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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내용은 지방 교회측의 신학잡지인 ‘확증과 비평’(A&C) 1996년 7월호에 실린 케리 로비쇼우의 논문인 “…that we might be made God”(21-31쪽)를 번역한 것입니다. 아래 번역은 영어 원문이 익숙하지 않은 평범한 한국어 독자들이 신화관련 주제에 대해 바로 이해하도록 돕기 위한 목적으로 비공식적으로 이뤄진 것임을 밝혀 둡니다. 따라서 이 주제에 대한 원 저자의 주장을 좀더 정확히 알고 싶은 분들은 반드시 영어 원문을 확인하여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원출처: https://www.affcrit.com/pdfs/1996/03/96_03_a3.pdf ).
“…우리가 하나님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케리 로비쇼우
4세기 때부터 전해 오는 아타나시우스(Athanasius)의 위 경구(警句)1는 수세기에 걸쳐 그의 독자들 가운데 적지 않은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그의 글에 대한 반응은 크게 기뻐하는 것부터 매우 애통해 하는 것까지 다양했다. 여러 세대에 걸쳐 그리스도인들이 고수한 정통 신앙의 다양한 기준과 비교해 볼 때, 아타나시우스의 두드러진 선언은 일부에게는 기독교 신앙의 완벽한 본으로 여겨졌고, 다른 이들에 의해서는 기독교 이단의 한 예로 여겨져 왔다. 많은 이들은 그의 진술이 니케아 정통 보수자들의 사상 및 글과 일치한다고 본다. 다른 이들은 삼일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인격, 즉 우리가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바로 그 문제에 관한 통념을 확립하는 데 기여한 필자가 이 같은 말을 했다는 사실에 당혹스러워 한다.
공정하게 말하자면 아타나시우스가 “그분이 인간이 되심으로 우리가 신성하게 된다.” 라고 한 말을 완화되게 해석함으로 이 걸림돌을 적당히 피해가는 이들도 있다. 물론 이 방법에 의해 두려움은 확실히 완화되지만, 아나타시우스의 글들과 그와 동일 시대의 글들을 더 읽어보면 많은 경우 이 방법이 통하지 않음을 보게 된다.2 신학적으로 소위 신화(theosis 또는 deification)에 관한 이러한 초기 글들은 그 자체의 가치로 평가해 볼 때 분명 실제로 그것들이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는 바로 그대로를 의미하며, 초기 교회의 많은 이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사람을 하나님으로 만드는 그분의 역사라고 보았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한다. 자로슬라브 펠리칸(Jaroslave Pelikan)은 “헬라 교부의 전통, 특히 그 신비한 형태에 따르면, 신화가 이 구원하는 지식, 죄의 용서, 죽음으로부터의 구출의 최종 목표요 결과였음.”(155)을 확증한다. 4세기와 5세기에 토론되었던 구원과 성령의 관계에 관해 펠리칸은 다른 곳에서 “그러나 구원은 단지 생명주는 것만이 아니라 신화이다.”(216)라고 간략하게 정의한다. 펠리칸이 같은 책의 색인에서 “신화”라는 표제 아래서 “구원을 보시오” 라고 한 것도 흥미로운 사실이다.(384)
다수의 개신교 신학자들은 초기 교회의 신화 교리를 중요한 성경 진리로 보기 보다는 헬레니즘의 잔존물 정도로 일축하기 쉬운 듯 하다. 하르낙(Harnack)이 신화 교리를 이교도적이고 고대 그리스적이라고 규정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또한 성경 학자들이 인간이 하나님이 된다는 개념을 즉석에서 비성서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일도 흔하다. 예를 들어 버터워트(G.W. Butterworth)는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의 신화에 관한 글에 대해 “사람이 이 세상에서 신으로 존재한다거나 다음 세상에 신이 된다는 것을 희미하게라도 암시하는 곳은 신 구약을 통틀어 한 군데도 찾을 수 없다.”(163)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교를 거세게 비난하면서 신화 교리에 대해 쉽게 이야기하는 초기 교회 저자들의 태도를 보면, 그들이 완전히 이교도적이고 고대 그리스적이고 성경의 의도와 동떨어져 있었다고 가정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 오히려 초기 교회는 신화를 이교도의 신화 교리와는 뚜렷하게 구분된 성경적이고 기독교적인 개념으로 보았던 것같다.
신화 교리는 아마도 우리가 기독교의 유산을 받아들이고 감상하는데 있어서 얼마나 선택적인가를 보여주는 가장 좋은 예일 것이다. 근대의 믿는 이로서 우리가 초기 교회, 특히 4세기와 5세기의 가르침을 고려할 때 우리는 성경에 제시된 신성한 진리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 무엇이 주목할 만한지, 무엇이 적합한지를 고르고 선택한다. 물론 이것은 전적으로 타당하다. 진리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교회가 실로 진보해 왔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과거의 결함을 피할 수 있게 한다. 우리는 대부분 2세기부터 5세기 동안 신성한 삼일성과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관한 많은 진리가 제공되었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 기간 동안 극소수의 주요 진리가 믿는 이들에 의해 발견되어 위대한 자산들에게 더해졌다. 물론 의심할 바 없이 그 이후의 교사들이 삼일성과 그리스도론에 관한 몇가지 개념을 잘 다듬었다. 그러나 이것은 항상 2세기와 5세기 사이에 나온 가르침들의 기본틀 아래 다듬어져 왔다. 이러한 진리의 확고함을 보면 그 영께서 교부들을 더욱 완전한 이해 안으로 인도하신 듯 하다. 이것은 주님이 요한복음 16장 13절에서 예언하신 것과 같다. “그러나 실재의 영께서 오시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모든 실재 안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스스로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듣는 것만 말씀하시며, 장차 올 일들을 여러분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2세기와 5세기 사이의 교부들의 주된 관심사는 하나님의 삼일성과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관해 이단들로부터 교회를 보존하는 것이었지만, 이것이 그들이 믿고 가르쳤던 것의 전부는 아니었다. 그들의 글의 대부분은 교리상으로 비교적 논란이 적은 그리스도인의 생활 속의 영성과 실행 방면 등을 다뤘다. 대체로 이 문제들은 지난 몇 세기 동안 개신교에 의해 무시되고 일부는 경멸되어 왔다. 물론 이렇게 일부 문제들을 무시하는 데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초기 교회의 일부 실행들은 필수적인 신앙보다는 미신을 지향했기 때문이다. 한 예로 초기 실행에는 십자 성호를 긋는 것(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상징하는 손짓으로 자신을 헌신함)이 있다. 이 실행은 천주교와 동방 정교회에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행해지고 있다. 근대 개신교 신자의 대부분은 이러한 실행이 전적으로 미신적이고 불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교부들의 글을 읽을 때 서슴없이 그 가치를 묵살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저술들에서 우리는 삼일성과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관한 필수적인 가르침부터 사람의 감상과 미신을 망라하는 폭넓은 개념을 발견하게 된다. 문제는 현대 믿는 이들인 우리가 이 중 어디까지를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에 대한 해답은 물론 진리에 대한 우리의 이해 정도에 달려있다. 개신교는 삼일성과 그리스도론을 합당하게 정의하는 교리의 끝에 허용 한계점을 둔다. 천주교 계열은 더 넓은 범위를 허용하는 반면, 동방 정교는 거의 모든 범위를 포함한다. 이것이 실지로 의미하는 것은 개신교인들은 대체로 교부들의 글에서 삼일성과 그리스도론에 관한 위대한 가르침만 받아들이고 다른 내용은 거부한다는 것이다.
