 있을 때마다 그녀는 늘 이것이 그녀의 마지막 동전이라고 말했다. 그녀가 사는 곳은 시골이었지만 몇 십년 동안 그녀의 필요에 부족한 때가 없었다. 그녀가 그리스도의 승리라 말할 때, 나는 그녀에게서 그리스도의 승리가 나타났음을 보았다. 그러나 그녀가 얻은 생명 면은 그녀의 믿음 면보다는 못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을 열심파, 믿음파, 지식파, 생명파로 나눌 수 있는가?(우리가 알고 있는 것으로 고의로 다른 사람을 비평치 않고 피차 유익을 얻기를 하나님께 바란다.) 나는 고의적으로 이렇게 나누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우리 가운데 자연히 이러한 네 파가 있게 된다는 뜻이다. 이러한 현상은 죄가 아니다. 이것은 매우 좋은 것이다. 당신이 어떤 면에서 발전하고 진보한 사람을 접할 때 당신은 그의 그면이 매우 좋다고 느낄 것이다. 많은 경우에 어떤 사람이 열심파이면 당신은 믿음파이고, 다른 사람이 지식파이면 당신은 생명파이다. 대개가 어떤 한 방면에만 특별한 발전이 있는 유별난 발전을 한다. 그리스도인 중에 어떤 사람은 어떤 면에서, 또 어떤 이는 다른 면에서 계속 전진한다. 그러므로 네 방면에 다 진보하여 균형잡힌 그리스도인은 아주 드물다.

 

나는 성결파에 속한 사람들에게 장점이 있음을 시인한다. 그들은 생명에 주의를 한다. 웨슬레 같은 사람들은 생명 면에서 아름답게 장성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아는 데 있어서도 절대적이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깊은 성경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을 별로 찾을 수 없다. 그들은 지식면에서 매우 부족하다. 그들은 믿음도 좋고 열심도 있지만 지식 면에는 무언가 결함이 있음을 볼 수 있다.

 

또 한 종류는 형제회의 사람들이다. 당신은 그들 가운데서 한 가지 기이한 일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의 장점은 믿음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에게 믿음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또한 생명도 아니다. 이 말도 그들에게 생명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또한 열심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복음 전파에 조금 냉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식과 성경 해설을 말할 때 그들이 하나님께로서 받은 빛과 계시는 정말 뛰어나다. 지식 면에서 그들은 정말 특별한 은사를 가졌다.

 

중국 내지(內地) 선교회의 창시자인 허드슨 테일러는 참으로 믿음이 있는 사람이다. 테일러가 처음으로 내지 선교회를 창설했을 때 그가 가지고 있는 돈은 몇 파운드 밖에 안 되었다. 그는 그 돈을 은행에 「내지 선교회」의 이름으로 적금했다. 이것이 내지 선교회의 시작이었다. 현재 그들에게 들어오는 돈은 일분에 몇 파운드씩이다. 최초에 내지(內地)에 가서 전도한 사람은 몇 사람뿐이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돈이 그 몇 사람의 쓰기에 부족했을 때, 그는 하나님께 사람을 보내달라고 간구했다.

 

그는 하나님께 몇 명을 보내달라고 구하고, 또 몇 십명을 보내달라고 구하고, 또 몇 백명을 보내달라고 간구했다. 그는 믿음 면에서 참으로 자람이 있는 사람이고, 생명 면에서도 좋다. 그러나 지식 면은 그의 믿음처럼 뛰어나지 못하다.

 

열심 있는 사람의 예는 외국에서나 중국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최초로 중국에 전도한 모리슨(Morrison Robert. 1782-1834) 같은 사람은 매우 열심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다른 면은 그의 열심보다 뛰어나지 못했다.

