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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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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는 하나의 제목, 또는 하나의 일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항상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일은 자주 있는 일이지만 결코 매번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무엇인가?
바로 눈물이다. 당신은 눈물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사람이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것은 좋은 현상이다. 영성에 지극히 체험이 있는 한 분은, 『만일 당신의 사랑을 눈물을 흘릴 줄 모르는 사람에게 준다면 이것은 당신의 돈주머니를 소매치기에게 보관해 두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이것은 사실이다. 당신이 돈주머니를 소매치기에게 보관해 두는 것은 얼마나 불안한 것인가? 이와 마찬가지로 당신이 당신의 사랑을 눈물을 흘릴 줄 모르는 사람에게 주는 것은 반드시 당신으로 하여금 실망하게 한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눈물은 없어서는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무릇 눈물을 흘릴 줄 모르는 사람은 그의 사람 됨의 특성을 잃어버린 것이며,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는 눈물 흘리는 것은 사람이 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만한 사람을 보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것이 그의 용기라고 생각한다. 그는 그가 이렇게 하는 것이 다른 사람보다 고상하며, 많은 사람과 비교하여 초월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당신에게 말하거니와 마른 눈은 우리에게 그의 내면에 건조하고 딱딱한 마음이 있으며, 그의 마음은 반항할 수 있으며 감정이 없이 마치 목석(木石)같음을 알려 준다. 많은 때, 눈물 흘리는 것은 사람들에게 그의 심정을 말해준다. 눈물처럼 사람의 마음 속의 상태를 대변해 줄 수 있는 것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눈물이 마음의 출구라고 말하겠다.
예를 들어, 나는 오늘 너무 근심에 싸여서 탄식조차 할 수 없고, 말도 할 수 없으며, 밥도 먹을 수 없고, 잠도 잘 수 없고, 일도 할 수 없다 하자. 어떻게 해야 내가 나의 근심을 떨어버릴 수 있는가? 당신이 의사에게 가서, 『어떤 사람이 근심에 싸여 이런 지경에 이르렀는데, 무슨 치료법이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하자. 그가 만일 심리학을 이해한다면 그는, 『친구를 데리고 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어서 그로 기운을 내게 하십시오. 또는 경치가 좋은 곳에 가서 두루 돌아다니게 하거나 풀밭에 가서 산보하게 하십시요. 그렇지 않으면 음악을 들려주어 상쾌하게 함으로 근심하는 일을 잊어버리게 하십시오.』라고 말해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당신에게 말하는 것은, 이런 것들은 모두 효력이 생길 수 없다는 것이다. 만일 그 의사가 인생에 대하여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에게 한바탕 실컷 울게 할 때 어떤 일이라도 해결될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것은 사실이다. 당신 속에 압력이 심하고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눈에서 한두 방울 눈물이 떨어지기만 하면, 기운이 나고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마음 속에 있는 것이 눈으로 흘러나오다니, 정말 기묘한 일이다. 눈은 마치 마음의 출구와 같다. 눈물을 흘릴 때 마음이 열린다.
나는 한 불구자를 기억하고 있는데, 그는 신체 결함으로 인하여 마음이 정말 견디기 힘들어 했고, 심지어는 어떤 것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느껴서 세상을 싫어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었다. 이렇게 견딜 수 없는 것이 그의 마음 속에 칠 년 동안이나 계속 되었는데 마치 그를 불사르는 것 같았다. 그가 한번은 음악회를 갔는데, 그 음악회에 참석했던 모든 사람들은, 너무도 듣기 좋은 음악에 혼이 빼앗긴 것 같다고 느꼈으며, 매우 유쾌하고 평안하다고 느꼈다. 그런데 그는 어떠한가?
그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 『오늘 음악회가 정말 듣기에 좋지 않았습니까? 왜 눈물을 흘리나요?』라고 물었다. 그는 『본래 나는 정말 무료하여서 십 분도 참을 수 없을 것이라고 느꼈는데, 지금 음악을 듣자마자 눈물이 흐르니 모든 것이 좋습니다.』 그러므로 음악은 마치 그의 마음에 구멍을 내어 눈물이 흘러나오게 한 것 같다. 본래 우울함이 그의 마음을 가리웠었지만 이제 눈에서 눈물이 흐르자, 우울함도 눈물을 따라 나가버렸고 그 사람의 본성이 나타났다. 우울함에 갇혔었던 그 사람의 본성은 눈물에 의해 해방되었다. 그러므로 눈물을 흘리는 것은 그 사람에게 본성이 있음을 나타낸다. 눈물이 있어야 비로소 그의 인성을 나타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눈물을 흘리는 것이 연약함의 표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것이 도리어 그의 매몰함과 무인성(無人性)을 나타낸다.
눈물은 사람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데에 함께 갖는 몫이다. 그래서 우리 주님 또한 눈물을 흘리셨다. 성경은 비록 주님의 기쁨을 기록하고 있지만 그분의 웃음은 기록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분의 눈물은 기록하고 있다. 히브리서 5장 7절에서는 주님이 눈물 흘리신 일이 여러 번이었으며, 눈물 흘리는 것은 그분께 항상 있는 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사야 53장에서도 또한 그분은 자주 근심을 겪으셨으며, 고통을 받으셨다.
눈물은 매우 보배로운 것이다. 왜냐하면 유독 눈물만이 사람의 눈을 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너무 많은 먼지와 흙과 더러운 것들이 있어서 당신의 눈을 더럽히지만, 눈물이 있어 흘러나올 때, 당신으로 하여금 더욱 선명한 눈빛을 가지게 한다. 만약 눈에 눈물이 없다면, 어떤 사람도 눈으로 무엇을 보지 못할 것이다.
눈물은 물질 세계에서 씻음의 기능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영적인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당신에게 눈물이 많으면 많을수록 당신은 사물을 더 분명히 볼 수 있다. 당신에게 눈물이 없다면, 영적인 눈은 그 기능을 잃어버리게 된다. 한번은 팬톤 선생이 한 젊은 부부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당신들은 매우 좋지만, 그러나 아직 한 가지가 부족한데 이것을 하면 완전하게 될 것입니다. 이 일은 바로 주님이 빨리 오시도록 재촉하는 것입니다.』
그날 저녁 남편이 아내에게 말했다. 『이번에 그 선생님의 말씀을 들어야만 하오. 오늘 저녁에 우리는 이 일을 위해 기도합시다.』 남편은 충심으로 기도하고 난 후, 그의 아내도 기도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녀는 기도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스스로 추측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우리의 가정은 아주 좋아요. 부부 간에도 사이가 좋고 즐거우며, 경제적인 면도 문제가 없고, 우리 뜻대로 집도 아주 편안하고 아름다운데 내가 왜 주님이 빨리 오시기를 구해야 하나요? 천천히 오시기를 바래요.』 이렇게 칠 개월이 지났을 때 그녀의 남편이 갑자기 죽었다. 후에 그녀가 팬톤 선생을 만나자 그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그 칠 개월 후부터 저는 매일매일 주님이 빨리 오시기를 구했습니다.』 눈물이 그녀의 눈을 씻어서 그녀로 하여금 분명히 볼 수 있게 하였다.
