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성한 말씀을 누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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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영은 항상 우리를 잘못된 행위로 이끈다. 만일 믿는이가 영을 좇아 행하기 원한다면 순간순간 자기 자신을 정상적인 상태로 보존시켜야 한다.

 

영은 생각과 같이 방종하고 거만하며 위축될 때도 있다. 만일 믿는이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영을 보존하지 않는다면 영이 실패할 때에 그의 외적인 행위도 실패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많은 외적인 행위의 실패가 행위의 실패 이전에 안에 있는 영이 이미 실패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만일 믿는이가 강하고 힘 있는 영을 가지고 있다면 어떤 상황에 있든지 그는 자기의 혼과 몸을 다스리고 방탕함에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혼과 몸은 영을 억압하고 믿는이를 타락시킨다.

 

하나님이 주의하는 것은 우리의 영이다. 이곳은 새 생명의 소재지요 성령이 역사하는 곳이며 우리가 하나님과 교통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곳이다. 또한 이곳은 성령의 계시를 얻는 곳이며 우리가 훈련받는 곳이고 자라는 곳이며 우리가 대적의 모든 공격을 대항하는 곳이며 우리가 마귀와 그의 군병을 이길 권세를 얻는 곳이며 우리가 일할 능력을 얻는 곳이다. 바로 이 영으로 우리는 부활생명을 얻고 부활한 몸으로 변형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의 상태가 어떠하면 우리의 영적 생활의 상태도 어떠하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영이 정상적인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안에 계신 주님께서 돌보시는 것은 우리의 혼인 겉사람이 아니라 우리의 영인 속 사람이다. 만일 우리의 속 사람이 비정상적인 상태에 있다면 우리의 혼생명이 발달했다 하더라도 우리의 전체 생활은 무너질 것이다.

 

믿는이의 영의 정상적인 상태에 대하여 성경은 전혀 묵인하지 않는다. 많은 노련한 믿는이는 성경의 권면을 체험한고로 승리의 지위와 하나님과 동역하는 능력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영을 성경이 가르친 여러 상태에 두어야 함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믿는이의 새롭게 된 의지에 의해 어떻게 영이 다스리는가를 본 바 있다. 이것은 가장 중요한 것이다. 오직 의지로 말미암아야 믿는이는 자기의 영을 합당한 상태에 둘 수 있다. 영이 합당한 상태에 있어야 한다는 중요성에 대해서는 많이 다루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다시 언급하지 않겠다.


통회함

 

『여호와는 영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시 34:18 원문 참조).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여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영)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시 57:15).

 

많은 믿는이들은 회개하고 주님을 믿을 때나 넘어져서 죄를 범할 때 만이 통회하는 영이 필요하다고 잘못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영을 통회하는 상태에 보존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안다. 비록 우리가 날마다 범죄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항상 통회하기를 원하신다. 이는 우리가 아직 육체를 가지고 있고 육체가 언제라도 활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통회하는 영은 우리를 깨어 있게 한다. 우리는 범죄하지 말아야 하는 반면에 범죄에 대한 통회를 가져야 한다. 하나님의 임재는 이러한 영 안에서 감지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한번 회개하므로 만족하는 것을 싫어하신다. 그분은 우리에게 늘 통회하며 살아가라고 하신다. 이것이 있어야만이 생활과 행위에서 성령과 의견 충돌이 있을 때 즉시 느끼고 통회할 수 있다. 오직 이렇게 해야만이 사람들이 당신에게 잘못이 있다고 말할 때 당신은 잘못을 인정할 것이다. 이 통회는 필수적인 것이다. 이는 믿는이가 주님과 한 영으로 연합하였다고 해서 앞으로 영영 잘못을 범하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은 잘못될 수 있다(사 29:24). 설령 영이 틀리지 않더라도 생각이 혼미케되어 영의 뜻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러한 통회하는 영은 다른 사람들이 작은 일에서까지 믿는이가 주님을 닮지 않았다고 하는 말을 가리지 않고 그 사실을 인정하게 한다. 하나님은 오직 영 안에서 통회하는 사람만을 구원할 수 있다. 그분의 뜻을 계시해주기 위해서 그분에게는 통회하는 영을 가진 사람이 필요하다.

 

자신의 잘못을 가리는 사람에게는 통회하는 영이 없다. 하나님도 이런 사람을 완전한 상태로 구원할 수 없다. 우리는 성령의 책임과 세상사람의 책망을 받을 수 있는 영을 소유할 필요가 있다. 우리 자신이 마땅히 이르러야 할 것을 이루지 못한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손길을 보게 될 것이다.


상하게 됨

 

『하나님이 구하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시 51:17).

