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성한 말씀을 누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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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 아가서 5:2-6:14

 

Ⅰ. 부활 후의 십자가와 여자의 실패(5:2-6:3)

 

A. 부르심(5:2)

 

『내 몸은 잘지라도 내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그분이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하는 자,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나에게 열어다오 내 머리에는 이슬이 가득하고 내 머리털에는 밤 이슬이 있다 하는구나』(5:2, 다른 번역).

 

여기에 이르러서 그녀 자신의 일과 생활은 완전히 정지되었다. 그녀는 마치 잠자는 사람처럼 활동도 없고 행위도 없고, 계산도 없고, 발버둥치는 것도 없고, 힘을 내는 것도 없으며, 근심도 없다. 그녀는 이제 완전히 안식한다. 십자가가 모든 죄악을 처리했을 뿐 아니라 모든 혈기도 처리했다. 이제 죄가 역사하지 않고 자아도 움직이지 않으며, 겉사람 전체가 이미 고요한 상태에 이르렀다. 행동이 있더라도 그녀 자신은 오히려 자기가 하는 것이 아니라고 느끼며, 그녀는 마치 방관자와 같을 뿐이다.

 

사실 그녀는 이미 잠들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그녀에게 움직임이 없고, 생각이 없고, 믿음이 없고, 취하는 것이 없고, 생활이 없으며, 일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주님의 부활 생명이 그녀 안에 있으며, 부활한 주님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녀 안에 거하시며, 또한 그녀 안에 살고 계신다. 겉사람은 비록 조용하지만 속사람은 오히려 약동한다. 우리는 여기서 속사람과 겉사람이 절대적으로 다른 것임을 본다. 겉은 잠잘 수 있으나 속은 깨어 있으며 조금도 잠자려는 뜻이 없다.

 

이것은 참으로 바울이 말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와 일치된다.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교통의 표현이다. 주님과의 완전한 연합 안에 있는 이런 사람은 매우 민감하며, 깨어 있고 느낌이 가득한데, 다시 말해서 그녀는 주님의 매우 작은 음성과 움직임까지도 모두 느끼는 것이다. 이 속사람은 영원히 잠자지 않으며, 언제든지 주님의 음성이 있으며, 그녀는 즉시 듣고 이것이 그녀의 사랑하는 자의 음성임을 안다.

 

주님은 이제 오셔서 무엇을 하시는가? 주님은,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에게 열어다오』라고 말한다. 이 노래에서 주님은 가장 먼저 자신을 왕으로 나타내셨는데, 이는 그분이 마음 가운데서 보좌를 얻기 원하셨기 때문이다. 후에 그분은 그녀가 그녀 안의 벽을 벗어나 부활 생명 안으로 들어가도록 이끌기 위해 부르는 자가 되셨다. 후에 또다시 그분은 얼마나 그녀와 완전한 사랑의 관계에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자신을 신랑으로 나타내셨다.

 

이제 그분은 여기서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방법으로 계시하신다. 『내 머리에는 이슬이 가득하고 내 머리털에는 밤 이슬이 있다』. 이것은 무엇을 묘사한 그림인가? 이것은 그분 자신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체험을 말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그곳에서 그분의 머리에는 참으로 이슬이 가득했다! 동시에 우리는 그 밤에 그분의 머리에 밤 이슬이 있었음을 본다(눅 22:44). 그러므로 그분은 여기서 자신을 늘 간고를 겪은 사람으로 나타내신 것이다.

 

이전에 우리가 본 십자가는 속죄를 위한 것이었으며, 또한 우리는 십자가의 연합도 보았다. 우리는 십자가에서의 고난받으심과 죽으심을 보았고, 십자가가 어떻게 우리로 하여금 세상과 자아에서 벗어나게 하는지도 보았다. 우리는 십자가의 승리도 보았고 십자가의 본받음도 보았다. 한 믿는이가 이러한 것들을 거친 후에는 아마도 이것이 최고의 체험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오늘 이후로 그녀는 걸음마다 부활과 영광 안에서 길을 간다. 이 믿는이가 아직 배우지 못한 십자가의 또 다른 방면이 있다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이 방면에 관하여, 그녀에게는 약간의 체험이 있으나 아주 초보적인 것에 불과할 뿐이다. 그녀는 비록 십자가의 고난을 알지만, 십자가의 고난이 포함한 것이 얼마나 크고 얼마나 깊은지는 결코 알지 못한다. 비록 그녀가 이미 십자가의 모형을 알지만, 그녀는 결코 이 모형이 그녀를 어떤 모양으로 인치는지는 모른다. 주님이 이제 그분의 믿는이를 부르시는 것은, 그녀가 이전에 거쳐보지 못한 십자가의 체험이나 혹은 그녀가 이전에 매우 얕게 거친 십자가의 체험을 거치라는 것이다.