당신이 생리학(生理學)을 안다면, 눈은 마치 유리와 같아서 반드시 항상 닦고 씻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투명하지 않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러므로 눈꺼풀이 붙었다 떨어질 때마다 눈물이 눈을 씻기 위해 나온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적인 세계에서 눈물을 흘려 보지 않은 사람은 그의 영적인 눈을 씻은 적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또한 분명하게 볼 수 없다. 이제까지 상처를 입어본 적이 없고, 뜻에 맞지 않은 일을 만나본 적이 없고, 아직까지 상심해본 적이 없고, 고뇌해본 적이 없으며 영 안에서 핍박받는 일을 만나보지 않았다면, 그들은 많은 일들에 대해 사물을 분명히 볼 수 없고 또한 알지도 못한다.
어떤 부모는 주님 안에서 정말 좋고 열심이 있으며 주님을 위하여 많은 일을 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서 그들이 가장 사랑하는 작은 아이가 죽었다. 그들은 너무 화가 나서, 『이제부터 우리는 더이상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치 않는다. 우리가 이렇게 성실하게 그분을 섬겼는데, 그분은 은혜를 주시기는 커녕 반대로 아이가 죽게 하셨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이후의 시간을 모호하게 보냈으며 이전과 같은 열심도 없고 주님을 추구하지도 않은채 팔 구 년을 지냈다.
어느 날 그 죽은 아이의 아버지가 광야에서 길을 가다가 양치는 한 사람을 보았는데, 그는 양무리를 이끌고 작은 개울을 건너려 하였다. 시골의 작은 개울 위에는 좋은 다리가 없고 단지 나무 판자 정도가 중간에 놓여 있어서 다리 역할을 한다. 사람은 그곳을 능히 건널 수 있지만 양에게는 그것이 쉽지 않다. 양은 담력이 적고 둔하다. 그러므로 그 목자가 아무리 양들을 때리며 건너도록 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것들은 가려고 하지 않았다. 후에 그 목자는 방법이 없으므로, 어미 양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아직 젖을 먹고 있는 어린 양을 품안에 안고서 먼저 저쪽으로 건너갔다. 그러자 어미양도 그의 어린 양을 사랑하기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건너갔다. 이같이 다른 양들도 함께 개울 저쪽으로 건너갔다. 그 아버지는 이것을 보고서, 「충분하다」고 말했다. 이때부터 그는 부흥(復興)하기 시작했다. 후에 그는, 『하나님이 내가 개울 이편에서 떨어질까 두려워해 건너가려 하지 않자, 나의 어린 아이를 먼저 데려 가셨다.』고 간증했다. 양처럼 그렇게 둔한 짐승도 따라갈 줄 아는데, 나는 왜 머뭇거리면서 가지 않는가?
그러므로 눈물은 많은 경우에 사람들을 하나님과 더 친근하도록 이끌 수 있다. 이 때문에 무릇 사람이 평탄하고 안일한 길만을 지나가며, 풍상우설(風霜雨雪)을 만나보지 않으면 높고 깊은 성인(聖人)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안락할 때에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 눈물을 흘리는 날에 이르면 주님을 시인하지 않는 사람, 단지 평범하고 포부가 없는 사람은 많은 체험을 가질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믿지 않는 것은 고통을 맛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 세상에서는 하루종일 희희낙낙하고 먹고 마셔도 처세할 수 있다. 특별한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제멋대로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무릇 눈물을 흘릴 줄 모르는 사람은 반드시 광명을 볼 수 없다. 당신이 세상 가운데서 여전히 이와같이 혼미하며, 술에 빠져 있다면, 아직 구원받지 못한 것이 당연하다. 그리스도인들이여, 당신의 굳은 마음이 눈물로 당신의 눈을 씻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영적인 일에 있어서도 이같이 모호한 것이다.
지금 우리는 눈물 흘리는 것에 대해서 성경이 어떻게 말하고 있으며, 이것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다룸받아야 하는지를 살펴보려 한다. 지금 나는 당신에게 쾌락이나 즐거운 웃음을 권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당신에게 아픈 마음과 통곡하는 것을 권한다. 왜냐하면 지금은 울어야 할 때이며 이 땅은 울어야 할 곳이기 때문이다. 내가 다시 말하거니와 무릇 눈물을 한 쪽에 제쳐놓은 사람은 세상의 실태를 알지 못하며 세상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모른다. 눈물을 흘릴 줄 모르는 사람은 이미 그의 사람됨의 본성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것은 참이다! 눈물을 흘리는 것은 인생의 참된 의미이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보아야 한다. 신구약 전체를 통하여 눈물을 언급한 곳은 수십 군데이나, 오늘 모든 성경 구절을 다 읽을 필요는 없으며 단 몇 귀절로 족하다. 우리가 오늘 말하고자 하는 몇가지 요점은, 눈물의 의미가 무엇인가와 눈물과 죄인의 회개와의 관계이다. 끝으로 우리의 눈물에 대하여 하나님은 어떻게 보시는가를 보기로 하자.
Ⅰ. 눈물의 의미
어떤 때는 너무 기쁘기 때문에 눈물이 흐르기도 한다. 그러나 대개는 슬픔이 지나치거나 신경이 너무 무거운 압박을 받기 때문이다. 우리 내면에 번민과 근심이 있고, 참기 어렵고, 마음에 받은 압박이 너무 무거워서 더이상 참을 수 없기 때문에 눈물을 흘린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 기묘한 일이 여기에 생긴다. 당신의 눈물이 흘러나오면, 본래는 당신 안에서 너무도 무거웠던 것이 갑자기 가벼워지기 시작하고, 본래 너무도 꽉 죄었던 것이 조금 풀어진다. 이것은 마치 당신의 눈물로 인하여 어떤 것이 당신 안에서 흘러나가는 것 같다. 본래 속에는 너무 많은 것이 있었는데, 이제 그것이 적어질 리가 없고, 본래 안에 가득찼었던 화가 지금 그렇게 적어질 리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눈물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것은 마음 속에 있는 것을 내보낼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눈물은 마음의 출구이다. 이제 우리는 성경에서 어떻게 말씀하는지 살펴보자.