이 글은 현대 개신교에서는 거절되었지만 고대 교회의 첫 5세기동안 기꺼이 받아들여진 문제 중 하나를 다룬다. 하지만 이것은 사소한 영적 실행에 관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인의 구원이 무엇인지에 관한 초대 교회의 기본적인 이해를 다룬 것이다. 이 문제는 근대 개신교에 의해 철저히 거절당해 왔으며, 무슨 의미인지 조심스럽게 그 뜻을 한정하기 전에는 이야기를 꺼내지도 못한다. 그 후에도 오해받거나 더 나쁘게는 뜻이 와전되는 거대한 위험 요소가 수반된다. (여기에도 이러한 위험이 감수되었다!) 그러나 고대 교회에서는 용어 자체가 의미하듯이3 신화는 사람의 구원의 최종 목표로 여겨졌다.
물론 초기 교회가 구원을 신화로 보았다는 것을 입증하는 시도에 있어 우리는 이와 동시에 구원에 관한 현대의 유력한 견해가 성경의 신성한 계시에 나타난 진리에는 못 미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하고자 한다. 우리는 현 시대에 사는 우리가 무엇인가를 잃어버렸다고 단언한다. 역사 속의 나중 단계에 의해 진리가 더 진보해야 할 때, 우리는 최소한 구원의 내용과 목표에 관한 이해에 있어 보다 원시적이다. 인간이 신화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을 막고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을 나타내는 동안, 우리는 하나님 자신이 설계하신 것에 저항하고 그분의 구원의 완전한 범위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신화에 관한 초기 교회의 가르침을 주의해서 살펴봄으로써 최소한 함축적으로라도 이 진술을 증명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신화 라는 용어의 자격조건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 신화라는 용어를 조건 없이 사용할 수 있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불행히도 신화는 일반적으로 전통적인 기독교인들에게 불쾌감을 주는 의미를 수반한다. 신화에 대한 합당한 이해에 포함되지 않는 이러한 의미들과 유감스럽게도 결부되었다. 그 중 일부는 성경에서 비롯되고 초기 교회에 의해 받아들여진 의미로서 완전히 용인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 개신교의 잘못된 편견 때문에 배척되었다. 그러므로 신화의 의미에 조건을 두는 것은 그릇된 관념을 배제하고 잘못된 편견을 조정하기 위함이다.
이교적인 의미들
사람들이 신화라는 용어를 접할 때 가장 흔히 떠올리는 것은 고대 이교도가 행했던 것처럼 사람을 신의 자격으로 높이는 관행일 것이다. 역사적으로 이것은 로마 제국에서 아주 흔했다. 황제들을 신으로 대하는 경외심이 다국적이고 다종교적인 로마 제국을 하나로 결합했다. 이러한 황제 숭배는 두 무리에 의해 단호히 거절 당했는데, 바로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이다. 이것은 분명 한 분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절대적인 믿음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신화에 대한 반응은 또한 신격의 의미에 관한 특별한 관점들에서도 나타난다. 이방 종교가 신화를 자신의 종교 체제로 받아들이는 것은 훨씬 용이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들을 단지 인간보다 조금 우월한 존재로 보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방 신들은 사람의 형상대로 만들어졌고 다소 타락했으며 인간이 겪는 악덕을 동일하게 가졌던 것이다. 고대 시대는 이방 신들의 육신적인 이야기의 드라마와 음모로 가득 찼다. 터툴리안(주후 220년 사망)은 사신(邪神)의 수치스럽고 무모한 장난을 나열하고 이렇게 지적했다. “만일 이러한 것들이 사실이라면 공개되지 말아야 하고, 사실이 아니라면 종교에 큰 경의를 표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날조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30) 이러한 수준에서 신이 되는 것은 인간 존재에서 진보하는 것이나 인류의 비약적 발전이라고 볼 수 없다. 이와 달리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완벽하시며 천지만물 위에 계시고 사람의 모든 결점들을 초월하신다. 이방인의 생각에 가장 고결한 사람은 아주 쉽게 신이 될 자격을 갖추겠지만, 유대인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우리의 의로운 행위는 다 더러운 옷”(사 64:6)과 같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람 특히 구원받지 않은 사람 사이의 간격은 로마 시대의 황제 숭배 이교가 제안했던 것처럼 그렇게 쉽게 메워질 수 없다.
더 나아가 고대 이교도들은 단지 선언만으로 신이 되었다. 이 과정은 헬라어로 아포테오시스(apotheosis), 라틴어로 콘세크라티오(consecratio)라고 불렸고, 일반적으로 황제가 죽은 후에 일어났다. 그러나 신격화된 지도자가 어떻게 간주되었는가를 제외하고는 어떤 식으로 바뀌었는지에 대해 아무도 믿지 않았다. 이전에는 황제로서 존경 받았고, 이제는 신으로서 숭배 받았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그는 여전히 사람이었다. 생명과 본성에 있어서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것은 마치 근대 대통령의 취임식과 같다. 이전에 그는 직무가 없었고 직무의 존엄성과 경의에 맞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취임식을 하는 그 순간 대통령이 된다. 사람 자체는 전혀 변하지 않지만 그는 신분 상승으로 인해 시민들의 경의을 얻게 된다. 우리가 아래에서 보게 되겠지만 이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구속되고 거듭나고 변화된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자격을 얻을 뿐 아니라 그 본질적인 실재를 가져오는 생명과 본성에 있어서의 변화를 체험하는 것과는 상반된다.