 

겟세마네가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은 하나님께 싫어 버린 바 되는 것과 이 싫어 버린 바 됨에서 산출된 모든 것이다(사 53:4). 우리는 그분의 십자가의 속죄의 방면은 분명히 알지만, 그분의 십자가에는 여전히 외면적으로는 하나님에 의해 싫어 버린 바 된 방면이 있다. 이것으로 인해 그분은 극도의 수치를 당하셨다.

 

그분이 이전에 받은 많은 고난 가운데에는 하나님이 그 안에 계셨기 때문에 여전히 영광스런 면이 있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그분은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도 싫어 버린 바 되신 것처럼 보이며, 그분이 당하신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치심과 학대인 것 같다. 여기에서도 하나님의 손을 볼 수 있는데, 하나님의 치심으로 말미암아 그분은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이것은 그분에게 가장 큰 수치가 되었다.

 

십자가의 속죄의 방면에서 주님은 우리와 연합되신 적이 없다. 그러나 주님은 그분의 십자가의 다른 방면 안에서 우리가 그분과 교통을 갖기를 원하신다. 과거에 우리가 만난 문제는 죄악과 세상과 사단과 천연적인 것에 불과했다. 우리가 비록 십자가의 고난과 십자가의 모형을 만나긴 했지만, 하나님에 의해 싫어 버린 바 됨과 사람에게서 수치를 당하는 것에 대해서는 체험이 깊지 않기 때문에 전혀 낯설을 것이다.

 

주님은 여기서 문을 두드리며, 『나에게 열어다오』라고 말씀하신다. 그 뜻은, 다시 한번 그분께 마음의 문을 열어 주고, 다시 한번 밤 이슬로 가득한 주님을 영접해 달라고 믿는이를 부르는 것이다. 그녀는 여전히 하나님에 의해 싫어 버린 바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워야 하며 여전히 십자가의 더 깊은 오해와 수욕을 배워야만 한다.

 

그분이 그녀를 누이라고 부르시는 것은 그녀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에 근거한 것이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그녀의 인식을 말한다. 「나의 비둘기」는 성령의 성품을 말한다. 「나의 완전한 자」. 이것은 그녀의 성결과 정결과 헌신을 말한다. 그러나 그분이 결코 「신부」를 언급하지 않으신 것은 그녀가 어떻게 대답하는가에 따라 그녀가 신부가 되어 완전히 연합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이 그녀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그분을 향해 이렇게 열어 달라는 것이다. 그녀는 이전에 이미 자신을 열어 주님을 왕으로 받아들인 적이 있는데, 이제 주님은 그녀 자신을 열어 그분을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로 받아들이라고 하신다. 이제 주님은 그녀를 이끌어 그분과 함께 고난받고 그분의 죽음을 가장 깊은 방법으로 배우도록 하신다. 그렇지 않을 때 주님은 억지로 그녀가 가기를 원치 않는 길로 가게 하실 수 없다. 그러므로 그분은 문을 두드리고 간청하시면서 믿는이가 자원할 때까지 기다리시는 것이다.

 

B. 책임을 전가함(5:3)

 

2절의 이러한 부르심은 많은 믿는이에게 예기치 못한 일이다. 그들은 결코 십자가에 수욕의 방면이 있음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결코 십자가에 대한 체험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다. 십자가에 대한 그들의 체험은 심지어 아주 깊다고도 할 수 있다. 비록 그들이 십자가를 위하여 약간 고난도 받고 핍박도 당하고 사람에게서 수욕도 받아 보았겠지만 그들은 줄곧 십자가는 그들의 영광이요, 그들의 생명이요, 그들의 능력이라고 느꼈을 것이다. 그들은 십자가가 참으로 그들에게 수욕이 된다는 것을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십자가는 그들로 세상의 명성을 잃게 할 뿐 아니라 영적인 명예도 잃게 하며, 그들은 뜻밖에도 사람에게서와 하나님에게서 조차도 싫어 버린 바 된 자로 보여진다. 하나님은 그들로 시련을 거치게 하시고, 친근한 사람의 위로와 동정을 얻지 못하게 하시며,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에 의해 치심을 당하고 학대받는다고 생각하게 하신다. 세상에 속한 수욕은 아마도 그들이 이전에 받아보았겠지만, 영에 속한 수욕은 그들에게 완전히 새로운 체험이다. 이러한 오해로 생긴 수욕은 그들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에 연관된 것이기 때문에, 그들로 깊은 느낌을 갖게 할 수 있다. 여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들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운다』(골 1:24)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게 된다.

