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성한 말씀을 누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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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메시지에서는 몸에 관하여 다방면에 걸친 많은 문제들을 다루고 싶다. 첫째는 교리에 관한 것이다.

 

교리의 두 부류

 

교리가 반드시 소극적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교리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교리의 두 부류 사이의 차이를 구별해야 한다. 첫번째 부류는 분열시키지 않는 교리들을 포함하는 반면, 두 번째 부류는 분열시키는 교리들을 포함한다. 어떤 교리들은 우리의 믿음을 구성하는 기초적인 것이다. 그러나 기초적인 것이 아닌 다른 많은 교리들도 있다.


공통적인 믿음

 

우리의 믿음은 어떤 기본 교리들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이 한 분이지만 삼일 하나님-아버지, 아들, 그 영-이심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은 유일하게 한 분이지만 삼이일(三而一) 이심을 믿지 않는 사람은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이 교리는 분열시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기초적이며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믿어야 하는 것이다.

 

두 번째로, 우리는 모두 하나님이 아들 안에서 육신을 입었음을 믿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으로 육신이 되었다는 뜻이다. 이것을 믿지 않는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다.

 

세째로, 우리는 모두 사람으로 성육신 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사시고, 우리 구속을 보장하기 위하여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음을 믿어야 한다. 사흘 후 그는 육신적으로 또 영적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 오늘 그는 우리의 구원자시요, 부활 안에서 우리의 주(主)요, 우리의 생명이다. 그를 믿으면 우리 죄가 사하여지고, 그가 우리의 생명으로 우리 안에 들어오고, 우리는 거듭난다. 거듭난 모든 자들은 유일한 교회이다. 그들이 어느 지방에 거하든지 그들은 우주 교회의 지방적인 표현이다.

 

마지막으로, 교회 안의 모든 성도들은 주 예수께서 그들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재림하실 것을 기다리고 있다. 이것이 구원의 믿음을 구성하는 교리들이요, 구원받기 위하여 우리가 믿어야 하는 기본적인 교리들이다. 건전하고 순수한 신자들은 모두 이러한 기본 교리를 붙잡고 있으므로 이것을 같은 믿음이라 부른다(딛1:4). 여기에 관하여는 성도들 가운데 논쟁이 거의 없다.


기본적인 교리들만 주장함

 

이러한 기본적인 교리와 함께 성경은 다른 많은 교리들을 포함하고 있다. 다른 교리들도 필요하고 중요하지만 그것은 믿음을 구성하는 기본 교리는 아니다. 종교 개혁 때부터 오늘날까지 매우 많은 분열이 나타났다. 모든 분열들은 대부분이 다른 교리들에 의해 일어났다. 어떤 분열도 기본 교리들에 의해 일어난 것은 없다. 왜냐하면 기본 교리들 가운데에는 성도들을 나누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분열은 여러 가지 분열적인 교리들에 의해 생겨났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에 주의해야 한다. 주님의 회복 안에 있는 우리는 믿음을 구성하는 기본 교리들을 주장한다. 이 기본 교리를 붙잡지 않는 사람은 순수한 신자가 아니고 구원을 받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기본 교리들을 떠나서 다른 어떤 교리들을 주장하지 않는다.

 

방언이나, 기도로 말씀 읽기나, 발 씻음이나,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 등이 기본 교리인가? 물론 아니다. 이 교리들 중 어느 것도 믿음을 구성하지 않는다. 방언이나, 말씀 먹기나,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실행을 하고 안 하고는 여러분의 구원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하나님이 삼일 하나님이심을 믿고,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으로 성육신 되셨음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것을 믿고, 그가 재림하실 것을 믿는 한 여러분은 구원을 받았고, 교회의 한 지체이다.

 

어떤 사람은 말씀을 먹지 않고 방언을 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공통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구원받은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이 기본 교리들을 믿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발을 천 번 씻었다 하더라도 구원받지 않은 것이다.

