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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공교히 짜서 에봇을 짓되 그것에 견대 둘을 달아 그 두 끝을 연하게 하고, 호마노 두 개를 취하여 그 위에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새기되, 그 두 보석을 에봇 두 견대에 붙여 이스라엘 아들들의 기념 보석을 삼되 아론이 여호와 앞에서 그들의 이름을 그 두 어깨에 메어서 기념이 되게 할지며』(출 28:6-7, 9, 12).
『너는 판결 흉패를 에봇 짜는 법으로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공교히 짜서 만들되 장광이 한 뼘씩 두 겹으로 네모 반듯하게 하고 그것에 네 줄로 보석을 물리되 첫 줄은 홍보석 황옥 녹주옥이요 둘째 줄은 석류석 남보석 홍마노요 셋째 줄은 호박 백마노 자수정이요 넷째 줄은 녹보석 호마노 백옥으로 다 금테에 물릴지니 이 보석들은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대로 열 둘이라 매 보석에 열 두 지파의 한 이름씩 인을 새기는 법으로 새기고』(출 28:15-21).
『아론이 성소에 들어갈 때에는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기록한 이 판결 흉패를 가슴에 붙여 여호와 앞에 영원한 기념을 삼을 것이니라 너는 우림과 둠밈을 판결 흉패 안에 넣어 아론으로 여호와 앞에 들어갈 때에 그 가슴 위에 있게 하라 아론이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판결을 항상 그 가슴 위에 둘지니라』(출 28:29-30).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고후 11:28-29).
『내가 정죄하려고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말하였거니와 너희로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고후 7:3).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히 13:7).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로라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1-3).
『젊은 자들아 이와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 5:5-6).
Ⅰ
하나님이 이 땅에서 선택한 사람은 한 사람이었다. 한 사람이 가족이 되고 가족이 나라가 되었다. 그 한사람은 아브라함이요, 그 나라는 이스라엘이다. 한 사람이었을 때에는 하나님은 이 한 사람에게 나타나시고 계시하시고 말씀하신다. 한 사람으로부터 한 가족이 되었을 때에는 그 가족의 가장(家長)에게 나타나시고 계시하시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예의 위치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권위와 이름 아래 돌아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하나님의 나라가 되었을 때 하나님이 그들에게 계시하는 방법은 달라졌다. 하나님은 옛날처럼 한 사람에게 말씀하시거나 나타나지 않고 그의 백성들에게 하나의 특정한 방법으로 계시하시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계시하시는 방법은 무엇인가? 이 방법은 바로 판결 흉패로 그들에게 계시하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옛날에는 하나님이 한 사람에게 말씀하셨지만 지금은 판결 흉패로 말미암아 그의 백성에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서 무슨 일이 있으면 이 판결 앞에 나아와 하나님의 인도와 계시를 구해야 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들이 한 나라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방법을 바꾸셨다. 형제 자매들이여, 이 사실을 기억하라. 당신이 아브라함과같이 주님을 단독으로 섬길 때에는 하나님이 당신 개인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당신 주위에 하나님의 백성이 있을 때 당신은 하나님의 백성 중의 한사람에 불과하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계시하시는 방법이 바뀌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 개인과 하나님 사이에 왕래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개인을 향한 나타냄과 계시를 무시하는 것도 아니다. 당신이 아브라함과 같이 한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따를 때에는 하나님이 당신 개인에게 말씀하시고, 나타나시고, 계시하셨다. 당신 주위에 하나님의 백성이 있은 후에도 당신 개인의 하나님과의 왕래는 끝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에 중요한 점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이제 당신이 온 백성과 한 무리로 조화(調和)되었으므로, 하나님의 계시와 말씀을 당신 개인에게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온 백성에게 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말씀하시고 계시하시는 방법은 바뀌어졌다. 형제 자매여, 반드시 당신은 온 성도와 하나님 앞에서 한 몸이 되었음을 보아야 한다. 이제 하나님은 사람에게 계시하고, 말씀하고, 나타내시는 방법을 바꾸셨다. 당신이 만일 이것을 보지 못한다면 당신의 주님과의 교통이 끊어지지 않을지 모르나 하나님에 대한 당신의 봉사는 틀린 것이다. 당신이 주님을 섬기려면, 하나님의 자녀 가운데서 그들의 필요를 만족시키려면 반드시 하나님이 개인에게 계시하시고 나타내시는 방법과 단체에서 계시하시고 나타내시는 방법이 다름을 보아야 한다.
