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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 요한복음 17:1-5, 11, 12, 16-24
요한복음 14장부터 16장은 주님이 이 땅에서의 마지막 밤에 그분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이 놀라운 메시지 이후에 그분은 아버지께 기도를 드렸다. 요한복음 17장에 있는 이 기도는 성경에서 가장 심오한 말씀이다. 그것은 우리의 정신적인 이해력을 훨씬 초월하는 것이다. 심지어 그 중점을 파악하기도 쉽지 않다.
이 기도에서 주님은 사소한 것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음을 주목하라. 그분은 병자를 치료하거나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는 것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으셨다. 그분이 기도하신 것은 하나님의 마음 속에 있는 깊은 것이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심으로 기도를 시작하셨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17:1).
아버지가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란 무슨 뜻인가? 아들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어떻게 아버지와 아들이 영화롭게 되실 수 있는가? 우리가 성경으로부터 아는바 영광이란 하나님이 표현되심이다. 전기의 예가 우리로 더 분명히 알게 도울 것이다. 전기는 스위치가 켜질 때까지 감춰져있다. 스위치가 켜질 때 빛이 비춘다. 이 빛들의 비춤이 곧 전기의 영광이다. 전기가 빛을 비출 때 그것은 영화롭게 된다. 밝은 빛을 보고 있을 때 우리는 어떻게 전기가 나타나게 됨으로써 영화롭게 되는가를 깨달을 수 있다.
잠시 보여진 영광
하나님은 너무나 숨겨진 분이다. 그러나 그분이 표현되는 때마다 거기에 영광이 있다. 예컨대 성막이 세워졌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그곳에 충만했다(출 40:34-35). 이스라엘 자손들은 덮는 구름을 볼 수 있었다. 성막 위에 있는 영광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거기 계심을 알게 하였다.
이 일은 성전이 완공되었을 때 두번째 발생했다. 『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올 때에 구름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하매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인하여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왕상 8:10-11). 밝은 빛의 전구가 전기의 임재를 가리키듯 이 영광의 구름도 하나님의 임재를 보여준다.
주 예수님이 사람되셨을 때 그분의 영광은 그분의 인성 안에 감춰져 있었다. 그분의 육신적인 몸은 마치 여호와의 영광이 속에 숨겨져 있는 성막과도 같았다. 밖에서는 이 영광이 보이지 않았지만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갈 때 그는 여호와의 영광이 거기 있음을 보았다. 성막은 육신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예표였다. 하나님의 영광이 그리스도의 육신의 몸 안에 감춰져 있었다. 어느 날 변화산에서 그리스도는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가 보는 앞에서 변형되셨다(마 17:1-8).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하나님이 표현되셨다. 그러나 잠시뿐이었다. 그후에 그 영광은 다시 감취어졌다.
부활 안의 영광
요한복음 17장에서는 주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실 때가 가까웠었다. 당신이 깨닫지 못할는지 모르지만 부활이란 곧 충만한 표현이다. 카네이션 씨를 생각해 보라. 그것은 작고 시선을 끌지 못한다. 그러나 이 조그만 씨 안에 꽃의 만발함이 감춰져 있다. 그 씨가 우리가 볼 수 있는 곳에 그대로 있다면 거기에서 꽃의 만발함을 볼 수 없다. 즉 영광을 볼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그 씨를 흙에 심어서 그것이 죽으면 자라나와서 꽃을 피우게 된다. 꽃의 만발함은 감추인 영광의 해방인 것이다. 카네이션이 꽃피는 것은 곧 그것의 영화롭게 됨이다.
주 예수님은 하나의 씨이셨다. 그분은 우리가 흠모할만한 아름다움도 없는 멸시받는 나사렛 사람이셨다. 그러나 그 씨는 신성한 영광을 감추고 있었다. 이제 그분은 막 땅에 떨어져 죽으시려는 참이었다. 그런 뒤 그분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켜지고 그 신성한 영광이 표현되려고 했다. 달리 말해서 그리스도는 영화롭게 되시는 것이었다.