욥기 16장 20절:『나의 친구는 나를 조롱하나 내 눈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고』. 이것은 욥이 사탄의 공격을 받고 욥의 세 친구가 그를 조롱한 후에 욥이 한 말이다. 형제여, 사람의 조롱과 압박을 받고서,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는 이러한 경험을 한 적이 있는가? 당신은 많은 때, 사람 앞에서 면박을 받은 적이 있는가? 당신은 손해와 억울한 누명을 받은 적이 있는가? 당신은 이러한 일들을 만날 때 욥처럼 그렇게 운 적이 있는가? 물론 사람 앞에서 우는 것은 그 사람이 연약하다는 표시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하여 우는 것은 합당한 것이다. 무릇 하나님 앞에서 눈물을 흘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나 자신은 말할 수 있다. 이와 반대로, 이제껏 하나님 앞에서 울어보지 못한 사람은 교통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과 친근하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으며, 무거운 짐을 여호와께 내려 놓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더욱 알 수 없다.
나의 친구 하나가 일찌기 내게 눈물 흘리는 것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그는, 『당신의 세상 길이 형통하지 않고, 처처에서 핍박을 받으며, 사람들이 당신을 옳지 않다고 말하며, 환경이 당신을 귀찮아 할 때에 당신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려야만 한다. 이것이 당신의 유일한 출로(出路)이며 오직 이것만이 당신으로 그 어려움을 해결하게 한다.』고 말했다. 이것은 사실이며 무릇 경험한 적이 있는 사람은 모두 같은 말을 할 것이다. 이러한 일은 피할 수 없는 것이며, 모든 성도가 경험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당신이 경건하게 날을 보내며 충심으로 하나님을 섬기고자 한다면, 이런 일들은 당신 몸에 반드시 임할 것이며, 또한 눈물도 반드시 흘려야 하기 때문이다. 눈물을 흘려보지 않은 사람치고 충성된 사람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형제 자매여! 당신은 어떠한가? 당신이 만일 이미 당신의 어려움과 기쁨을 하나님께 아뢰었다면, 나는 또한 당신이 동시에 당신의 눈물을 하나님께 드리기를 권한다.
시편 6편 6절 말씀을 보자. 『내가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다윗은 이 때에 환난을 당했고, 몸 또한 강하지 않았다. 그는 밤마다 눈물을 흘렸으며 심지어 요를 적시고 침상을 띄우기까지 했다. 나로 한 마디 듣기 싫은 말을 하도록 허락한다면, 무릇 웃을 줄만 알고 울 줄 모르는 사람은 아주 얕은 사람이라고 말하겠다. 무릇 매일 희희낙낙하는 것은 그의 속에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눈물을 흘려본 적이 없는 사람 중에 하나님께 발견되는 사람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눈물은 그의 속에 무엇인가 있다는 것을 말해주며, 사람으로 하여금 이것이 하나님께로서 비롯된 역사라는 것을 보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귀히 여기시는 것은 우리의 공개적인 눈물이 아니며, 사람들에게 보이는 눈물이 아니고 도리어 우리의 비밀한 눈물이며, 그분께 보여진 눈물이다. 「하나님을 향한 눈물」, 「밤에 흘리는 눈물」이 바로 보배로운 눈물이다. 우리는 다윗이 아주 잘 우는 사람임을 안다. 시편은 일찌기 그가 여러 차례 눈물을 흘린 일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죄악이 있거나, 환난을 당할 때마다. 매번 하나님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사울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단지 성질과 노기를 낼 줄만 알았지 눈물을 흘릴 줄 몰랐다.
우리는 눈물이 비애의 표시임을 보았다. 또한 우리는 비애가 사람에게 어떤 느낌을 주고, 희희낙낙하는 것은 사람에게 어떤 감동도 줄 수 없음을 안다. 왜냐하면 희희낙낙하는 것은 얕은 것이며 비애는 사람의 깊은 곳에서 나온 것이고 사람의 내면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인생의 경험이 많은 사람들은 모두 이것을 공인한다. 눈물은 마음이 상했다는 표시이다. 그러므로 눈에서 눈물을 흘리기 전에 마음 속에서 먼저 눈물이 있어야 한다. 무릇 마음에 애통함이 없이 눈물만 흘리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처럼 우리는 다윗이 하나님께 그러한 깊이와 경험을 하는 데까지 인도함 받은 까닭이 모두 그의 눈물로 말미암은 것임을 본다. 그가 흘린 눈물이 실로 많다는 것은 그가 받은 고난과 그가 만난 역경이 또한 지극히 많다는 것을 나타낸다. 많은 공과는 환난 중에 배운 것이다. 로마서에서 말한 것처럼, 곤고와 환난을 당하는 것이 인내를 배울 수 있게 한다. 다윗을 다윗 되게 한 것은 바로 그의 눈물이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만일 눈물의 공과 없이 그를 놓고 본다면, 그는 다른 사람보다 더 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에 포로되었을 때에 사람들은 그들을 비웃으며 말했다. 『너희는 무엇이 있느냐? 너희 하나님의 전(殿)도 훼파되었고 나라도 망했는데 너희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너희가 당한 것은 무엇이냐?』 이러한 상황 아래 고라 자손은 이러한 시를 써서 말했다.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시42:3). 그때에 그들은 진정 고통스러웠으며, 사람들은 날카로운 말로 그들을 자극하여 그들을 참을 수 없게 하였고, 그들은 부득불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렸다. 사람들은 그가 미워하는 사람에게 언제나 기회를 찾아 그를 자극하려 한다. 그들은 남을 자극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당신의 괴로움을 즐거움으로 여긴다. 그 때에 이스라엘 사람의 대적 또한 이와같이 그리스도인들을 자극했고 욕하며 조롱하여 고통을 느끼게 했다. 비록 그러할지라도 그들은, 얼마 후에는 하나님께서 이러한 눈물을 돌아보실 것을 믿고 다만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전도서 4장 1절은. 『내가 돌이켜서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보았도다 오호라 학대받는 자가 눈물을 흘리되 저희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저희를 학대하는 자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저희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은 듣기 싫은 말을 듣거나, 곤고와 학대를 당해서 우울함과 분노가 생기기 때문임을 본다. 이러한 것들이 당신 내면을 누르고 많은 시간이 흐른 뒤 당신이 더이상 참아낼 방법이 없으면, 당신은 눈물을 흘리게 된다.
예레미야 애가 1장 2절은, 『밤새도록 애곡하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 사랑하던 자 중에 위로하는 자가 없고 친구도 다 배반하여 원수가 되었도다』라고 말한다. 애가는 예레미야가 쓴 것으로 당시 이스라엘 사람이 포로 된 후의 체험을 말했다. 이 구절은 이스라엘 사람이 눈물 흘린 것은 그들이 거짓 대우를 받았기 때문임을 우리에게 알게 해 준다.
우리는 이상의 많은 구절들로부터 눈물이 다른 사람의 학대, 간사함, 조롱 또는 여러가지 순탄치 않은 환경을 당한 후에 흘리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압박과 고통의 표시이다. 우리는 이러한 일들이 우리 주님에게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그분의 마음이 애곡하여 눈물을 흘릴 수 없었을 것이다. 주님이 눈물을 흘리신 것은 우리에게 그분 또한 일찌기 이러한 것들을 겪으셨다는 것을 말해준다. 눈물을 흘리는 것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며, 도리어 거룩한 것이다.
