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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받기 전의 우리의 양심의 느낌이 우리의 영의 느낌이 됨
영의 느낌을 따르는 문제에 주의를 기울이는 그리스도인은 많지 않다. 많은 기독교 서적이 있지만 영의 느낌에 관해 말하는 책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비록 영의 느낌(the feeling of the spirit)이란 용어는 신약에서 발견할 수 없지만 성경의 계시에 따르면 그러한 것이 있다.
「느낌」이란 단어는 에베소서 4장 19절에서 사용되는데, 이 구절은 이방인들이 느낌 없는 자가 되는 것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중국어 화합본 성경에는 이 「느낌」이란 단어가 「양심」으로 번역되어 있다. 이것은 구원받기 전에 우리의 영의 느낌은 양심의 느낌이기 때문이다. 양심의 느낌이 무감각해지는 것은 모든 양심의 느낌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양심이 디모데 전서 4장 2절의 「양심에 화인 맞은」 것처럼 마비된 것이다. 달리 말해서, 양심이 그 감각을 잃어버린 것이다.
구원받은 후의 영의 느낌은 생명과 평안임
로마서 8장에서는 「느낌」이란 말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 사실은 그곳에 있다. 6절 하반절은 『영에 둔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말한다. 생명과 평안은 영의 느낌들이다. 우리는 우리 안에 생명과 평안이 있음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들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6절 상반절은 『육에 둔 생각은 사망이라』고 말한다. 사망은 불안함을 포함한다. 사망은 사람으로 불안함을 느끼게 한다. 각 그리스도인 안에는 이 두 가지 현상-생명과 평강, 사망과 불안함-이 있다. 어떤 사람을 현재의 그가 되게 하는 것은 그의 마음 안에 있는 생각들이다. 만일 우리의 생각을 영에 둔다면 우리는 분명 속에 생명을 가질 것이다. 우리가 생명을 가질 때 우리는 편안함을 느낀다. 편안함을 느끼는 것이 평안이다. 우리의 생각이 항상 육에 있다면 우리는 분명 불안함을 느낄 것이다. 그것은 사망의 징후와 표시이다. 나는 여러분 모두가 이런 종류의 체험을 가졌을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 영화 보러 가는 것에 대해 생각했을 때 우리는 들떠 있었다. 그러나 구원받은 후인 지금, 우리가 영화를 보러 가는 것에 대해 생각할 때 속에 불안함을 느낀다. 이것이 사망의 현상이다. 그것은 우리의 영이 죽게 됨을 나타낸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합당한 느낌을 잃어버렸다. 만일 이때 우리가 주님께 돌이켜 『주여, 나를 용서하소서 나는 당신 앞에 평온해지기 원합니다.』라고 말한다면, 그때 우리는 속에서 안정될 것이다. 이것이 평안이다. 평안은 생명의 현상이다.
사망의 현상은 다양하다. 일단 우리가 속에서 죽게 되면, 우리는 즉시 불안함과 공허함을 느낄 것이다. 일단 우리가 공허함을 느끼면, 우리는 두려워하고 움츠러들게 될 것이다. 우리는 약해질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의 총계가 사망이다. 사망은 위의 것의 총체이다.
또한 생명의 현상도 다양하다. 우리 안에 평안이 있다면, 그것이 생명이다. 이 생명 안에 기쁨과 만족과 충만과 담대함이 있다. 이 모든 것이 생명의 현상이다. 사망은 약함의 절정이요 총체이다. 생명은 강함의 총체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생명과 사망의 「온도계」이다. 우리 속에 약함이 있을 때 사망이 들어온 것이다. 우리 안에 평안이 있을 때 생명이 시작된 것이다. 이것은 새로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뿐 아니라 수십 년 동안 구원받아 온 사람들에게도 그러하다.
생각은 우리 혼의 주된 부분이고 우리 혼은 우리 자아이기 때문에 우리의 생각이 우리 존재를 대표한다. 우리의 혼인 우리 존재가 육을 위한 계획을 세우며,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이나 관광 여행을 고려할 때, 우리는 안에 사망을 가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의 생각을 육에서 영으로 돌이켜 기도하고 성경을 읽거나 주님을 접촉한다면, 또한 영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한다면, 우리는 안에 생명을 가지고 살기 시작한다.
만일 우리가 평안을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는 속에서 죽게 되었음을 안다. 반대로, 우리가 평안을 가진다면, 우리 안에 생명을 가졌음을 안다. 우리가 평안한지 그렇지 않은지는 전적으로 느낌의 문제이다. 느낌을 설명하는 것은 매우 어렵지만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느낌을 가질 것이다.