 

이 부르심은 얼마나 새롭고 놀라운가? 또 얼마나 잔혹한가? 그러므로 이 부르심을 듣는 사람은 위축된다. 그녀는 아마도 하나님의 영광이 어떤 것보다도 중요한 것이 아닌가고 생각하며 의문을 제기할지 모른다. 『나는 지난 날에 어떻게 나의 생활과 일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가를 항상 생각했다. 이제 만일 하나님이 참으로 나로 하여금 오해를 받게 하시면, 사람 사이에 있는 나의 아름다운 이름을 빼앗아 가시고, 사람에게서 수치를 당하게 하시어 나와 하나님 사이에 문제가 생겼다고 생각하게 한다면, 하나님이 어떻게 영광을 얻으실 수 있는가?』

 

아마도 그녀는 자신을 위하여 그리 많이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더 많이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여기서 그녀가 생각한 것은 그녀 자신이 하나님을 어떻게 영화롭게 하는가였음을 보지 못한다. 그녀는 반드시 하나님의 박탈하심에 이르러야 하는데, 즉 자신의 선한 마음을 의지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의도가 모두 제해질 정도로 하나님의 박탈하심을 받아야 한다. 십자가가 반드시 깊은 단계까지 역사해야 하는데, 즉 당신이 단 마음으로 기꺼이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신 분깃을 받아 들이고 하나님으로 자신의 영광을 돌보시게 하는 단계에까지 십자가로 더 깊이 역사하게 해야 한다.

 

부르심을 들은 사람에게 여전히 한 가지 어려움이 있는데, 그것은 그녀가 하나님의 일을 돌아보고자 한다는 것이다. 이전에 그녀는 자신이 인식한 십자가로 인해 사람들을 이끌어 그녀에게 와서 주님의 길을 배우게 할 수 있었다. 그녀의 과거의 십자가의 체험은 그녀로 하여금 생명의 운하가 되게 하여 주님을 따르는 사람으로 그녀를 따르게 했다. 만일 그녀가 이 새로운 부르심을 받아들여 십자가에 의해 수욕받는 위치에 이끌려진다면 그녀의 일의 위치와 일의 기회를 더 잃어버리지 않겠는가?

 

과거의 십자가의 체험은 사람을 그녀에게로 이끌어올 수 있었다. 오늘 이후의 십자가의 체험은 사람을 그녀 앞에서 더 쫓아 버리지 않겠는가? 오늘 이후로 도대체 어떤 사람이 그녀에게 가까이 오겠는가? 또 어떤 사람이 그녀에게서 주님의 길을 배우겠는가? 이러한 생각들이 그녀로 하여금 주저하게 하며 앞으로 못 나아가게 한다.

 

그러므로 그녀는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라고 반응한다. 나의 모든 외면적인 행위 가운데, 이미 십자가로 말미암아 나의 옛사람과 옛사람의 모든 행위를 벗어 버렸는데 어찌 내가 이전에 벗어 버린 옷을 다시 입는 것처럼 이제 일어나서 십자가의 외롭고 부끄러운 방면을 받아들이고 사람의 오해를 받아야 하는가? 십자가의 체험이 이미 옛사람에게서 나온 모든 것을 벗어버릴 정도에 이르렀는데, 아직도 부족하다는 말인가?

 

대부분의 믿는이들이 이 단계에 이르렀을 때 십자가의 양면-소극적인 면과 적극적인 면-을 보지 못한다. 부활을 알고 십자가도 알지만 다 소극적인 방면에 불과하다. 십자가가 어떻게 옛 창조를 처리하는가만 주의할 뿐 결코 십자가가 어떻게 새 창조를 처리하는가는 보지 못했다. 그녀는 십자가가 사람으로 하여금 벗어나게 하는 역사만 보았을 뿐 십자가가 사람으로 어떻게 들어가도록 역사하는가는 결코 보지 못했다.

 

아마 그녀는 이러한 적극적인 역사는 부활 방면의 일이라고 여기면서 오해를 할지도 모르나 이것이 십자가의 일이라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십자가는 적극적인 방면에서 십자가의 수치와 고난받음과 오해의 모형을 새 창조 위에 인친다. 주 예수님의 생명은 원래 새 창조의 생명인데, 아직도 우리가 그분의 몸에서 십자가가 그분에게 준 고난받는 모형을 보지 못했단 말인가?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마는』. 나는 목욕하여 온몸이 주님 안에서 이미 깨끗해졌을 뿐 아니라 내가 이 세상을 걸어갈 때 세상과의 접촉에서 묻은 먼지와 더러움도 늘 씻어내므로 이미 정결하게 되었다. 나는 반드시 나의 정결함을 지켜야 하며, 진보가 없이 퇴보하는 것 같으므로 다시는 자신을 더럽힐 수 없다. 그녀는 자신이 반드시 그녀의 정결함을 지켜야 한다는 것만 보았을 뿐, 오히려 주님을 영접하기 위해 문을 열므로 더럽혀지는 것은 참된 더럽혀짐이 아님을 보지 못했다(다시 옷 입고 다시 더러워져야 비로소 문을 열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다시 옛사람을 입고 다시 세상의 영향을 받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는 틀림없이 사람의 오해의 옷을 입고 오해의 더러움을 당하는 것을 가리킨다. 여기의 책임 전가는 좋은 것이지만 이것은 그녀로 하여금 가장 좋은 것을 얻게 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여기의 상황은 그녀가 자신의 체험에 이미 만족하고 빌립보서 3장 10절의 완전한 체험을 얻는 것의 중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부지불식간에 여기서 또 「자아」가 튀어나왔다. 그녀는 과거의 체험 때문에 하나님의 일과 영광에 있어서 자기 자신에게 지위가 있는 것처럼 여긴다. 그녀의 또 한 가지 문제는 그녀의 현재의 영적 상태를 바꾸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부르심은 우리의 현재의 상태를 흐트러뜨리기 위한 것이다. 모든 영적인 진보는 다 현재의 질서가 바뀌는 데에서 온다. 이것이 바로 대가를 지불함이다.