하나님 자신에 대한 전통적인 오해
초기 교회의 기독교인들은 이교도적인 신화 교리는 거부했지만 신화의 합당한 이해는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면 우리는 이러한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초기 교회는 어떻게 존재와 본질에 있어 사람을 초월하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사람을 최종적으로 신화하는 구원을 희망할 수 있었는가? 바꾸어 말하면 초기 교회는 어떻게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큰 간격이 우리의 구원으로 좁아질 수 있다고 믿었는가? 그러나 이 딜레마는 사실상 하나님에 관한 우리의 전통적인 개념에서 비롯된 그릇된 것이다. 사람의 신화를 하나의 결정적인 가정(假定), 즉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사람은 사람이며, 이 둘 사이에는 극복할 수 없는 거리가 존재한다는 전제로 접근하기 때문에 이러한 딜레마를 갖게 된다. 유대인과 현대 기독교인 가운데 압도적인 개념은 하나님은 모든 창조물을 초월하시고 그분의 초월성은 사람이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공유하지 못하도록 막는다는 것이다. 신학 용어로는 이것을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 (incommunicable) 이라고 한다. 즉, 하나님은 그분의 존재와 본질을 자신 외의 누구와도 공유하지 않으신다는 뜻이다. 바울이 디모데 전서 6장 16절에서 “오직 하나님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 이라고 하는 것을 보아도 이것은 분명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에 관한 진리의 전부는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실존에 공유할 수 있는 방면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가장 명백한 증거는 그분의 육체되심이며, 이로 인해 하나님은 사람이 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는 두 방면이 있으시다. 한 방면은 그분의 만유 위의 초월성과 접근 불가성과 비공유성이고, 다른 방면은 사람에게 오시고 그분 자신을 우리 인류와 연결하심으로 그분의 크신 사랑을 나타내어 보이신 것이다. 초기 교회 교부들의 이해에 따르면, 사람이 하나님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공유적 속성의 미덕에 의한 것이다.
많은 근대 기독교 교사들이 하나님의 이러한 구별을 부정하는 반면 초기 교회는 이것을 인정하고 가르쳤다. 블라디미르 로스키(Vladimir Lossky)는 이러한 구별이 심지어 초대 교회의 교부들을 포함한 그들의 글 대부분에 나타난다고 했다(71). 로스키가 자신의 주장을 뒷바침하기 위해 인용하는 초대 교부들로는 아테나고라스(Athenagoras), 바질(Basil), 그레고리 나지안젠(Gregory Nazianzen), 존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 위(僞)디오니시우스(Pseudo-Dyonisius) 등이 있다(71-72). 초기 교회는 하나님은 비공유적 속성만 있으시다는 전제 아래서 우리의 구원을 보지 않았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 이그나티우스(Ignatius)(주후 107년 사망)가 말한 것과 같이 그들에게 있어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도달하고 하나님께 참여하는데 문제가 없었다. 이러한 언어는 우리의 구원의 목표를 묘사하는 데 있어서 자주 사용되었다. 초기 교회에게는 하나님이 그분의 창조물과 떨어져 있는 동시에 연결될 수 있었다. 그분의 비공유적 속성을 통해 유일하고 접근할 수 없는 하나님으로서의 구분을 유지하시고, 그분의 공유적 속성을 통해 그분 자신을 사람과 연결하고 사람을 그분 자신과 연결하고자 하는 그분의 경륜을 표명하신다. 육체되심은 이 경륜의 첫번째 단계였고, 사람의 신화는 최종 완성이 된다.
우리가 하나님은 우리가 멸망으로부터 구원받는 그 이상을 의도하신다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한다면, 하나님에 관한 그러한 구분은 필수적이다. 구원이 단지 이신득의(以信得義) 뿐이라면 하나님은 사람에게 공유되실 수 없고 가까이할 수 없어도 괜찮다.(최종 분석에서는 그러한 제한된 구원의 관점조차도 하나님이 사람에게 오시고 사람과 연결되시는 그분의 공유적 속성의 어떤 것이 요구되지만). 초기 교회의 구원에 관한 평가는 이신득의 그 이상이었다. 그것은 우리를 하나님과의 연합 안으로 이끌고 우리를 그분과 함께하는 영원한 차원으로 높이는 구원이었다. 구원에 관한 이러한 관점은 고대 교회에 반향하는 우리가 하나님은 그분의 신격에 있어서 유일하시며 홀로 우리의 경배의 대상이 되시며, 하나님은 그분 자신의 존재와 실존에 의해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이 홀로 하나님이신 그분과 연합하고 참여함을 통해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고 고백하는 한 전적으로 합당하다.
유감스럽게도 많은 현대 기독교인들은 구원에 관해 초기 교회가 가르쳤던 것보다 한참 뒤떨어진 것으로 만족한다. 안타깝게도 어떤 기독교인들은 사람의 신화를 포함하는 구원에 관한 보다 깊은 관점을 조롱하고 반대한다. 이러한 반대의 근거를 요구하면 그들은 최종적으로 하나님은 오직 비공유적 속성을 가지시며 인간의 신화에 의해 성역이 침범되지 않으신다고 호소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방향에서의 위대한 첫 걸음이신 육체되심, 즉 그분이 자신의 광대한 공유적 속성을 전람하시고 사람과 멀리 떨어져 홀로 존재하는 것이 그분의 의도가 아니심을 나타내 보이신 것을 무시한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보호해 드리길 소원하는 것같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온전하심은 그분의 사람이 되심 안에서 더 큰 위험에 처해졌다. 신약은 육체되심을 비우심(빌2:7)이라고 말하고, 그리스도의 육체 안에서 죽으심을 그분의 굴욕(행 8:33)이라고 말한다. 사람이 하나님이 되는 것은 단지 사람이 영원한 수준으로 올려지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 안에서 영화롭게 되심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축소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확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공유적인 방면이 허락하는 한, 그리고 그분의 신격의 유일함에 대한 합당한 존중이 더해졌을 때 사람의 신화는 덜 심각한 “모독”이다. 우리가 그분의 신격의 비공유성을 존중하고 유일한 하나님으로서 그분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경배를 돌린다면, 그분을 불쾌하게 하지 않을까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반면에 우리가 그분의 구원의 완전한 공급을 무시하고 그분의 공유적 속성을 충만히 누리는 데 실패한다면 그분의 은혜와 경륜 안에서 그분을 모욕할 수 있다.
우리의 이해와 사용
하나님의 구원이 사람의 신화로 최종 완결된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이려면 먼저 “우리가 어떤 식으로 하나님이 되는가?”라는 질문을 해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우리가 관찰해 온 바대로 하나님 안에서의 비공유적 속성과 공유적 속성의 구분을 존중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 때문에 사람은 결코 신격에는 참여할 수 없다. 사람은 결코 삼일성의 네번째 인격이 될 수 없고, 결코 신으로 경배 받을 수 없다. 사람은 결코 창조물로서의 속성을 잃어버리지 않기 때문에 결코 창조자가 될 수 없다. 사람은 영원토록 사람의 형상과 사람의 본성을 지니기 때문에 결코 편재할 수 없다. 사람은 창조시 부여받은 제한된 정신적 기능을 영원히 가질 것이고, 결코 전지하게 될 수 없다. 하나님은 창조 안과 밖 모두에서 하나님이시지만 사람은 기껏해야 창조의 제한 안에서 하나님과의 연결을 통해서만 하나님이 된다. 유감스럽게도 신화 개념을 수용하는 많은 현대 교사들은 이러한 전제들을 무시한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이 하나님 됨은 모든 점에서 사람의 창조물로서의 위치에 의해 조절되고 제한될 것이다. 그리고 사실상 창조시의 사람의 어떠함은 사람이 하나님이 된다는 개념을 가장 크게 뒷받침한다. 창세기 1장의 창조 기록을 보면 사람을 제외한 모든 생물은 “그 종류대로” 창조되었다(11절, 12절, 21절, 24절, 25절).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에는 다른 종들과는 구분되는 특징을 가진 생물의 종(種)들이 있다. 그러나 사람의 창조가 다시 언급되었을 때 사람은 “그 종류대로” 창조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오히려 “우리[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 1:26)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 문장을 창조의 다른 기록에서 말하는 그 종류대로와 연결해서 이해해 보았을 때, 같은 개념을 보다 섬세하고 자세히 언급한 것으로 이해한다.6 그러므로 이 문장을 통해 사람은 하나님의 종류대로 창조되었다고 이해한다. 사도 바울도 아테네의 아레오파고스에게 “하나님의 족속(헬라어 제노스, genos, ‘종; 종류’)” (행 17:29)이라는 유사한 말을 했다.