 

원문에서 「상함」은 「떨다」라는 뜻이 있다. 어떤 신자는 범죄하고도 그의 영은 아무 일이 없었듯 아주 자유롭다. 건강한 영은 일단 죄를 범하면-다윗과 같이-상함이 있게 되는 법이다. 상한 영을 가진 사람만이 비교적 쉽게 하나님께 돌이 켜진다.


떨음

 

『그러나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시 66:2).

 

원문에서 「통회」는 「매를 맞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은 매를 맞으므로 조심스럽고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경외하는 영이다. 믿는이의 영은 언제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 스스로 옳다는 마음을 완전히 파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모든 것의 인도자로 삼아야 한다.

 

믿는이는 자기의 영이 매를 맞아서 고개를 들지 못하고 하나님의 명령만을 주로 삼는 것같이 거룩한 존중함과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 절대로 필요하다. 강팍한 영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데 장애가 된다. 십자가의 더 깊은 역사로 자기 자신을 분명히 알고 자기의 사상과 감정과 욕망이 얼마나 믿을만하지 못하다는 것을 아는 믿는이만이 감히 자기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범사에 떨고, 하나님의 능력의 보호하심이 없다면 실패한다는 것을 인식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서 단독적으로 행동하지 말아야 한다. 언제든지 우리의 영이 떨지 않을 때 우리의 영은 독립하는 경향이 생기게 된다. 우리 자신이 아무데도 의지할 것이 없는 상황에 처해야만이 하나님을 의지하게 된다. 떠는 영은 우리가 실패하지 않도록 우리를 보호하고 우리로 참되게 하나님을 알게 한다.


겸손

 

『겸손한 자와 함께 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 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잠 16:19).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영)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잠 29:23).
『또한 (내가)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사 57:15).

 

겸손은 자신을 멸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전혀 바라 보지 않는 것이다. 믿는이의 영에 거만한 태도가 있는 것은 바로 그의 넘어짐의 증거이다.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의 문제만이 아니라 사람 앞에서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것은 겸손한 영은 『가난한 자와 함께 하는데』에서 볼 수 있다. 오직 겸손한 영을 가진 사람만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어떤 부류의 사람도 멸시치 않을 수 있다. 하나님의 임재와 존귀와 영광은 오직 영 안에서 겸손한 사람에게 나타난다.

 

겸손한 영은 곧 가르침을 받는 영이요 권유를 받는 영이며 설명의 말을 잘 받는 영이다. 많은 믿는이의 영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만 하고 다른 사람에게서 가르침을 받을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높아 있다. 융통성이 없고 고지식해서 가르침을 받기가 어려우며, 자기의 잘못인줄 알면서도 자기 의견을 고집하는 영을 가진 믿는이가 얼마나 많은지. 사람에 대해 오해한 것을 설명해주는 말을 듣지 않을 정도로 강팍한 영을 가진 믿는이는 얼마나 많은지. 오직 겸손한 영만이 담을 수 있는 도량이 있다.

 

하나님은 그분의 미덕을 나타낼 겸손한 영을 필요로 하신다. 교만한 영이 어찌 성령의 음성을 듣고 성령과 동역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의 영에 조금도 교만한 흔적이 발견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영은 항상 부드럽고 섬세하며 융통성을 지녀야 한다. 영의 조그만한 강팍함도 주님을 닮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주님과의 교통을 가로막는다. 겸손하고 항상 주님을 기다리며 주님을 대적하는 것이 없는 사람만이 주님과 동행할 수 있다.


가난함

 

『영 안에서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마 5:3).

 

영 안에 가난한 것은 자신을 아무 것도 없는 존재로 여기는 것이다. 믿는이의 위험은 영 안에 너무 많은 것들을 담는데 있다. 오직 영 안에서 자신의 빈곤함을 아는 사람만이 겸손할 수 있다.

 

믿는이의 체험과 성장과 진보는 그의 영 안의 진귀한 보물이 되므로 영의 가난함을 잃게 되는 경우가 많다. 자기가 얻은 것을 묵상하고 자기가 체험한 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장 간교한 위험물이다. 많은 때에 믿는이들은 이것을 모른다. 가난함이란 무엇인가? 가난함은 곧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믿는이가 항상 자신의 가장 높고 깊은 체험에 착념한다면 그 체험은 그의 영 안의 장애물과 올무가 될 수 있다.

 

오직 비어 있는 영만이 믿는이로 하여금 하나님 안에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게 한다. 부요해진 영은 믿는이로 자신을 중심삼게 한다. 구원의 완전함은 믿는이로 자신에서 나와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한다. 만일 믿는이가 자신을 위해 무엇을 보류해 둔다면 그의 영은 즉시 자기 속으로 향하게 되고 「밖으로 나아가서」 하나님과 일치될 수 없게 된다.


온유

 

『온유한 영』(갈 6:1)

 

이것은 영의 정상적인 상태 중에 가장 중요한 항목이다. 온유는 강팍함과 고집의 반대이다. 온유한 영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영이다. 동정하지 못하는 영은 늘 하나님의 인도를 잃게 한다. 온유한 영은 곧 가장 짧은 시간 내에 자아의 뜻을 버리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영이다.