부활 안에서 해방된 영광은 곧 아버지 자신이었다. 아들이 영화롭게 된다는 것은 바로 아버지도 역시 영화롭게 되신다는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사람이신 예수 안에 아버지가 감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영광이 비춰나올 때 아들과 아버지가 같이 영화롭게 되셨다.
그러면 어떻게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영화롭게 될 수 있었는가? 그것은 바로 죽음과 부활에 의해서였다. 어떻게 아버지에서 아들 안에서 영화롭게 되실 수 있었는가? 그것은 아들의 영화롭게 되심에 의해서였다. 아들이 영화롭게 되었을 때 그 영광은 곧 아버지가 표현되신 것이었다. 그러므로 주님은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다(요 17:1). 영화롭게 되는 것은 신성한 본성이 표현되게 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우리는 인간의 언어로 적절히 표현할 수 없는 무엇인가를 만지고 있다. 나는 표현력이 부족함을 느낀다. 내가 본 것을 당신도 볼 수 있도록 주님을 앙망한다.
열매맺음 안의 영광
대부분의 식물들은 꽃이 핀 다음에 열매를 맺는다. 꽃이 피는 것은 잠시의 표현이고 곧이어 더 오래가는 열매가 뒤따른다. 중국 북부의 내 고향에는 사과나무 숲이 많이 있었다. 우리의 흥미를 끄는 것은 사과나무가 꽃을 많이 피우는 것이 아니었다. 해마다 우리는 9월이 오기를 열렬히 고대했는데 이는 그때가 되면 나무들에 사과가 달려 가지가 축 늘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사과나무들이 그 영화롭게 됨 안에 있는 것을 보러 가기를 너무나도 누렸다! 심지어 우리가 멀리 떨어져 있을지라도 사과의 향긋한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그 향내가 너무나도 달콤했기 때문에 우리는 사과 몇 개를 우리의 옷 속에 몇 개월간 넣어 둠으로써 사과 향기가 우리의 옷에 흠뻑 적셔지게 했었다.
영화롭게 되심 안의 그리스도는 카네이션 꽃과 같은가 아니면 사과나무 같은가? 그분은 사과나무 같으시다! 그분이 맺은 열매는 꽃이 핀 것보다 더 향기가 좋고 더 아름답다! 우리가 곧 이 열매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부활 후에 그분의 제자들을 산출하지 않으셨다면 그분은 다만 카네이션 꽃으로만 머무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의 부활 후에 예루살렘에는 백 이십 명이 있었다(행 1:15). 그런 뒤 삼천 명이 더해졌다(2:41). 또 얼마 되지 않아 오천 명이 있었다(4:4). 지금 이 온 땅 위에는 그리스도의 부활로부터 산출된 「사과나무 숲」들이 있다! 유럽에서 아프리카, 북미, 남미, 그리고 극동에 이르는 모든 곳에 이 사과나무 숲들이 퍼졌으며 주 예수님을 표현하고 있고 영화롭게 하고 있다!
교회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라는 열매를 맺는 사과나무 숲이다! 우리가 그분을 표현함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 예수님이 영화롭게 되실 때 아버지도 역시 영화롭게 되신다. 요한복음 17장에서 그날 밤 주 예수님이 기도하고 계셨던 것은 합당한 교회생활을 위한 것이었는데 그것은 사과들이 사과나무를 표현하는 방식처럼 그분의 모든 제자들이 그분을 표현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분의 사과들로서 아버지께서 영화롭게 되시도록 부활 안의 그분을 표현한다! 달리 말하면, 합당한 교회생활이란 아들과 아버지의 영화롭게 되심이요 아들 안에서 아버지께서 영화롭게 되심이다.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라는 주님의 기도는 합당한 교회생활 안에서 성취된다.
우리가 이 첫번째 구절을 이해한다면 이 기도 전체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주님은 모든 믿는이들의 하나를 위해 계속해서 네 번 기도하셨다.
