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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시대에 왕국 안에서 영생을 얻음
복음을 전할 때 우리는 사람들에게 예수를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고 말한다. 그렇다. 사람이 예수를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사람은 누구나 오늘 교회 시대에서 사람이 믿기만 하면 영생을 얻는다는 것을 안다. 이것이 우리의 메시지이다.
그러나 여기에 한가지 문제가 있는데, 곧 이 영생이 어느 때에 우리가 누리도록 나타나고 발견되느냐는 것이다. 오늘 우리들의 생각과 영은 종종 사망의 공격을 받고 있다. 사탄은 여전히 그의 세력을 가지고 있다. 어느 때가 영생이 완전히 나타날 때인가? 새 하늘과 새 땅의 때인가 아니면 왕국 안에서인가?
요한복음 5장 24절-29절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여기 24절에서는, 사람이 예수를 믿으면 영생을 얻고 심판에 떨어지지 않게 되며, 사람이 주 예수의 말씀을 듣고 주 예수를 보내신 아버지를 믿는 이것이 곧 영생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29절은 선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말한다. 여기서의 「생명」은 조에(zoe)로서 앞에서 말한 영생과 같은 단어이다. 무릇 선을 행한 자는 조에(zoe)를 얻게 되고 악을 행한 자는 심판을 받게 된다. 24절은 분명히 우리가 영생을 이미 얻었다고 말하는데, 29절에서는 부활할 때에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의 차이점을 보라.
25절에서 말한 것은 교회 시대의 일이다. 여기서는 죽은 자가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게 되리라고 말한다. 우리는 다 죽은 사람들이다. 우리는 하나님 아들의 음성을 들은 결과 살아나게 되었다. 28절은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라고 말한다. 25절은.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고 말한다. 28절에서는 「때가 오나니」라고 말했을 뿐 「곧 이 때」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것은 장래의 일이지 결코 현재의 일이 아니다.
여기서는 장래 무덤에 있는 자들이 나온다고 말한다. 앞에서는 죽은 사람을 말했고, 여기서는 무덤에 있는 죽은 사람을 말했다. 앞의 죽은 사람은 죄와 허물로 죽은 사람을 가리키고, 여기서 말한 무덤 속의 죽은 사람은 영혼이 죄 가운데 죽은 사람이 아닌 몸이 죽은 사람을 가리킨다. 모든 육신이 죽어서 무덤에 있는 사람은 장래 두번째로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게 될 것이다. 그 때 선을 행한 사람은 생명의 부활로, 악을 행한 사람은 심판의 부활로 나오게 된다. 두번째로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는 때는 바로 모든 무덤에 있는 사람들이 거기서 나올 때이다.
마가복음 10장 30절을 보기로 하자.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여기서 주 예수님은 또 한 번 영생에 대해 말씀하셨다. 우리는 이 영생이 무엇인지를 주의해야 한다. 마가복음 10장 30절의 영생은 요한복음에서 말한 교회 시대의 영생이 아니고 장래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영생도 아니다. 여기서 말한 것은 내세에 얻게 될 영생이다.
「내세(來世)」라는 단어는 원문에서 다음 시대 혹은 차기(次期) 시대를 뜻한다. 오늘 이 시대는 은혜 시대이고, 다음 시대는 왕국 시대 혹은 천년왕국 시대이다.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신 내세에 영생을 얻으리라는 것은 예수를 믿음으로 얻는 영생을 가리키지 않는다.
주님이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한 사람이 주 예수님께 와서,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다. 이것은 행위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은 그에게 행위로 인한 영생을 알려주신 것이다. 주님은 율법을 지키고 모든 소유를 팔아야만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막 10:17-21).
요한복음에서 주님은 영생을 얻는 것이 은혜에 근거할 뿐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님을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주신다. 그런데 왜 여기서는 율법을 지키고 모든 소유를 팔아야만 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는가? 이는 마가복음 10장에서 말한 영생이 요한복음에서 말한 영생과 다르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10장의 영생은 행위가 있어야 얻을 수 있고, 요한복음의 영생은 믿음으로 얻을 수 있다.
그 젊은 청년이 떠난 후에 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라고 하셨다. 주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자 제자들은 그분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의아하게 여겼다. 주 예수님은 또, 『재물을 의지하는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이 심히 놀라 서로 말하기를,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라고 했다. 예수님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고 하셨다.
베드로가 말하기를,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장래 무엇을 얻으리이까)』라고 하자 주 예수님은 장래의 일을 그들에게 알려주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 10:23-30). 그들은 왕국 안에서 영생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좀전에 우리가 말한 영생은 왕국 안에서의 영생이다. 왕국 안에서의 영생은 행위로 얻는 것이고, 헌신함으로, 주님과 함께 고난 받고 함께 수치받음으로 얻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오늘날의 영생은 이미 해결되었고 영원에서의 영생도 이미 결정된 것이다. 그러나 왕국 안에서 영생을 갖게 될 것인가의 여부는 당신이 주님을 사랑했는가 복음을 널리 전파하기 위해 모든 소유를 버렸는가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았는가, 세상을 거절했는가에 달려 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당신은 돈이나 물질이나 가정 혹은 세상 사람을 위해 살고 있지는 않은가? 주 예수님은 만일 당신이 주님을 사랑하고 복음을 위해 모든 소유를 버린다면 오늘날 이 모든 것을 잃어버리지 않을 뿐 아니라 백 배나 받는다고 하셨다. 오늘 당신이 주님을 위해 모든 소유를 버린다면 하늘에 있는 은행에서 백 배나 찾아 쓸 수 있다. 이렇게 높은 이자율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당신이 일 불을 넣었는데 백 불을 찾을 수 있다니, 세상에 이런 은행이 있겠는가? 이뿐 아니라 내세에 당신은 영생을 얻게 된다.