나는 이 세상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 웃는 얼굴보다 훨씬 더 좋다고 말하고 싶다. 죄악과 음란으로 충만한 이 세상은 더럽기에 여전히 몇 방울의 눈물로 씻겨져야 한다. 만일 이 눈물이 없다면 세상은 아마 악으로 가득찰 것이다. 눈을 멀게 하는 사악한 이 세대는 더러워져서 몇 줄기의 뜨거운 눈물이 아직 있어야 하며, 사람으로 말한다면, 이러한 감정이 아직 있어야 한다. 만일 없다면, 아마 여전히 깊은 구덩이만도 못하고, 그것의 흑암은 지옥보다도 더할 것이다.
오늘날 이 땅에 지극히 많은 아름다운 꽃이 있지만, 그것을 기를 수 있는 눈물이 있는 것이 다행이다. 만일 없다면 일찍 말라 죽었을 것이다. 세상에 부모와 부부, 형제 관계, 더 나아가 친척과 친구의 관계에 있어서 그것을 유지할 수 있는 몇 방울의 눈물이 있는 것이 다행이다. 만일 없다면, 즉시 대환난 때의 광경으로 변해버릴 것이다. 우리는 적 그리스도가 나타날 것을 알지만 그것을 저지하는 눈물이 있음이 다행이다. 그렇지 않다면, 고통은 심해지고 죄악도 더 심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눈물은 인생의 참된 의미이며, 그가 아직도 인성을 가지고 있고 죄에 대한 느낌을 가지고 있다는 표시이다. 왜냐하면 언제든지 죄악이 있는 곳에는, 눈물이 반드시 있기 때문이다.
마음의 상처를 주는 환난이나 환난의 일들, 이전의 추억 등은 모두 우리의 눈물이 흘러나오게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릴 수 없는 것은 그가 자신의 이전의 역사를 잊어버렸고, 이미 떠나버린 그 낙원을 잊어버렸고, 오늘날 어떠한 지위에 처해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속에 있어서도 이와 같다. 만일 눈물이 없다면 사람은 처음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무릇 사람이 과거에 자기가 어떠한 일들을 겪었는지를 잊어버린 사람은 눈물을 흘릴 줄 모른다. 눈물을 흘리는 것은 회상으로 인하여 고통을 느낀다는 표시이다.
Ⅱ. 눈물의 기능
(1) 구원받는 것에 있어서
눈물은 스스로 주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당신이 눈물을 흘려야겠다고 말해서 눈물을 흘린다면 그것은 완전히 그 의미와 가치를 잃어버린 것이다. 무릇 마음 속의 고뇌로 말미암아 나온 것이 아닌 것은 조금도 의미가 없으며, 완전히 거짓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비록 이것이 자유로울 수 있지만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이며, 또한 모든 사람이 흘려야 하는 것이다. 당신이 만일 이제껏 눈물을 흘려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면, 나는 당신은 진실로 마음이 없는 사람이며 또한 분명히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지금 나는 주님을 믿지 않은 친구들에게 몇 마디 하고자 한다. 당신은 눈물이 사람을 주 예수 앞으로 이끌 수 있다는 것을 아는가? 또한 사람으로 하여금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더 친근하게 나아갈 수 있게 한다는 것을 아는가? 왜냐하면 눈물이 여기서 그러한 방해물을 제거하는 것은 바로 통회함으로써 죄악을 없애는 것이기 때문이다. 친구여, 당신은 죄가 있음을 인정하는가? 죄와 당신과의 관계를 아는가? 당신은 눈물을 흘리기까지 통회하였는가? 만일 당신이 아직까지 당신의 죄악을 인하여 심히 고통스러워하고 괴로워 한 적이 없다면, 나는 당신에게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묻고 싶다. 만일 어떤 사람이 죄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면, 나는 그가 목석이며 마음과 감정이 없다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당신의 마음이 죄에 대하여 어떠한가를 당신의 눈이 표시해 내기 때문이다. 아, 죄가 있다! 지금 하나님께 무슨 죄가 있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이, 단지 사람의 일들을 제시함으로도 당신에게 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잘못한 것이 얼마나 많은지를 생각해 보자. 우리 부모나 처자, 형제, 친척, 친구, 동급생, 동료 등 우리가 부딪치는 사람들 가운데 일찌기 몇번이나 그들에게 피해를 입히고, 속이고, 잘못 대했는지 모른다. 아마 물건에 있어서도 분명치 않고, 장부의 계산도 아직 끝내지 못한 것이 있을지 모르며 이러한 것들이 모두 다 죄이다. 만일 이것을 해결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하나님과 친밀할 수 없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일이다. 당신은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아는가? 당신에게 죄가 있으며 지금 당신이 죄악으로 충만하다면, 이 많은 죄는 당신을 이끌어 깊은 구덩이로 빠뜨릴 것이다. 친구여! 회개하라! 돌이키라! 당신의 눈물로 씻을 수 있다.
그렇다. 오직 예수의 피가 있어야만이 죄를 씻을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첫번째 것이요, 죄를 씻는 두번째가 필요한데 그것은 바로 눈물이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 앞에서의 죄는 보혈로 씻지만 사람의 마음은 눈물로 씻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 앞에서 눈물 흘리는 것은 영원히 죄를 씻을 수 없으며, 오직 피로써만이 씻을 수 있다. 그러나 피 또한 눈물을 요구한다. 주님의 피가 있고 그 위에 당신의 눈물이 더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주님의 구속이 있지만, 사람의 회개와 죄악을 미워함이 없다면 영원히 죄를 씻을 수 없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주관적인 체험이 있다면 눈물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옛 성도들은 어떻게 했는지를 살펴보자.
예레미야 애가 2장 18절은, 『저희 마음이 주를 향하여 부르짖기를 처녀 시온의 성곽아 너는 밤낮으로 눈물을 강처럼 흘릴지어다 스스로 쉬지 말고 네 눈동자로 쉬게 하지 말지어다』라고 말한다. 유대인이 이같이 눈물을 흘린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는 죄악을 회개하기 위함이며, 시온이 빼앗김을 인함이며, 예루살렘이 점령당했기 때문이며 이스라엘 백성이 강 동쪽으로 사로잡혀 갔기 때문이다. 아무런 길이 없는 상황에서 죄악을 인하여, 나라가 망하고 성전이 훼파됨을 인하여, 눈물을 흘렸다. 나는 오늘 당신이 강물이 흐르는 것처럼 그렇게 더욱더 많은 눈물을 흘리고, 주야로 눈물을 흘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아직 주님을 믿지 않은 친구여, 당신이 눈물 흘리기를 간절히 바란다. 무릇 죄에 대하여 웃을 수 있는 사람은 죄가 무엇인지 모르며, 그 자신의 운명 또한 알지 못한다. 무릇 눈물을 흘려본 적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보배로움을 알지 못한다. 무릇 죄에 대하여 울지 않는 사람은 죄의 쾌락을 떠날 줄을 모른다. 그러므로 죄를 위하여 우는 것은 없어서는 안 될 일이다.