(1) 『거룩하신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으로(안에)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11절).
(2)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21절).
(3)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22절).
(4)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함은』(23절).
하나 안의 영광
요한복음 17장에서 영화롭게 됨은 하나와 동등시 된다. 하나가 사라지면 영화롭게 됨도 없어진다. 하나가 있을 때 아들이 영화롭게 되고 아버지도 아들 안에서 영화롭게 되신다.
아마 이제 당신은 왜 우리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의 상황을 그렇게도 우려하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성도들간에 분열이 있을 때 거기에 영화롭게 됨이 있는가? 일단 참 하나가 깨지면 아들의 영화롭게 됨이 있을 수 없고 아들을 통한 아버지의 영화롭게 됨도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진정으로 주께 감사드리는 것은 지난 여러 세기 동안의 분열들에도 불구하고 각 세대마다 그분을 추구하는 신실하고도 충성스러운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사소한 문제들을 지나가게 하고 함께 모여서 그분 안에서의 하나, 그 영 안에서의 하나, 아버지 안에서의 하나가 되었다. 삼일 하나님 안의 참된 하나로 모이는 그런 모임이 있을 때마다 또 있는 곳마다 거기에 어느 정도 아들과 아버지의 영화롭게 되심이 있어 왔다.
요한복음 17장에 있는 주님의 기도의 중점은 믿는이들의 하나이다. 주님의 긍휼을 입은지 오십 오 년이 지난 지금 내가 간증할 수 있는 것은 믿는이들이 참된 하나 안에서 모이는 것만큼 영광스러운 것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오직 주님만을 생각하며 함께 모일 때 우리는 그 영 안에서 하나요 아버지 안에서 하나이다. 삼일 하나님 안의 그러한 하나가 곧 영화롭게 됨이다. 제한된 정도라도 이것을 체험하는 것은 주님의 기도에 대한 응답에 참여하는 것이다. 아들의 기도에 대한 아버지의 응답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그 응답은 오순절 날에 시작되었는데 그때 백 이십 명 모두는 하나가 되었으며 따라서 아들과 아버지는 영화롭게 되셨다. 19세기 이후로 이 기도에 대한 응답은 지구상의 이곳 저곳에서 계속되고 있다.
심지어 우리가 여기에 모일 때조차도 이 기도에 대한 아버지의 응답이 어느 정도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 분량의 정도가 얼마나 큰가는 우리가 차이점들을 얼마나 떨쳐버리고 또 얼마만큼이나 그리스도를 우리의 중심, 심지어 우리의 조성자체로 취하느냐에 달렸다. 우리는 우리의 의견이나 교리나 실행으로 하나인 것이 아니다. 우리의 하나는 그리스도이다. 그분 자신이 우리의 하나됨의 내용이다. 그러한 하나가 아들과 아버지의 영화롭게 되심이다.
성경의 모든 책들 중에서 요한복음이 삼일 하나님을 가장 충분히 계시하고 있다. 14장, 15장, 16장은 그 메시지를 담고 있고 17장은 그 기도를 담고 있다. 이 네 장은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에 대한 완전한 계시이다.
요한복음 14장에 계시된 삼일 하나님
요한복음 14장 7절부터 11절까지에서 주님은 아버지에 대해 말씀하셨지만 어리석게도 빌립은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라고 구했다. 주님은 그들 가운데 그렇게 오래 계셨는데도 빌립이 그분을 여전히 알지 못하는 것에 놀라움을 표하셨다. 날마다 빌립은 그분과 함께 있었다. 그분을 보는 것이 곧 아버지를 보는 것임을 빌립은 깨닫지 못했던가? 어떻게 빌립은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구할 수 있단말인가? 주님은 아버지 안에 계셨고 아버지는 그분 안에 계셨다. 심지어 그분이 하시는 말씀조차도 그분 자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께서 그분 안에 거하시면서 그분의 일을 하고 계셨다. 빌립은 그분이 아버지 안에 계시고 아버지가 그분 안에 계심을 믿지 못했던가?