아, 형제 자매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계시하시는 방법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계시하시는 방법-바로 그 판결 흉패로 말미암아 계시하는 다른 방법이 있음을 보아야 한다.
Ⅱ
흉패는 대제사장이 하나님을 만나러 갈 때 몸에 다는 것이다. 이 흉패는 대제사장이 입은 에봇 위에 배치되었다. 흉패는 두 겹으로 되어 있고 네모 반듯하다. 그 위에는 네 줄에 각기 세 종류의 보석이 물려져 있다. 이 많은 보석 위에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 외에도 에봇의 두 견대에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두 보석이 있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은 이스라엘 전국민, 즉 하나님의 온 백성을 대표하는 것이다. 대제사장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단독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어깨에 메고 가슴에 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다. 대제사장은 주 예수를 대표한다. 이것은 바로 주님이 우리를 어깨에 지고 가슴에 사랑으로 품는 것을 예표한다. 대제사장은 하나님 앞에 섬기러 나갈 때 에봇을 몸에 입어야 한다. 그는 반드시 온 이스라엘 사람들을 어깨에 메고 가슴에 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해결하지 못할 어려운 일이 생길 때 대제사장은 에봇을 입고 흉패를 차고 하나님 앞에 계시와 말씀을 간구하러 나간다. 그러므로 이 흉패는 판결 흉패이다. 사람은 흉패로 말미암아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다. 모세가 하나님에게 이 회중에 한 사람을 세워 달라고 간구하니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하나님께 감동된 자니... 그는 제사장 엘르아살 앞에 설 것이요, 엘르아살은 그를 위하여 우림의 판결로 여호와 앞에 물을 것이며』(민 27:16, 18-21).
아말렉 사람들이 시글락 사람을 쳐서 그들의 부녀와 거기에 있는 대소 여인들을 하나도 죽이지 아니하고 사로잡아 갔을 때 다윗은 에봇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에게 적군을 쫓아가도 되는가를 물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쫓아가라 네가 반드시 미치고 정녕 도로 찾으리라』고 하셨다. 결국 그들은 쫓아가서 찾아냈다(삼상 30:1-8, 18-19). 이러한 일들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말씀하실 때 판결 흉패로 말미암아 말씀하심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판결 흉패 안에는 우림과 둠밈이 있다. 「우림」의 히브리어 뜻은 바로 「빛을 냄」이라는 뜻이다. 「둠밈」은 「완전함」의 뜻이다. 대제사장이 판결 흉패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의 빛이 비취고, 빛이 비췰 때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나타난다.
Ⅲ
형제 자매여, 이것은 구약의 이야기이다. 구약과 신약을 밖의 형식에서 보면 차이가 있지만 하나님의 역사의 원칙을 따라 볼 때에는 같은 것이다. 구약은 그림자요, 신약은 바로 실제이다. 그러나 이러한 실제의 일들이 원칙에서는 구약과 같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계시하신 방법과 교회 가운데 그의 자녀에게 계시하시는 방법은 같은 원칙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자녀 가운데 한두 사람 또는 서너 사람이 하나님 앞에 참으로 겸손하고 하나님을 경외한다 하자.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 가운데 어려움이 있음을 보았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자녀 가운데 나타나지 않았음을 보았을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를 어깨에 메고 가슴에 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간구하기를 배워야 한다. 바울을 보자. 그는 하나님의 모든 성도를 어깨에 메었고 하나님의 온 교회를 가슴에 품었다(고후 11:28-29). 그가 이렇게 판결 흉패를 걸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을 때 하나님의 빛이 비취었다. 그러므로 그는 고린도 교회의 죄를 범한 사람을 알 수 있었고, 어떤 영적 비밀의 말씀을 에베소 교회에 편지로 써야 할 지를 알았다.