물론 우리도 인류의 슬픈 타락의 역사를 알고 있다. 그로 인해 인류는 하나님의 모양의 상당 부분을 상실했다. 타락으로 인해 사람은 분류하기 어려워졌다. 사람이 어떤 “종류”인지 알기 어렵다. 사람은 분명 다른 생물보다 우월하지만 그 중 많은 생물과 아주 비슷해 보인다. 다른 한편으로 사람은 어느 정도는 하나님과 같으나 분명 하나님보다 많이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하나님의 경륜을 통해 하나님이 되도록 그러한 방식으로 창조되었다. 타락 이전의 아담은 신화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으로 창조되지 않고 다만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을 받을 수 있는 역량을 가졌을 뿐이다. 타락은 우리 사람이 왜 창조되었는지를 깨닫는 것을 지연시켰고 구속을 필요로 하는 부정적인 요소를 가져왔다.
사람의 신화를 위한 하나님의 경륜
그리스도인 대부분이 구속을 하나님의 구원의 주된 항목이라고 이해하는 듯하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사람을 타락과 타락이 유발시킨 그분의 격노에서 구원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의 구원을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그리스도의 육체되심의 목적은 완전한 구속을 성취하기 위해 완전한 희생 제물을 얻도록 완전한 사람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맞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완전한 내용은 아니다. 개신교의 종교 개혁은 기독교가 그리스도의 구속의 필요성을 보도록 눈을 열어 주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종교 개혁은 많은 방면에서 기독교를 근시안적으로 만들어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견해를 너무 좁게 만들어 단지 구속의 방면만을 감사하게 했다. 하나님의 구원을 사람의 신화로 보았던 초기 교회는 이처럼 제한적인 구원의 정의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아타나시우스가 ‘하나님이 사람 되심은 사람으로 하나님 되게 하려는 것이다’ 라고 했을 때 그는 분명히 육체되심의 목적은 곧 사람의 신화라고 보았다. 물론 그가 구원의 구속방면의 가치를 무시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에게나 교부들에게 구속은 구원의 목적이 아니라 끝을 향한 하나의 과정일 뿐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현대 개신교보다 더 폭넓게 보아야 한다. 개신교는 구원과 구속을 사실상 같다고 보고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이 구원을 이루기 위한 주요 수단으로 보는 반면,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이 이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것이라고 여길 수 밖에 없다. 즉, 구원은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과 표현에 참여하여 그분의 아들들이 되고 그분과 같은 종류가 되는 것이다. 구원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물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구속의 역사를 폄하하지 않지만, 그리스도가 거치신 과정 중 다른 두 단계인 그분의 육체 되심과 부활에 더 초점을 맞춘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은 우리의 타락으로 인해 생긴 부정적인 요소들인 우리의 죄들과 마귀와 세상과 옛사람과 옛창조와 자아를 다루는데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긍정적인 방면은 그분의 육체되심과 부활을 통해 확고해진다. 육체 되심을 통해 그리스도는 우리가 되셨고 부활을 통해 우리는 그분의 생명으로 거듭나고, 그분의 본성을 소유하고, 그분의 영원한 표현을 위해 그분이 된다. 육체 되심과 부활을 통해 그리스도는 두 가지 위대한 과정을 거치셨다. 육체 되심을 통해 그분은 여전히 하나님으로 존재하시면서 동시에 사람이 되셨고, 이로 인해 신성을 인성 안으로 이끌어 오셨다(요 1:1, 14). 부활을 통해 그분은 여전히 사람이시면서 그분의 인성 안에서 하나님으로 선포되심으로 인성을 신성 안으로 이끌어 오셨다(롬 1:3-4). 하나님께서 사람을 완전히 구원하시고 영원히 표현되시기 위해 그분이 신성한 삼일성 안에서 움직이시는 것이 초기 교회의 언어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경륜이었다.
육체 되심—신성을 인성 안으로 이끌어 오심
육체 되심으로 신성이 인성 안으로 이끌어졌고 하나님은 사람이 공유할 수 있는 분이 되셨다. 이제 하나님과 사람은 연결되어 신성과 인성이 서로 감소됨이 없이 동시에 공존하는 유일한 한 사람을 산출했다.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인 동시에 온전한 사람이시다. 육체 되심의 이유는 복합적이다. 그분은 자신의 인간 생활 동안 은혜와 실재를 나타내셨다(요1:14). 그분은 사람이 배운 적이 없고 배울 수도 없었던 공과인 순종을 배우셨다(히 5:8). 또한 그분은 그분의 믿는 이들에게 생활의 본이 되셨다(벧전 2:21, 요13:15, 마11:29). 그분은 인간 유혹의 시험을 통과하셨지만 죄에 굴복하지 않으셨다(히4:15). 이런 것들을 통해 그분은 사람을 위해 죽으시기에 자격이 있는 분이 되셨다. 그분이 사람으로 오심으로 그리스도는 잃었던 것을 찾아 구원하시고자 하셨다(눅19:10). 이 구원은 물론 우리의 구속을 포함한다. 그분은 죄를 위한 완전한 희생제물이 되심으로(요1:29, 히9:26, 벧전1:19) 우리를 위한 영원한 구속을 성취하시고자 했다. 그러므로 육체 되심 안에서 그리스도는 만물을 대신하여 죽음을 맛 보시고(2:9) 죽음을 통해 죽음을 멸망시키셨다(2:14; 딤후1:10; 고전15:54-56, 26). 이 모든 것은 신성이 인성 안으로 이끌어질 것을 요구하였다. 그것들은 주로 예수님의 인성에 의존한 것이었지만, 그분의 신성으로 인해 영원한 효능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단지 우리의 죄의 문제만을 해결하는 것만으로는 우리를 타락한 상태에서 온전히 회복할 수 없다. 사람이 타락했을 때 그는 생명나무의 길을 잃었다(창2:9, 3:24). 생명 나무는 사람의 창조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사람에게 생명이 되시는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다. 히브리서 2장 10절에서 11절은 이렇게 말한다.