 

온유한 영은 사마리아에서 광야로 부르심을 받은 빌림과 같이 믿는이의 일이 가장 발전할 때에 하나님의 미리 통지(通知)가 없이도 인도를 받은 즉시 멈출 수 있는 영이다. 온유한 영은 하나님 손에서 그분을 따라 행동하는 영이다. 온유한 영은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고 자기 뜻을 좇지 않는 영이다. 하나님은 그분께 순종하는 영을 통해서만이 그분의 뜻을 성취할 수 있다.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온유한 영은 더욱 필수적이다. 온유한 영은 어린 양같은 영이자 십자가의 영인 것이다.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않으신 것』(벧전 2:23)이 바로 온유한 영이다. 온유한 영은 손해를 입기를 원하고, 비록 보복할 능력이 있고, 율법으로 보호할 수 있어도 결코 육체의 손으로 자신을 위한 신원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곧 고난과 피해를 당할지라도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 영이다. 그분은 스스로 공의에 처하시고 다른 사람에게는 공의를 요구하지 않으셨다. 그분 안에 사랑과 인자하심이 충만했기 때문에 그분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매혹시킬 수 있었다.


불탐

 

『부지런하며 게으르지 말고 영 안에서 불탐으로 주를 섬기라』(롬 12:11원문 참조).

 

육체가 일시적인 충동으로 인해 열심을 내고 감정의 작용으로 열심을 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일시적인 것이요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육체가 가장 부지런 할 때에도 가장 게으를 수 있다. 이는 그의 부지런함은 자기 뜻에 일치하고 감정의 도움으로 한 것에 불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육체가 싫어하고 육체의 감정이 냉담해질 때에 육체는 주님을 섬기지 않는다. 날씨가 좋을 때나 궂을 때나 한 걸음씩 서서히 주와 함께 수고하는 것을 육체는 결코 하지 못한다. 『영 안에 불타는 것』은 장기적인 일이다. 오직 이렇게 할 때만이 『항상 주를 섬길 수 있다』.

 

우리는 육체적인 모든 열심을 피하고 성령이 우리를 충만하시게 해야 한다. 이렇게 될 때에 하나님은 우리 영이 항상 불타도록 지켜주신다. 우리의 영이 냉냉할 때조차도 우리의 영은 냉냉해지지 않으려 하고 주님의 일을 계속하려고 한다.

 

여기서 사도가 말한 것은 일종의 명령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새롭게 된 우리의 의지가 주장하는 문제이다. 우리는 의지를 사용하여 불탐을 택해야 한다. 우리는 『내 영은 냉냉하길 원치 않고 불타기 원한다.』고 말해야 한다. 우리의 감정이 무엇에 대하여도 흥미를 못 느낄 때에 우리의 모든 것은 불타는 영에 지배를 받게 해야 한다. 결코 냉냉한 감정이 우리를 이기게 해서는 안 된다. 항상 전일하게 주를 섬기는 것이 불타는 영의 표시이다.


냉철

 

『냉철한 영을 가진 사람은 명철한 자니라』(잠 17:27 원문 참조).

 

우리의 영이 항상 불타야 하지만 또한 우리의 영은 냉철해야 한다. 불타는 것은 『부지런하고 게으르지 않고 주를 섬기는 것』을 가리켜 말한 것이고, 냉철함은 지식에 대해 말한 것이다.

 

만일 우리의 영이 냉철하지 않다면 우리는 종종 지나친 행동을 하게 된다. 원수의 목적은 성도를 정상 궤도에서 벗어나 그의 영으로 성령과 접촉을 잃게 하는 데 있다. 우리는 종종 믿는이의 영이 냉철하지 않으므로 원칙에 의해 사는 생활을 감정에 의한 생활로 변개시키는 것을 본다. 영과 생각은 본래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영이 냉철하지 않을 때에 생각은 자극을 받게 되고 생각이 일단 불태워지면 믿는이의 많은 행위는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여 비정상적이게 된다.

 

그러므로 영의 냉철함을 보존하는 것은 언제나 유익이 있다. 항상 우리의 흥분된 감정과 늘어나는 욕망과 분란한 사상을 상관치 않고 한 걸음 물러나서 냉철한 영 가운데서 모든 문제를 고려하는 것은 우리의 노정을 주님의 길 가운데 지켜준다. 우리의 영이 자극을 받을 때에 우리가 어떤 행동을 취한다면 아마도 그것들은 하나님의 뜻에 위배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하나님을 알고 사탄을 알며 모든 것을 통찰하므로 우리의 영 안에서 혼에 속한 믿는이에게 없는 일종의 안정을 가져야 한다.