 

또 하나의 예를 들면 왕국의 교리는 성경의 기본 교리가 아니다. 형제회의 어떤 교사들은 왕국이 중단되었다고 말한다. 성경에서는 왕국이 오늘 여기에 있다고 계시한다. 그러나 내가 경고하거니와, 청년들은 나가서 왕국에 대한 이 특별한 관점을 지방 교회 교리로서 가르치지 말아야 한다. 더우기 영을 훈련하는 문제도 기본 교리가 아니다. 나는 청년들 중 몇몇이 다른 사람들에게 주장하기를, 왕국이 오늘 여기에 있고 모든 사람들이 말씀을 먹어야 하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들의 영을 훈련해야 한다고 할까 걱정된다. 청년들이 이렇게 하면 편당이 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것 중 어느 것도 주장해서는 안 된다.

 

최근에 한 형제는 나에게, 교회들이 라이프-스타디 메시지를 사용하여 라이프-스타디 메시지 편당이 될까 우려하는 몇몇 성도들이 있다고 말했다. 우리에게는 교회들에게 라이프-스타디 메시지를 사용하라고 강요할 의도가 없다. 그들에게 이러한 메시지에 대한 욕구가 없다면 그것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통닭을 먹고 우유를 마시는 것이 우리를 편당으로 만들지 않는 것처럼 그것을 사용하는 것은 교회를 편당으로 만들지 않는다. 우리는 배가 고플 때 먹고 마신다. 라이프-스타디 메시지에 대해서도 똑같아야 한다. 라이프-스타디 메시지를 사용하지 않는 교회도 여전히 교회이다.

 

말씀 먹는 것이나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여러분이 말씀 먹을 필요를 느끼지 않으면 그렇게 하지 말라. 여러분이 말씀 먹는 데 주의하지 않는다고 해서 여러분을 배제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마찬가지로 교회가 활기 없고 엉성하다 할지라도 여전히 교회이고, 어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동시에 들림받으리라고 믿어도 여전히 교회이다. 그러나 나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은 이기는 자들이 먼저 들림받고 패배한 사람들은 대환난을 거칠 것이라 믿는다. 그렇지만 동시에 들림받으리라고 믿는 사람이나 이기는 자들이 먼저 들림받으리라고 믿는 사람이나 모든 그리스도인은 다 교회의 일부분이다. 이기는 자들이 먼저 들림 받는다고 믿는 사람들은 교회이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동시에 들림 받는다고 믿는 사람들은 교회가 아니라는 경우는 없다. 깨어 있든지 엉성하든지 교회는 여전히 교회이다.

 

우리는 믿음을 구성하는 교리 외의 다른 교리들을 주장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순수한 말씀을 알아야 하고 그에 따라 행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들은 엉성하거나 느슨하게 있기를 원하지 않으며, 오늘날 기독교 가운데 퍼져 있는 그 영향 아래 남아 있기를 원치 않는다. 나는 우리가 모두 이 두 범주 사이의 차이점을 인식할 수 있기 바란다. 교회는 그 영에 따른 하나 위에와 지방에 따른 하나 위에 건축된다. 교회는 천국이나, 말씀 먹는 것이나, 영을 훈련하는 것 등에 관한 교리들 위에 세워지는 것이 아니다.


독단적인 권위가 아님

 

이제 나는 지방 교회 안에 있는 인도자의 지위에 관하여 한마디 하고자 한다. 우리 가운데에는 독단적인 권위가 없다.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이 권위를 취하거나 인도자가 되려고 갈망한다면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마태복음 20장 25절부터 27절까지에서 주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종으로서 성도들을 섬겨야 한다. 교회는 세상과 다르다. 세상에서는 왕이 백성들 위에 군림하지만 교회에서는 가장 높은 자가 종이 되어야 한다. 모든 장로들은 교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어떤 사람이 권위를 취하거나 어떤 지위나 위치를 가지려 한다면 그것은 부끄러움이다. 가장 부끄러운 일은 지위나 위치나 직함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뿐 아니라 회복 전체에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의 영은 이렇게 지위를 추구하는 일을 거부하고 정죄해야 한다.

 

바울은 가장 큰 사도로 여겨질지 모르나 그는 교회를 섬기고 그들을 돌보는 종으로서 수고한 사람이다. 신약에 의하면, 장로들은 자신을 위해 권위를 취한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섬기는 자들이요 수고하는 자들이다. 우리는 모두 우리가 위치나 지위나 직함을 추구하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도리어 우리는 이러한 부끄러운 실행을 버려야 한다.