당신은 다른 사람에게 해서는 안 될 일을 한 적은 없는가? 당신은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친 적이 없는가? 당신에게 교만이 없는가? 당신은 질투하고 원망하고 분낸 적이 없는가? 그렇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점에서 하나님께 득죄하며 또한 사람에게 득죄한다.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표면상으로만 울고 마음 속에서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면 조금도 소용이 없다. 그러므로 눈물을 흘리는 것은 외면적인 것이 아니다. 눈물의 근원은 바로 마음 속에 있다. 오직 마음으로부터 나온 것만이 자신이 느끼고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
죄악을 회개하기 위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은 신약에서 더욱 더 분명하다. 누가복음 7장 38절에서의 그 여인을 보자.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또 44절은,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라고 기록한다. 친구여! 이렇게 눈물 흘린 것을 경험한 적이 있는가? 세상의 눈물에는 많은 종류가 있다. 어떤 것은 실망 때문이며 어떤 것은 조급함 때문이며, 또 어떤 것은 쾌락의 극치 때문이다(이것은 아주 적다). 어떤 때는 고통이 너무 심하기 때문에, 미워함이 너무 심하기 때문에, 또 화를 내고 시끄럽게 싸우기 때문에 운다. 그러므로 눈물 흘리는 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다. 그러나 내가 묻고 싶은 것은, 이 여인이 이렇게 운 것처럼 당신이 자신의 죄에 대하여 지극히 마음이 아파서 눈물을 흘려본 적이 있는가이다.
주님의 피는 사람의 모든 죄를 깨끗케 하신다. 그러나 만일 사람의 눈물이 그 위에 더해지지 않으면, 영원히 사람에게 효력을 발하지 못한다. 이전에 알렉산더가 편지 한 통을 받았는데, 그 편지 속에는 그의 어머니의 죄상으로 가득차 있었고 그 어머니의 모든 죄가 하나하나 다 기록되어 있었다. 얼마나 많은지 셀 수 없을 정도였다. 그 뜻은 알렉산더 앞에서 그의 어머니를 고발하고자 함이었다. 알렉산더는 그 편지에 대한 답장을 보냈는데, 그 안에는 단지 다음과 같은 한마디 말만 있었다. 『내 어머니 눈에 흐른 눈물이 그녀의 모든 죄를 씻었다.』 일은 이렇게 끝났다.
물론 하나님 앞에서 당신이 많은 눈물을 흘린다고 해서 당신의 죄를 조금이라도 씻을 수는 없다. 그러나 또 한 방면의 실제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지만, 그 위에 우리의 눈물을 더하지 않는다면, 그 피의 효용은 우리 몸에 미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죄에 대하여 통회하고 눈물 흘려본 적이 없이 주님을 영접하여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세상에 이런 일은 이제까지 없었다. 진실로 주님을 믿은 사람은 모두 통회의 체험을 가지고 있다.
나의 한 친구는 죄를 처리하는 것에 대한 두 가지 약이 있다고 말했다. 한 가지는 주님의 피이고, 또 한 가지는 자신의 눈물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기묘하다. 그러나 사실이다. 진실로 피로 말미암은 사람치고 눈물을 흘려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 구약의 예표 또한 무룻 누룩을 제하지 않으면 유월절을 지킬 수 없으며 무교병을 먹지 않으면 양고기를 먹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피는 정말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또한 사람의 통회의 뜨거운 눈물이 그 위에 더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나갈 방법이 없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 손 안에 주님의 피를 들고 그 위에 몇 방울의 눈물을 더하여 눈물을 주님의 피 안에 섞어야 한다. 사람이 만일 이전의 죄에 대하여 마음아파 하지 않는다면 구원받을 가망은 없다.
오늘 나의 말은 구원의 은혜를 받는 것에 대한 눈물의 기능에 중점이 있지 않기 때문에 더이상 말하지 않겠다. 이제 나는 주님을 믿는 형제 자매들이 눈물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하고자 한다. 우리는 앞에서 예를 든 그 여인의 일에서 그녀가 눈물로 주님의 발을 적신 것을 본다. 여기서 우리는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올 때, 비록 주님의 머리와 발에 적실 향기로운 기름을 살 돈은 없지만, 우리 개개인 모두 눈물을 그분께 드릴 수 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한다. 기름이 비록 좋지만 그러나 눈물도 좋다. 눈물을 주님께 가져오는 것이 가져오지 않는 것보다 좋다. 그러므로 우리 개개인은 뜨거운 눈물을 그분께 가져오자!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눈물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 성경에서 살펴보자.
(2) 기도에 있어서
시편 39편 12절은, 『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대저 나는 주께 객이 되고 거류자가 됨이 나의 모든 열조 같으니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 앞에서 눈물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응답을 얻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당신의 기도에 만일 이 눈물이 더해진다면, 반드시 더욱 빨리 응답을 얻을 것이다.
어떤 때 많은 기도는 무심(無心)하다. 왜냐하면 그에게 눈물 흘림이 없기 때문이다. 당신이 만일 마음이 있다면 그 위에 눈물을 더할 수 있다. 당신은 이렇게 하나님께 말할 수 있다. 『나는 이 땅에서 오래지 않으며 단지 나그네와 거류자가 될 뿐입니다. 이 세상에서 이미 나는 고통에 이르렀으니 청컨대 당신이 내게 응답하소서.』 이렇게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것이다. 눈물이 비록 공로(功勞)는 아니지만 당신의 마음에 품고 있는 것, 곧 원하는 마음을 나타낸다. 하나님이 들으실 수 있도록 우리가 기도 중에 이러한 눈물을 많이 더하기를 원한다.
열왕기 하 20장 5절은, 『너는 돌아가서 내 백성의 주권자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일 만에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겠고』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얼마나 좋은지! 하나님은 당신의 눈물을 보신다. 히스기야는 그의 수명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고 또 눈물을 흘렸으며, 하나님은 그에게 응답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눈물 흘리는 기도를 좋아하시며, 우리의 눈물 흘리는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무릇 당신의 마음을 움직여서 눈물을 홀리게 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도 움직일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아무리 많은 눈물을 흘린다 해도 그것은 손해가 없다. 사람 앞에서의 눈물은 당신의 연약함을 표명하고, 당신에게 장부의 기개가 없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 앞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면, 이것은 오히려 당신이 목석과 같이 마비되었음을 나타낸다. 나 자신은 열왕기 하 20장 5절의, 「내가 너의 눈물을 보았다」라는 이 말씀을 가장 귀하게 여긴다. 그러므로 우리는 괴로움과 곤고를 만났을 때에나 핍박을 받고 갈 길이 없을 때마다 고개를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 두 줄기의 눈물을 흘릴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 앞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면 쓸모가 없다. 세상에 우는 사람은 본래 많지만, 그런 사람의 애곡은 단지 자신의 상심과 괴로움을 나타낼 뿐 어떤 일도 발생하게 할 수 없다. 눈물 위에 반드시 기도가 더해져야 한다. 당신은 매번 애곡하고 슬퍼하고 괴로와하면서 어찌 그 위에 기도를 더하지 않는가? 당신은 당신의 고난과 슬픔을 기도에 의지하여 하나님께서 들으시도록 말할 수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히스기야가 이렇게 한 것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우리 주님 또한 큰 소리로 애곡하고 눈물 흘리며 기도하셨음을 보여준다.