만물은 하나님을 위하여 존재하고 또 하나님을 통하여 존재하므로, 하나님께서 많은 아들들을 영광안으로 이끄시려고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시는 것은 합당한 것입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분과 거룩하게 되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한 분에게서 났으므로, 예수님께서 그들을 형제들이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여기서 그리스도의 육체되심은 사람이 거룩하게 되는 것과 영화롭게 되는 것보다 훨씬 높은 수준으로 여겨졌다. 사람을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는 분명 그리스도가 먼저 거룩하셔야 했다. 이것이 4세기에 아리우스주의에 반대했던 아타나시우스와 다른 이들의 주된 주장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분의 신성한 본성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기 위해 그리스도는 또한 사람이셔야만 했다. 육체 되심을 통해 그리스도는 거룩케 하시는 근원인 신성을 거룩케 하시는 대상인 인성 안으로 이끌어 오셨다.
신화와 동의어인 거룩케 하심은 믿는 이들이 죄인들로부터 하나님의 아들들로의 변화를 경험하는 본성의 변화에 중점을 둔다. 하나님의 본성의 속성인 거룩은 하나님을 그 외의 다른 모든 것들로부터 분별함이라고 정의된다. 하나님 한 분만이 거룩하시다(계15:4). 이렇게 말함으로 우리는 그분이 모든 것 가운데 유일하시고 모든 것들로부터 분별되신다고 선언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룩케 됨, 즉 거룩하게 만들어질 때(엡1:4, 골1:22) 우리는 다른 모든 것에서 따로 계시는 하나님이신 그분의 거룩에 참여한다. 이 참여가 곧 우리의 신화이다.
히브리서 2장 10절과 11절도 거룩하게 됨을 믿는 이들의 아들의 자격과 동일시한다. 10절에서 말하는 영광 안으로 이끌어진 아들들이 바로 11절에서 말하는 거룩하게 되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동일시 또한 신화를 암시한다. 이후에 보겠지만, 우리가 하나님이 되는 것의 한 방면은 우리가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이다. 그분의 아들들로서 우리는 개인적으로(혹은 보다 전문적으로 말해 본체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아니지만, 종류에 따르면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이다. 모든 생물의 후손들은 인격에 있어서는 그들의 아비들과 동일하지 않지만, 종류에 있어서는 같다. 히브리서 2장에 따르면 우리는 거룩케됨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들의 영광 안으로 이끌려지고 있다. 이것을 위해서 그리스도는 육체 되심으로 신성을 인성 안으로 가져오셨다. 그리스도의 육체 되심의 최고의 목적은 바로 이 거룩케되심 즉 신화이다.
부활—인성이 신성 안으로 이끌려짐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이유 또한 복합적이다. 유감스럽게도 개신교는 육체되심과 마찬가지로 부활에 관해서도 편협한 관점을 갖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죄들을 위한 그분의 희생의 효력을 입증하는 것과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의롭게 되는 기초로 이해된다. 로마서 4장 25절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우리의 허물 때문에 넘겨지셨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다.” 물론 그리스도의 부활에 이런 법리적인 목적이 있지만, 법리적인 방면이 부활의 목표의 전부는 아니다. 의롭게 됨은 그 정의로 보자면 법리적인 과정이긴 하지만 로마서 5장 18절은 “생명의 의롭게 됨”이라고 말한다. 헨리 알포드(Henry Alford)는 이것을 “생명을 주는, 혹은 생명으로 이끄는 의롭게 됨”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단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받아들여지는 것의 증거로만 보는 것은 확실히 너무 좁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신성한 생명의 영역 안에 있는 유기적인 문제이다. 이것은 그분의 부활의 본성과 관계가 있다. 부활의 효력 또한 사람의 신화를 이루어내는 유기적인 문제이다. 그분의 부활을 통해 그리스도께서는 인성을 신성 안으로 이끌어 오셨다. 이것이 우리가 사려깊은 관심을 두어야 할 부활에 대한 더 높은 관점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효과를 두 가지 관점에서 고려해 보아야 한다. 즉 그것이 그분 자신께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와 그분의 믿는 이들인 우리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가 언급한 것처럼 그리스도는 완전하신 하나님과 온전하신 사람으로서 우주 가운데 유일한 분이다. 신격에 있어서 그분은 독생자로 불리신다(요1:18, 3:16, 3:18, 요일4:9). 이것은 그분을 신격에 있어서 아버지와 성령과 구분하는 불변의 칭호이며, 다른 누구와도 나눈 적이 있거나 나눌 수 없는 것이다. 누구도 그리스도의 독생자의 신분에 참여할 수 없다. 인성에 있어서 그분은 사람의 아들이라고 불리신다(마12:8, 막10:45, 눅9:22, 요3:13, 행7:56, 계14:14). 그분은 온전한 사람이시며 인류를 온전히 대표하신다. 그분이 사람의 아들이 되심으로 그리스도는 자신을 영원히 인류에게 위탁하셨다. 그분은 사람으로서 죽으셨고, 사람으로서 다시 살아나셨고(마17:9), 사람으로서 승천하셨고(요6:62), 사람으로서 보좌에 앉으셨고(마26:64), 사람으로서 영광 안에서 돌아오실 것이고(25:31), 사람으로서 영원히 다스리실 것이다(눅1:31-33). 그리스도는 결코 그분의 인성을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최소한 그분을 믿고 영접한 이들인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과의 연합을 통해 하나님에게 참여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신약의 계시는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를 설명함에 있어서 이보다 더 나아간다. 그리스도는 단지 독생자이실 뿐 아니라 많은 형제들 가운데 맏아들이시다(롬8:29).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의 문제와 그 해결책인 성경 안에 있는 하나의 큰 계시에 직면한다. 그리스도는 신격에 있어서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그러한 분에게 형제가 있을 수 없다. ‘독생’이라는 말은 그분이 홀로 태어나셨고, 그분 외에 다른 아들들이 없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리스도를 많은 형제들 중 하나님의 맏아들이라고 부른다. 그분이 부활하신 날 아침에 그리스도는 그분의 제자들이 이제는 형제들이며, 그분의 아버지가 이제는 그들의 아버지라고 선포하셨다. 이것을 통해 그분은 자기를 믿는 자는 이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셨다(갈3:26, 요1:12, 롬8:14).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있다. 다른 형제가 없고 다른 누구와도 아들의 자격을 공유할 수 없는 독생자께서 어떻게 많은 형제가 있고 그들과 아들의 자격을 공유하는 맏아들이실 수 있는가? 그 해답은 최종적으로 사람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에 달려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 전에는 오직 그분 안의 신성 부분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수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그분의 인성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다. 그분의 신성의 특성들이 사람이신 그분께 귀속되고, 그분의 인성의 특성들이 하나님이신 그분께 귀속될 수 있다는 것을 신학 용어로는 속성교류 (communicatio idiomatum)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귀속들은 서술의 수준일 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그분의 신성에서도 실재로 죽으셨다고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분은 신성에서는 본질적으로 영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육체되심으로 더해진 인성의 속성을 통해 죽음의 과정을 통과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말할 수 있다(행20:28). 그러나 부활을 통하여 그분의 인성은 “아들화” 되셨다. 그리스도의 인성이 부활을 통해 신화되었다는 개념은 아타나시우스의 글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것이 바로 로마서 1장 3-4절에서 바울이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것입니다. 이 아들은, 육체에 따라 말하자면 다윗의 씨에서 나셨고, 거룩한 영에 따라 말하자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하시어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습니다.” 영원하신 독생자로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실 필요가 전혀 없다. 그분은 영원히 아들이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신 인정되심이 있었다. 