인도하는 자들을 따름

 

권위의 문제에 대한 면을 볼 뿐 아니라 이제 우리는 다른 면을 생각해야 한다. 히브리서 13장 17절에서는,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고 말한다. 히브리서 13장에서는 인도하는 자들에 대해 세 번이나 언급하고 있다(7, 17, 24절).

 

우리는 주님이 주의 회복 안에서 많은 인도자들을 주신데 대하여 주님께 감사드린다. 장로들은 인도를 맡은 인도자들이다. 장로들은 집회소에 있는 화장실을 깨끗하게 하는 것을 포함하여 모든 것에서 인도자가 되어야 한다. 장로는 명령을 하고 모든 성도들이 종처럼 일하며 집회소를 깨끗하게 하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장로 중 한 명이 화장실 청소를 할 필요를 느꼈다면 그가 청소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 성도들은 장로들이 일하는 것을 볼 때 장로들을 따라야 한다. 순종하는 것은 인도하는 자를 따르고 복종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장로들이 군림하는 자가 되고 모든 성도들이 복종하는 신하가 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이런 관념은 완전히 틀린 것이다. 오히려 교회 안의 장로들과 인도하는 자들이 앞장서야 한다. 그러나 일단 앞장서던 일이 이루어지면 장로들은 그 특별한 일을 계속할 필요가 없다.

 

어떤 장로들은 자신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명령하기를 좋아한다. 또 어떤 장로들은 그들 자신이 모든 것을 다 하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화장실을 청소하더라도 혼자서 하고 싶어할 뿐 다른 사람들이 함께 하기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명령만 하고 자신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장로가 있을 수 있고, 자신이 모든 것을 다 하는 장로가 있을 수 있다. 이 두 극단 대신, 형제들은 앞장서서 본을 보인 후 성도들이 그것을 하도록 허락해야 한다. 장로들은 하나하나를 다 이렇게 해야 한다.

 

장로들이 합당하게 앞장설 때 성도들은 다만 이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 『우리들을 위해 모든 것을 하는 부지런한 장로에 대해 주님을 찬양합니다! 그들은 정원을 쓸고 카펫트를 소제하고 화장실을 청소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누리기만 하면 됩니다.』

 

때때로 성도들이 장로들을 비판하고 정죄할지도 모른다. 어떤 성도들은 아무 것도 하기를 원치 않고 장로들이 모든 것을 하기를 더 좋아한다. 이것은 비정상적인 것이다. 장로들은 겸손하게 앞장서서 본을 보이고 모든 성도들은 그들을 따라야 한다. 장로들이 집회소를 청소하고 잔디를 깎으면 성도들도 똑같이 해야 한다. 이것이 성경에서, 인도하는 자들을 순종하고 그들에게 복종하라고 말한 뜻이다. 장로들은 앞서서 본을 보이고 성도들은 그들을 따른다면 주님의 간증은 퍼져나갈 것이고 모든 성도들은 기능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신약에서 말한 인도자의 지위에 관한 정확한 이해이다.

 

신약에 의하면, 교회 안에는 지배자도 부하도 없다. 우리는 모두 형제들일 뿐이다(마23:8). 신약에서의 다스린다는 것은 앞장선다는 뜻이고 다스림 아래 있다는 것은 인도를 따르고 인도에 복종하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 이 땅 위에 있는 천국이다. 이것은 땅에 속한 제국이나 행정과는 아주 다르다. 교회 생활의 실행에서 어떤 사람들은 앞장서서 본을 보이고 성도들은 따른다. 우리 가운데에는 계급 제도가 없다.


다르게 가르치지 않기를 배움

 

더우기 교회 생활에서 우리는 모두 다르게 가르치지 않기를 배워야 한다(딤전6:3-5). 분쟁이나 분열을 일으키고 다른 의견을 낳는 것은 피해야 한다. 우리는 건전한 가르침에 따라 나아가야 한다. 「질문들과 말의 싸움」으로 고통받을 필요는 없다(딤전6:4, 헬라어 원문). 우리는 모두 주의 회복을 위해 있으므로 다르게 가르쳐서는 안 된다.