마태복음의 많은 부분은 왕국 대신 「영생」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이는 그 때에 살아 있는 사람들은 곧 왕국에 들어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7장 14절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고 말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협착한 길을 가라고 복음을 전한다. 그러나 만일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협착한 길을 걸어야 구원받을 수 있다면, 그 구원은 은혜에 속하지 않고 사람의 행위 즉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협착한 길을 그의 걷는 공적에 달려 있게 된다.
마태복음에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영생은 오늘날 우리가 얻은 영생을 가리키지 않고 천년 왕국 안에서의 생명을 가리킨다. 사람이 왕국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 하려면 반드시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협착한 길을 가야 한다. 만일 하나님의 명령과 그분의 뜻을 지키지 않는다면, 당신의 영생을 잃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멸망한다는 뜻이 아니라 왕국 안에서 영생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만일 이 문제가 해결된다면 당신은 성경 안의 시대의 문제에 대해 분명해질 것이다. 교회 시대에서는 모든 것이 다 은혜에 의한 것이다. 교회 시대의 끝무렵, 하나님은 그 아들로 말미암아 그분의 왕국을 세우실 것이다. 왕국 안에서는 오직 주님을 신실하게 섬긴 사람들만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하게 된다. 성경은 이것을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준다.
천년 왕국의 형벌
성경은 많은 하나님의 자녀가 특정한 형벌을 받게 될 것을 말한다. 많은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 사는 동안 행위가 합당치 않고 생활이 경건치 않으며, 세상을 사랑하고 자기 뜻대로 행동하며 자의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의 일에서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지 않고 자기가 좋아 하는 일을 하며, 사람을 기쁘게 하고 사람의 영광을 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으며, 주 예수님의 수치 받으신 위치에 서 있기를 꺼려하고, 많은 실수와 죄를 범한다. 만일 그들이 이생에서 하나님의 징계를 받지 않았다면, 죽은 다음 그날 부활할 때 그들이 단지 주 예수님과 더불어 함께 왕 노릇 하지 못하게 될 뿐이라고만 생각하는가?
주 예수님은 우리가 먼저 그분과 함께 죽고 함께 수치를 당한 다음에야 함께 왕 노릇 하고 함께 영광을 얻게 된다고 하셨다(딤후 2:12). 많은 그리스도인이 고난을 당해본 적이 없을 뿐아니라 더욱이 그들에게는 많은 범죄와 세상을 사랑함과 육체를 좇아 행하는 것들이 있다. 세상을 떠날 때 그들에게는 많은 불의와 처리되지 않은 많은 죄들이 남아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러한 사람이 특별하고도 실지적인 질책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마태복음 18장 21절부터 35절까지는, 어느 종이 자기 주인에게 빚을 졌는데 주인이 그의 빚을 탕감해 주고 그를 용서해 주었으나 그 종은 자기에게 빚을 진 다른 동관을 용서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한다. 처음에 언급한 종은 필히 구원받은 사람일 것이다. 이는 그가 주님의 사하심을 구하고, 주님도 불쌍히 여겨 놓아 주고 그의 빚을 탕감해 주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도 아무런 의지할 데가 없는 사람으로서 하나님 앞에 나온 자들이므로 주님이 우리를 용서하시고 놓아주시며 우리의 빚을 탕감해주신 것이다. 이 종이 그리스도인이므로 그가 만난 일을 장래 우리도 만나게 된다. 그 주인이 이 종을 어떻게 다루었으면 우리 주님도 우리를 그렇게 다루실 것이다.
28절-30절 : 『그 종이 나가서』. 그 종은 밖으로 나갔다. 그는 자유인이 되었기 때문에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여기서는 한 그리스도인이 다른 그리스도인의 죄를 용서하지 않는 것을 말하고 있다. 당신은 사함받은 사람이지만 남을 사하는 사람이 되려고 하지 않을지 모른다. 당신이 주님께 빚진 것은 천만 냥(兩)을 그분이 다 탕감해 주었는데도 당신은 당신에게 열 냥(兩)밖에 빚지지 않은 형제에게, 『내게 갚으라. 한 푼도 차이 없이 다 갚으라. 갚지 않으면 놓아 주지 않겠다.』라고 말한다. 그 결과는 어떤가?