 

우리의 영에 말할 수 없는 안정을 갖기 위해 성령은 믿는이의 영 안에 충만되어야 하고 믿는이의 혼은 완전히 거절되어야 한다. 우리의 혼, 몸 혹은 환경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든지간에 영 안의 안정감을 잃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영은 바다 표면에 풍랑이 아무리 세차게 몰려와도 잔잔하고 움직이지 않는 바다 밑과 같아야 한다. 믿는이의 혼과 영이 분리되기 전에 어떤 돌발적인 일을 당하면 그의 온 존재는 즉시 분란해지거나 당황하게 되거나 속수무책이거나 마음이 요동하기 마련이다. 이것은 영적인 지식이 없고 혼과 영이 아직 분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과 혼의 분리가 바로 영의 냉철함을 지키는 것이다. 이럴 때에 믿는이는 「마음이 요동하지 않는」체험을 갖게 된다. 아무리 분란한 바깥 환경도 우리의 안에 있는 침착함과 평화를 빼앗아 갈 수 없다. 그렇다. 태산(泰山)이 그의 앞에 무너져 내린다 해도 그의 냉철함을 변개시킬 수 없다. 이것은 사람의 수양으로 얻을 수 없고 오직 성령이 모든 것의 진상을 믿는이에게 계시해줄 때만이 가능하다. 이것은 그의 혼이 영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성령의 속박을 당할 때라야 가능하다.

 

여기의 문제는 바로 의지를 통제하는 문제이다. 우리의 영은 우리의 의지의 다스림 하에 있어야 한다. 불타는 것은 우리의 의지가 원하는 바이고 냉철함도 역시 우리의 의지가 원하는 바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결코 우리의 영의 상태가 의지의 통제에서 벗어나게 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우리의 의지는 주의 일에 열심을 내면서도 냉철한 태도를 취할 수 있어야 한다.


기쁨

 

『내 영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눅 1:47).

 

믿는이의 영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상한 태도(시 51:17)를 취해야 하고 동시에 하나님을 기뻐해야 한다. 그의 기쁨은 단지 기뻐서 기뻐하는 것이나 자기에게 무슨 체험과 역사와 축복과 좋은 환경이 있어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을 그의 중심으로 삼았기 때문이어야 한다. 사실상 하나님 외에 믿는이를 기쁘게 할만한 것이 없다. 만일 믿는이의 영이 염려와 근심, 걱정으로 억눌러져 있다면 그의 영은 즉각 실직하고 가라앉게 되며 정상적인 위치를 잃어버림으로 성령의 인도를 따르지 못하게 된다.

 

믿는이의 영이 이러한 짐들에 의해 억눌러질 때에 그의 영은 즉시 경쾌함과 자유와 광명을 상실하고 승천의 위치에서 타락하게 된다. 만일 영이 상하는 기간이 길어진다면 영적 생명이 받은 해는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럴 때에 어떤 것도 그의 구원이 될 수 없다. 오직 길은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을 기뻐하고 하나님이 이루신 모든 것이 나의 구원이 된다는 것으로 기뻐하는 것이다. 믿는이는 결코 「할렐루야!」의 성조(聲調)를 상실해서는 안 된다.


두렵지 않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 하는 영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영이니』(딤후 1:7).

 

두려워하는 것은 겸손이 아니다. 겸손은 절대적으로 자기 자신-자신의 약점과 장점-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그 반면에 두려워하는 것은 자기의 약점을 기억함으로 자기 자신을 연민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사건건 물러나고 위축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한면에서 우리 자신에게 아무 것도 없으므로 인해 떨고, 다른 한면으로 그분의 능력으로 인해 담대히 전진하기를 원하신다. 주님은 우리에게 담대히 주를 위해 증거하고, 고난과 수치를 당하며,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주를 의지하며, 그분의 사랑과 지혜와 능력과 성실함과 약속을 믿을만한 것으로 여길 것을 요구하신다.

 

우리가 주를 위해 증거하는 등의 일에서 위축될 때마다 우리는 우리의 영이 정상적인 상태에서 떠나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영을 「두려움 없는」가운데 보존시켜야 한다. 「능력」의 영과 「사랑」의 영과 「근신하는」 영이 모두 우리에게 필요하다.

 

우리의 영은 강건해야 하나 사랑을 잃을 정도로 강하지 말아야 한다. 잠잠하고 자기를 통제하며 자극을 받지 않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원수를 대적하려면 우리의 영은 강건해야 하고 세상 사람을 대하는데 있어서 우리의 영은 사랑이 있어야 하며 자기 자신에 대하여 우리의 영은 근신해야 한다.


안정됨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영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벧전 3:4).

 

이것이 자매들에게 주신 말씀이나 영성에 있어서 이 가르침은 형제들에게도 필요한 것이다.