 

우리는 들림 받음이나 왕국 등 의견들을 일으킬 수 있는 교리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러한 것들에 대해 가르치지만, 여러분이 그에 관하여 서로 논쟁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논쟁하고 싶어할 때 여러분은 다만 이렇게 말해야 한다. 『형제여, 당신은 이렇게 믿으십시오. 그것은 나에게는 문제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들림 받음에 대해 다른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논쟁할 필요가 없다. 교리에 대하여 토론하거나 대적하는 분위기를 만들지 말고 다른 사람과 화목하라.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우리는 말씀 먹는 것이나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주장하지 말아야 한다.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본 사람일지라도 말씀 먹는 것이나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느끼지 못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들에게 이렇게 해야 한다고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이 그에 대한 필요를 느낄 때까지 기다리라.

 

예를 들면, 나는 금시계를 가지고 있고 다른 사람은 장난감 시계를 가지고 있을 수 있다. 내 손자들은 금시계보다 장난감 시계를 더 좋아할 수 있다. 내가 그들에게서 장난감 시계를 취하면 그들은 기분이 나빠서 울 것이다. 그들이 자랄 때까지 기다리기를 배워야 한다. 그들이 자랄 때에는 나의 금시계를 제대로 인식할 것이다. 다른 사람과 논쟁하지 말라. 그보다 조용히 기다리며 그들을 자라게 하라. 그들이 다른 시계를 준비할 때까지 장난감 시계를 가지고 놀도록 그대로 두라.


획일화가 필요 없음

 

교회들 가운데에는 획일화가 필요 없다. 어떤 교회는 말씀 먹기를 실행하고, 어떤 교회는 말씀 먹기를 실행하지 않을 수 있다. 교회들을 똑같이 만들려고 하지 말라. 교회 생활은 군대나 학교와 같지 않고 가정과 같다. 어떤 교회들은 가정에 있는 아이들과 같을 것이다. 그러나 어린 아이 같은 교회 생활에 대하여 논쟁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우리는 그러한 교회를 소중히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린 아이 같지만 아주 새롭고 신선하기 때문이다.

 

다른 교회들을 여러분의 교회와 똑같게 만들지 말라. 그렇게 하는 것은 연약한 싹을 뽑아서 죽게 하는 것이다. 싹을 땅에 그대로 두어 자라게 하라. 아마 여러분의 지방에 있는 교회는 수년 동안 자라서 높은 수준에 도달했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다른 교회는 그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을 수 있다. 다른 교회들은 더 병들었을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지 뿌리를 뽑아버리지 말라. 오히려 여러분은 그곳에 공급해야 한다. 교회를 획일화하려는 시도는 모두 잘못된 것이다.

 

더우기 어떤 교회에서도 성도들을 획일화하려고 하지 말라. 이렇게 하면 여러분은 어려움에 빠질 것이다. 육신적인 생각은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이 똑같기를 원한다. 그것은 멋대로인 어린이가 뛰고 떠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건강한 가정은 시끄러운 가정이다. 정상적인 가정에서는 아이들이 장난하고 떠든다. 몇몇 아이들은 울고, 몇몇 버릇없는 소년들은 심지어 서로 싸우기도 할 것이다. 이것이 정상적이고도 건강한 상태이다.

 

교회들 가운데에서 어떤 사람들은 여러 번 나에게 와서 서로 비난했다. 그러나 나는 모든 사람을 정당화하고 말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싸우는 나이이기 때문에 정당합니다. 여러분이 싸우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틀림없이 병든 것입니다.』 나는 이 교훈을 나의 손자들로부터 배웠다. 그들이 제멋대로 굴지 않는다면 그들이 아픈 것임에 틀림없다. 언제나 그들이 너무나 조용할 때에는 그들에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궁금하다.

 

장로들은 편들지 않기를 배워야 한다. 대신 싸우는 사람들을 모두 정당화시키고 그들을 그대로 놔 두어야 한다. 그들이 싸우면 싸울수록 그들은 더 먹을 것이다. 그들이 더 먹으면 먹을수록 그들은 자랄 것이다. 그들이 더 자라면 자랄수록 그들은 더 싸울 것이다. 이것이 순환이다. 싸우는 것은 먹는 것을 돕고, 먹는 것은 자라는 것을 도우며, 자라는 것은 다시 돌아와서 싸우는 것을 돕는다. 모든 어린 자들은 모두 이와 같이 자란다. 이 말이 몇몇 나이 든 사람을 놀라게 할지 몰라도 이것은 어린 자들의 자라는 길이다.