 

내가 이러한 예를 여러분 앞에 드는 것은 우리가 한 방면만을 주목하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지식이 뛰어난 사람에게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열심이 좋지 않으면 우리에게도 열심이 없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 믿는 이들 가운데 매우 좋지 않은 광경은, 어떤 사람은 지식을 저버리고 어떤 이는 생명을 주의하지 않는 점이다. 지식에는 관심하지 않고 생명만을 관심하는 사람은 아무 것도 몰라도 그냥 지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생명을 주의하지 않고 지식에만 관심을 두는 사람은 남을 가르친 후에 곧 성질을 내며 화를 낸 후 얼굴의 화가 가시기도 전에 또 앉아서 남을 가르친다.

 

형제들이여, 우리는 다른 사람의 단점만을 주의해서도 안 되고 장점만을 주의해서도 안 된다. 생명이 올바르지 못할지라도 지식이 뛰어날 수 있고 열심은 좀 부족할지라도 믿음은 약하지 않고, 생명은 좋지만 남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이 있으면 믿음 면에서 그를 따르고, 지식이 뛰어난 사람이 있으면 지식 면에서 그를 따라야 하며, 생명이 풍성한 사람이 있으면 생명 면에서 그를 따르고, 열심 있는 사람이 있으면 열심 면에서 그를 따라야 한다. 만일 당신이 균형잡힌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이 네 방면에 대한 추구가 있어야 한다.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능력을 얻게 하고 지식은 하나님의 일을 깨닫게 한다. 생명은 하나님의 사랑과 빛을 우리 몸에서 나타내게 하고 열심은 하나님을 사람에게로 전하여 사람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얻게 한다. 우리는 기회 있을 때마다 전도지를 뿌리고 동료와 가족과 자녀들에게 간증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이 네 방면 중 한 방면만 주의한다면 그것은 뒤집지 않은 전병이다.

 

또다른 면에서,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기도를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어떤 성도는, 기도는 어린아이가 할 일이요 장성한 사람은 간구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이것은 우스운 말이다. 또한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기도에서 하나님의 응답이 불필요한 기도로, 하나님에서 기도를 듣는 기도에서 듣지 않는 상태로 진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말을 하는 사람은 믿음이 부족하다. 만일 기도가 전혀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않은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그를 체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기도에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체험이 있어야 한다.

 

믿음이 부족해서는 안 된다. 교회 가운데 지식 있는 사람이 적지 않고, 열심 있는 사람도 적지 않으며, 생명이 자란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러나 가장 부족한 것은 믿음 있는 자이다. 다른 세 방면에서는 자람이 있는 사람을 많이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믿음면에서 자람이 있는 사람은 그리 많이 찾아낼 수 없다.

 

어떤 면으로는 지식도 또한 긴요하다. 지식도 이 네 방면에서 상당한 지위를 갖는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성경의 중요한 진리를 모르거나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원칙과 성경의 개요를 모른다면 각종 이론을 다 받게 될 것이다. 침례를 예로 들어 보자. 주께서 십자가에서 머리를 숙이셨기 때문에 침례 받을 때 머리를 숙여야 한다고 말할 때 당신은 일리가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만일 당신에게 성경 지식이 있다면 주님이 십자가에서는 머리를 숙이셨지만 무덤 안에서는 머리를 숙이시지 않았음을 알 것이다.

 

구원받은지 1, 2 년 또는 5 년쯤 된 사람에게 칭의(稱義)와 구원이 어떻게 다르냐고 물을 때 비슷하다고 대답하는 사람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러한 사람은 칭의가 무엇이고 구원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이다. 그 사람에게는 죄 사함이나 구원도 비슷하고, 모든 것이 비슷한 것 같다. 믿음만 가지고 다른 면을 주의하지 않는 사람은 한 쪽만 계속 굽고 뒤집지 않는 전병이다. 지식이 없으면 어떻게 가야할지를 모른다. 지식이 없는 사람은 자신이 장님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인도할 수도 없다.