이러한 인정되심은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련된다. 사도행전 13장 33절에서 바울은 부활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태어나신 것이라고 선포한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심으로 그분의 자녀인 우리에게 이 약속을 온전히 이루어주셨습니다. 이것은 시편 제 이 편에 기록된 것과도 같습니다. ‘너는 내 아들이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그리스도는 영원히 아들이시다. 이것은 아버지가 아들을 낳기 이전의 하나의 사건이 아닌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영원한 관계를 나타낸다. 아버지는 영원히 아들을 낳고,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구분이 영원히 존재함을 말한다. 그러나 부활은 시간 안의 어느 한 지점이며,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그분의 아들로 낳은 “오늘”이다. 여기에서 낳음은 그리스도의 인성과 관련된다고 볼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의 독생자의 신성 안에 있는 하나님의 신성한 생명과 본성이 그리스도의 인성 안으로 퍼져 인성까지도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였다. 그러므로 오늘날 그리스도는 신성 안에서 하나님의 독생자이시고, 그분의 인성 안에서 영화롭게 되고 신화된 사람의 아들은 하나님의 맏아들이시다.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사람이 하나님이 되는 것에 관해 가장 분명하게 말하는 성경 구절들은 아마도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해 직접적으로 말하는 구절들일 것이다. 믿는 이들의 부활에 관해 바울이 해명한 고린도 전서 15장이 이 문제에 관해 분명하고도 가장 간결한 표현을 제공한다. “마지막 아담은 생명주시는 영이 되셨습니다”(45절). 마지막 아담은 의심할 바 없이 인류의 마지막인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그분은 완전한 의미에서 사람이시다. 생명주시는 영은 하나님 자신으로 이해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만이 생명을 주실 수 있고(요5:21, 6:33, 63, 롬4:17, 고전3:6), 신격 안에 두 영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 구절에서 사람이 하나님이 되는 개념에 대한 더욱 섬세한 표현을 제공한다.
이와 비슷하게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7장에서 예수님과 그 영(the Spirit)이 동일시 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을 사람들이 받을 그 영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아직 영광스럽게 되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 영께서 아직 계시지 않았다(39절). 물론 신격의 제3위격이신 하나님의 영은 영원히 존재해 오셨고, 시간상 그 영께서 “아직 계시지 않은” 때는 없었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사람 예수가 영화롭게 되신 것인 부활을 통해 생겨난 그 영의 방면을 말하는 것이 틀림없다. 우리는 이것을 사람 예수의 신화로 본다. 이를 통해 그분의 인성이 하나님이 되시고, 그 인성은 그분의 신성과 함께 생명주는 영에 투자되고 생명 주시는 영을 통해 (우리와) 소통되신다. 요한복음 6장 또한 비록 덜 분명한 방식이지만 이러한 사상을 포함한다. 53절과 54절에서 주님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는다면, 여러분 속에 생명이 없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었고,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입니다.” 이것은 믿는 이들의 생명의 근원인 그분의 인성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들 중 대부분에게 어려운 말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이것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 “생명을 주시는 분은 그 영이십니다. 육체는 무익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한 말은 영이요 생명입니다”(63절)라고 말씀하셨다. 이로 인해 주님은 그분의 생명을 주는 인성이 그 영을 통해 믿는 이들에게 유용하게 되기를 바라셨다. 우리는 이 안에서 재차 그리스도의 인성의 신화를 본다.
그리스도의 인성의 신화가 그분의 부활이 그분에게 영향을 미친 결과임을 보아 왔듯이, 우리는 이제 믿는 이들의 신화도 그분의 부활이 그들에게 영향을 준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분의 인성이 신화됨을 통해 그분은 신성만이 아니라 인성에서도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다. 이 때문에 그분을 믿는 우리들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신화될 수 있는 것이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믿는 이들에게 영향을 준 관점에서 그것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찬양을 드립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크신 긍휼에 따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일으켜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어 살아있는 소망을 갖도록 하셨으며”(벧전 1:3). 우리는 그분의 부활을 통해 거듭났다. 또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의 증거를 가지게 되었을 뿐 아니라, 그보다 더 중요하게 그분의 부활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우리의 아들의 자격을 단지 입양으로 보지만, 성경은 이것을 하나의 출생이라고 말한다(요1:13, 요일5:1).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다만 한번의 입양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들로 선포되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을 소유함을 통해(요일5:12, 벧후1:4), 진정으로 참되게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됨을 통하여 우리는 신성의 범주 안으로 이끌려졌고, 이러한 점에서 하나님이 되고 신화되었다. 물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점, 즉 그분의 비공유적 신격의 방면에서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인성이 영화롭게 됨과 신화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신 방면에서 보면 우리는 분명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그분은 영화롭게 되고 신화된 하나님의 아들들 중 맏아들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많은 아들들로서 영광으로 이끌려지고 있다(히2:10).
그리스도는 신성에서는 영원히 하나님이셨지만 그분의 인성은 부활 때 하나님으로 인정되셨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분의 신성 안에서의 어떠하심과 신화되고 높여진 인성 안에서의 어떠하심 모두에 있어서 본체론적으로 하나님이시다. 즉 그분만이 하나님 자신의 미덕에 의해 하나님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신다. 그분은 스스로 하나님으로 인식되시고, 그러한 인식을 위해 다른 어떤 것도 필요치 않으시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이들이 하나님이 되는 것을 말할 때, 우리는 다른 문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믿는 이들은 오직 종류 즉 종(種)에서만 하나님이 되며 인격적으로는 아니다. 그리스도는 그분 자신의 하나님 신분에 의해 하나님으로 존재하시나, 믿는 이들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즉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 의존함을 통해서만 하나님이 된다. 그러므로 믿는 이들의 신화에 관한 신약의 용어는 간접적이며 또 그래야만 한다. 비록 신약에서 믿는 이들이 하나님으로 명백하게 불린 곳은 한 군데도 없지만, 그들의 신화의 사실은 믿는 이들이 가진 몇 가지 신분에서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요약하면,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지 법리적인 효과 그 이상이다. 오히려 부활이기에 그것은 주로 생명의 문제이다. 그 첫번째 효과는 그리스도 자신에게 있었다. 즉 그분은 부활을 통해 그리스도의 인성이 그분의 신성한 생명으로 적셔졌고, 그분의 본성은 신화되었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 부활 후에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맏아들이시다. 이러한 분으로서 그분의 부활을 통해 우리를 거듭나게 하심으로 우리를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는 구원의 원형, 창시자가 되셨다(히2:10). 그분의 인성이 하나님의 아들로 신화되신 것과 같이 우리도 하나님의 많은 아들들이 되도록 신화된다.