 

영적인 안일을 탐하면 항상 더 높은 부르심의 동기를 거절하게 된다. 우리가 영적으로 편안히 거할 때, 양심도 우리에게 무슨 잘못이 있는지에 대해 송사하지 않는다. 많은 영적인 체험 또한 참으로 주님의 죽음과 부활로부터 나온 것이지만, 우리는 시간을 들여 그리스도의 우리에 대한 목적에 이르려고 추구하지 않는다. 낡은 것에 따른 모든 생활은 항상 새로운 것을 그다지 힘써 추구하게 하지 않으며, 항상 우리로 하여금 현재의 평안함을 잃기를 원치 않게 한다.

 

C. 문을 열어 드림(5:4-5)

 

4절의 「마음이 동하여서」는 마땅히 「심장이 동하여서」로 번역해야 한다. 그 뜻은 가장 깊은 곳의 느낌이라는 것이다.

 

그녀의 문제는 결코 거절하는 데 있지 않고 육체의 약함을 표시하는 데 있다. 그녀의 의지는 이미 완전히 주님께로 돌아섰다. 이러한 지연의 표시는 그녀의 천연적인 인품을 나타낸다. 안에는 문제가 조금도 없는데 밖에 힘이 조금 부족할 뿐이다. 이렇기 때문에 주님은 다시 새롭게 간청하심으로 그녀를 격려하시는 것이다. 만일 그녀가 참으로 마음이 강팍하다면, 주님은 이렇게 하려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이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매』라고 한다. 이것은 부르심을 위한 것이지 타격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 손은 이전에 그녀의 손을 잡았거나 그녀의 머리 밑에 있었던 손이다. 이 손은 못박힌 자국이 있는 손이다. 주님은 이러한 손으로 다시 한 번 그녀에게 요청하시는 것이다. 문틈으로 손을 들이 민다는 것은 주님이 그분의 힘을 다해 부분적으로나마 자신을 계시하신다는 뜻이다. 손으로 그녀에게 그분 자신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그분의 손은 그분의 마음을 나타내며, 그분의 손은 그분 자신을 계시한다.

 

모든 영적인 체험은 다 그리스도에 의해 매혹된 결과이다. 어떤 사람이든 주님의 계시를 보아야만 비로소 그의 현재의 안일한 상황을 벗어 버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한 발 더 전진할 수 있다. 참으로 주님을 본 사람은 심장이 움직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오늘날 감동을 받은 사람이 얼마나 적은지! 참으로 어떤 사람이 교리에 감동된 사람이고, 어떤 사람이 주님께 감동된 사람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그녀는 곧 일어나 문을 열었다. 주님이 그녀를 매혹시켰기 때문에, 이전에 능력의 십자가를 받아들인 것처럼 수욕의 십자가도 받아들여야 한다. 이러한 문을 여는 손-믿음과 순복-에서는 자연히 몰약의 방울이 떨어진다. 왜냐하면 이 안에는 주님의 죽음의 능력이 있을 뿐 아니라 주님의 죽음의 향기도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그 죽음을 통과한 생명이 그녀의 손에서 마치 호수물이 넘치듯이 그녀로 하여금 문을 열게 할 뿐 아니라, 그녀의 의지의 빗장이 주님의 죽음의 향기에 적셔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D. 숨음(5:6)

 

주님의 처리를 받아 본 체험이 있는 사람이 순복하지 않을 때, 오히려 하나님의 가르치심이 없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은 순복한 후에야 비로소 있는 것이다. 당신이 순복할 때에야 비로소 주님은 당신으로 하여금 당신의 불순종이 얼마나 악한 것인가를 느끼게 하신다(사람의 초보적인 체험에 있어서는 가르침이 순복 전에 있고, 주님은 순복하기까지 그를 가르치신다. 체험이 있는 사람에게는 가르침이 항상 순복 후에 있으며, 그로 불순종의 고통을 맛보게 한다.).

 

느낌에 있어서 그녀는 이제 그녀의 사랑하는 자가 다시 가버렸다고 느낀다. 이전에 그녀는 우매했기 때문에 그분의 임재를 잃었다. 그녀의 현재의 이 고통은 영 안에서의 고통이다. 그녀의 영은 이제 흑암에 둘러싸인 것같이 빛이 없다. 그녀는 그분이 부르시며 말씀하실 때 주님을 향해 나아갔던 과거를 회상한다. 그분이 말을 할 때에 그녀의 혼은 이미 그분을 향해 갔다.