 

『종용(안정)하여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는 것』(살전 4:11)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본분이다. 오늘날 믿는이들에게 말이 너무나도 많다. 때로 입으로 하지 않은 말이 소리내어 한 말보다 더욱 많다. 분란한 생각과 끝없는 말은 우리의 영이 의지의 통제를 떠나서 방탕하게 한다. 「풀어진 영」은 항상 사람으로 육체를 좇아 행하게 한다.

 

믿는이의 영이 풀어질 때 죄를 면하기가 가장 어렵다. 잘못된 영은 잘못된 행위를 가져다준다. 안정된 영을 가져야만이 안정된 입을 가질 수 있다. 영에 있는 것은 마음으로 말해내기 마련이다. 우리가 많은 일로 혼란되어 있을 때에도 우리가 고요히 안정될 수 있도록 우리 안정된 영을 보전하기 위해 항상 근신해야 한다. 영을 좇아 행하기 위해서 안정된 영은 필수적인 것이다.

 

안정된 영이 없을 때 우리는 죄에 빠지게 된다. 만일 우리의 영이 안정되어 있다면 우리 영 안에서 성령이 발한 음성을 들을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고, 분란함 가운데 이해하지 못 했던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안정된 영이 믿는이의 장식이라는 말은 이것이 믿는이의 외적인 표현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신선함

 

『영의 새로운 것으로』(롬 7:6).

 

이것은 영적 생명과 영적인 일에서 가장 중요한 한 단계이다. 낡아진 영은 사람에게 어떤 사상을 줄 수 있을 뿐 어떤 감동도 주지 못한다. 이로 인해 낡아진 영에는 능력이 없고 무엇을 간절히 사모하지도 않는다. 낡아진 영은 낡은 사상을 뿜어낼 뿐이다. 살아 있는 생명은 결코 낡은 영에서 흘러나오지 않는다. 낡은 영에서 발한 모든 것-그 말과 가르침과 태도와 사상과 생활-은 다 낡고 묵은 것이며 전부터 있는 것들이다.

 

많은 교리들은 믿는이의 머리 속에만 미칠 뿐 영 안에 아무런 기초도 세울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한 사람의 가르침 뒤에는 사람들의 영을 「만져주는」 영이 없다. 한번 체험했던 어떤 교리가 이제는 과거로 변하고 일종의 기념물이 되고 머리 속의 기억으로만 남아 있게 될 수가 있다. 이것은 곧 영 안에서 생각으로 방향을 바꾼 것이다. 때로는 그 사상이 아주 신선하고 생각에서 새로 얻은 사상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생명의 확증을 거치지 않은 일종의 사상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의 말을 듣고 그와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그에게서 신선한 영을 만지지 못한다.

 

많은 때에 우리는 주 안에서 항상 새로운 것을 얻는 그리스도인들을 본다. 이러한 사람들 앞에 서 있을 때에 우리는 그들이 주님 앞에서 새로이 얻은 무언가를 느낄 수 있고 그들에 의해 주님 앞으로 인도되는 듯하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신선함이다. 이것이 아닌 것은 모두 낡은 것이다. 그들은 독수리와 청년들같이 순간순간 새 힘을 얻는 듯하다. 그들이 사람들에게 공급한 것은 머리 속의 무미건조하고 부패되며 벌레먹은 만나가 아니라 영의 숯불 위에 있는 생선과 떡이다. 그 사상의 높이와 깊이와 놀라움은 결코 신성한 영과 같은 감동을 사람들에게 주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의 영을 항상 신선하게 보존해야 한다. 만일 우리의 영이 주 안에서 그분의 축복을 받은 영같지 않다면 우리의 영은 사람들을 만날 자격이 없다. 우리의 생활이든 사상이든 체험이든 그것들이 역사의 기념물이 되었다면 그것은 낡은 것이다. 우리의 모든 것은 순간순간 주님에게서 얻은 것이어야 한다. 남을 모방하기만 하고 생명의 체험이 없는 것들도 신선한 것으로 계산될 수 없다. 과거 자기의 체험을 모방하는 것도 아무 효력을 보지 못한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내가 아버지로 인해 산다』(요 6:57)는 것의 중요성을 알게 한다.

 

우리가 순간순간 아버지의 생명을 우리의 생명으로 취할 때에 비로소 우리의 영은 항상 신선할 수 있다. 신선하지 않은 영은 결코 사역의 열매를 맺을 수 없고, 생명에 있어서 영을 좇아 행하지 못하며 싸움에서 대적을 이기지 못한다. 낡은 영은 하나님을 만나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결코 이 영으로는 사람을 만날 수 없다. 영이 항상 신선하려면 항상 하나님과의 접촉 안에 있어야 한다.


거룩함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고전 7:34).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후 7:1).