예를 들어 만일 당신이 손으로 팔을 만지면, 팔은 느낌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만일 시체를 만진다면 그것은 차가와서 어떤 느낌도 가지지 못할 것이다. 만일 내가 당신의 손을 만지면, 나의 손가락이 당신의 느낌을 자극하고, 당신의 손에 있는 느낌과 나의 손가락에 있는 느낌이 서로 반응하기 때문에 나는 당신의 손이 살아 있는 것임을 안다. 이렇게 해서 나는 당신의 손이 살아 있음을 안다. 만일 아무런 느낌이 없다면 그 손은 죽은 것이다.
거듭난 영의 느낌은 하나님께로서 온 것임
우리의 영은 우리 존재 중 가장 살아 있는 부분이다. 또한 영의 느낌을 가장 예민하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느낌은 두 영의 연합으로부터 온 연합된 영의 느낌이다. 이 영은 우리의 영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영과 우리의 영이 함께 연합되었다. 그러므로 이 영의 느낌은 매우 예리하고 섬세하다.
우리의 거듭난 영은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으로 인해 매우 섬세하고 온유하게 되었다. 한 방면에서 하나님의 영은 능력의 영이고, 다른 방면에서 그분은 생명의 영이다. 그분은 밖으로는 능력의 영이고 안으로는 생명의 영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성령의 이 두 방면을 말하기 위해 두 가지 상징을 사용한다. 성경은 능력의 영에 관해 말할 때 독수리를 그 영의 상징으로 사용하며, 생명의 영에 관해 말할 때는 비둘기를 상징으로 사용한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속박의 땅으로부터 그들을 자기의 날개에 업어 옮기는 큰 독수리같다고 말씀하셨다(출 19:4). 이것은 하나님의 영의 능력 방면을 언급한다. 신약에서 주 예수님이 침례받고 물에서 나오셨을 때.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그분 위에 내려왔다(마 3:16). 이것은 하나님의 영의 생명 방면을 언급한다. 그러한 분으로서 하나님의 영은 매우 섬세하고 온유하고 평온하시다. 그분은 큰소리를 내거나 소란스럽게 하거나 울부짖거나 고함치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 안에서 매우 섬세하고 온유하고 평온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많은 경우 그분의 임재를 소홀히한다.
나는 여러분 모두가 구윈받았다고 믿으며 성령이 여러분 안에 계심을 안다. 그러나 여러분은 어떻게 아는가? 교리로인가, 체험에 의해서인가? 만일 여러분이 『성경이 그렇게 말한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교리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우리의 체험에 따른 것이라면 『우리는 영의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사람은 구원받기 전에 그의 영 안에 이미 약간의 느낌을 가지고 있다. 만일 한 아이가 어머니에게서 사탕 몇 개를 훔친다면, 평강을 느낄 수 없고 어머니로부터 숨을 것이다. 이것은 그가 그의 양심 안에 어떤 느낌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그가 자랄수록 그의 양심의 느낌은 무시되어지고 점차적으로 무뎌질 것이다. 어떤 이는 심지어 대담하게도 강도질이나 살인을 하는 극한에 이를 것이다. 그 단계에서도 여전히 이들은 속에서 불안함을 느낄 것이다.
구원받았을 때 우리의 영은 거듭났고 느낌은 회복되었다. 이제 성령은 속에서 우리 영의 느낌을 강화하고 있다. 그러나 신약의 원칙은 성육신의 원칙, 즉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았을 때 비록 우리 영의 느낌이 강화되었지만 극도로 강화되지는 않았다. 어떤 사람은 구원받는 순간에 강하고 예민한 느낌을 가질 수 있다. 그는 아마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철저하게 자백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감정은 단지 하루나 이틀 혹은 일이 주 동안만 유지되었다. 결국에는 이런 느낌이 감소되었다.
때때로 이런 느낌은 어떤 이들에게 있어서 그들이 도대체 구원받았는지 어떤지를 의심할 정도로 그렇게 많이 감소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구원받는다면, 당신은 당신의 영 안에 전보다 더 많은 느낌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당신은 당신 속에 있는 영의 느낌이 아무리 섬세하고 온유하고 평온할지라도 이전보다 훨씬 더 강해졌음을 체험으로부터 말할 수 있다. 이 작고 세미한 느낌 안에서 당신은 하나님의 임재를 가진다.
비록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 어떤 느낌을 가지고 있었을지라도 그것은 구원받은 후의 느낌과는 달랐다. 예를 들어, 모든 사람은 자랑하기를 좋아한다. 모든 이들은 돋보이고 싶어한다. 자신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은 어떤 사람에게는 경이로움을 준다. 그러나 때때로 그의 양심은 그것이 합당치 않음을 깨닫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구원받은 후에, 우리는 자랑하는 것이 합당치 않음을 느낄 뿐만 아니라, 우리의 깊은 존재 안에서 부끄러움을 느낀다. 구원받기 전에, 우리는 자랑하는 것이 합당치 않음을 알았을지 모르지만 부끄러움을 느끼지는 않았다. 구원받은 후에, 우리는 자랑하는 것이 합당치 않음을 느낄 뿐 아니라 그것에 대해 부끄럽게 느낀다. 이것은 우리가 구원받은 사람들임을 증명한다. 많은 문제들에서 우리는 이 원칙을 시금석으로 사용할 수 있다.