 

그녀는 무슨 이유인지 모르므로 자신을 증오하는데, 이는 그녀의 내면과 달리 그녀의 외면이 무력해져 있기 때문이다. 왜 그녀는 밖의 거짓된 거절로 그녀 안의 그분의 영광의 얼굴빛을 감추게 하였는가? 그녀는 이제 할 수 없이 찾고 부르지만, 오히려 그분은 보이지 않고 대답지도 않으신다. 여기의 찾음과 과거의 찾음은 다르다. 이것은 큰 길과 거리에서의 찾음이 결코 아니요 하나님 앞에서의 찾음이다. 그러나 여기서 기도는 뜻밖에도 쓸모없는 것 같다.

 

E. 상처받음(5:7)

 

이번에는 결코 그녀가 그들을 찾거나 그들에게 묻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그녀를 만나는데, 그들은 이렇게 아름답고 이렇게 큰 변화를 거친 사람이 왜 오늘 그녀의 사랑하는 자를 잃었을까 하고 생각한다. 그들은 아마도 그녀를 도우려 했겠지만, 오히려 그들의 말은 그녀에게 더 큰 타격이 되었고 더 아픈 상처를 주었다. 그녀는 위로받기를 원했지만, 그녀가 얻은 것은 상처뿐이다. 펜 루이스 여사가 인용한 좋은 성경이 있는데, 『대저 저희가 주의 치신 자를 핍박하며 주께서 상케 하신 자의 슬픔을 말하였사오니』(시 69:26)라고 말한다.

 

그들은 그녀의 어려움을 처리할 줄 몰랐다. 그들은 주님이 만일 자신을 감추셨다면 틀림없이 그녀의 잘못이라고 여기며 말했을 것이다. 그들은 그녀가 내적으로 받은 타격이 심한 것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책망하는 것이 그녀를 돕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말로 그녀를 더욱 친 것이다. 이때에 그녀는 참으로 『훼방이 내 마음을 상하여 근심이 충만하니 긍휼히 여길 자를 바라나 없고 안위할 자를 바라나 찾지 못하였나이다』(시 69:20)라고 말할 것이다.

 

「웃옷」은 「수건」으로 번역해야 한다. 그녀의 고통은 아직 그치지 않았다. 사람은 그녀를 도울 수 없을 뿐 아니라 그녀를 위로할 수도 없으며, 더욱이 그녀의 일을 우스운 일로 여긴다. 주님 안에서 지키는 책임을 맡은 사람이 뜻밖에도 그녀를 덮어주려 하지 않고 도리어 그녀의 일을 사람에게 공개하여 그녀로 수건을 잃게 하고 가릴 것이 없게 하여 사람 앞에서 그녀의 수치를 드러낸다. 그녀의 실패는 믿는이 가운데 공개적인 소문이 되었다. 그녀는 실로 욥처럼 그녀를 도우려는 친구들을 만나지만, 다 그녀를 정죄하는 친구들일 뿐이다.

 

이 한 무리의 파수꾼은 바로 하나님의 집에서 책임을 지는 사람들이다. 영성으로 말한다면, 틀림없이 그녀를 인도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많은 때에 영적인 사람일지라도 다른 사람에 대한 그의 단안(斷案)이 잘못 될 수 있다. 형제들의 우리에 대한 태도는 비록 많은 때에 잘못된 것이지만, 이것은 주님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실패를 느끼게 하려고 허락하신 것이다. 만일 우리와 주님 사이가 주님의 뜻에 따라 전진한다면, 주님에게는 자연히 우리의 형제들을 처리할 방법이 있으시다. 우리가 만일 실패하면, 그것이 비록 아주 미세한 것이라 할지라도, 주님이 우리를 다루시는 것보다 더욱 심하게 형제들로 우리를 다루게 하신다.

 

F. 예루살렘 여자들에게 도움을 구함(5:8)

 

8절의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는 마땅히 「내게 사랑병이 있구나」로 번역해야 한다. 그녀가 영적인 사람 가운데서 도움을 얻지 못할 때 그녀는 이제 자기보다 어린 사람에게서 도움을 구한다. 그녀가 이같이 주님께 득죄하고, 주님의 얼굴빛을 잃었다고 느끼며, 의지할 곳이 없을 때, 그녀는 예루살렘의 여자들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그녀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나는 이제 실패했으니 만일 할 수 있다면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하는 것 같다. 실패에 대한 그녀의 느낌이 이렇게 깊기 때문에, 그녀로 하여금 주님 안의 어린아이조차도 그녀를 도울 수 있다고 느끼게 하는 것이다.