 

만일 우리가 영을 좇아 행하기 원하다면 항상 우리의 영을 거룩히 지켜야 한다. 거룩하지 않은 영은 사람을 그릇된 길로 인도한다. 그릇된 사상으로 사람들을 판단하고, 물건을 탈취하는 것, 남의 죄를 기억하고, 사랑이 부족하고 말이 많으며 잔혹하게 비평하고 스스로 옳다 하는 것, 남의 권면을 듣지 않고 형제를 미워하며, 자신을 높이는 등등 이 모든 것은 다 영을 더럽힐 수 있다. 영이 거룩하지 않으면 결코 신선해질 수 없다.

 

영적인 생활을 추구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결코 어떠한 죄도 지나치지 말아야 한다. 죄는 어떤 것보다 더욱 우리를 해친다. 죄에서 벗어나고 영을 좇아 행하는 길을 터득했다 하더라도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과거 범한죄에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만일 죄가 들어온다면 영을 좇아 행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순간순간 죄에 대해 죽음의 태도를 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죄에게 지고, 죄는 우리의 영에 들어와 영을 해치게 된다. 거룩함이 없이 주를 볼 수 있는 사람이 없다.


강건함

 

『아이가 자라며 영이 강하여지며』(눅 1:80).

 

우리의 영은 점점 성장하고 강건하게 되어야 한다. 이것은 영적 생활을 하는 데 필수적인 것이다. 우리의 영이 우리의 혼과 몸을 다스릴 수 없을 정도로-특히 혼이 자극을 받고 몸이 약할 때에-강건하지 못하다고 느낄 때가 얼마나 많은지. 우리가 사람들을 도우려고 할 때에 그들의 영에 무거운 짐이 있는 것을 보고서도 많은 때 우리의 영은 그들을 해방하기에 능력이 부족함을 체험한다.

 

원수와 싸울 때에 원수와의 장기전에서 승리하기에 우리 영의 능력이 충분히 강하지 못함을 발견한다. 또 얼마나 많은 경우에 우리는 영의 능력이 부족함을 느낌으로 모든 것을 다스리지 못하고 생명과 일에서 억지로 하는 부분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우리는 얼마나 더 강한 영을 갖기를 원하는가. 영이 강건해질 때 곧 예민한 직감과 판단력을 갖게 된다. 또한 영에 속하지 않은 모든 것을 거절할 수 있다.

 

어떤 신자는 영을 좇아 행하겠다고 결심하지만 행할 능력이 없다. 이는 그의 영에 모든 것을 다스릴만한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의 영은 다른 것에 지배를 받는다. 우리는 결코 성령이 모든 일을 대신해 주기를 바라서는 안 된다. 거듭난 우리의 영은 반드시 성령과 동역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영을 사용하기를 배우고 최선을 다해 영을 사용해야 한다. 만일 믿는이가 영을 사용한다면 그의 영은 점점 강건케 된다. 그럴 때에 영은 성령을 거스리는 모든 것-완악한 의지든 혼란된 사상이든 무절제한 감정이든-을 대항할 능력이 있게 된다.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의 영도 상처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사람의 영은 그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영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잠 18:14). 이 말씀은 영이 분명히 상할 수 있다는 뜻이다. 상할 수 있는 영은 분명 아주 약하다. 만일 우리의 영이 강건하다면 혼의 충동을 견디고 요동하지 않을 수 있다.

 

모세의 영은 가장 강건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영을 항상 강건한 상태에 두지 않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이 「그의 영을 거역」(시 106:33)하게 할 수 있었다. 그 결과로 그는 죄를 범하게 되었다. 만일 우리의 영이 강건하다면 어떤 상황에 있든지 아무리 육신이 고통을 당하고 감정이 괴로울지라도 주님으로 말미암아 승리의 개가를 부를 수 있다.

 

오직 성령만이 속 사람에게 필요한 능력을 우리에게 주실 수 있다. 우리 영의 능력은 성령의 능력주심에서 온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영은 훈련받을 필요가 있다. 믿는이가 영을 좇아 행하기를 배웠다면 사역할 때에 그는 천연적인 힘을 쓰지 않고 영의 능력을 사용하게 될 것이다. 또한 그는 생명에 있어서 혼에 속한 생명을 의지하지 않고 영의 생명의 힘으로 살게 된다. 그리고 싸움에 있어서 혼의 힘을 쓰지 않고 영의 힘으로 사탄과 그의 악령들을 대적하고 공격하며 반대하기를 배우게 된다.

 

이것은 점진적인 것이다. 믿는이가 이렇게 영을 좇아 행할 때에 그는 더욱 많은 성령의 능력을 얻게 되고 그의 영을 더욱 강건케 할 것이다. 믿는이는 항상 자기의 영을 강건한 상태에 있도록 자신의 영을 지켜야 한다. 결코 당신의 영을 느슨하게 풀어놓았다가 어떤 필요가 생길 때에 그 필요를 채우는데 있어서 무능한 영으로 만들지 말라.