인간 관계에서는 아버지와 그의 아들이 하나가 아니다. 아들은 자기 아버지가 자기 안에 있다거나 자기가 아버지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는 자기 아버지와 하나가 아닐 뿐 아니라 그의 아버지도 그가 말하고 있는 동안 일하지 않는다. 그런 하나는 땅에 속한 수준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 온 우주 안에서 오직 하나님의 아들만이 자신의 아버지와의 이런 관계를 말할 수 있으시다. 삼일성(Trinity) 안에서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구별이 있다. 그분들은 둘이시다. 그러나 그분들은 하나이시다. 왜냐하면 아들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아들 안에 있기 때문이다. 오, 놀라운 비밀이여!
빌립과 대화를 나누신 후 주님은 계속해서 더 이상한 것을 말씀하셨다(요 14:16-18).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제자들은 이미 주님을 그들의 보혜사(위로자)로 소유했다. 그런데 지금 그분은 또 다른 분, 곧 실제의 영을 그들에게 보내도록 아버지께 구하겠다고 하신다. 첫번째 보혜사는 다만 그들 가운데 계실 수 있었지만 이 두번째 보혜사는 그들 속에 계실 것이었다. 주님은 『내가 너희를 고아와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말씀하셨다. 얼마나 이상한가! 누가 그들에게 다시 오고 계셨는가? 주님인가, 실제의 영이신가? 두 분이 오고 계셨는가? 아니다. 오직 한 분만 오고 계셨다. 그 영의 오심은 주님 자신의 오심이었다. 보혜사가 그들 안에 계셨을 때 주님도 그들 안에 계셨다.
삼일성의 문제를 만질 때 우리는 자신의 이해에 미치지 못하게 된다. 나는 주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를 이해하고자 애쓰면서 이 장을 거듭거듭 반복하면서 연구했다. 읽으면 읽을수록,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나는 더욱더 미로 속에 빠진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결국 나는 자신의 분석적인 연구에서 멀리 떠나 요한복음 14장을 기록된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 장은 아버지가 아들 안에 계시고 아들은 아버지 안에 계신다고 말해준다. 또 실제의 영이 오신다고 말한다. 그 실제의 영은 아버지와 아들을 실제가 되게 만드실 것이다. 그분들 중 한 분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은 세 분 모두가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 세 분은 여기서 분리되어 있지 않으시다. 그분들은 하나이다.
당신의 체험을 생각해보라. 당신은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을 갖고 있지 않은가? 그들은 어디에 계신가? 그분들은 당신의 영 안에 계시면서 동시에 하늘에서 보좌에 계신다. 이것이 우리가 누리는 하나님이다!
나는 형제회에 있었을 때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아들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기도하도록 가르침받았다. 그리 흔하지는 않지만 어떤 환경들 아래서는 아들께 기도하는 것도 옳았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가 성령께 기도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말했다. 나는 그들의 가르침을 좇으려고 애썼지만 그것은 내게 번거로운 것임을 알게 되었다. 내가 기도드리고 있는 아버지는 어디 계시는가? 기도할 때 어떻게 아버지와 아들을 구분지을 수 있단 말인가? 그 영은 어디 계시는가? 결국에 가서 나는 이런 혼돈에서 벗어났다. 신약은 우리에게 말하기를 그 세 분은 모두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한다. 그 세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요한복음 4장 24절은 이렇게 말한다. 삼일성의 세번째는 성령이시다. 아들이 부활 안에서 생명 주는 영이 되었다(고전 15:45). 아버지가 영이시고 아들은 생명 주는 영이시고 성령은 또 다른 영이신가? 세 영이 계시는가? 분명히 그렇지 않다. 이 세 분은 한 영이시다. 내가 당신을 신학적인 혼돈이나 정신적인 혼란 속으로 이끌어들이려 한다고 생각지 말라. 나의 갈망은 다만 삼일 하나님에 대한 나의 누림을 당신과 함께 나누려는 것뿐이다! 날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은 나의 충만한 누림이다. 내 안에 삼일 하나님을 모시고 있다니 나는 얼마나 행복한지!