 

그녀는 결코 그들이 어리다는 것을 모르지 않으며, 그들과 주님과의 교통이 반드시 완전하지는 않다는 것을 알므로, 그녀는 「너희가 만일 만나거든」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그녀들이 만날 수도 있고 만나지 못할 수도 있음을 안다. 그러나 그녀는 아주 깊이 후회하는 가운데 어찌할 바를 모를 때, 그녀들 중에 한두 사람이라도 혹시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기대하는 것이다. 자기의 기도는 통하지 않고 이제 다른 사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녀가 전달하려는 한 마디는 「내게 사랑병이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이미 앞에서 한번 했으나, 거기의 상황과 여기의 상황은 완전히 다르다. 거기서는 그녀가 교통 안에서 아주 사랑스럽게 흐를 때였으나 지금은 고갈되어 있는 때이다. 느낌이 충만할 때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별로 희귀하지 않지만, 사면이 어둡고 느낌이 없을 때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다. 이것은 그녀가 믿음의 생활에 있어서 실로 큰 진보를 가졌음을 증명한다. 그녀는 이미 어떻게 환경을 다스리는지를 배웠고, 자기의 느낌을 어떻게 다스리는지도 배워서 안다. 지금의 사랑병은 결코 사랑에 취해 배불러서 난 것이 아니고 사랑에 굶주려서 난 것이다.

 

G. 예루살렘 여자들의 대답(5:9)

 

이 예루살렘 여자들은 자신들에게 비록 주님 안에서의 깊은 체험이 없고 새 창조의 생명으로 충만하지도 않지만, 이 여자가 「여자 중에 지극히 아름다운 자」인 것을 알아볼 수는 있다. 자신은 비록 얻지 못했지만, 새 창조의 겸손과 성결과 영광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녀는 비록 그녀의 사랑하는 자의 얼굴빛을 잃었지만 여전히 여자 중에 아름다운 자이다. 그녀는 결코 그녀의 아름다움을 잃지 않았다.

 

비교하는 방식으로는 원래 그리스도를 온전히 볼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분은 비교할 수 없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 가운데서 비교는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녀들의 눈은 아직 그분이 절대적인 분임을 보지 못했으므로, 그분을 상대적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실 이 여인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그것뿐이겠는가!

이 말은 또한 이 여자들이 비록 예루살렘 사람이긴 하지만, 그녀들은 아직도 주님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계시를 얻지 못했음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그녀들은 단지 그녀로부터 반사된 빛만 얻을 뿐이다.

 

H. 사랑하는 자에 대한 여자의 인상(5:10-16)

 

다비(J. N. Darby)는 이 부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여기의 뜻이 추호도 소홀히 여겨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신부가 여태까지 신랑의 완전함을 이야기할 때, 그분은 기꺼이 그녀를 받아들여줄 것 같았다. 그녀가 그분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것은 모두 다른 사람에게 그녀 자신의 느낌을 표시하기 위한 것이었지 절대로 그분에게 직접 말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분이 그녀에 대해 말할 때에는 오히려 아주 자유롭고 아주 완전하게 그녀가 어떠한지를 말하는데, 이것은 그분이 그녀에게 자신이 그녀를 좋아한다는 것을 나타내려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를 생각할 때에 여기의 그림이 얼마나 합당하고 아름다운지!』

 

하나님은 그녀들의 질문을 통해 그녀로 하여금 주님에 대한 그녀의 인상을 표현케 하는데, 즉 그녀가 이전에 얻었던 계시가 다시 한번 그녀 안에서 빛을 발하도록 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주님은 자연스럽게 그녀를 당초의 위치로 회복시키려 했다. 한 가지 매우 기묘한 일은, 우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로부터 얻은 계시가 어떤 때에는 비록 혼미해질 수 있지만, 완전히 잃어버린 바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 여자는 여전히 예루살렘 여자들의 교사요, 그녀의 실패는 그녀들의 승리보다 낫다.

 

10절에서 그녀는 먼저 그녀의 사랑하는 자의 어떠함을 일반적으로 말했다. 「희다」는 원문에서 「빛이 밝게 비취는 그런 종류의 흰 색」이다. 이것은 그분의 청결함과 그분이 얼마나 죄에서 멀리 떠난 분인가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분의 흰색은 창백한 흰색이 결코 아니라 희고도 붉다. 이것은 그분이 생명이 충만하고 능력이 충만한 분임을 말하는 것이다(다윗도 얼굴빛이 붉은 사람이었다-삼상 16:12). 우리는 그분의 일생에서 그분이 얼마나 능력과 생명이 충만한 사람으로 나타났는지를 본다. 열 두 살 때 성전에 나타나신 이래로 오늘날 하나님 우편에 앉으실 때까지 그분은 남을 돕는 일에서 역량이 부족하게 나타나신 적이 한 번도 없다.