우리가 하나님인 방식
우리는 앞에서 믿는 이들이 누리는 신분들이 최소한 생명과 본성에 있어서 그들이 하나님이 되는 것을 시사함을 지적해 왔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어떠한 방식으로 하나님이 될 것인지를 정의하기 위해 이것들을 함께 모아야만 한다. 신약이 사람의 신화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지적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 안의 믿는 이들로서 누리는 신분들에 대해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도 이러한 함축적인 의미는 분명하다. (사실상 “그리스도 안의”라는 가장 신비로운 문구가 암시하는 것도 그분이 우리가 되고 우리가 그분이 되게 하기 위하여 우리가 하나님께로 이끌려져 그분과 동일시 되는 것이다.)
먼저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이것은 단지 입양 선언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신성한 출생에 의한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되는 기본적인 수단을 소유한다. 우리가 거듭날 때 받는 신성한 생명 안에는 우리를 하나님으로 만드는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다. 이것이 생명의 원칙이다. 아버지로부터 난 모든 것이 아버지처럼 되도록 자란다. 우리는 하나님께로 난 우리 또한 이와 마찬가지라고 믿는다. 요한일서 3장 2절은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가 장차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분과 같아지리라는 것을 압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분을 그분의 존재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한다. 요한의 사상을 따르면, 하나님과 같게 되는 것의 증거는 하나님을 뵐 수 있는 능력임을 주목하라. 이것은 초대 교회 교부들의 글에서 뚜렷히 나타나는 개념이다. 우리가 보는 만큼 그것이 된다. 물론 육체의 아들이 인격적으로 아버지와 똑같이 되지 않는 것처럼 우리도 인격적으로 하나님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육체의 아들이 아버지와 같은 종류인 것과 같이 우리도 종류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신성한 생명 안에는 신성한 본성이 있고, 신성한 본성을 소유함을 통해 우리는 본성에 있어서도 하나님이 된다. 베드로도 우리가 참되게 신성한 본성을 소유한다는 것을 믿는 이들이 “신성한 본성에 동참하는 사람”이 된다고 말함을 통해 단언한다(벧후1장4절). 어떤 이들은 우리가 신성한 본성에 동참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반박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고 하나님의 본성을 누린다면, 우리가 적어도 종류에 있어서 하나님이 아닌가? 우리가 이것을 부인한다면 누가 보아도 명백한 것을 무시하는 것이다. 또한 동시에 우리가 하나님의 유일성을 존중한다면, 그렇게 할 합당한 이유가 없다. 우리는 인격적으로는 하나님이 아니지만, 생명과 본성에 있어 우리는 하나님의 종류이다.
둘째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불행히도 현대 기독교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대부분은 그 위력이 거의 빠져 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몸’이라는 단어는 ‘관리기관’ 혹은 ‘정치적 통일체’ 정도를 의미한다.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몸’은 믿는 이들의 집합을 의미하는 은유일 뿐이다. 그러나 몸에는 그보다 더 깊은 것이 있다. 그리스도의 비밀한 몸보다 오히려 우리의 신체가 은유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물질적인 면에서 우리의 몸의 어떠함은 비밀한 면에서의 그리스도의 몸이 어떠함과 같다. 실제로 우리의 몸은 우리이고 우리는 우리의 몸이다. 다시 말하지만 인격과 인격의 실체적 표현에는 구분이 있다. 그러한 구분은 그리스도가 머리이시고 믿는 이들이 몸으로 불리는 데에서 보듯이 신약에 잘 보존되어 있다. 그러나 신약에서 몸과 그리스도의 인격이 동일시되는 것도 의심할 바 없다. 고린도전서 12장 12절은 “왜냐하면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가 한 몸인 것같이, 그리스도도 그와 같으시기 때문입니다.”라며 몸 전체를 그리스도라고 칭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우리는 인격적으로는 아니지만 그분의 충만으로서 우리는 분명 그리스도이다. 그분이 유일한 머리이시고, 홀로 경배받으실 그리스도이시며, 우리는 이 땅에서 나타나고 표현된 그리스도의 몸이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지니게 될 것이다. 즉 우리는 단지 생명과 본성 만이 아니라 표현에서도 하나님이 될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결국에는 영광 안에 있게 될 것임을 이해한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 영광이 우리 자신의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점이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주님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은”(22절)이라고 기도하셨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부활과 승천 안에 받으신 영광이 결국 믿는 이들의 영광이 된다는 것을 가리킨다. 24절에서 주님은 계속해서 “내가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도록 하여주시고, 창세 전에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어 나에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이 보도록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도하셨다. 헨리 알포드는 여기에서의 ‘(주목하여) 바라보다(behold)’ 를 설명하기를, “바라보고와 참여하다이다. 바로 이 사례가 그것을 추정한다. 단지 구경꾼이 이 영광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1:882)라고 했다. 이것은 우리가 앞에서 말한대로 참여함을 통해 우리가 바라 보는 그것이 된다는 관념과 일치한다. 고린도 후서 3장 18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이를 통해 이 영광으로 변화되는 연속적인 과정을 언급한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너울을 벗은 얼굴로 거울처럼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반사함으로써 그분과 동일한 형상으로 변화되어 영광에서 영광에 이릅니다. 이것은 주 영에게서 비롯됩니다.” 하나님께서 구속하신 백성의 총체인 새 예루살렘은 영원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지고” 내려올 것이다(계21:11). 하나님의 변화된 사람들은 “그분의 얼굴을 볼 것이고 그분의 이름이 그들의 이마에 있게 될 것”이다(22:4). 다시 말하지만 사도 요한은 하나님을 바라봄으로써 그 바라보는 것으로 변화된다는 개념에 호소한다. 더 나아가 그분의 이름이 그들의 이마에 있을 것이다. 이것은 단지 우리가 그분의 소유이고, 그분의 이름이 소유권을 뜻하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분의 이름은 우리가 무엇이 되었는가를 나타내는 하나의 표식이 된다. 시대의 마지막에 하나님의 어린양이 삼일성의 제 2격의 신성한 이름인 “하나님의 말씀”을 지니고 나타나실 것처럼 우리 또한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지니고 하나님과 함께 영원토록 거할 것이다.