 

우리는 또한 생명 면을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추구해야 하고 모든 죄악으로부터 승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알게 하시기를 간구하고 우리가 이기지 못한 죄를 발 아래 두게 하시기를 간구하자. 그리스도가 내 안에 거하시므로 내가 알고 있는 죄를 이미 다 이겼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그리스도인이 자라지 않는 이유는 아직 죄를 이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일매일 자아를 거절하고 처리해야 하며 죄악을 처리해야 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 날마다 성령이 우리 속에 역사하게 하여 그분의 생명이 흘러나오게 해야 한다.

 

오늘 나는 이 네 가지를 여러분 앞에 두었다. 우리가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이 네 방면에서 추구해야 하고 한 면만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반드시 이 네 방면이 균형 있게 발전해야 하며 뒤집지 않은 전병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께 열납되도록 사랑을 추구하고, 지식을 추구하며, 또한 믿음과 열심을 추구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시기 바란다.


위트니스 리
[열두 광주리 가득히 9, "그리스도인이 주의해야 할 네 가지 일", 한국복음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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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진리의 기둥과 터 청지기 12.03.08.12:43 1194
그리스도인이 주의해야 할 네 가지 일 청지기 12.03.08.12:39 1104
70 새어버림과 떠돌아다님 청지기 12.03.08.12:32 968
69 사랑의 말씀 청지기 12.03.08.12:10 866
68 희년 청지기 12.03.08.11:37 1171
67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image 청지기 12.03.08.11:24 991
66 주 예수에 대한 두 종류의 인식 청지기 12.03.08.10:22 990
65 배우면서 하라 청지기 12.03.08.10:17 830
64 혼과 영의 구분 청지기 12.03.08.10:13 1696
63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청지기 12.03.08.10:09 1142
62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청지기 12.03.08.10:00 1645
61 인격이신 그리스도를 사랑함 청지기 12.03.08.09:50 927
60 잠언에 대해 가져야 할 건전한 태도 청지기 12.03.08.09:46 898
59 영 안에 생명이신 그리스도 청지기 12.03.08.09:31 920
58 성경 해석의 원리 청지기 12.03.08.09:21 948
57 성령의 통제 청지기 12.03.08.09:16 981
56 십자가를 통한 사역 청지기 12.03.08.09:12 1004
55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 청지기 12.03.08.09:08 863
54 하나님의 건축을 위한 어린양의 일곱 눈 청지기 12.03.08.09:04 866
53 육체의 탄식―휴거되기 전 청지기 12.03.08.09:01 965
52 합일과 분열의 근거 청지기 12.03.08.08:57 938
51 교회들이 세워진 근거 청지기 12.03.08.08:55 862
50 어떻게 내면의 인도를 따르는가 청지기 12.03.07.16:33 809
49 모든 사람을 사랑함 청지기 12.03.07.16:24 931
48 성경 해석을 지배하는 원칙 청지기 12.03.07.16:22 839
47 하나님이 계심에 대한 체험과 토론 청지기 12.03.07.16:06 993
46 네 가지 소극적인 요인들을 주의하라 청지기 12.03.07.15:59 954
45 십자가에 못박힌 생활을 삶 청지기 12.03.07.15:52 1076
44 가정집회들과 이주와 전시간 사역자들 청지기 12.03.07.15:42 944
43 동료 믿는이들을 향한 우리의 태도 청지기 12.03.07.15:37 758
42 성도들을 진리 안으로 이끎 청지기 12.03.07.15:24 806
41 구속과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에 대한 이상 청지기 12.03.07.14:02 1169
40 사역의 하나에 대한 공과 청지기 12.03.06.12:48 776
39 하늘에 속한 이상―몸에 대한 이상 청지기 12.03.06.12:23 1174
38 하늘에 속한 이상―그리스도에 대한 이상 청지기 12.03.06.12:16 1448
37 복음을 위해 바울이 고난받고 은혜를 누림 청지기 12.03.06.11:47 2349
36 권위의 기도 청지기 12.03.06.11:42 1385
35 교회의 기도 사역 청지기 12.03.06.11:36 1345
34 주님의 사역자의 성격―진리의 절대성 청지기 12.03.05.15:43 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