 

「뛰어나다」는 원문에서 「기(旗)를 받치는 자」 혹은 「들어올려진 기(旗)」를 뜻한다. 여기의 뜻은, 그리스도는 천만 인 가운데 높이 올려진 기, 즉 모든 사람이 기대하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기이시며, 우리의 기대는 곧 그분이시다. 그리고 그분 자신이 또한 기를 받치는 자이신데, 그 뜻은 그분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주(主)라는 것이다. 『대적이 홍수같이 몰려올 때 여호와의 영이 한 기(旗)를 일으켜 그를 대항하리라』(사 59:19, 다비 역). 그곳의 기(旗)는 십자가를 가리켜 한 말이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은 기를 받치는 분으로서 죽임 당한 어린양이심을 가리킨다. 그분이 어디를 가시든 천만 인이 모두 그를 따르려 하며, 그분과 비교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일반적으로 말한 후에, 그녀는 이제 세세하게 주님이 그녀에게 주신 계시와 인상을 말하려 한다.

 

11절의 「정금 같고」는 그분의 신성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다. 그분에게는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영광이 있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골 2:9). 하나님은 이 그리스도를 우리의 머리로 세우셨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모든 것이 그분 안에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은 그분 안에 있지 않다. 이렇기 때문에 『머리를 붙들고...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게』 된다(골 2:19).

 

『머리털은 고불고불하고 까마귀같이 검구나』. 까마귀같이 검다는 것은 그분의 영원한 능력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다. 그분이 자신을 태고 적부터 항상 있는 자로 나타내실 때, 그분은 그분의 머리털이 희다고 말씀하신다(계 1:14). 그러나 여기서는 그분의 영원히 쇠(衰)하지 않고 패(敗)하지 않는 능력을 말하므로, 그분의 머리카락이 검은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 성경은 사람이 쇠패하고 변한 것을 말할 때 그의 머리카락이 반백(班白)이라고 말한다(호 7:9). 그러나 우리 주님에게는 반백(班白)의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다. 그분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 (히 13:8).

 

12절의 눈은 사람의 표정 특히 친밀한 표정이 나타나는 부분이다. 사람의 말과 서신도 비록 의사를 전달할 수 있으나, 그것은 멀리 떨어져 있는 자들 사이의 의사 소통 수단이다. 눈의 표정은 가까이 있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비둘기의 몸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바로 눈이다. 「시냇가」에 있다는 것은 그것의 적셔짐을 말하며, 「젖으로 씻은 듯하다」는 그것이 희다는 것을 말하며, 「아름답게 박혔구나」는 그것의 단정함을 말한다. 그러므로 주님의 눈은 그분이 우리를 향해 나타내시는 표정인 것이다. 믿는이가 볼 때 주님의 두 눈은 비둘기의 눈과 같이 아름답다. 즉 활력으로 충만하며, 조금도 고갈되지 않음이 마치 시냇가에 있는 것 같으며, 흑백이 분명한 것이 젖으로 씻은 듯하며, 아름답게 박힌 것은 정당한 시선을 가진 것으로, 그분은 안목이 분명치 못하여 사물을 잘못 보실 수 없다는 것이다.

 

13절에서, 그분의 두 뺨은 일찍이 사람의 수욕을 받아 보았고(사 50:6) 사람의 희롱도 받아 보았다(마 27:30). 그러므로 믿는이가 그분의 두 뺨을 향기로운 꽃밭 같고 향기로운 풀 언덕과도 같이 아름답고 향기롭게 보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입술」은 곧 그분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이다. 이러한 말들은 얼마나 청결하며 동시에 몰약즙과 같이 향기로운지! 『은혜를 입술에 머금으니』(시 45:2). 사람이 그분을 칭찬하고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혜의 말씀(눅 4:22)을 진귀하게 여기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또한 몰약즙은 은혜를 나타낼 뿐 아니라 그분의 죽음과 관계된 것으로 그분의 죽음으로 말미암은 은혜를 나타낸다. 그분의 입술에서 떨어진 것은 모두 몰약즙이므로, 그분의 말씀하심에는 그분의 죽음에 근거한 은혜의 말씀이 아닌 구절이 하나도 없다. 그분이 하신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평안히 가라』(눅 7:48, 50) 혹은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요 6:47), 『일어나... 걸어가라』(막 2:9) 등의 말씀은 모두 그분의 죽음에 근거한 것이다.

 

14절의 「노리개」는 열왕기 상 6장 34절의 「접다」와 같은 뜻이다. 「접는」 목적은 그것이 벗겨지거나 잃어버린 바 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황금 노리개」의 의미는, 주 예수님의 행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결코 도중에 빗나가거나 잃어버린 바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의 행사는 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이 관(管)은 금으로 되어 있다. 「황옥」은 구약에서 몇 차례 사용되었다. 에스겔 1장 16절과 다니엘 10장 6절이 바로 그 중 두 가지 예(例)이다. 이 구절들은 모두 견고함을 보여 준다. 에스겔 1장에서 우리는 이방인이 결국 정권을 잡을 수 있으나 하나님의 다스림의 수레바퀴(황옥으로 만들어짐)는 여전히 도는 것을 본다. 다니엘 10장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그리스도(몸이 마치 황옥 같음)가 여전히 세상의 미래를 지배하고 있음을 본다. 그러므로 황금 노리개와 황옥은 다 주님이 하신 일의 견고함을 말하는 것이다.