31절-33절 :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그 사람이 이미 주님의 긍휼을 입었기 때문에 그는 분명 구원받은 사람일 것이다. 주인은,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내가 너를 용서한 것같이 너도 네 동관을 용서하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냐?』고 했다. 이것은 이 사람이 주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입고 사함받은 사람임을 증명해 준다. 그가 다른 그리스도인을 용서하지 않았을 따름이지 그에게 생명은 있는 것이다.
34절 :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이미 긍휼하심을 입고 사함받은 사람을 주님은 빚을 다 갚을 때까지 다시 옥졸들의 손에 붙이셨다. 그가 빚을 다 갚을 수 있는가는 모를 일이지만, 그는 반드시 고통을 당하게 된다. 이것은 우리에게 그날 주님이 다른 그리스도인을 용서하지 않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그들이 다른 사람을 대한 대로 대하신다는 것을 보여 준다. 만일 당신이 형제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주님도 당신이 그를 용서하지 않은 것에 따라 당신을 대하실 것이다.
긍휼과 심판
우리는 우리 하나님이 공의의 하나님으로서 장래 심판대 앞에서 공의로 우리를 심판하실 것임을 안다. 물론 심판대 앞에서는 공의를 말하지만, 여전히 긍휼이 있게 된다. 오늘 당신이 사람들을 긍휼로 대한다면, 주님도 당신을 긍휼히 여기실 것이다. 오늘 만일 당신이 사람을 가혹하게 대하고, 남의 실패와 약함에 대해 엄격하며 공의를 말한다면, 그날 주님도 당신을 공의로 대하실 것이다. 만일 당신이 남을 긍휼히 여긴다면, 그분도 당신을 긍휼히 여기실 것이다.
누가복음 6장 37절은 이렇게 말한다.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오늘 어떤 그리스도인은 말을 너무나 박정하게 한다. 남을 비판할 때 그는 그 사람의 잘못을 하나하나 자세히 따진다. 남을 판단하고 비평할 때 그는 장래 하나님도 그가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식대로 그를 대하실 것임을 알아야 한다. 당신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당신도 헤아림을 받게 된다. 만일 당신이 사람들에게 누르고 흔들어 후히 준다면, 주님도 당신에게 누르고 흔들어 후히 주실 것이다(눅 6:38). 남을 용서하는 자는 사함을 받게 되고, 남을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기심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성경은 긍휼은 심판을 이긴다고 말했다(약 2:13). 심판조차도 이길 수 없는 한 가지가 있는데, 바로 일생 동안 남을 긍휼히 여긴 사람이다. 우리에게 실수가 없을 수는 없으나 오늘 우리가 남을 긍휼히 여길 때 하나님도 우리를 처리할 수 없으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손해보기를 싫어하여 남과 다투고 항상 자기에게 많이 남기고 다른 사람에게 적게 준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남을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 되기 바란다. 그럴 때 심판의 날에 심판의 주조차도 어떻게 다룰 수 없는 사람들이 될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을 고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이 땅에 사는 동안 당신이 남을 긍휼히 여긴다면 하나님께서도 당신을 긍휼히 여기신다는 것이다.
오늘 당신의 긍휼히 여김은 장래 심판을 이기게 할 것이다. 오늘 당신이 남을 심판한 것같이 장래 주님도 당신을 그렇게 심판하실 것이다. 당신이 남을 대하듯이 주님도 당신을 그렇게 대하시기 때문에, 이 은혜는 의로운 것이다. 오늘 당신이 어떻게 사람을 대하는가는 하나님이 그 도량대로 당신을 헤아리도록 당신 자신을 위해 하나의 그릇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야고보서 2장 13절은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고 말한다. 남을 긍휼히 여기지 않은 사람은 긍휼 없는 심판을 받게 된다. 그러나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한다. 당신의 긍휼은 심판을 이길 것이다. 이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마태복음 18장은, 하나님의 자녀들도 빚을 다 갚을 때까지 옥졸의 손에 넘겨져 옥에 갇힐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준다. 물론 우리가 진 빚을 다 갚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최소한 어느 날 우리는 주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고 용서하시듯이 남을 긍휼히 여기고 용서하기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35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이 부분의 말씀은 불신자에게 하신 것이 아닌 그리스도인에게 하신 것으로서 천부와 그분의 자녀와의 관계와 형제와 형제 사이의 관계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 단락의 말씀 앞 부분에서 베드로는 주님께,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하고 물었다. 주 예수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해야 한다고 하셨다(마 18:21-22). 이 말씀에 이어서 그 종에 관한 말씀을 하신 것이다.
만일 당신이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장차 질책을 받게 될 것이다. 주 예수님의 이 말씀은 베드로가 옥졸들의 손에 넘기워 옥에 갇힐 가능성도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만일 베드로가 이렇게 될 가능성이 있다면 당신과 나도 이렇게 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은 「너희」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베드로 한 사람에게만 하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하신 말씀이다. 만일 우리 각 사람이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우리 천부께서도 우리를 그렇게 대하실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구원이 영원히 요동치 않는 사실임을 기억하라. 그러나 만일 오늘의 문제를 분명히해 놓지 않으면 장래 왕국 안에서 특정한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워치만 니
[워치만니 전집 29, 하나님의 복음 제 23장, 한국복음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