넷째로 개인적인 믿는 이들로서 우리는 생명과 본성과 표현에 있어 하나님이 된다. 주로 바울의 글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표현과 그로 인해 그분과 동일시되는 것을 찾을 수 있다. 가장 명백한 예 중의 하나가 빌립보서 1장 21절이다. “왜냐하면 나에게 있어서 삶은 그리스도입니다.” 믿는 이들이 무엇이 될 수 있고 없는지에 관한 선입견에 의해 이 구절의 온전한 의미를 회피하려는 의도가 수없이 있었다. 그러나 단순히 받아들였을 때 바울은 교회들 중에서의 그의 삶과 그의 섬김은 그리스도의 삶이요 그리스도의 섬기심이었다 라고 말하고자 한 것 같다. 바울은 그가 직면하는 모든 것에서 실제적으로 그리스도가 되었을 정도로 그리스도를 철저히 표현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그는 더 상세한 설명을 제공한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 겉으로 보기에 바울은 믿는 이들 가운데 살았지만, 그의 내적 실재는 그리스도가 그 안에서 그를 통해 사셨고, 바울의 주위에 있는 이들에게 그분이 실제로 나타나셨다. 물론 바울이 거기에 있었지만 그만큼 그리스도 또한 거기 계셨다. 이것은 모든 믿는 이들에게 하나의 본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목표는 그분이 선택하신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그리스도가 되게 하는 것이다.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믿는 이들이 “왜냐하면 나에게 있어서 삶은 그리스도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그리스도를 어느 정도 대표한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만이 아니다.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입니다 라고 우리가 바울과 함께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 안에서 생명과 본성과 표현에 있어서 우리가 하나님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변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정의 하자면, 변화는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바뀌는 것이다. 문제는 어느 수준에서 그리스도인의 변화가 발생하는가 하는 것이다. 바울이 믿는 이들의 변화에 대해 언급할 때 그는 무엇을 가리키는가?(롬12:2, 고후3:18).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변화는 행동이 단지 더욱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수준으로 바뀌는 것을 뜻한다고 생각하는 것같다. 리차드 C. 트렌치(Richard Chenevix Trench)는변화와 변형을 대조시키면서 변화의 내재적 특징을 이렇게 분명히 말한다. “만약 네덜란드식 정원이 이태리식 정원으로 바뀐다면 이는 ‘메타시마티즈모스’[변형]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만약에 정원을 도시와 같이 완전히 다른 것으로 바꾼다면 이것은 ‘메타모포시스’ [변화]일 것이다.”(277, 트렌치의 예는 성경이 하나의 정원으로 시작해서 하나의 도시로 끝나기 때문에 의미심장하다.). 변화에 대한 이러한 트렌치의 이해는 메타모포시스의 어근인 모피(morphe)의 의미에 대한 그의 철저한 분석에 따른 것이다. 그는 이 기본 단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모피는 내적 생명을 표현하는 형태를 의미하고”(276), “어떤 것의 본질을 가리킨다”(278). 그러므로 변화는 단지 변화의 외적인 나타남만이 아니라 더 본질적으로는 변화의 내적이고 본질적인 본성을 중시한다. 신약에서 변화는메타모포시스, 즉 창조되었으나 타락한 우리의 상태에서 거듭나고 높여진 상태로의 바뀜이다. 변화는 믿는 이들을 거듭나기 전의 그들의 어떠함과는 본질적으로 다르게 만든다. 예전에는 타락한 인간이었지만 이제 그들은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을 그들의 새로운 존재의 유기적인 실재로 가지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의 지체이다. 이러한 면에서 그들은 인간적일 뿐 아니라 이제는 신성하고, 사람일 뿐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확실히 그분의 자존의 속성에 의해 홀로 참된 하나님이시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그분의 구속되고 거듭난 믿는 이들도 그분과의 유기적인 연합 그리고 높여지고 신성한 수준에서 그들의 존재를 위해 그분께 온전히 의지함에 의해 하나님이 된다.
인간이 하나님이 된다는 사상, 즉 하나님이 마땅히 받으셔야 할 영광을 그분에게서 불경스럽게 빼앗아 간다고 생각할 때 우리가 움추러들 수 있으나, 실제로는 성경에서 암시된 진정한 신화는 하나님이 인류 안에서 가장 충만한 방식으로 영광 받으시는 길을 제공한다. 믿는 이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소유하게 될 때까지 영광에서 영광으로, 즉 한 단계의 영광에서 다른 단계의 영광으로 변화되고 있다(고후3:18). 그 때에는 믿는 이들이 표현하는 것이 단지 그들이 아니라 하나님일 것이다. 인간으로서 그들은 하나님을 나타낼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과 영광을 가짐으로서 믿는 이들은 당연히 하나님이라 불릴 수 있고 하나님이 됨으로서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찬양한다. 마침내 사람이 하나님이 되었기 때문에, 만물의 마지막에 대해 바울이 다음과 같이 선언한 것은 참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것입니다(고전15:28).”
원출처: https://www.affcrit.com/pdfs/1996/03/96_03_a3.pdf
Notes
1 아타나시우스, “말씀의 성육신,” 54:3. 헬라어로 된 이 논문의 제목에서 가져 온 전체 문장은 다음과 같다: Αýτüς γÜρ Ýνηνθρþπησεν, ινα ημεις θεοποιηθωμεν (“For He became/was made human that we might become/be made God”그분이 인간이 되신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이 되게하기 위함이다). 이 논문은 폴 오니카(Paul Onica)와 캐리 로비쇼우(Kerry Robichaux)의 서문에서도 인용됨
2 일부는 번역자가 아타나시우스의 θεοποιηθωμεν 를 “신성하게 되는”(become divine)이라고 번역하는 것을 허용해야 한다고 다투지만, 그런 번역에 관련된 문제점들을 차지하더라도 바실(Basil’)의 θεüν γενÝσθαι (On the Holy Spirit 9:23) 를 “하나님이 됨”(being made God) 이외의 다른 것으로 번역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이에 대한 또 다른 예들도 있다.
3 초기 교부들은 신화를 가리키는 다양한 범주의 표현들을 사용했지만, 가장 분명한 것은 θεοποιω (theopoio) “[어떤 이를] 하나님으로 만든다, 신화한다” 와 θÝωσις (theosis)”신화”였다.
4 그의에베소교인들에게 보낸 서신, XII, 과 마그네시안( Magnesians)에게 보낸 서신 XIV, 에서 하나님께 도달함(attain to God)이란 표현과 그의폴리캅에게보낸 서한, V, 에서 하나님께 참여함(take part in God)이란 표현을 보라.
5 우리는 이 용어를 신약과 초기 교회에서 사용했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신약에서 헬라어 오이코노미아(oikonomia )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원한 목적을 수행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하신 안배, 행정, 또는 계획을 가리킨다. 교부들에게는 이 용어가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좀더 구체적인 표현 즉 성육신을 통해 사람과 하나되시고 또한 우리의 구속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분의 삼위일체 안에서 나아가심을 가리켰다.
6 이 단락은 위트니스리의 사역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에게 큰 빚을 진 것이다. 여기에서 그의 영향력은 단순한 인용 그 이상이다.
7 예를 들어 “아리안들을 반대하는 네 개의 담화(Four Discourses against the Arians).” I:42, III:48, 53를 보라.
8 바라건대, 우리는 이것에 대하여 ‘확증과비평’(A&C) 과월호인 I권, 1호에서 충분히 반박했다. 캐리 로비쇼우 47-48 쪽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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