많은 경우 두 사람이 함께 우는 것은 소용이 없지만, 하나님 앞에서 우는 것은 유용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의 눈물을 보시고, 그의 구하는 것을 들어주시고자 하시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눈물 한방울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헤아리지 않으신다. 시편 56편 8절에,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으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 하였나이까』라고 말한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눈물 흘리는 것의 유익임을 기억하자.
슬프고 아픈 사람들이여, 만일 인생이 당신으로 고통스럽게 하고 당신이 받는 압박이 너무나 무거우며, 생활하는 것이 무미(無味)하고 피곤하며, 너무 많은 어려움이 있어 당신으로 지나갈 수 없게 한다면,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우는 것이 좋다. 내가 당신에게 말하거니와 이것은 헛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매번 흘린 눈물을 기억하시며, 또한 당신이 흘린 눈물을 모두 그분의 병에 담으신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눈물을 병에 담으시듯이 우리가 받은 고통을 보존하신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 감사한다. 우리가 흘리는 눈물은 땅에 떨어져 흙과 합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병 안에 담겨진다.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 하였나이까』. 하나님은 잊어버리지 않으시고 보존하시며 기억하신다.
형제 자매여, 내가 묻건대 당신은 그러한 울음이 지극히 맛이 있다는 것을 아는가? 지극히 후련하다는 것을 아는가? 어린 아이가 어떤 때, 몹시 심하게 우는 것은 힘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인가? 그 아이는 맞아서도 배가 고파서도 아니다. 그 아이가 밖에서 다른 아이의 우롱과 억울한 누명과 고민스런 일을 만나고 집에 돌아와 그의 사랑하는 엄마를 보자마자 터져 나오는 울음은 너무나 심한 것으로 참으로 엄마 앞에서 대성 통곡하는 것이다. 아,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의 눈물은 정말 후련하다.
보통 사람 앞에서 우는 것은 그렇게 큰 의미가 없으며 아무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울고 언제 울어야 하는가? 당연히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자, 우리를 가장 돌아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울어야 한다 그분 앞에서 우리는 후련하도록 울 수 있다. 왜냐하면 그분이 우리를 보배로이 여기시기 때문이다. 그분 앞에서 우는 것은 참으로 우리로 맛을 느끼게 해 준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귀를 기울여 듣고 계시며 자세히 보고 계시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로 더욱 기쁘게 울 수 있게 하신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의 간구대로 하시고자 하기 때문이다. 아, 그렇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한다면 결국은 정말 좋게 될 것이다.
우리가 살펴볼 한 부자(父子)의 이야기는 우리로 하나님 앞에서 눈물로 기도하는 유익을 더욱 분명하게 보도록 한다. 마가복음 9장 24절은, 『곧 그 아이의 아비가 눈물 흘리며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원문 참조)』라고 말한다. 이 때에 그의 마음은 너무도 견디기 어려웠으며 그는 자신의 믿을 수 없는 것-믿음이 부족한 것-을 통한히 여겼다. 또 한면으로는 아이가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볼 때, 모든 방법을 다 써보았으나 여전히 나아지지 않고, 지금은 주님의 제자들에게 치료해 주시기를 구했지만 효과를 보지 못했다. 이렇게 되자 초조하고 고뇌하는 상황 속에서 숨이 막힐 듯하여 눈물을 흘리며 주님께 부르짖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주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셨고, 아이는 나았다. 많은 기도가 효과가 없는 원인은 바로 눈물을 흘리지 않기 때문이다.
디모데 후서 1장 3절부터 4절에서는, 『나의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한다. 여기서 바울은 왜 디모데를 보고 싶어하였는가? 왜냐하면 그것은 디모데가 눈물을 흘렸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주님을 위하여 일한 사람은 모두 눈물을 흘릴 줄 알았다. 그래서 나는 눈물을 흘릴 줄 모르면서 주님을 위해 일을 잘 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믿는다. 눈물 흘리는 것은 마치 사역자의 필수 요건인 것 같다. 모든 바른 기도에 있어서 가장 좋은 것은 내면에 눈물이 있어 하나님으로 당신을 기억케 하고 당신의 간구를 들으시게 하는 것이다.
(3) 주님의 역사에 있어서
이제 우리는 주님의 역사에 있어서 눈물이 어떤 관계가 있으며 어떤 위치가 있는지를 보고자 한다.
예레미야 9장 1절은,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그렇게 되면 살륙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곡읍하리로다』라고 말한다. 예레미야는 진실로 울 줄 알았으며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눈물의 선지자라고 한다. 다시 18절을 보자. 『그들로 빨리 와서 우리를 위하여 애곡하게 하여 우리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게 하며 우리 눈꺼풀에서 물이 쏟아지게 하라』. 13장 17절, 『너희가 이를 듣지 아니하면 나의 심령이 너희 교만을 인하여 은근히 곡할 것이며 여호와의 양무리가 사로잡힘을 인하여 눈물을 홀려 통곡하리라』.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음으로 그는 곡하였다. 14장 17절, 『너는 이 말로 그들에게 이르라 내 눈이 밤낮으로 끊치지 아니하고 눈물을 흘리리니 이는 처녀 딸 내 백성이 큰 파멸, 중한 창상을 인하여 망함이라』. 여기서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창상을 입음으로 인하여 울었다.
울 줄 모르면서 주님을 위한 좋은 사역자가 된 사람은 없다. 무릇 사역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면, 당신이 사역에 대해 마음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무릇 마음이 있어 사역을 마음 위에 놓는다면 울지 않을 수 없다. 어떤 때에는 사람을 다룸에 있어 갖가지 방법을 다 동원해도 실패한다. 당신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한 가지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때로 당신이 어떻게든 권하였지만 소용이 없었다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마지막 권면으로 쓸 수 있다. 때로는 싸움에서 모든 무기를 다 동원해도 이길 수가 없다. 그럴 때에는 눈물 흘리는 것이 마지막 병기가 된다. 사람은 다른 무기 앞에서 대항할 수 있다. 그러나 눈물 앞에서는 반드시 무장 해제한다.