이 느낌은 우리가 가르침받은 것이 아니라 타고난 것이다. 우리가 거듭날 때 우리 안으로 태어난 것이다. 구원받을 때, 우리는 확실히 우리 안에 제해질 수 없는 더해진 요소를 가진다. 이 요소는 하나님 자신이다. 그분이 우리 안으로 더해지신 것이다. 일단 우리가 이 요소를 우리 안에 가지면 우리 속의 느낌은 이전과는 다를 것이다. 이것은 한 잔의 쓴 차(茶)에 비유될 수 있다. 설탕이 그 안에 더해지기 전에 그것은 쓰지만, 설탕이 그 안에 더해진 후에는 약간의 달콤함을 가진다. 차 안에 약간의 달콤함이 있는 한 이것은 설탕의 성분이 안에 있다는 증거이다.
마찬가지로 구원받기 전에 우리의 생명은 쓴 생명이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구원을 받았다. 비록 약간의 쓴 맛이 남아 있지만 쓴 맛 안에 달콤함이 있다. 이것은 우리 안에 다른 요소가 더해졌음을 증명한다. 하나님의 요소가 우리 영 안으로 더해졌으며, 이 요소가 어떤 느낌 곧 영의 느낌을 산출했다. 이것이 우리가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Ⅰ. 영의 느낌이 생명의 느낌임
영의 느낌은 생명의 느낌이다. 이 생명은 우리의 천연적인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이다. 영이 생명이고 생명이 영이기 때문에 영의 느낌은 생명의 느낌이다. 모든 종류의 생명에는 느낌이 있다. 더 높은 생명은 더 높은 느낌을 가지며, 더 낮은 생명은 더 낮은 느낌을 갖는다. 강한 생명은 강한 느낌을 가지며, 약한 생명은 약한 느낌을 갖는다.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은 그 영이며, 이 영은 우리의 생명이다. 이 생명은 가장 높은 생명이므로 분명히 가장 많은 느낌을 갖는다. 구원받는 사람들로서 우리는 모든 종류의 영적인 느낌으로 가득해야 한다. 우리는 느낌이 없어서는 안 된다.
Ⅱ. 영의 느낌은 생명의 법의 작용으로부터 오는 것임
영의 느낌은 우리 안에 있는 그 영의 움직임으로부터 나온다. 이 움직임은 기름을 바르는 것과 같다. 여러분이 얼굴에 크림을 바르면 얼굴은 그것을 느낀다. 이와같이 우리의 영의 느낌은 우리 안에 있는 그 영의 움직임으로부터 나온다. 이것이 빌립보서 2장 13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운행하고 계신다고 말할 때의 그것이다. 더욱이 그분의 운행하심은 하나님의 법이다.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의 법의 작용이다. 이 법은 생명에 속하며 생명의 자연스런 기능이다. 조건들이 법의 요구에 맞는 한 그 법은 자동적으로 작용한다. 이 생명의 법이 우리 안에서 작용할 때 그것은 우리에게 영의 느낌을 준다.
영의 느낌은 우리가 기도할 때 가장 살아 있고 가장 예민하고 가장 강하다. 이것은 우리가 달릴 때 더 빨라지는 피의 순환과 같다. 우리가 기도하며 주님과 교통을 가질 때, 안에 있는 그 영의 작용이 증가되어 안에 있는 영의 느낌이 더 예민해진다.
Ⅲ. 영의 느낌은 섬세하고 온유하며 평온함
영의 느낌은 섬세하고 온유하고 평온하다. 만일 우리가 영의 느낌을 감지하기 원한다면 평온해지는 것을 배워야 한다. 만일 여러분이 조급한 성질을 갖고 있다면 영의 느낌을 감지할 수 없을 것이다. 여러분이 더 섬세하고 온유하고 평온할수록 여러분의 영의 느낌은 더욱더 분명해질 것이다.