바울은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교회 가운데 하나님의 길을 그렇게 분명히 쓸 수 있었겠는가?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일을 조금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자녀들의 어려움은 조금도 관심하지 않은 채 은둔 생활을 하며 기도하여 빛이 온 것이 아니다. 그가 어깨에 메고 가슴에 품은 것은 하나님의 교회요, 하나님의 자녀였다. 그가 경외하는 마음으로 빛이신 아버지 하나님 앞에 나아갔을 때 하나님은 그를 비추사 그가 메고 품은 온 교회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그로 하여금 알게 했다. 그러므로 그가 고린도 교회에 쓴 편지는 고린도 교회에 가장 필요한 것이었고, 그가 에베소 교회에 쓴 편지는 에베소 교회에 가장 필요한 것이었다. 바울이 온 교회에게 준 원칙도 구약에서 대제사장이 판결 흉패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빛을 구한 것과 같았다.
바울은 하나님의 온 교회를 어깨에 메고 가슴에 품었다. 바울이 온 교회를 관심하지도 않고 다만 새삼스럽게 몇 마디 기도를 하고 그 지방 교회에 편지를 쓴 것이 아니다. 어떠한 성도도 그럴 수 없다. 우리는 원칙을 깨달아야 한다. 그것은 바로 주의 성도를 하나님 앞에 품고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얼마나 많은 날동안 하나님의 자녀들을 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앙망했는지 모른다. 그는 하나님의 빛 가운데서 본 것이 있을 때 이 빛으로 편지를 조금 쓰고, 또 하나님의 빛 가운데서 본 것이 있을 때 이 빛으로 또 서신을 썼다.
형제 자매여, 오늘날 하나님의 그의 백성에 대한 뜻을 알고, 교회에 대한 뜻을 깨닫고, 그의 백성과 교회 가운데의 길을 깨달으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온 자녀를 어깨에 메고 가슴에 품고 하나님의 빛 가운데서 형제 자매의 상태를 읽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얻은 말씀을 쓸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그의 교회 가운데서 그의 자녀들에게 계시하는 방법이다.
Ⅳ
교회의 일들은 판결 흉패의 원칙을 따라 정한다.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생명이 장성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을 어깨에 메고 가슴에 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빛 가운데서 온 백성의 형편을 읽어 단안(斷案)을 내리는 것이다. 한 교회의 일을 한두 사람의 명령대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당신은, 『사도 시대의 교회는 다 사도의 말을 듣지 않았는가?』라고 물을 것이다. 그렇다. 그러나 사도는 하나님의 온 백성을 메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계시를 구한 것이지 교황처럼 명령을 내린 것이 아니다.
한 지방 교회의 일을 한두 사람의 명령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모두 손을 들어 표결하는가? 그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다. 그러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교회의 장로들이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의 상황을 하나님 앞에 메고 나아가 구하고 묻는 것이다. 장로는 하나님의 자녀 가운데 장성한 사람들이다. 나이가 많다 해서 장로인 것이 아니다. 영적 체험과 영적 상태가 장로임을 나타낸다. 장로는 하나님에 대해 상당히 경건하며 형제 자매의 상태를 잘 알고 있다. 한 지방 교회에 일이 생기고 문제가 생길 때 한 사람이 독선적으로 판정하거나 여러 사람이 손을 들어 표결하는 것이 아니라, 장로들이 형제 자매들의 상황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의 얼굴 빛 가운데서 간구하고 교통하며 함께 인도를 받는 것이다. 이렇게 일을 판정하는 것이 백 퍼센트 옳다고는 감히 말할 수 없지만 오류가 쉽게 생기지는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형제 자매여,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의 단체가 되었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계시하는 방법이 바뀌어졌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때에는 하나님이 모든 백성으로 말미암아 계시하신다. 하나님의 뜻은 그분 자신을 그의 모든 백성 안에 넣어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말씀하심이 곧 모든 백성에게 보내는 그의 반향이다. 