 

「몸」은 반드시 「심장」으로 번역해야 하는데, 이 구절의 몸은 5장 4절의 「심장」(원문 참조)과 같은 단어이다. 그 뜻은 주님은 또한 매우 깊은 느낌을 가진 분이시라는 것이며, 이 느낌은 전적으로 그분의 백성을 위한 것이다. 「상아」는 결코 보석과 같이 생명이 없는 것이 아니다. 상아를 얻으려면 적어도 고난을 받거나 죽어야 비로소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주님의 그분의 백성에 대한 이러한 느낌, 즉 그분이 일찍이 고난 받고 죽으심으로 큰 대가를 치르셨다는 것을 말해 준다. 「새기는」 것은 정교한 일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그분의 모든 느낌은 천박하거나 즉흥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준다. 「청옥」에 대해 성경은 「하늘같이 청명하더라」고 말한다(출 24 10). 이러한 청옥들이 주위에 박혀 있다는 것은 그분의 느낌이 우리를 만질 때 어떻게 하늘의 지배를 받는가를 말해 준다.

 

15절의 「발」은 성경에서 행동을 가리키고, 「다리」는 그보다 서는 것을 가리킨다. 「화반석」은 성경에서 여러 번 「세마포」로 번역되었으므로, 여기서 그것은 그분의 의를 나타낸다. 「기둥」(원문 참조)은 안정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기서의 뜻은 모든 것의 모든 것이신 우리 주님은 그분이 세우신 의이기 때문에 요동하실 수 없음을 말한다. 무릇 그분을 따랐던 사람들은 다 그분에게서 끊임없이 이 인상을 받을 수 있었다. 여자가 그녀의 사랑하는 자에 대해 강론할 때, 그녀는 세 번 금을 언급했는데, 이것은 그분의 머리 속의 생각, 손의 행위, 발 아래의 안정정이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말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모든 것을 다스리셨다. 그분은 완전히 순복한 사람이셨고 또한 완전히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시킨 사람이셨다. 이것이 우리가 아는 그분이다.

 

『그분의 형상은 레바논 같고』. 그분은 땅을 초월한 분이요, 높은 곳에 사는 분이다. 그분의 모든 것은 하늘에 속한 사람과 같다.

 

『그분의 탁월함은 백향목 같고』(다른 번역). 그분은 사람이지만 영광을 얻으신 사람이다. 백향목이 얼마나 높이 모든 나무를 초월하는가를 보라. 이와같이 그분은 유일하게 영광 받은 사람이시다.

 

16절에서 마지막으로 그분의 「입」을 말한다. 원문에서 입은 일반적인 입이 아니라 입맛이다. 여기의 「입」과 2장 3절의 「맛」(원문 참조)은 같은 단어이다. 이것은 입술과 크게 다르다. 이 맛은 주 예수님의 중보의 역사를 말한 것이다. 그 뜻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모든 것을 먼저 맛보고 나서 다시 우리에게 전달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것을 먼저 그분 안에 저장하신 후에 다시 우리에게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중보의 역사이며 매우 달콤한 것이다. 우리가 그분을 안다면, 우리는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모든 것은 다 그리스도를 거친 것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까지 말할 때, 듣는 사람의 마음은 뜨겁지 않을 지 모르지만, 말하는 사람의 마음은 너무나 뜨겁게 감동된다. 우리가 이전에 걸어왔던 길과 우리가 인식한 주님을 재음미할 때, 우리는 『그분은 전체가 사랑스런 분입니다.』라고 외쳐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분의 어떤 것을 언급해도 전체가 다 사랑스럽다. 전심으로 주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여! 이분이 나의 사랑하는 자요 나의 친구이니, 내가 그분을 찾는다고 너희가 이상히 여기겠느냐?

 

주님에 대한 그녀의 인상을 이렇게 말하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그녀가 인식한 주님을 말하는 것이요, 그녀가 주님 안에서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것이며, 그녀와 주님과의 연합이 도대체 어떠한 교통인지를 말하는 것이다. 참으로 그녀가 열린 얼굴로 거울을 보듯이 주님의 영광을 보매 주의 형상으로 변화되니 영광 위에 영광이러라.

 

그녀가 마지막으로 말하려 할 때에 빛이 이미 그녀의 혼을 비췄으므로, 그녀의 어조는 그녀가 얼마나 느낌으로 충만했는지를 나타낸다. 그녀는 마치 거기서 외쳐 노래하면서, 『그분은 전체가 사랑스럽구나. 이는 나의 사랑하는 자요 나의 친구일다!』라고 말하는 것 같다.


워치만 니
[워치만니 전집 2집 제 3권, 노래 중의 노래 제 4단락 "부활 후의 십자가의 부르심", 한국복음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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