울지 않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다. 죄인을 위하여 마음아파 하며 심지어 울기도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문제가 생겨도 울고, 원수에게 분히 여기는 마음을 참을 수 없어도 울어야 한다. 무릇 주의 기쁨을 구할 마음이 없는 사람은 이런 경험이 없다. 주님의 사역에 마음이 있으면 반드시 운다. 구약에서 예레미야는 주님께 지극히 쓰임받은 선지자 중의 하나였는데 그가 이런 위치에까지 이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눈물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자녀를 위해 염려하고 책임을 느끼며 심지어 밤낮으로 울었다.
그렇다. 눈물은 우리에게 결핍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더욱더 많은 눈물로 그것을 씻어야 하기 때문이다. 많은 어린 성도는 눈물로 키우고, 가르치는 것이 필요하다. 영적인 생활도 눈물로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많은 죄인들에게 눈물로 씨를 뿌리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만일 눈물이 없다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오늘날 사람들의 헌신은 실제로 너무 부족하다. 진정 많은 사람들이 몸과 능력과 금전과 시간을 바쳤지만, 눈물을 바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오늘날 참으로 많은 사역이 완전할 수 없고 많은 성도가 아직 길러지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우리가 사역을 위해 눈물을 흘린다면, 결국 어떻게 될 것인가? 눈물은 끝까지 흘리는 것이 아니라 멈출 때가 있다. 예레미야 31장 16절은,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네 소리를 금하여 울지 말며 네 눈을 금하여 눈물을 흘리지 말라 네 일에 갚음을 받을 것인즉 그들이 그 대적의 땅에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실로 사역을 위해 눈물을 흘린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상을 주시리라고 말씀하신다.
눈물을 흘리는 것이 하나님의 사역에서 이와 같음은 말할 것도 없고 가정 안에서도 이와 같다. 어머니가 자녀를 대하는 것을 보기만 하면 알 수 있다. 나는 자녀가 나쁘다고 해서 화만 내고 울 줄 모르는 어머니가 있다면 좋은 어머니라고 보지 않는다. 새 신자에게도 자녀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처럼 돌보는 것이 가장 효력이 있다. 탕자가 집에 돌아오는 것은 온전히 그의 어머니의 눈물로 말미암은 것이다. 자녀가 아주 나빠서 집을 떠나 고향 밖의 먼 곳에서 표류하더라도 집에서 그를 위해 눈물 흘리는 좋은 어머니가 있다면, 그 탕자는 오래지 않아 그의 어머니의 눈물 때문에 반드시 돌아오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자녀가 나쁘다고 해서 화만 내고 소리 지르고 때릴 줄만 알고 결코 울지 않는다면 아무런 유익이 없다. 어떤 어머니가 모든 것이 좋다 하더라도 눈물이 결여되었다면, 좋은 어머니가 아니다. 사역에 있어서 우리가 죄인과 어린 형제를 다루는 것도 이와 같다. 당신이 그를 찾아가서 그를 돕고 성경을 읽어주는 것들은 유익하며 모두 좋다. 그러나 없어서는 안 될 한 가지는 예레미야와 같이 기도하여 말하는 것이다. 『어찌하면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그렇지 않으면 완전할 수 없다. 많은 주의 사역자들은 하나님이 그에게 구변과 재능, 능력, 지식, 기회 등을 주시기를 구한다. 이런 것들은 좋다. 그러나 주의 사역 가운데 반드시 있어야 할 한 가지는, 「내 눈이 끊치지 않고 눈물을 흘리리니」라고 간구하여 말하는 것이다.
구약에 이러한 본이 있을 뿐 아니라 신약에도 있다. 사도행전 20장 19절을 보자.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31절,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바울은 어떻게 주님을 섬겼는가? 그는 모든 일에 겸손하고 밤낮 쉬지 않고 눈물을 흘렸다. 그러므로 눈물을 흘리는 것은 사역하는 좋은 방법이다. 내가 다시 말하거니와,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 가운데 완전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비록 그가 많은 일에 있어 좋지만, 눈물이 없다면 좋다고 볼 수 없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데 있어서, 그 위에 눈물을 더하여야만 비로소 좋다. 그러나 이것은 일부러 꾸며서 나오는 것을 말하지 않고, 마음에 먼저 깊은 느낌이 있은 후 눈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을 말한다.
바울은 여기서 『내가 삼 년이나 밤낮으로 쉬지 않고 눈물로 너희들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고 말한다. 당신에게 묻건대, 당신은 이렇게 사역을 위해 눈물을 흘린 적이 있는가? 만일 어떤 사람이 주의 일에 열심인지 아닌지, 전일한지 아니한지, 주님을 섬기는 마음이 완전한지 아닌지를 알고자 한다면, 그에게 눈물이 있는지 없는지를 물어보기만 하면 된다. 직선적으로 말하자면, 눈물이 없이는 사역이 영원히 흥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결여되었다면, 어둠 속에 있는 어떤 것이 사역에 방해를 줄 것이다.
고린도 후서 2장 4절은, 『내가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고린도 전서가 바울이 글로에 집 사람들이 고린도 성도들의 상황을 보고한 것을 듣고서 썼다는 것을 안다. 바울은 그들의 여러 잘못된 점을 지적하고 직선적이고도 엄격한 말로 그들을 책망한다. 고린도 후서의 이 부분은 바울이 어떻게 고린도 전서를 썼는가를 말한다. 바울은 『내가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다.』고 말한다.
형제 자매들이여, 내가 묻거니와, 당신은 한 형제나 혹은 자매가 실족했다는 것을 들었을 때 바울처럼 그렇게 애통해 하며 눈물을 흘린 적이 있는가? 그렇다. 눈물을 흘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웃고자 하는 것도 힘이 필요하다. 눈물 흘리는 것은 당연히 더 많은 힘이 필요하다. 형제여, 당신은 힘을 다해 울어본 적이 있는가? 우리는 바울이 고린도인들에게 쓴 편지에서 그의 말이 마치 칼과 같이 너무도 엄격하다는 것을 본다. 『너희는 범죄한 사람을 내어쫓아야 한다.』라고 말하는 귀절이 있다. 이런 종류의 말은 진실로 사람이 견디기 힘든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만일 당신이 말로써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힌다면, 그 말은 반드시 당신 자신을 먼저 상처 입힐 것이다. 자신이 먼저 찔린 바 되지 않았다면, 결코 다른 사람을 찌를 수 없다. 바울은 진실로 이러한 사람이었다. 그는 고린도 전서에서 가장 무겁고도 견디기 어려운 말을 했을 때에, 한면에서는 눈물을 흘리면서, 또 한면으로는 말을 했다. 그가 아직 말을 하기도 전에, 다른 사람이 고통을 느끼기도 전에, 그 자신은 이미 먼저 고통을 느꼈다. 그러므로 사람을 괴롭게 하고자 한다면, 자신은 반드시 먼저 그렇게 괴로움을 겪어야만 한다. 단지 다른 사람에게만 마음 아프게 하는 일은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사역자가 된 사람은 눈물을 흘리는 것에 있어서 체험이 없으면 안 된다. 바꾸어 말하면, 무릇 형제가 실족하고 실패하는 것을 보고서 자신이 눈물 흘리지 않는 사람은 주의 일을 하는 데 적합치 않으며, 다른 사람을 지적해 주거나 권면하기에 더욱 합당치 않다. 당신이 어떤 형제나 자매를 책망하려 한다든지 그에게 무슨 잘못이 있는가를 말해주려고 한다면, 당신 자신이 먼저 반드시 그러한 괴로움과 말하는 것에 있어서의 예리함을 느껴야 비로소 말할 자격이 있다.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의 아들의 피가 땅 위에 떨어져 되돌아 가지 않았으므로 사람들로 그것에 의지하여 구원받게 할 수 있다.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 아들의 눈물 또한 거두어 가지 않았으므로, 그분이 우리를 생각하는 마음을 말해주시고, 우리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눈물을 흘릴 수 있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와 사역에 있어서 우리 주님이 하신 것을 본받아 이러한 눈물을 많이 흘리자!