장로가 말하기 전에 하나님은 이미 그분의 뜻을 형제 자매 안에 넣어 주시며 장로는 모든 형제 자매들을 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영 안에서 형제 자매들의 상황을 읽고 또 읽어 우리 모든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을 본다. 모든 사람을 통하여 나온 말씀이 바로 현재 하나님의 모든 자녀의 필요요, 또한 그의 모든 자녀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필요이다. 오직 이것만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를 감동시킬 수 있으며 우리 모든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을 만질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자녀로 말미암아 그분 자신을 계시하신다. 그러므로 교회는 몇몇 사람에 의해 일을 결정하거나 모든 손을 들어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장로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온 백성을 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께서 그들을 비추시고 계시하시기를 구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교회 가운데서 그의 자녀를 인도하는 방법이다. 교회 가운데 장로들은 마땅히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자녀들의 상황을 알고 항상 그들을 걸머지기를 배워야 한다. 형제 자매들에게 문제와 어려움이 있을 때 장로들은 즉시 하나님의 자녀들을 지고 하나님의 빛 가운데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알아내어 문제와 어려움을 해결한다. 신약의 서신은 바로 이 원칙에 의해 쓰여졌다. 서신을 쓴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각지 교회의 상황을 알아 각지 교회의 상황을 그들의 마음에 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빛을 봄으로써 쓴 것이다. 그러므로 한 마디도 불필요한 말이 없다. 그들이 쓴 그 많은 말들이 바로 하나님의 계시요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원칙대로 결정하지 않은 일은 십중팔구 다 틀린 것이다. 하나님의 종이 본 빛과 진리는 대부분 형제 자매로 말미암은 것이다. 하나님의 종이 얻은 하나님의 계시는 많은 경우 교통한 사람들로 말미암은 것이다. 많은 경우 당신 곁에 형제 자매들이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형제 자매들이 당신 곁에 없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 하나님의 교회 가운데에서는 반드시 이러한 원칙에 근거하여 일을 결정해야만 착오를 일으키지 않는다.
Ⅴ
형제 자매여, 당신은 이러한 말이 무의미하다고 느끼는가? 이것은 수속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배워야 할 하나의 영적 공부임을 알아야 한다. 여기에는 십자가의 부서짐이 필요하다. 만일 당신이 참으로 위에서 말한 원칙 안에 생활하려면 십자가의 부서짐이 필요하다. 장로에게 십자가의 부서짐이 필요할 뿐 아니라 모든 형제 자매가 다 십자가로 부서져야 한다. 만약 그 교회가 매일매일 십자가의 처리받기를 배우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그 교회에서 말씀하실 수 없다. 누구든지 장로든 사도든 아비들이든 청년들이든 모든 사람이 십자가에 부서져야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더 분명히 말씀하실 수 있게 된다.
특히 장로는 반드시 십자가의 처리를 받아야 한다. 장로들의 행동과 말은 하나하나가 형제 자매에게 영향을 준다. 장로는 모든 형제 자매들의 상황을 관찰할 뿐 아니라 형제 자매의 일을 가지고 빛이신 하나님께 가서 기도하고 또 기도하며, 교통하고 또 교통해야만 단안을 내릴 수 있다. 이 원칙은 필수적인 것이며, 우리 자신의 의견을 깨뜨릴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 중 장로들이 이 원칙을 지켜야 할 뿐 아니라 제일 작은 형제 자매일지라도 하나님이 그 안에 계시므로 하나님의 그의 자녀 가운데의 뜻에 영향을-그 뜻을 나타내고 덮고 감춤으로써-줄 수 있다. 그러므로 형제 자매들의 행동과 말은 하나하나가 다 하나님의 제한을 받고 십자가의 부서짐을 받기를 배워야 한다. 만일 어떤 지방의 형제 자매들이 다 이러하다면 그곳이야말로 하나님이 가장 잘 말씀하실 수 있는 곳이다.
교회 가운데 누구도 남을 경시할 수 없다. 평상시에 당신을 괴롭히는 형제의 의견이라 할지라도 경시해서는 안 된다. 당신이 그의 의견을 짓밟았다가는 어느 날엔가는 후회할 것이다. 형제 자매여, 이런 말은 체험 있는 형제 자매가 고통 가운데서 배운 것이다. 당신은 한 사람도 경시할 수 없고 멸시할 수 없다. 그들의 원망하는 말과 반대하는 말이라도 다 하나님 앞에 가져가 읽어야 하며 그들을 어깨에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간구해야 한다. 당신은 독단적이어서는 안 된다. 다윗은 그를 욕하는 말까지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 읽었다.