교회 생활의 아름다움

 

그러나 이것은 누구나 싸워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여러분이 어떤 사람과 싸울지라도 여러분은 그와 같은 교회 안에 있기 때문에 여전히 그를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같은 회복 안에 있고 같은 간증 안에 있기 때문에 서로서로를 사랑한다.

 

매우 자주, 나는 어떤 교회 안에 있는 장로들에게 어떤 일들을 정죄할 필요가 없다고 말함으로써 그들을 놀라게 했다. 교회를 획일화시키지 말고 모든 사람들을 똑같이 만들지 말라. 나이 든 사람은 나이 든 사람이고, 어린 자들은 어린 자들이고, 버릇없는 자들은 버릇없는 자들이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여러분은 소년들을 소녀로 만들 수 없다. 모든 소년들은 제멋대로일 것이고, 열 살 아래의 모든 소녀들은 아주 얌전할 것이다. 가장 얌전한 아이들은 열 살 아래의 소녀들이고, 가장 버릇 없는 아이들은 열 살 아래의 남자 아이들이다. 얌전한 여자 아이나 버릇없는 남자 아이들이나 다 사랑스럽다. 이것이 가정의 아름다움이다.

 

교회 생활에서 우리는 얌전한 자매들과 버릇없는 형제들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것이 교회 생활의 아름다움이다. 우리가 하나 안에 남아 있는 한 싸운다 할지라도 조화가 있으며 아름다움을 볼 것이다. 우리가 싸울지라도 우리에게는 여전히 조화가 있다. 이상한 말같이 들릴지라도 이것은 사실이다. 싸움은 있지만 분쟁은 없다. 우리는 한 회복을 위하여 있고 한 간증을 위해 있다. 아무리 많이 싸운다 할지라도 우리의 싸움은 회복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대적자들을 다룸

 

나는 또한 우리와 대적하는 사람들을 다루는 데 관하여 한마디 하고 싶다. 어떤 대적자도 절망적인 경우로 여기지 말라. 오히려 우리는 그들의 대적하는 것을 황금 같은 기회로 여겨야 한다. 모든 대적자들은 좋은 「고기」이다. 우리는 대적자들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바꿔야 한다.

 

대적자들을 다루는 것은 우리의 동기를 드러낼 것이다. 우리의 의도가 다만 사람들에게 확신을 주고 우리의 일을 위해 그들을 얻는 것이라면, 우리의 동기는 순수하지 않다. 우리의 동기는 오로지 그리스도의 산 간증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어떤 대적자가 이것을 받아들이느냐 않느냐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의 책임은 그들에게 주님의 간증을 분명히 할 기회를 잡는 것이다. 대적자들을 접할 때 우리는 깊은 곳에 그들을 잡겠다는 의도를 가질 수 있다. 우리는 그런 의도를 잊어야 한다. 우리의 동기는 지방 교회들을 증가시키겠다는 의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님의 간증에 의하여 일어나야만 한다.

 

우리는 지방 교회들을 증가시키기 위해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의 밝고, 빛나고, 강하고, 진취적인 간증을 위해서 있다. 우리는 사람들이 이 길로 와서 우리에게 동의하고 우리를 따르는지 어떤지에는 관심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만 예수의 간증을 주의한다. 우리는 이 간증을 감추거나 숨기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낼 모든 기회로 잡을 것이다.

 

종종 나는 어떤 사람들이 좋은 재료들이니 교회를 위해 그들을 얻어야 한다고 성도들이 말하는 것을 듣는다. 이것은 우리의 동기를 나타낸다. 우리는 이러한 일을 위하여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반복하거니와 우리는 예수의 밝고 빛나는 간증이 되기 위하여 여기에 있다. 우리는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비추고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이 그것을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는 주님께 달려 있다.


대답할 준비가 됨

 

대적자들을 다루려면 우리가 발간한 많은 책을 읽음으로써 우리 자신을 준비해야 한다. 어떤 형제는 우리를 대적한 책을 읽고 독을 먹었지만 그후에 우리 책을 읽고 도움을 받았다.