합일

 

『너희가 한 영으로 서서』(빌 1:27 원문 참조).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영에 속한 사람의 생활은 다른 믿는이와 연결되는 생활이다. 이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영 안의 하나이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믿는이의 영 안에 거하므로 믿는이와 완전히 연합되었다면 믿는이의 영이 다른 신자와 하나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영에 속한 사람은 그리스도와 하나님 안에서 하나될 뿐 아니라 또한 각 사람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과 연합한다.

 

그러므로 혼 생명이 자기 속에서 역사하게 하는 믿는이는 결코 영을 좇아 행할 수 없다. 영이 그의 사상이나 감정의 지배를 받는 믿는이도 다른 사람과 하나 될 수가 없다. 사상과 감정이 영의 통제 하에 있는 믿는이만이 자기의 생각과 감정이 동의하지 않은 것을 상관치 않고 그것을 제재하며 다른 하나님의 자녀들과 영 안에서 하나될 수가 있다.

 

믿는이는 자기의 영을 모든 믿는이와 하나되는 상태에 두어야 한다. 작은 단체나 같은 견해를 가진 사람들과 서로 연합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전체와 연합해야 한다. 우리의 영이 강팍함과 독소가 없고 아무 제한이 없이 완전히 열려 있고 자유로워야만이 사람들과 만날 때 아무 장해가 없을 수 있다.


은혜로 층만함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영에 있을지어다』(갈6:1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영과 함께 할지어다』(몬 25절).

 

순간순간 우리의 영을 지키는 데 있어서 주 예수의 은혜는 보배로운 것이다. 주님의 은혜는 우리 영 안에 때에 따른 도움이다. 이것은 축복의 말씀이자 믿는이의 영이 얻을 수 있는 바의 극치이다. 우리는 항상 주의 은혜 안에서 우리의 영을 지켜야 한다.


휴거의 영

 

이상에 서술한 각종 상태 외에도 우리는 우리의 영을 항상 세상과 분별하고 하늘로 승천하는 상태에 두어야 한다. 이것을 우리는 휴거의 영이라고 부른다. 이 휴거의 영은 승천의 영보다 더욱 깊다. 이는 휴거의 영을 얻은 사람은 하늘에서 사는 기분이 들 뿐 아니라 또한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 주님의 재림과 자신의 휴거를 믿고 앙망하게 되기 때문이다.

 

믿는이의 영이 그리스도의 영과 한 영 될 때에 그는 자신이 하늘의 시민이고 세상에서는 단지 나그네로 산다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그러나 이후에 성령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에게 휴거의 영을 주신다. 본래 그의 구호였던 「전진하자!」가 이제는 「올라가자!」로 변한다. 이것은 그의 모든 것으로 하늘에 올라가게 한다. 휴거의 영은 믿는이로 하여금 먼저 『내세의 능력을 미리 맛보게 하는』(히 6:5) 영이다.

 

그러나 이것은 재림에 관한 교리를 믿는 사람이라고 모두 휴거의 영을 갖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주님의 재림을 믿고 전파하고 주님의 재림을 위해 기도하는 것도 별 의미가 없을 수 있다. 사람들은 이것들을 소유하면서도 휴거의 영을 가지고 있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성숙한 믿는이라고해서 다 이러한 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물로서 때로는 그분의 기뻐하심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고 때로는 믿음의 간구에 의해 주어진다.

 

휴거의 영은 믿는이의 영을 항상 휴거의 위치에 처하게 한다. 주님의 재림을 믿을 뿐 아니라 자신이 확실히 휴거될 것을 믿게 한다. 이것은 단지 어떤 교리를 믿는 것만이 아니라 한 가지 사실을 아는 것이다. 시므온이 성령의 계시를 받아 자기가 죽기 전에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볼 수 있다고 믿었듯이 영 안에서 믿는이들도 자기가 죽기 전에 주님 앞으로 휴거될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믿음은 에녹의 믿음이다. 우리는 미신적인 것을 믿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휴거의 기간에 남아 있다면 우리는 결코 휴거의 믿음이 부족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이생에서의 하나님의 역사를 알게 하고 우리의 일을 돕는 하늘의 능력을 얻게 한다.

 

만일 믿는이가 이 휴거의 영을 얻었다면, 다른 말로 해서 그의 영이 휴거의 상태에 처해 있다면 우리는 그 신자가 더욱 하늘에 속하게 됨을 보게 되고, 하늘로 가는 길이 죽음을 통해야 하는 과거 그의 생각과 다르다는 것을 볼 것이다.