시편 126편 5절과 6절은,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라고 말한다. 당신은 주님의 간증이 되고자 하는가? 여기서 당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 가를 알려준다. 여기서 말하는 씨앗은 바로 복음이며, 단은 바로 사람의 구원받음이다. 씨앗이 물을 주어야 자랄 수 있는 것처럼 씨를 뿌리러 나가는 데에는 당신의 눈물을 써야만 한다. 만일 물이 없다면 씨앗은 자랄 수 없다. 그러므로 열매 맺는 것이 쉽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눈물 흘리는 것이 있어야만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다. 당신이 만일 하나님 앞에서 개인적으로 눈물을 흘린다면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올 수 있다고 말한다.
많은 때에 우리는 복음 전하는 것을 평범한 일로 여긴다. 그러므로 그들이 자라지 않고, 성숙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사역은 눈물과 큰 관계가 있다. 눈물이 결여된 사역은 실패하기 마련이다. 눈물은 당신의 마음을 표명한다. 당신의 눈물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당신의 마음이 있다. 무릇 마음에 두지 않는 일은 언제나 위험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역에 열심을 내야하며 전일하게 눈물을 흘려야 한다.
Ⅲ. 우리의 눈물에 대해 하나님은 어떻게 하시는가
이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눈물에 대해 어떻게 하시는가를 살펴보자. 시편 56편 8절은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으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 하였나이까』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기억하시고 우리의 눈물을 계수하시며 우리가 흘린 눈물을 잊어버리지 않으신다.
시편 80편 5절은, 『주께서 저희를 눈물 양식으로 먹이시며 다량의 눈물을 마시게 하였나이다』라고 말한다. 또 시편 116편 8절은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라고 말한다. 이 두 성경 구절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눈물을 우리의 양식과 음료로 삼으셔서 먹고 마시게 하셨다고 말한다. 아, 우리는 모두 이 세상에서 평생 눈물의 나날을 보내고, 눈물의 동반자가 된다. 이 세상은 눈물을 흘리는 곳이며, 모든 땅이 눈물로 적셔져서 마른 곳이 하나도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어떤 일에 의해서나 우리 마음은 상처를 입고, 어떤 환경에서나 우리 마음은 찔림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땅에는 평안이 없다. 그러나 상황은 비록 이러하지만, 하나님은 우리 눈을 눈물에서, 우리 발을 넘어짐에서 구원하고자 하신다. 우리는 눈물을 흘리는 세상에 영원히 있지 않을 것이다. 눈물이 없는 날이 우리에게 임할 것이다.
계시록 7장 17절은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실 것임이러라』고 말한다. 여기의 한 무리는 바로 교회이다. 그러므로 이 땅 위에서 성도가 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이 저희 눈에서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다. 이것은 천년왕국 대환난 때에 주님이 주신 약속이다.
천년왕국 후 한 무리가 있는데, 주님은 그들에게도 약속하여 말씀하셨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21:4). 이 한 무리의 사람들은 천년왕국의 백성이 된다. 교회나 유대인이나 이방인에 관계없이 모든 구원받은 사람에게 주님은 또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라고 약속하셨다.
우리가 새 예루살렘을 좋아하는 것은 황금 길과 진주 문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임재가 있으며 거기에서는 눈물을 흘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죽는 것은 고통을 당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한 동안 쉬러가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당신이 길을 가는데 지치고 피곤해서 한동안 자러 가는 것과 같다. 모든 사람은 그날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지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오늘 쉬러 갔다. 만일 주님이 더디오신다면, 오십 년 혹은 삼십 년을 쉬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바울과 같이 이천 년을 쉬어야 그날이 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감사한다. 우리가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그날이 오고 세상은 지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 대신에 고통을 담당하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장래에 다시 고통받을 필요가 없게 하셨다. 하나님께 감사한다. 거기에는 고통이 없고, 죄가 없다. 죄가 있어야 어려움과 고통과 눈물이 있다. 거기에는 죄가 없으므로 영원히 다시는 눈물이 없다. 하나님께 감사한다. 상심한 날과 일은 오래지 않을 것이다. 새 예루살렘이 오면 이 눈물의 세계는 즉시 지나가 버린다. 아. 그곳에는 모든 고통이 떠나간다. 왜냐하면 죄가 제해지면 고통도 당연히 내쫓김 당하기 때문이다.
주 안에 있는 어떤 사람은 그날이 오면 주님이 부활의 몸을 우리에게 주신다고 말했다. 나는 그 몸이 지금과 모든 것이 동일하며, 각종 지체도 있고 모든 것이 같으며 단지 변화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변화된 몸은 한 가지 것이 결여되는데, 그것은 바로 눈 속의 눈물샘이다. 왜냐하면 눈물 흘리는 것은 밤의 일이어서 그때는 쓸모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감사한다. 우리는 복이 있다. 왜냐하면 이 질그릇은 이 땅에서 계속 일하고 기도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이 땅에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만족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더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아, 그 날이 오리라. 나는 그날이 속히 오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한 이야기로 결론을 맺고자 한다. 제1차 세계 대전 말의 어느 전투에서 프랑스와 독일 양측에는 부상병이 진지(陣地)에 가득했고, 그들은 모두 중상을 입어서 죽어가고 있었다. 그중에 프랑스의 부상병 가운데 한 사람이(그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이었다) 물병을 들고서 한 독일 병사에게 물을 먹여 주었다(그 독일 병사 또한 진실한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때 그들은 둘 다 죽어가고 있었다. 물을 다 마신 후에 그 프랑스 병사가 그 독일 병사의 손을 잡고서 말하기를, 『그곳에는 다시 전쟁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하고서 두 사람은 몸을 돌리자 마자 죽었다. 아! 오늘 여기서 내가 다시 말하고 싶은 것은, 거기에는 더이상 눈물이 없다는 것이다.
워치만 니
[일곱 광주리 가득히 8, "눈물", 한국복음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