 

대적자들은 나의 말씀을 왜곡하기를 좋아한다. 그렇다. 내 책 중 한 권에서 나는 교회가 삼일 하나님과 하나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삼일 하나님과 교회는 하나 안에 있는 넷이다. 아버지는 아들 안에 있고, 아들은 그 영 안에 있으며, 그 영은 교회 안에 있다. 이것이 하나 안에 있는 넷이다. 그러나 대적 자들은 이 문장을 왜곡하여 우리가 교회를 신성화하고 교회를 숭배한다고 말한다. 얼마나 왜곡한 것인가!

 

한 문장을 이해하려면 단락 전체뿐만 아니라 책 전체를 읽어야 한다. 한 문장이나 한 단락을 떼어내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우리가 발간한 모든 것은 철저히 숙고한 것이다. 보통 그것은 수년 동안의 연구와 체험의 결과이다. 우리는 우리가 발간한 것이 모두 성경에 따른 것이라는 완전한 확신을 갖고 있다.

 

성경은 우리가 말한 모든 것에 대한 기초이다. 우리들을 공격한 「마인드밴더(The Mind benders)」는 성경으로부터 인용한 것이 아니다. 그 책에서 우리를 대적하여 겨눈 비난은 성경이 아닌 역사적인 기독교에 기초를 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좇지, 역사를 좇지 않는다. 마르틴 루터가 역사적인 교회를 좇았다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회복은 없었을 것이다.

 

가능하다면 우리의 모든 책을 읽으라. 여러분이 우리 말의 어떤 문장을 떼어내서 왜곡하는 대적자를 만날 때 그 책을 읽어 보라. 준비하라. 그러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를 알 것이다.

 

베드로 전서 3장 15절에서는,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라고 말한다. 이 구절에서 「대답」으로 해석된 헬라어는 「방어(防禦)로 주어진 대답」을 의미한다. 그러한 대답을 하려면 여러분은 우리가 뜻하고 있는 것과 우리가 누리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대적 자들이 어떤 것을 질문할 때 방어할 수 있고 어떻게 대답할지를 알 것이다. 이것은 준비 없이는 될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여러분에게, 『왜 너희들이 교회이고 다른 무리들은 교회가 아니라고 말하느냐?』라고 물을지 모른다. 이 질문은 긴 대답을 요구한다. 피상적으로 대답할 수 없다. 이와같은 질문에 대답하기 위하여 여러분은 준비해야 한다.

 

여러분은 대적자들을 만날 때, 그들과 논쟁하거나 성질을 내지 말라.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많이 비난하고 대적할지라도 그들과 논쟁하지 말고 기쁨과 인내를 가지라. 그들을 적으로 여기거나 소망 없는 경우로 여기지 말라. 오히려 우리의 누리고 있는 것을 이해하도록 최선을 다하여 그들을 돕고 결과는 주님께 맡기라.

 

이제 이 메시지에서 다룬 중점들을 요약하자. 우리는 믿음을 구성하는, 구원에 필요한 기본적인 교리들만을 주장할 뿐 다른 교리들은 주장하지 않는다. 우리 가운데서는 권위를 취하지 않으며 지위나 위치나 직함을 갈망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세상 방법에 따른 순종이나 복종은 없어야 한다. 그대신 우리는 모두 영 안에서 행하기를 배워야 한다. 장로들은 앞장을 서야 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따라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할 때 주님의 간증은 퍼져나갈 것이다.

 

그리고나서 다른 사람들, 특별히 대적자들은 도움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그들을 적이나 소망 없는 경우로 여기지 말고 그들을 사랑하며, 우리가 누린 주님을 최선을 다해 그들에게 전해야 한다. 그들을 돕고,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을 그들에게 제시함으로써 우리 자신이 많은 것을 배울 것이다.

 

지금 여러분은 많은 것을 알고 있을지 모른다. 여러분이 다른 사람에게 제시할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여러분은 달마다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생명뿐만 아니라 지식에 있어서도 자랄 것이다. 이것은 주님의 회복의 전진을 도울 것이다. 여러분이 접촉하는 사람들이 결코 이 길로 돌아오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여러분의 제시를 통하여 빛을 받게 되고 심지어 확신을 가지고 굴복하게 될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들의 대적하던 것은 잠잠해지고 여러분을 그렇게 맹렬하게 대적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리 많은 책이 우리를 대적하여 쓰여질지라도, 결국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지방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거룩한 사람들이고 거룩한 말씀을 믿고 성령 안에서 행하고 주님의 길에서 주님을 따르는 자들임을 깨달을 것이다. 대적자들의 양심은 이것을 간증할 것이다.