 

많은 경우 믿는이가 영적인 일을 하고 있을 때에 믿는이는 많은 기대와 계획을 가지고 있고 성령과 지혜와 능력으로 충만하며 하나님이 그를 크게 쓰실 것이라는 믿음도 있고 그의 사역이 얼마 안 가서 열매를 맺을듯한 발전한 상태에 있게 되는데, 바로 이때 하나님의 제동기(制動機)가 작동하여 모든 일을 그만 멈추고 다른 길을 갈 준비를 하라고 하는 것을 체험한다. 이것은 사람을 놀라게 할만 한 일이다. 『왜 그래야 합니까? 제 능력은 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까? 내가 얻은 놀라운 지식도 사람을 도와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무엇 때문에 모든 것이 닫혀져야 하고 죽고 냉냉해져야 합니까?』.

 

이러한 인도 가운데서 믿는이는 하나님의 목적이 그로 하여금 다른 길을 취하게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전에는 그 길이 전진하는 것이었으나 지금은 승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일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언제라도 일은 종식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때에도 하나님은 환경-핍박, 반대, 무엇을 박탈하는 일 등-을 사용하여 그들의 세상적인 일을 좋은 것으로 여기지 않고 그들이 휴거의 영을 갖기 원하심을 알리고자 하신다. 지금 주님은 그분의 자녀의 진로를 바꾸고자 하신다. 하나님의 많은 자녀들은 아직도 「가장 좋고 진보된 일」보다 더 좋은 것은 휴거의 영임을 모른다.

 

이 휴거의 영은 결과가 없는 것이 아니다. 이 영을 얻기 전에 믿는이의 체험은 수시로 변한다. 만일 믿는이가 영 안에서 휴거의 간증을 갖고 자신의 휴거에 대하여 확고한 믿음도 있으며 생명과 일에 있어서 휴거의 영에 합당한 행위를 가졌다면 휴거의 영은 그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도록 예비되게 할 것이다. 이러한 예비는 외적인 것들을 바로잡아주는 것만이 아니라 믿는이의 영과 혼과 몸이 온전히 주님을 모셔오기에 예비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는이는 휴거의 영을 얻고 보존하는 법을 지시해 달라고 성령께 간구해야 한다. 믿는이는 휴거의 영을 얻도록 방해하는 모든 것들을 제하기를 원해야 하고 이에 대한 간구와 바람과 믿음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어디서 실패했는지를 알기 위해서 항상 우리의 생명과 일을 휴거의 영에 맞추어 놓아야 한다. 이 영을 어느 때에 잃었고 어떻게 회복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승리할 수 있도록 우리는 세상 일이 우리의 영적 생명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기도를 통해 인식해야 한다.

 

한번 휴거의 영을 얻은 후에 믿는이는 그것을 아주 쉽게 잃어버리게 된다. 이것은 그가 이 단계의 생명 안에서는 대개 어떤 특별한 기도와 일을 통해서만이 하늘에 속한 지위와 가장 현명한 안목을 보존할 수 있음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항상 이런 영을 유지할 수 있는지에 대해 성령의 가르침을 구해야 한다. 이런 기도의 결과는 대개 믿는이들이 『위엣 것을 생각하는 데』(골 3:2)로 이끌려 진다. 이것이 휴거의 영을 보전하는 조건 중에 하나이다.

 

믿는이가 천당의 문입구에 서 있고 매순간 휴거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는 마땅히 하늘의 흰옷과 일을 택해야 한다. 왜냐하면 다음 일분 내에 당신이 하늘로 부르심을 받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소망은 우리로 땅의 것들과 끊어지고 하늘과 연결하게 한다.

 

비록 현재 하나님이 믿는이에게 그가 전심으로 들림받는 것을 갈망하기 원하지만 이것이 그가 자신의 들림받는 것만 관심하고 하나님이 분부하신 바 그가 땅에서 해야 할 마지막 단계의 일을 잊어버리고 사람들의 필요를 돌보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단지 하나님은 그가 하나님이 주신 일로 인해 그의 휴거를 저지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는 생활에서나 일에서 항상 「하늘의 매력」이 「땅의 매력」보다 더 낫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믿는이는 주의 일을 위해 살뿐 아니라 주의 데려감을 위해 살기를 배워야 한다.

 

우리의 영이 날마다 높이 올려지고 주님의 재림을 앙망하기 원한다. 우리가 「세속적인 것」을 원치 않을 뿐 아니라「세상에 있는 것」도 싫어할 정도로 세상적인 것들이 우리에게 아무런 매력이 없기 바란다. 우리가 일찍 주와 함께 있을 수 있도록 우리의 영이 매일매일 하늘을 향해 솟아 오르기 원한다. 세상의 가장 좋은 일에 의해서도 우리 마음이 나누어지지 않도록 우리가 위엣 것들을 전심으로 생각하기 바란다. 오늘 이후로 우리가 진실로 영 안에서와 이해 속에서 『주 예수여 어서오시옵소서』라고 간절히 구하기 바란다.


워치만 니
[영에 속한 사람, 제25장 영의 정상적인 상태, 한국복음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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