형제 자매여, 당신에게 찬성하는 사람만이 당신에게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해준다고 생각지 말라. 오히려 많은 때에, 당신을 반대하는 사람이 당신에게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해준다. 당신의 길을 보장하는 것은 오직 이 원칙뿐이다. 당신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지 않기를 원하고 형제 자매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이 원칙 안에 생활해야 한다. 오직 이 원칙만이 우리의 의견과 견해를 없이 한다. 오직 이 원칙 아래 있어야만 형제 자매의 뜻을 하나님 앞에서 읽을 수 있다. 당신이 읽어 낸 말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에게 하시고자 하는 말이다. 오직 이 원칙만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의 뜻을 그의 자녀 가운데 말씀하실 수 있게 한다. 오직 이 원칙만이 하늘의 마음을 만족케 하고 땅의 마음을 만족케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보자. 교회 가운데 한 가지 일이 생겼을 때 몇몇 장로들이 어떻게 할 것을 결정하고 그렇게 했다 하자. 어떤 한 형제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입을 다물고 함부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결과는 바로 그리스도의 몸의 기능이 정체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옳은가? 일을 행하기 전에 하나님은 이미 그의 자녀 가운데 운행하셨다. 장로들은 이러한 일을 하기 전에 형제 자매의 상황을 하나님 앞에 가져가 읽어야 한다. 그렇게 읽어 낸 것이라면 모두가 달콤하게 느낄 것이고 옳다고 말할 것이다.
장로는 이러한 원칙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때에는 이러한 일을 처리하는 단안이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 가운데 운행하시는 것과 합하지 않게 된다. 그러면 단안이 나와도 하나님의 자녀 안에서는 움직이지 않고 그의 자녀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결국에는 그리스도의 몸의 기능이 중지된다. 만일 하나님의 빛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의 상황을 분명히 읽고 단안을 내린다면 이 단안은 하나님의 자녀들 안의 영을 기쁘게 하고, 기름 부음이 있게 하고, 약동하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몸의 기능은 거기에서 중지될 것이다.
형제 자매여,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께 이러한 구원을 구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몸의 구조가 있어야 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의 기능의 활동과 나타남이 있어야 한다. 이 원칙은 모든 형제 자매가 다 보고 동참해야 할 원칙이다.
Ⅵ
또 한 가지 우리가 언급해야 할 것은 권위의 문제이다. 권위란 무엇인가? 표면적으로 보면 권위는 지위에 근거한다. 지위가 있으면 권위가 있다. 그러나 성경의 말씀으로 볼 때 실제는 그렇지 않다. 권위는 지위에 중점을 둔 것이 아니다. 그러면 권위는 무엇에 중점을 둔 것인가? 권위는 생명에 중점을 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아론의 지팡이에 싹이 난 것을 보았기 때문에 아론의 권위를 인정했다. 부활의 생명이 없는 권위는 아무 소용없는 것이다.
교회 가운데의 권위는 지위에 중점을 둔 것이 아니라 생명에 중점을 둔 것이다. 남이 당신을 임명한다 해서 당신에게 권위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누구도 교회 가운데의 지위를 근거 삼아 자신에게 권위가 있다고 생각할 수 없다. 다윗은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사울의 권위를 순종했다. 그러나 사울은 하나님을 거스렸기 때문에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왕의 지위만 있을 뿐 왕의 생명이 없었다. 하나님도 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셨다. 다윗이 순종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사울의 권위는 지위에 있는 것이었지 생명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정하시지 않았다. 어느 날 하나님은 사울을 쳐서 제쳐놓으셨다. 교회의 권위는 바로 생명이다. 당신 안에 하나님의 부활의 생명이 있는 만큼 당신에게 권위가 있고 하나님의 부활의 생명을 잃은 만큼 당신의 권위도 잃게 된다. 성경에서 장로들은 양무리를 주장하지 말고 양무리의 본이 되라고 말씀하셨다. 본(本)이란 생명 안에서 생활함으로써 나오는 것이다.
『내가 장로다. 나에게 권위가 있다.』라고 힘주어 말하지 말라. 만일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순종케 하려고 권위를 쓰고 유익을 취하려 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교회의 문제가 될 것이다. 교회 안에서 형제 자매들은 서로 겸손히 순종해야 한다. 사랑 가운데서 본을 보임으로써 나타나는 권위만이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여금 마음에서 순종하게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사, 우리에게 가장 좋은 본을 허락하시기를 원한다.
워치만 니
[워치만 니 전집 제 2집 18권, "판결의 흉패", 한국복음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