요한복음 15장에 있는 삼일 하나님과 가지들
요한복음 15장은 14장보다 더한층 영광스럽다!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주님은 이렇게 선포하셨다. 이 그림 안에 함축된 의미를 생각해 보라. 아버지는 이 포도나무의 근원이요 기원이시다. 이 포도나무는 아버지에 의해 심겨졌고 또 그분에 의해 경작되고 공급받는다. 그분은 그것의 토양이요, 햇빛이요, 공기이시다. 아들은 한 그루의 포도나무로서 아버지를 체현하고 있다.
요한복음 15장 26절에 이를 때 그 영이 나온다.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실제)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여기서 「께로서」라고 두 번 번역된 헬라어 전치사는 이에 정확히 해당되는 영어 단어가 없다. 그것은 「-로부터 함께(from with)」를 뜻한다. 그 영은 아버지로부터 아버지와 함께 오신다. 그 두 분은 분리될 수 없으시다. 즉 그 영이 임하시면 아버지도 임하신다.
이는 아들의 경우에도 그러하다. 그분은 아버지로부터 아버지와 함께 오셨다. 이 땅 위에 계시는 동안에 그분은 혼자가 아니셨다. 아버지가 그분과 함께 계셨다(요 8:16, 29). 그분이 어디에 계시든지 아버지도 그곳에 계셨다. 삼일성의 셋은 구별은 되지만 분리할 수 없다. 우리가 아버지를 가질 때 아들도 갖는다. 아들을 가지면 아버지도 갖는다(요일 2:23). 아들과 더불어서 우리는 그 영을 갖는다. 아버지는 포도나무의 근원이시다. 아들은 포도나무이시다. 그 영은 포도나무의 생명즙이시다.
이 큰 포도나무는 삼일 하나님의 유기체이다. 아버지의 모든 어떠하심이 이 유기체 안에 있으며 삼일성의 두번째인 이 포도나무 안에 체현되어 있다. 포도나무 속에는 그 영의 순환하는 생명의 흐름이 있다. 포도나무와 그 가지들을 유지하기 위해 아버지의 풍성을 옮기시는 분은 바로 그 영이시다. 우리가 접붙임 받은 곳은 바로 이 포도나무 안으로이다. 우리는 삼일 하나님의 이 유기체 안으로 접붙인 바 되었다!
이것이 우리가 신격화된다는 뜻이겠는가? 나는 신격 안에 넷-아버지, 아들, 그 영, 교회-이 있다고 가르친다는 참소를 받아왔다! 우리는 경배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분명히 우리는 신성한 생명과 신성한 본성을 갖고 있다. 가지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포도나무의 생명과 본성을 갖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므로 확실히 우리는 그분의 생명과 본성을 소유하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분명히 우리는 머리와 하나이다.
요한복음 14장은 우리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의 관계를 밝힌다. 요한복음 15장은 더 나아가서 포도나무와 그 가지들에 대해 말한다. 요한복음 16장은 다시 한번 삼일 하나님에 대해 말한다.
우리의 체험과 누림을 위한 요한복음 16장에 있는 삼일성
『그러하나 진리(실제)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실제)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16:13-15).
아버지가 소유하신 것은 다 아들의 것이다. 그러므로 아들은 아버지의 체현이다. 아들이 가진 모든 것이 다 그 영께 주어진 바 되었다. 그 영은 그러므로 아들의 실제화이다. 그리고 그 영은 가지신 모든 것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신다. 이 순서에서 우리는 모든 것이 결국 우리의 것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버지가 가지신 모든 것은 아들에게 속하게 되었다. 아들이 가지신 것을 그 영이 받으신다. 그 영은 자신이 가지신 것을 우리에게 열어 보여 주신다. 그 영, 아들, 아버지는 모두 우리의 소유이다!