Ⅳ. 영의 느낌은 사망과 불안함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생명과 평안임
영의 느낌은 사망과 불안함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생명과 평안이다. 생명은 만족과 성취와 강건함과 활기와 신선함을 포함한다. 이것들은 모두 생명의 현상이다. 사망은 공허함과 불만족과 약함과 우울과 낡음을 포함한다. 생명의 일반적인 현상은 평안이고, 사망의 일반적인 현상은 불안함이다. 만일 당신이 만족하고 충만하고 강하고 생기 있고 신선하다면 당신은 확실히 편안함과 평안을 느낄 것이다. 만일 당신이 불만족하고 약하고 우울하고 낡았다면 틀림없이 불안함을 느낄 것이다. 우리 안에 있는 이러한 현상들은 우리가 영 안에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우리로 알게 하는 느낌을 준다. 우리가 영 안에 있다면, 우리는 생명과 평강을 가질 것이다. 만일 우리가 영 안에 있지 않고 육 안에 있다면, 우리는 사망과 불안함을 가질 것이다.
Ⅴ. 영의 느낌은 강하고 맑은 생각이 필요함
영의 느낌은 강하고 맑은 생각에 의해 조화될 필요가 있다. 만일 당신이 영 안에서 강해지기 원한다면 강한 의지를 가져야 한다. 만일 당신이 맑은 영을 갖기 원한다면, 맑은 생각을 가져야 한다. 당신의 의지가 강하고 당신의 생각이 맑을 때 당신의 영은 평온할 것이다. 만일 당신이 바람이 부는 대로 향방 없이 표류하는 키 없는 배처럼 우유부단한 사람이라면, 당신의 영의 느낌은 정확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당신이 항상 상상 속에서 헤매인다면, 당신의 생각은 맑지 않을 것이고 당신의 영의 느낌은 예민하지 못할 것이다. 마치 당신은 투명해야 하지만 온갖 종류의 페인트가 묻어서 투명도를 잃어버린 유리 조각 같을 것이다. 그러므로 영의 느낌은 강하고 맑은 생각이 필요하다.
Ⅵ. 갑작스런 느낌들은 기다리며 관망함이 필요하며 지속적인 느낌들이 보다 믿을 만함
우리 안의 갑작스런 느낌들은 신뢰할 수 없으며 기다림이 요구된다. 여러분은 기도하는 동안 여러분이 틀림없이 기적을 행할 수 있고 어떤 병자를 위해 기도하고 안수하여 그가 치유될 것이라는 갑작스런 생각을 가질 수도 있다. 혹은 여러분이 오늘밤 문을 두드리러 갈 때 방문하는 첫번째 집에서 온 가족이 침례받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될 수도 있다. 이런 종류의 갑작스런 생각들이 기도하는 동안이나 잠잘 때 낮 시간에 자주 들어올 수 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상태에 관하여 분명하지 않아서 갑작스런 생각들에 의해 조종되어 고려함이 없이 일들을 행한다. 그러한 생각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유혹하는 악한 자로부터 온 것이다. 그는 돌을 떡으로 변하게 하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도록 주 예수님을 유혹했다(마 4:3-9). 영 안에 사는 우리는 영의 느낌을 따라야 한다. 우리는 일을 할 때 갑작스런 느낌을 신뢰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갑작스런 느낌들은 대개 육의 상상이나 사단의 맹렬한 화전으로부터 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갑작스런 느낌들을 기다리며 관망해 보아야 한다. 영의 참된 느낌은 분명히 지속적이며, 지속적인 느낌만이 신뢰할 수 있다.
Ⅶ. 영의 느낌을 따르는 것은 그 영의 기름바름을 순종하는 것임
영의 느낌은 생명의 법의 작용에서 올 뿐 아니라 실제로 영의 느낌은 그 영의 기름바름이다. 그 영 자신이 우리 안에서 우리에게 기름바르는 연고이다. 이 기름바름이 영의 느낌을 낳는다. 만일 우리가 그 영의 기름바름에 순종하면, 우리는 영의 느낌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영의 느낌을 따를 때, 우리는 영을 따라 행하고 있는 것이다.
Ⅷ. 한담과 원망과 논쟁의 말들은 영의 느낌을 소멸시킴
야고보서 3장 2절은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또한 잠언 10장 19절은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고 말한다.
이 구절들은 우리의 말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 준다. 한담이나 수다나 원망이나 시비는 영의 느낌을 사라지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빌 2: 14)고 말한다. 원망은 감정에서 오고, 시비는 생각으로부터 온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원망은 자매들에게 더 많고 시비는 형제들에게 더 많다. 감정에서 온 것이든 생각에서 온 것이든 그것들은 혼에서 나온 것이다. 사람이 영 안에 살고 있지 않을 때 그는 혼 안에 살고 있으며 원망하거나 시비할 것이다. 교회 생활에서 만일 우리가 이 모든 소극적인 것들을 없애기 원한다면, 우리는 영의 느낌을 따라야 한다. 나는 우리 가운데 원망이나 시비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영의 느낌과 영의 느낌을 따르는 것만이 있기 바란다.
위트니스 리
[생명의 말씀, "영의 느낌을 따름", 한국복음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