 

담대하게 나아가자. 형제로서 서로 사랑하며 주님의 간증을 위해 함께 나아가자. 우리는 또한 밖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며, 그들을 돕고, 그들에게 주님의 간증을 제시해야 한다. 그러면 주님의 임재가 우리와 함께할 것이고 주님의 축복이 우리 위에 임할 것이다.


위트니스 리
[그 영과 몸, "제21장", 한국복음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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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그리스도를 살기 위하여 능동적-수동적이 됨 청지기 12.04.19.14:48 1183
125 부모를 공경하고 결혼을 존귀히 여김 청지기 12.04.19.14:38 941
124 영의 느낌을 따름 청지기 12.04.19.14:35 987
123 보배와 질그릇 청지기 12.04.19.14:29 1101
122 눈물 청지기 12.04.19.14:24 1482
121 기둥으로 변화됨 청지기 12.04.19.14:16 921
120 분리와 계시 청지기 12.04.19.09:38 953
교회생활에 관한 몇 가지 중요한 문제들 청지기 12.04.19.09:33 1062
118 영적 생명의 단계 청지기 12.04.19.09:27 1130
117 오락 청지기 12.04.19.09:21 962
116 세상과의 분별 청지기 12.04.19.09:14 965
115 자아의 파쇄와 영의 해방 청지기 12.04.18.19:01 940
114 주님의 이름을 부름 청지기 12.04.18.18:57 1604
113 이기는 생명을 체험하는 길 청지기 12.04.18.18:50 940
112 제사장의 의복―흉패와 에봇 청지기 12.04.18.18:40 1898
111 혼적인 신자의 경험 청지기 12.04.18.18:38 1121
110 십자가로 돌아가라 청지기 12.04.10.11:02 902
109 사실, 믿음, 체험 청지기 12.04.10.10:58 895
108 생명의 체험―헌신 청지기 12.04.10.10:52 999
107 생명의 체험과 성장 청지기 12.04.10.10:46 967
106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 청지기 12.04.10.10:44 1565
105 삼일 하나님 안에서의 하나 청지기 12.03.27.13:40 1012
104 판결의 흉패 청지기 12.03.27.13:35 905
103 주님의 재림 청지기 12.03.27.13:31 1022
102 처음 익은 열매 청지기 12.03.27.13:23 934
101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 청지기 12.03.27.13:16 1015
100 믿는이들의 휴거(2) 청지기 12.03.27.13:03 1186
99 믿는이들의 휴거(1) 청지기 12.03.27.12:55 940
98 그리스도의 승천으로부터 이 시대 끝까지의 세계 역사―첫째 인부터 네째 인까지 청지기 12.03.26.10:11 1037
97 특별하고 최종 완성적인 예수의 증거 청지기 12.03.26.10:07 898
96 하나님과의 교통 안에 삶―영광스런 중재(仲裁) 청지기 12.03.26.10:01 900
95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은혜를 앎―씨와 땅 청지기 12.03.26.09:51 1218
94 부활 안에 있는 생명―열국에 의해 상징된 종파 안의 문제 청지기 12.03.26.09:40 877
93 사람의 세번째 타락 청지기 12.03.23.17:42 997
92 사탄의 배역과 파괴 청지기 12.03.23.17:35 1037
91 하나님이 믿는이들을 다루시는 길―왕국에서의 징계(Ⅱ) 청지기 12.03.23.17:30 1048
90 하나님이 믿는이들을 다루시는 길―왕국에서의 징계(Ⅰ) 청지기 12.03.23.17:24 1254
89 하나님이 믿는이들을 다루시는 길―천국에 들어가는 조건 청지기 12.03.23.17:14 1067
88 하나님이 믿는이들을 다루시는 길―징계와 상급 청지기 12.03.22.19:03 1395
87 영에 속하는가 두뇌에 속하는가 청지기 12.03.22.18:57 914
86 하나님의 구속의 방법 청지기 12.03.22.18:47 996
85 새 종교를 향한 다섯 단계 청지기 12.03.22.17:59 866
84 새 예루살렘―성의 치수들 청지기 12.03.22.17:51 1148
83 사역의 재고―서문, 머리말 청지기 12.03.21.19:37 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