당신의 체험이 이것을 확증할 것이다. 분명히 당신은 그 영이 속에 계신다는 것을 확신한다. 이 영은 아들의 실제화이다. 당신 속에 계신 아들은 아버지의 체현이시다. 당신 속에 세 분이 모두 계신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그 영에 의해서이다! 그분은 당신에게 참으로 실제가 되신다. 당신이 슬픔 가운데 있을 때 위로하시고 당신이 어둠 속에 있을 때 빛을 비추시고 당신이 곁길로 벗어나려고 할 때 당신에게 괴로움을 줄 것이다. 당신은 구원받기 전에 그런 체험을 해본 적이 있는가? 이 내적인 부축과 공급은 당신이 그분을 믿은 연후에야 당신의 것이 되어왔다. 속에 계신 이 풍성한 분은 아버지의 체현이신 아들의 실제화이다. 그러므로 삼일 하나님께서 당신 속에 계신 것은 당신의 매일의 누림, 매순간의 누림을 위한 것이다!
삼일 하나님의 풍성을 밝히 드러내는 이 세 장-요한복음 14장, 15장, 16장-이 끝난 뒤 아들께서는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셨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17:1). 어떻게 이 영화롭게 되심이 있을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믿는이들의 하나에 의해서였다(11절, 21절, 22절, 23절).
요한복음 17장에 있는 믿는이들의 하나
(1)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와 그분의 생명에 의해서
아들은 아버지께서 그분께 주신 모든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분배해줄 권세를 받으셨다(2절). 이제 그분은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11-12절)라고 기도하셨다. 생명과 이름은 분리할 수 없다. 아버지의 생명이 없다면 어떻게 우리가 그분의 이름을 가질 수 있겠는가? 만일 우리가 그분에게서 나지 않았다면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가 아닐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을 가졌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른다.
(2) 말씀에 의해
믿는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 외에도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14-21절).
주님이 믿는이들에게 주신 말씀은 그들을 세상과 분별되게 한다. 그들은 세상에 속해 있지 않고 그분께 속해 있다. 이 거룩케 하시는 말씀은 그들을 지켜주며 심지어 그들이 세상에 남아 있을 때도 그러하다.
(3) 영광에 의해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함이니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서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함은』(22-23절). 아들은 아버지의 생명과 본성을 받았으므로 아버지를 표현한다. 아들의 영광이란 곧 그분이 아버지의 생명과 본성을 가짐으로써 아버지를 표현하는 것이다. 가령 대통령에게 한 아들이 있는데 그를 자기의 대표로 파송한다고 하자. 이 아들의 영광은 곧 생명과 본성에 있어서 그 대통령을 표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그가 표현하기 위한 아버지의 생명과 본성을 가졌다는 점에서 아버지로부터 영광을 받는 것이다.
아들의 이 영광을 그분이 우리에게 주셨다. 우리는 아버지의 생명과 본성을 함께 공유하고 있으므로 그분을 표현할 지위와 권리를 갖고 있다. 우리는 이 영광을 갖고 있다!
우리는 생명으로 말미암아 그 이름 안에서, 말씀에 의해, 영광 안에서 하나 안으로 이끌어졌다. 이 하나는 삼일 하나님 안에 있는 하나이므로 참된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하나 안에서 그분과 연합되었다.
우리는 이 참된 하나를 위하여 여기에 있다. 그분의 생명으로 말미암은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의 하나, 우리를 세상에서 분별시키는 그분의 말씀에 의한 삼일 하나님 안의 하나, 하나님을 그분의 생명과 본성으로 표현하는 영광 안의 하나, 이것이 곧 아들과 아버지의 영화롭게 되심이다! 또한 이것이 바로 교회생활이다!
위트니스 리
[요한의 보수하는 사역, "삼일 하나님 안에서의 하나", 한국복음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